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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今時行者, 雖專定慧, 多分道力未充, 若也不求淨土, 留此穢方, 逢諸苦難, 恐成退失. |
묻는다. 요즘 수행하는 사람들이 비록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지만 대부분 도력이 충분하지 못하니, 만약 정토를 구하지 않고 이 예토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 모든 고난을 만나 물러날까 걱정된다.
答. 此亦各在當人, 不可一例取之. 若是大心衆生, 依此最上乘法門, 決定信解四大如泡幻, 六塵似空花, 自心是佛心, 自性是法性, 從本已來, 煩惱性自離, 惺惺直然惺惺, 歷歷直然歷歷. 依此解而修者, 雖有無始習氣, 以無依住智治之, 還是本智, 不伏不斷. 雖有方便三昧, 離昏散之功, 以知緣慮分別, 是眞性中緣起故, 任性淨而無取攝之相. 雖涉外緣違順之境, 爲了唯心, 無自他能所故, 愛憎嗔喜, 任運不生. 如是任法, 調治習氣, 使稱理智增明, 隨緣利物, 行菩薩道, 雖處三界內, 無非法性淨土, 雖經歲月, 體不移時. 任大悲智, 以法隨緣故. 此人, 雖不如上古過量人, 一超登位, 具足通力者, 然以夙植善根, 種性猛利, 深信自心本來寂用自在, 性無更改. 故於諸世難, 何有退失之患? |
답한다. 이 또한 각자 당사자에 달려 있어서 한 예로 취할 수 없다. 만약 큰마음의 중생이라면, 이 최상승의 법문을 의지해서 사대(四大)는 물거품과 허깨비 같고 육진(六塵)은 허공 꽃 같으며, 자기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자기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본래부터 번뇌의 성품을 스스로 여의어서 성성함은 바로 그렇게 성성하며 역력함은 바로 그렇게 역력함을 결정적으로 신해한다. 이러한 신해를 의지해 닦는 사람은 비록 비롯함이 없는 습기(習氣)가 있어도 의지하고 머무름이 없는 지혜로써 다스리니 도리어 이것이 근본 지혜여서 억누름도 아니고 끊음도 아니다. 비록 방편과 삼매로 혼침과 산란을 여의는 공(功)이 있지만, 반연하는 생각과 분별이 참성품[眞性] 가운데의 연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에 맡겨도 취하거나 거두어들이는 모양이 없다. 비록 바깥 연의 어기고 따르는 경계를 지나더라도 오직 마음임을 알아서 자신과 타인, 주체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사랑과 미움, 성냄과 기쁨이 자유로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에 맡겨 습기를 고르고 다스려 이치에 맞는 지혜가 더욱 밝아져서 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보살도를 행하니, 비록 삼계 속에 있지만 법성정토아님이 없고, 비록 세월을 지나지만 본체는 때를 옮기지 않는다. 큰 자비와 지혜에 맡겨 법으로써 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록 아주 옛날에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 한 번 뛰어 계위에 올라 신통력을 구족했던 것과 같지는 않지만, 숙세에 심은 선근으로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리하여 자기 마음이 본래 고요함과 작용이 자재하고 성품이 다시 바뀜이 없는 줄을 깊이 믿는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의 어려움에 어찌 물러날 근심이 있겠는가?
▶습기(習氣, vāsanā)는 업의 잠재적 인상, 잠재 여력, 습관성, 훈습에 의해 남겨진 기분을 뜻한다. 이는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 등으로도 쓰며, 습(習)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유식학파에서 습기는 종자(種子)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며, 명언습기(名言習氣)・아집습기(我執習氣)・유지습기(有支習氣)로 나누고 있다.
華嚴論所謂,“ 大心凡夫, 能生信證入故, 生如來家. 不言已生佛家, 諸大菩薩者也.” 今時, 如此修心者, 爲上根也. |
『화엄론』에서 말한다. “큰 마음의 범부는 능히 믿음을 내어 깨달음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나며, 이미 부처님의 집에 난 모든 큰 보살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요즘에도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사람은 뛰어난 근기가 된다.
▶대심범부(大心凡夫) 큰 마음의 범부는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진 범부을 가리키며, 큰 마음의 중생[大心衆生]이라고도 한다. 40권본『화엄경(華嚴經)』권6의「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하「보현행원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큰마음의 중생이 모든 부처님의 법륜을 굴릴 수 있으며, 생사의 바퀴를 버리고 바른 법의 바퀴에 머물러 모든 이도(異道)의 삿된 견해를 꺾을 수 있다.”(大心衆生, 令其能轉諸佛法輪, 捨生死輪, 住正法輪, 摧滅一切異道邪論.)
或有行者, 聞自心淨妙之德, 信樂修習. 然以無始堅執我相, 習氣偏重, 致諸惑障, 未能忘情者, 且以空觀, 推破‘自他身心, 四大五蔭, 從緣幻出, 虛假非實, 猶如浮泡, 其中空虛, 以何爲我, 以何爲人.’ 如是深觀, 巧洗情塵, 心常謙敬, 遠離憍慢, 折伏現行, 資於定慧, 漸入明靜之性. |
혹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의 깨끗하고 미묘한 덕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며 닦고 익힌다. 그러나 시작 없이 아상(我相)을 굳게 집착함으로써 습기가 치우치고 무거워 모든 미혹의 장애가 닥치면 생각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은, 또한 공관으로써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사대(四大)와 오음(五陰)이 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나와서 헛되고 거짓되어 진실이 아닌 것이 마치 뜬 물거품이 그 가운데가 텅 빈 것과 같으니 무엇을 나라고 하며 무엇을 남이라 하겠는가?’하고 미루어 부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깊이 관하여 교묘히 생각의 티끌을 씻어서 마음이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며, 교만을 멀리 여의고 현행(現行)의 번뇌를 꺾어 조복하고 정혜(定慧)를 도우면 점점 밝고 고요한 성품에 들어갈 것이다.
