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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8장 17절-19장 6절.
18장.
1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여호와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행(信行)을 보고 감동을 하셨다는 거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어지고 믿는다 그 말이다.
사람 간에 절친하면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면 절친성인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모두 알려주신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부부 간이면서도 숨기고 핑계를 댔다. 이거 못 쓴다.
서로가 무언가 숨겨놓고 말을 하면 일이 자꾸 커진다. 안 좋은 게 자꾸 부풀어 오른다. 사소한 것이라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을 하면 깨끗하다. 숨기면 커진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숨기면 안 된다. 그러나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사람 앞에서 숨겨야 할 경우가 있다. 라합의 경우가 그런 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적을 두고 사람을 속이는 경우라면 이건 옳은 거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비상수단이다. 라합이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은 자기의 임시적인 목숨의 죽음을 면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자기의 영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다.
내가 하나님과 친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자꾸 말을 해 주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을 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나님과 먼 사람일수록 인간끼리의 허물을 만들어 버린다. 이런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뭐가 강대한 거냐? 군대가 많아서? 무기가 많아서? 우리의 이룰구원에서는 뭐가 강대한 거냐?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된다고 하는데, 이 강대성이 어떤 거냐? 강대한 나라, 강대한 민족, 강대한 사람, 의미는 똑같다. 하나님과 단일성으로 되는 게 아주 강한 거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에서 멀어진다면 이미 무너진 거다. 힘이 없는 거다.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단일성이 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과 단일성으로 살면 이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하나님의 본질로 강대해지는 복을 받는다는 거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계시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은 만민이 원