然此人, 若無萬善, 助開自力, 恐成迂滯. 直須勤供養三寶, 讀通大乘, 行道禮拜, 懺悔發願128), 始終無癈. 以愛敬三寶, 淳厚心故, 蒙佛威加, 能消業障, 善根不退. 若能如是, 自力他力,內外相資, 志求無上之道, 則豈不具美乎. |
그러나 이 사람이 만약 온갖 선으로 자기의 힘을 도와서 여는 것이 없다면 멀리 막힘을 이룰까 두렵다. 바로 반드시 부지런히 삼보를 공양하고 대승을 독송하며,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참회하고 발원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폐하지 말아야 한다. 삼보를 좋아하고 공경하는 순후한 마음으로 인해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를 입어 업장을 녹여서 선근이 물러나지 않을 수있다. 만약 이와 같이 자력과 타력이 안팎으로 서로 돕고 온 마음으로 위없는 도를 구할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此內外相資中, 有二種人, 所願各異. 或有悲願重者, 於此世界, 不厭生死, 自利利他, 增長悲智, 求大菩提, 所生之處, 見佛聞法, 以之爲願也. 此人, 不別求淨土, 亦無逢難退失之患. 或有淨穢苦樂, 欣厭心重者, 所修定慧, 及諸善根廻向, 願)求生彼世界, 見佛聞法, 速成不退, 却來度生, 以之爲願也. 此人, 意謂雖專內照, 忍力未成, 留此穢土, 逢諸苦難, 恐有退失之患. |
이 안팎으로 서로 돕는 가운데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원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혹 자비와 원력이 두터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자신도 이롭고 타인도 이롭게 하며, 자비와 지혜를 증장시키며, 대 보리를 구하며, 나는 곳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듣는, 그것으로써 원을 삼는다. 이 사람은 따로 정토를 구하지 않지만, 또한 어려움을 만나 물러나고 잃을 근심도 없다. 혹 정토와 예토, 괴로움과 즐거움에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닦는 바의 정혜(定慧)와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들어 빨리 물러나지 않음을 이루어 되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고 구하는, 그것으로써 원을 삼는다. 이 사람은 뜻으로는 비록 오로지 안으로 비춘다고 하지만 참는 힘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해서 이 예토에 머물러 여러 고난을 만나면 물러나고 잃는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此內外相資, 二種人志願), 深諧聖敎, 皆有道理. 此中, 求生淨土者, 於明靜性中, 有定慧之功, 懸契彼佛內證境界. 故望彼但稱名號, 憶想尊容, 希望往生者, 優劣可知矣. |
이 안팎으로 서로 돕는 두 종류 사람의 뜻과 원이 성인의 가르침에 깊이합하여 모두 도리가 있다. 이 가운데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사람은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정혜(定慧)의 공덕이 있어서 멀리 저 부처님 안으로 증득한 경계에 계합한다. 그러므로 저들이 다만 명호만 부르고 거룩한 얼굴을 생각하며 왕생하기를 희망하는 사람과 견주어보면 우열을 알 수 있다.
智者大師, 臨終謂門人曰, “火車相現, 一念改悔者, 猶能往生, 況戒定慧熏, 修行道力. 功不唐損.” 淨名經云, “欲淨佛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卽佛土淨.” 法寶記壇經云,“ 心地但無不淨, 四方去此不遠. 性起不淨之心, 何佛卽來迎請.” 壽禪師云, “識心, 方生唯心淨土, 着境, 只墮所緣境中.” 如上佛祖所說, 求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 未審. 離自心源, 從何趣入. |
지자(智者)134)대사가 문인들에게 말한다. “불붙는 수레의 모양이 나타나더라도 한 생각을 고쳐 뉘우치는 사람은 오히려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계・정・혜를 익혀 수행한 도의 힘이겠는가. 공력이 헛되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 곧 부처님의 국토도 깨끗해진다.”라고 한다.『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에서 이르기를, “마음에 다만 깨끗하지 않음만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성품이 깨끗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킨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여 청하겠는가.”라고 한다. 연수(延壽)선사가 말하기를, “마음을 알면 바야흐로 유심정토에 나고, 경계에 집착하면 단지 연하는 바의 경계 가운데 떨어질 뿐이다.”라고 하였다. 위에서와 같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설한 바의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뜻은 모두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모르겠다. 자기 마음의 근원을 여의고 어디로 들어갈 수 있을까.
▶지자(智者)의 법명은 지의(智顗, 538~597)로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개조이다. 그는 형주 화용현(華容縣)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이고, 자는 덕안(德安)이며, 세상에서는 지자대사(智者大師)・천태대사(天台大師)라고 불렀다. 18세에 출가하여 혜광(慧曠)율사로부터 율과 대승교학을 배웠고, 560년에는 혜사(慧思)를 찾아가서 천태의 심관을 전해 받았다. 38세에 천태산으로 들어가 수선사를 창건하고『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교학의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591년 여산에서 진왕 양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개황 17년 천태산 대석상 앞에서 입적하였으며, 후주 세종이 법공보각존자(法空寶覺尊者), 송의 영종이 영혜대사(靈慧大師)라고 시호하였다. 법을 전한 제자가 32인이었으며, 장안관정(章安灌頂)이 상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법화현의』,『법화문구』,『마하지관』등 30여부가 전한다.
▶이 구절은『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에 수록된 두 종류의『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확인할 수 없다. 법해(法海)가 집록한 『육조단경』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에 단지 깨끗하지 않음만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마음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면 염불하여 왕생함이 도달하기 어렵다. … 십악의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여 청하겠는가?”(大48, p.341b15~18. 心但無不淨, 西方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 不斷十惡之心, 何佛卽來迎請?) 종보(宗寶)가 편찬한『육조단경』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사군이여 마음에 다만 선하지 않음이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만약 선하지 않은 마음을 품었다면 염불하여 왕생함이 도달하기 어렵다. … 십악의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여 청하겠는가?”(大48, p.352a25-b2. 使君, 心地但無不善, 西方去此不遙. 若懷不善之心, 念佛往生難到. … 不斷十惡之心, 何佛即來迎請?)
如來不思議境界經云,“ 三世一切諸佛, 皆無所有, 唯依自心. 菩薩, 若能了知諸佛及一切法, 皆唯心量, 得隨順忍, 或入初地捨身, 速生妙喜世界, 或生極樂淨佛土中.” 此其證也. 以此而推, 雖不念佛求生, 但了唯心, 隨順觀察, 自然生彼, 必定無疑. |
『여래부사의경계경(如來不思議境界經)』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 있는 바가 없으나 오직 자기 마음을 의지한다. 보살이 만약 모든 부처님과 일체법이 모두 오직 마음의 헤아림임을 알면 수순하는 법인[隨順忍]을 얻고, 혹은 초지(初地)에 들어 몸을 버리고 빠르게 묘희(妙喜)세계에 태어나며, 혹은 극락의 깨끗한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비록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오직 마음뿐임을 알고 그에 따라 관찰하면 자연히 저 국토에 나는 것이 반드시 정해져 의심할 것 없다.
▶묘희(妙喜)세계는 동방 아촉여래의 정토, 불국토를 가리킨다.『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에서는 유마거사가 살았던 국토를 묘희 세계라고 하였다.
近世, 多有義學沙門, 捨名求道, 皆着外相, 面向西方, 揚聲喚佛, 以爲道行, 前來學習發明心地, 佛祖秘訣, 以謂名利之學, 亦謂非分境界, 終不掛懷, 一時棄去. 旣棄修心之秘訣, 不識返照之功能, 徒將聰慧之心, 虛用平生之力, 背心取相, 謂依聖敎, 諸有智者, 豈不痛傷. |
요즘 대부분의 의리를 배우는 사문들이 이름을 버리고 도를 구하지만, 모두 바깥 모양에 집착해서 얼굴을 서방으로 향하고 큰 소리로 부처를 부르는 것을 도행으로 삼고, 전부터 배우고 익혀왔던 마음을 밝히는 부처님과 조사들의 비결을 명리를 배우는 것으로 여기며, 또한 [자기들] 분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여겨 끝내 마음을 두지 않고 일시에 버려버린다. 이미 마음 닦는 비결을 버리고 돌이켜 비추는 공능도 알지 못한 채, 한낱 총명한지혜의 마음만 가지고 헛되이 평생의 힘을 써서 마음을 등지고 모양을 취하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의지한다고 말하니,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孤山智圓法師, 阿彌陀經疏序云,“ 夫心性之爲體也, 明乎靜乎, 一而已矣. 無凡聖焉, 無依正焉, 無延促焉, 無淨穢焉, 及其感物而動, 隨緣而變, 則爲六凡焉, 爲三聖焉, 有依焉, 有正焉. 依正旣作, 則身壽有延促矣, 國土有淨穢矣. 吾佛大聖人, 得明靜之一者也. 乃假道於慈, 託宿於悲, 將欲敺群迷, 使復其本. 於是乎, 無身而示身, 無土而示土, 延其壽淨其土俾其欣, 促其壽穢其土俾其厭. 旣欣且厭, 則漸諭之策, 行矣. 雖寶樓金池, 爲悅目之翫, 而非惑蕩之色, 而能達唯心無境矣. 雖風樹鳥聲, 有入耳之娛, 而非惉懘之音, 而能念三寶有歸矣. 夫如是, 則復乎明靜之體者, 如轉掌耳.” |
고산지원(孤山智圓) 법사의「아미타경소서(阿彌陀經疏序)」에서 말한다. “무릇 심성의 본체가 되는 것은 밝고 고요한 하나일 뿐이다. 범부와 성인이 없으며, 의보[依]와 정보[正]가 없으며, 긺과 짧음이 없으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없지만, 그것이 중생에 감응하여 움직이고 연에 따라 변하는데 미치면 육범(六凡)이 되고 삼성(三聖)이 되며, 의보가 있고 정보가 있다. 의보와 정보를 이미 만들었다면 몸의 수명도 길고 짧음이 있고 국토도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는 것이다. 우리 부처님 대성인께서는 밝고 고요 한 하나를 증득한 분이다. 그래서 길을 자애에서 빌리고 숙소를 연민에 의탁해서 장차 온 중생의 미혹을 이끌어서 그 근본을 회복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몸이 없이 몸을 보이고 국토가 없이 국토를 보이며, 수명을 늘리고 국토를 깨끗이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수명을 재촉하고 국토를 더럽혀 그들을 싫어하게 하였다. 이미 기뻐하고 또 싫어하면 점점 가르치는 꾀가 행해지는 것이다. 비록 보배 누각과 금빛 연못이 눈을 즐겁게 하는 노리개일 뿐이지만, 미혹하고 방탕하게 하는 색이 아니라 오직 마음일 뿐 경계가 없음을 통달할 수 있게 한다. 비록 바람 부는 나무와 새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즐거움이지만, 가락이 맞지 않는 소리가 아니라 삼보를 생각하여 돌아갈 수 있게 한다. 무릇 이와 같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
▶고산지원(孤山智圓, 976~1022) 법사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속성은 서(徐)씨이고 자는 무외(無畏)였으며, 호는 잠부(潛夫) 또는 중용자(中庸子)라고 하였다. 그는 8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유학을 배워 시문에 능했으며, 후에는 봉선사의 원청(源淸)스님 아래서 천태교관을 배웠다. 원청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산외파(山外派)의 학설을 세워 천태종의 정통적인 입장인 산가파(山家派)의 사명지례(四明知禮) 법사와 논변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에는 서호의 고산(孤山)에서 은거 하면서 경론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는 『아미타경소』,『수능업경소』,『무량의경소』등 열 종류의 주석을 남겼으며, 이 주석들은 십본소주(十本疏主)라고 불렸다. 그는 고산에서 은거하여 오래 살았으므로 ‘고산지원’으로 불렸으며, 시호는 법혜대사(法慧大師)였다.
▶의보[依]와 정보[正]는 중생이 의지하여 살고 있는 환경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가리킨다. 과거세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금세에 받아 태어난 유정의 몸을 정보(正報)라고 하며, 그 육신이 의지하는 객관의 환경, 곧 국토와 가옥, 의복, 식물 등을 의보(依報)라고 한다.
▶육범(六凡)은 육계(六界)를 가리키며, 이는 십계(十界) 가운데 범부(凡夫)의 세계를 뜻한다. 범부의 세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의 여섯 종류의 세계이다.
予謂圓師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今引繁文, 庶使今時求淨土者, 知佛意而修之, 不枉用功耳. 知佛意者, 雖念佛名, 懃求往生, 知彼佛境莊嚴等事, 無來無去, 唯依心現, 不離眞如. 念念之中, 離於昏散, 等於定慧, 不違明靜之性, 則分毫不隔, 感應道交, 如水澄月現, 鏡淨影分. 故萬善同歸集云,“ 佛實不來, 心亦不去. 感應道交, 唯心自見.” 又偈云,“ 能禮所禮性空寂感應道交難思議.” 此人, 必不取心外境界, 而興遍計倒執, 招諸魔事, 違背佛意也. 諸修道者, 切須在意. |
나는 지원법사가 우리 부처님의 좋은 방편의 근본과 지말을 깊이 아는 분이라고 여긴다. 지금 번거로운 글을 인용한 것은 요즘 정토를 구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닦아서 공력을 잘못 쓰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비록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여 부지런히 왕생을 구하지만, 저 부처님 경계의 장엄하는 등의 일이 옴도 없고 감도없으며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정혜(定慧)를 고르게 하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나지 않으면, 털끝만큼도 차이나지 않아서 감응의 길이 통함이 마치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깨끗하면 그림자가분명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말한다. “부처님은 실제로 오지 않았고, 마음도 또한 가지 않는다. 감응의 길이 통하여 오직 마음이 스스로 나타난다.” 또 게송으로 말한다. “예를 올리는 이와 예를 받는 이가 성품이 텅 비고 고요하니 감응하는 길 통함이 헤아리기 어렵다.” 이 사람은 반드시 마음 밖의 경계를 취하여 치우친 헤아림으로 잘못된 집착을 일으켜 모든 마군의 일을 불러서 부처님의 뜻을 위배해서는 안된다.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간절하고 반드시 뜻에 두어야 한다.
或有行者, 堅執名相, 不聞大乘唯心法門. 又不識吾佛, 於明靜性中, 以本願147)力, 權現身土, 幻住莊嚴, 攝引衆生, 令其耳目所翫, 達唯心無境, 復其本之善權. 却謂念佛往生, 將五蘊身, 受無量樂. 以是情執未忘故, 或見修禪者, 以爲是人, 不念佛求 生, 何時出離三界哉. |
혹 어떤 수행자들은 이름과 모양을 굳게 집착하여 대승의 오직 마음뿐이라는 법문을 듣지 않는다. 또한 우리 부처님이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본원력으로써 방편으로 몸과 국토를 나타내어 환(幻)같이 머무는 장엄으로중생들을 거두어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귀와 눈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오직 마음일 뿐 경계가 없음을 통달하게 하여 그 근본의 좋은 방편을 회복하게 함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염불하여 왕생하면 오온의 몸을 가지고 한량없는 낙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의 집착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혹선을 닦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염불해서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어느 때에 삼계를 벗어나겠는가하고 생각한다.
不知聖敎所明, 心淨故, 卽佛土淨之旨, 又聞說所修心地, 空明無物, 以謂無身受樂之處, 恐落空去. 不知空本無空, 唯是如來圓覺明靜之心, 同虛空遍法界, 該衆生心, 無間斷處. 一切衆生無明分別之心, 當處虛明, 與十方諸佛, 同一智海, 同一法性, 祇爲衆生, 終日其中行履, 而自背負恩德耳. 不知斯旨者, 以執吝貪着之心, 求佛境界, 如將方木逗圓孔也. |
성인의 가르침에서 밝힌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국토가 깨끗하다’라는 취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닦는 바의 마음은 텅 비고 밝아 대상이 없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는 몸이 즐거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여겨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공(空)은 본래 공(空)이 없어서 오직 이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밝고 고요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법계에 두루하여 중생의 마음을 모두 갖추어 사이와 끊어진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모든 중생의 무명(無明)으로 분별하는 마음은 그곳이 텅 비고 밝아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동일한 지혜의 바다이며 동일한 법의 성품이지만, 다만 중생들이 종일토록 그 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은덕을 등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취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착하고 아끼며 탐내고 애착하는 마음으로써 부처님의 경계를 구하는 것이니,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
▶무명(無明, avidyā)은 올바른 지혜가 없는 것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리에 어두운 무지(無知)를 말한다.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없음을 일컫는다. 무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지만, 무명이 무명임을 알면 무명은 사라진다.
或有行者, 稟性浮僞, 聞此心法, 信樂修習, 然得少爲足, 不加決擇, 知見未圓, 全恃本性, 不修萬行, 亦不求淨土, 見求生者, 而生輕慢. 此上二人, 於佛法中, 不善用心, 多有滯障, 可悲可痛也. 若是最下根人, 盲無慧目, 而知稱佛號, 則歎其希有, 豈以不知佛意修行爲過哉. |
혹 어떤 수행자는 타고난 성품이 들뜨고 거짓되지만 이 마음 법을 듣고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힌다. 그러나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판단하여 가리는 [수행을] 더하지 않는다. 지견이 원만하지 못하지만 온전히 근본 성품만 믿고 만행을 닦지 않으며, 또한 정토도 구하지 않으면서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사람을 보면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 위의 두 사람은 불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하여 막힘이 많이 있으니 슬프고 애통할 따름이다. 만약 가장 낮은 근기의 사람이어서 눈멀어 지혜의 눈이 없지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줄 알면 그것을 희유하다고 찬탄하니, 어찌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것으로써 허물로 삼겠는가.
或有行者, 受氣剛大, 情緣最深, 聞此心法, 不知措意之處, 然, 能觀彼佛白毫光明, 或觀梵字, 或誦經念佛, 如是行門, 專精不亂, 能調妄想, 不被惑障, 梵行成建. 此人, 初從事行, 感應道交, 終入唯心三昧. 故亦是善知佛意者也. |
혹 어떤 수행자는 받은 기운이 굳세고 크며 육정[情]의 연이 가장 깊어서 이 마음의 법을 들으면 뜻을 둘 곳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능히 저 부처님의 백호 광명을 관하고 혹은 범자(梵字)를 관하며 혹은 경을 외우고 염불을 할 수 있어서, 이와 같은 수행의 문에 오로지 정미하여 어지럽지 않고 망상을 고르게 할 수 있어서 미혹의 장애를 입지 않고 범행을 이룬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일을 쫓아 행하지만 감응의 길이 통하여 결국에는 오직 마음의 삼매에 든다. 그러므로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다.
飛錫和尙, 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浴大海者, 已用於百川, 念佛名者, 必成於三昧. 亦猶淸珠下於濁水, 濁水不得不淸, 念佛投於亂心, 亂心不得不佛. 旣契之後, 心佛雙亡, 雙亡定也, 雙照慧也. 定慧旣均, 亦何心而不佛, 何佛而不心. 心佛旣然, 則萬境萬緣, 無非三昧.” 誰復患之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 |
비석(飛錫)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高聲念佛三昧寶王論)』에서 말한다.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이미 백 가지 냇물을 사용한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또한 마치 맑은 구슬을 흐린 물에 내려놓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님 생각을 어지러운 마음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계합한 뒤에는 마음과 부처가 함께 없으니, 함께 없음은 정(定)이며 함께 비춤은 혜(慧)이다. 정혜(定慧)가 이미 고르다면 또한 어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어떤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러하다면 만 가지 경계와 만 가지 연이 삼매 아님이 없다.” 누가 다시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근심하여 높은 소리로 부처를 부르겠는가.
▶비석(飛錫)은 당(唐)나라 때의 스님으로 행적과 생몰년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신력이 높았고 학식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일찍이 율의를 연구하였고 밀교를 닦아 증득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765)에는 칙명으로 불공(不空) 삼장의 역장에 참여하여 『인왕호국반야경』, 『밀엄경』 등의 번역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염불삼매보왕론』 3권을 저술하여 정토사상을 선양하였으며, 『무상심묘선문전집법보』1권과 『서왕생정토문』1권을 저술하였다.
文殊所說般若經中, 明“念佛, 得一行三昧”者, 亦同此意也. 不了此意者, 却將見愛之情, 觀彼佛相, 念彼佛名, 日久歲深, 多爲魔魅所攝, 顚狂浪走, 虛勞功夫, 傾覆一生. 近世, 頻頻見聞如此之人, 皆由不知十界依正, 善惡因果, 唯心所作, 無體可得故也. |
『문수소설반야경(文殊所說般若經)』 가운데 ‘염불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고 밝힌 것도 또한 이 뜻과 같다.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도리어 보는 것마다 애착하는 생각을 가지고 저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고, 저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면서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대부
분 마군과 도깨비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미쳐서 날뛰다가 헛되이 공부를 수고롭게 하여 일생을 망치게 된다. 요즘에 자주 자주 이와 같은 사람을 보고 들었는데, 모두 십계의 의보・정보와 선・악의 인과가 오직 마음이 지은바라서 본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임을 알지 못한 것에서 말미암는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없어서 온 법계가 하나의 모양임을 아는 것으로, 이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大32, p.582b1-3 참조.]『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하나의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하며, 항상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게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일행 삼매라고 한다.(大48, pp.352c25-353a1)
或於坐中, 見天人菩薩像, 或如來像相好具足, 或端正男女, 及諸恐怖之相, 說諸種種幻惑之事, 或雖非外現之相, 於自心中隨順魔事, 惡覺情見, 不可具陳. 當此之時, 昏迷不省, 無慧自救, 橫罹魔網, 良可傷哉. 起信論不云乎.“ 當念唯心, 境界卽滅, 終不爲惱.” 又云.“ 行者, 常以智慧觀察, 勿令此心, 墮於邪網. 當勤正念, 不取不着.” 敎旨如斯, 何得逐境背心, 而求佛菩提哉. |
혹은 앉아 있는 동안에 하늘 사람과 보살상과 혹은 여래상이 상호가 구족한 것과 혹은 단정한 남자와 여자 및 여러 두려운 모양을 보거나, 모든 갖가지 허깨비에 미혹한 일을 말하고, 혹은 비록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가운데 마군의 일에 따라 순응하는 나쁜 느낌과 생각의 견해를 다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제할 지혜가 없어서 마군의 그물에 걸려 있으니 참으로 불쌍할 따름이다. 『기신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땅히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하면 경계가 곧 없어져서 끝내 괴로움이 되지 않는다.” 또 말한다. “수행자는 항상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 마땅히 부지런히 바르게 생각하여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다.”가르친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경계를 쫓아 마음을 등지고서 부처님의 보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今時行者, 多云,“ 但得念佛往生, 然後何有哉,” 不知九品昇降, 皆由自心信解, 大小明昧而發現也. 經中, ‘以解第一義諦, 勸進行者, 爲上品,’ 豈以聰明靈利之心, 甘爲鈍根, 不解第一義, 但稱名號哉. |
요즘 수행자들이 대부분 “다만 염불해서 왕생을 얻은 연후에는 뭐가 있는가?”라고 말하는데, 구품(九品)에 오르고 내림이 모두 자기 마음을 신해함이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을 말미암아 나타남을 알지 못해서이다. 경전 가운데서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알고 권하여 수행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상품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으로써 달게 아둔한 근기가 되어 제일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명호만 부르겠는가.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ārtha-satya)는 승의제(勝義諦)・진제(眞諦)・성제(聖諦) 등으로도 부르며, 세속제(世俗諦)・속제(俗諦)와 상대되는 말이다. 제(諦)는 진리의 뜻이므로, 제일의제는 가장 수승한 최고의 진리를 가리킨다.
萬善同歸集云,“ 九品往生, 上下俱達. 或遊化國, 見佛應身, 或生報土, 覩佛眞體, 或一夕而便登上地, 或經劫而方證小乘, 或利根鈍根, 或定意散意.” 是知, 古今達者, 雖求淨土, 以深 信眞如, 專於定慧. |
『만선동귀집』에서 말한다. “구품에 왕생하는 것은 위・아래가 모두 통달한다. 혹은 변화 국토에 노닐면서 부처님의 응신을 보고, 혹은 보토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며, 혹은 하루 저녁에 문득 상품(上品)의 경지에 오르고, 혹은 겁수를 지내고 바야흐로 소승을 증득하며, 혹은 영리한 근기와 아둔한 근기, 혹은 안정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이다.”이로써 알아라.예나 지금이나 통달한 사람들은 비록 정토를 구하지만,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는 것으로써 한다.
故知. 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 離於分齊, 唯依心現, 不離眞如. 不同凡夫二乘, 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 取色分齊故也. 如是, 則雖曰“同生淨土,” 愚智行相, 天地懸隔. 何如現今學大乘唯心法門, 專於定慧, 免墮凡小, 心外取色分齊之見也. |
그러므로 알아라. 저 색상으로 장엄한 등의 일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영역을 여의고 오직 마음을 의지해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 범부와 이승은 식(識)이 바뀌어서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아 색(色)의 영역을 취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함께 정토에 난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행하는 모양이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졌다. 어찌 지금 대승의 유심 법문을 배워서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는 것이 범부와 소승이 마음 밖에서 색(色)을 취하는 영역의 견해에 떨어짐을 면하는 것과 같겠는가.
若是祖宗門下, 以心傳心, 密意指授之處, 不在此限. 琪和尙云,‘ 能悟祖道, 發揮般若者, 末季未之有也.’ |
만약 조사의 종지를 따르는 문하에서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비밀한 뜻으로 가리켜 주는 곳은 이 한계에 있지 않다. 기(琪)화상이 “능히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般若))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말법 세계에는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반야(般若, prajñā)는 파야(波若), 반라야(般羅若) 등으로 음사하고 혜(慧), 지혜(智慧), 명(明) 등으로 번역한다. 반야는 모든 사물이나 도리를 꿰뚫어볼 수 있는 깊은 지혜를 의미한다. 혜원(慧遠, 523~592)은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근거하여 반야를 세 가지로 해석하였다. 첫 번째는 문자반야(文字般若)이며, 문자는 반야가 아니지만 반야를 드러내는 방편이므로 문자반야라 한다. 두 번째는 관조반야(觀照般若)이며, 모든 법의 실상을 관조하는 반야 지혜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관조하는 체(體)가 반야이므로 관조반야라고 한다. 세 번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이며, 관조하여 알게 되는 경계로서 그 체는 비록 반야가 아니나 반야의 지혜를 내는 것이므로 실상 반야라고 한다.
故此勸修文中, 皆依大乘經論之義, 爲明證, 略辯現傳門, 信解發明之由致, 并出生入死淨穢往來之得失, 欲令入社修心之人, 知其本末, 息諸口諍, 辯其權實, 不枉用功於大乘法門正修行路, 同結正因, 同修定慧, 同修行願159), 同生佛地, 同證菩提, 如是一切, 悉皆同學, 窮未來際, 自在遊戱, 十方世界, 互爲主伴, 共相助成, 轉正法輪, 廣度群品, 以報諸佛莫大之恩. |
그러므로 이『권수문』중에는 모두 대승 경론의 뜻을 의지하여 밝은 증명으로 삼아, 현재 전하는 문에서 신해하여 밝음을 드러낸 연유로서의 이치와 아울러 나고 죽으며 정토와 예토에 가고 오는 옳고 그름을 간략히 밝혔다. 결사에 들어와 마음 닦는 사람들이 그 근본과 지말을 알고 모든 다툼을 쉬며 방편과 진실을 밝혀서 대승 법문의 바른 수행의 길에서 잘못 공력을 쓰지 않아, 함께 바른 인(因)을 맺고 함께 정혜(定慧)를 닦으며 함께 행원(行願)을 닦고 함께 불지(佛地)에 나며 함께 보리(菩提)를 증득하게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모두 다 함께 배워서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자재하게 노닐며, 시방 세계에 서로 주인과 반려가 되어 한 가지로 서로도와 이루며, 바른 법륜을 굴려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그로써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고자 함이다.
仰惟佛眼, 證此微誠, 普爲法界群迷, 發此同修定慧之願. 嗚呼, 衆生之所以往來者, 六道也. 鬼神沈幽愁之苦, 鳥獸懷獝狘之悲, 修羅方嗔, 諸天正樂, 可以整心慮趣菩提者, 唯人道能爲耳. 人而不爲, 吾末如之何也已矣. |
우러러 생각하노니, 부처님의 눈으로 이 작은 정성을 증명하시어 널리 법계의 뭇 중생들을 위하여 함께 정혜(定慧)를 닦는 이 원을 일으키게 하소서. 슬프다. 중생이 가고 오는 곳은 육도(六道)이다. 귀신은 깊은 근심의 괴로움에 빠져 있고, 새와 짐승은 놀라서 날고 달리는 슬픔을 품었으며, 아수라는 바야흐로 성내고, 모든 하늘은 바로 즐거우며, 마음과 생각을 정리함으로써 보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세계[人道]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면서 하지 않는 것은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160)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라는 구절은『논어(論語)』의「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어찌할까, 어찌할까,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不曰, 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知訥, 曩閱大乘, 歷觀了義乘經論所說, 無有一法, 不歸三學之門, 無有一佛, 不藉三學而成道也. 楞嚴經云,“ 過去諸如來, 斯門已成就, 現在諸菩薩, 今各入圓明,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
지눌이 예전에 대승을 열람하면서 요의승(了義乘)의 경론에서 설하는 바를 차례대로 보니, 어느 한 법도 삼학(三學)의 문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었고, 어느 한 부처님도 삼학을 빌리지 않고 도를 이룸이 없었다. 『능엄경(楞嚴經)』에서 이르기를, “과거의 모든 여래도 이 문으로 이미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자 원만하고 밝음으로 들어가며, 미래에 닦고 배울 사람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의지해야 한다.”라고 한다.
是故, 我輩, 今結佳期, 預伸密誓, 當修梵行, 則仰慕眞風, 不生自屈, 以戒定慧, 資薰身心, 損之又損, 水邊林下, 長養聖胎. 看月色而逍遙, 聰川溪而自在, 縱橫放曠, 遂處消時, 猶縱浪之虛舟, 若凌空之逸翮. 現形容於寰宇, 潛幽靈於法界, 應機有感, 適然無準矣. 予之所慕, 意在斯焉. 若修道人, 捨名入山, 不修此行, 詐現威儀, 誑惑信心檀越, 則不如求名利富貴, 貪着 酒色, 身心荒迷, 虛過一生也. |
이러하므로 우리들이 지금 아름다운 기약을 맺고 미리 비밀한 서원을 펴서 마땅히 범행을 닦는다면, 참된 가풍을 우러러 사모하여 스스로 굽히는생각을 내지 않고 계・정・혜로써 몸과 마음을 돕고 훈습하며 버리고 또 버려서 물가와 수풀 아래서 성인의 태(胎)를 길러야 한다.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냇물 소리 들으며 자재하여 시간과 공간에 거리낌 없고 곳에 따라 시간을 소요하는 것이 마치 물결을 따르는 빈 배와 같고 허공을 떠다니는 편안한 새와 같다. 몸은 세상에 나타내었지만 그윽한 영혼은 법계에 숨겨 근기에 응하여 감응함이 있어도 항상 그러해서 기준이 없다. 내가 바라는 바는 그 뜻이 여기에 있다. 만약 도를 닦는 사람이 이름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이 행을 닦지 않고 거짓으로 위의를 나타내어 신심 있는 단월(檀越)들을 속여 미혹하게 한다면 명리와 부귀를 구하고 술과 여색에 탐착해서 몸과 마음을 황폐하고 미혹하게 하여 헛되게 일생을 보내는 것만도 못하다.
▶단월(檀越, dāna-pati)은 단나(檀那)・단나(旦那) 등으로 음역되며, 간략히 단(檀)이라고 한다. 단(檀)은 베푼다는 뜻으로 보시(布施)를 말한다. 단월은 베푸는 사람[施主], 보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권1에서는 “단나는 또한 단월이라 부른다. 단은 곧 베풂이니, 이 사람이 보시를 행하여 빈궁의 바다를 건너기 때문에 단월이라 한다”
諸公聞語, 咸以爲然曰,‘ 他日, 能成此約, 隱居林下, 結爲同社, 則宜以定慧名之.’ 因成盟文而結意焉. 其後, 偶因選佛場得失之事, 流離四方, 未遂佳期者, 至今幾盈十載矣. |
모든 스님들이 말을 듣고 다 그렇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에 이 약속을 이루어 수풀 아래에 은거하여 함께 모임을 맺을 수 있다면 마땅히 정혜(定慧)로써 이름 하자.”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맹세하는 글을 만들어 뜻을 맺었다. 그 뒤 뜻하지 않게 선불장의 좋고 나쁜 일을 원인으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아름다운 기약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去戊申年早春, 契內材公禪伯, 得住公山居祖寺, 不忘前願, 將結定慧社, 馳書請予於下柯山普門蘭若, 再三懇至. 予雖久居林壑, 自守愚魯, 而無所用心也, 然追憶前約, 亦感其懇誠, 取是年春陽之節, 與同行舡禪者, 移栖是寺. 招集昔時同願者, 或亡或病, 或求名利而未會, 且與殘僧三四輩, 始啓法席, 用酬曩願耳. |
지난 무신년(1188) 이른 봄에 함께 결사를 맺었던 스님 가운데 득재[材公] 선백이 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지난날의 발원을 잊지 않고 장차 정혜결사를 맺으려고 하가산 보문사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함이 두세 번 간절하고 정성스러웠다. 나는 비록 오랫동안 숲속에서 살면서 스스로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지켜가면서 마음 쓰는 바가 없었지만, 그러나 지난날의 약속을 추억하고 또 그 간절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 해 춘양(春陽)165)의 계절을 택해 같이 수행하던 강선자(舡禪者)와 함께 이 절로 옮겨 살게 되었다. 옛날 함께 발원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혹은 죽고 혹은 병들고 혹은 명리를 구해 모이지 못해 나머지 스님들 서너 명과 함께 처음 으로 법석을 열어 지난날의 원에 보답한다.
▶재공(材公)은 지눌스님의 비문에 나오는 득재(得才)를 가리킨다.
▶춘양(春陽)은 봄볕을 말하며, 계절로서의 봄을 일컫기도 한다. 굳이 풀이하면 따뜻한 봄 정도의 의미이다.
伏望, 禪敎儒道, 厭世高人, 脫略塵寰, 高遊物外, 而專精內行之道, 符於此意, 則雖無往日結契之因, 許題名字於社文之後. 雖未一會而蘊習, 常以攝念觀照爲務, 而同修正因, 則如經所謂,“ 狂心歇處, 卽是菩提, 性淨妙明, 匪從人得.” 文殊偈云, ‘一念淨心是道場, 勝造河沙七寶塔, 寶塔畢竟碎爲塵, 一念淨心成正覺.’ 故知. 少時攝念無漏之因, 雖三災彌綸, 而行業湛然者也, 非特修心之士, 成其益也. |
엎드려 바라노니, 선문・교문・유교・도교의 세상을 싫어하는 높은 사람이 풍진 세상을 벗어나 높이 세상 밖에 노닐면서 오로지 안으로 행하는 도를 정미롭게 하니, 이 뜻에 부합한다면, 비록 지난날 약속을 맺은 원인이 없더라도 결사문 뒤에 이름 쓰는 것을 허락한다. 비록 한 모임에서 습(習)을 쌓지는 못하지만 항상 생각을 거두어 관조하는 것으로써 본분을 삼아함께 바른 원인을 닦는다면, 경에서 이르기를, “미친 마음 쉰 곳이 곧 보리이니,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고 밝은 것이 남에게서 얻음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문수게(文殊偈)에서 말한다.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도량이니,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결국 부수어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그러므로 알아라. 잠깐 동안 생각을 거두어 번뇌를 없앤 인연은 비록 세가지 재앙[三災]이 휩싸더라도 행업이 깊고 고요할 것이니, 특별히 마음 닦은 사람이라야 그 이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以此功德, 上祝. 聖壽萬歲, 令壽千秋, 天下泰平, 法輪常轉. 三世師尊父母, 十方施主, 普及法界生亡, 同承法雨之所霑, 永脫三途之苦惱. 超入大光明藏, 遊戱三昧性海, 窮未來際, 開發蒙昧, 燈燈相續, 明明不盡, 則其爲功德, 不亦與法性相終始乎. 庶幾樂善君子, 留神思察焉. |
이러한 공덕으로 축원 올립니다. 성상의 수명은 만세를 누리고 왕자의 수명은 천추를 누리며, 천하는 태평하고 법륜은 항상 구르게 하소서. 삼세의 스승님과 부모님과 시방의 시주들과 널리 법계의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 이르기까지 다함께 법의 비에 젖는 바를 받아서, 영원히 삼악도의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대광명의 곳집에 뛰어들어 삼매의 성품 바다에 즐거이 노닐고,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어둠을 열고 등불과 등불을 서로이어서 밝고 밝음이 다하지 않는다면, 그 공덕 됨이 또한 법성과 더불어 서로 끝과 시작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선(善)을 좋아하는 군자는 마음에 두어 생각하고 살피십시오.
時, 明昌元年庚戌, 季春, 公山隱居, 牧牛子知訥, 謹誌. 至承安五年庚申, 自公山, 移社於江南曺溪山, 以隣有定慧寺, 名稱混同故, 受朝旨, 改定慧社, 爲修禪社. 然, 勸修文, 旣流布故, 仍其舊名, 彫板印施耳. |
명창(明昌) 원년 경술(1190) 늦봄에 공산에 은거하는 목우자 지눌이 삼가 쓰다. 승안(承安) 5년 경신(1200)에 공산에서 강남의 조계산으로 결사를 옮겼는데, 근처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어서 명칭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조정의 뜻을 받들어 정혜사를 바꾸어 수선사로 하였다. 그러나『권수문』은 이미 유포되었기 때문에 그 옛 이름 그대로 판에 새기고 인쇄하여 베풀 따름이다.
▶명창(明昌, 1190~1196)은 중국 금(金)나라 장종(章宗, 1188~1208 지위) 때의 연호이다.
▶승안(承安, 1196~1200)은 중국 금(金)나라 장종(章宗, 1188~1208 지위) 때의 연호이다.
▶ 정혜사(定慧寺)는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리 계족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이다. 정혜사는 오래된 사찰이라는 뜻에서 현지에서는 고사(古寺)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 충지(冲止, 1226~1293)의 문집에 있는 「혜소국사제문(慧炤國師祭文)」(韓4, p.396b)에 의하면, 혜소국사가 자신이 늙었을 때 머물려고 정혜사를 창건하였으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제자들이 사찰을 완성하고 큰 도량을 이루었다고 한다. 혜소(慧炤)국사는 혜조(慧照)국사로, 대감국사 탄연(坦然, 1070년~1159년)의 스승이다. 끝
[출처]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7)|작성자 곡두
http://blog.naver.com/bonem25/22121093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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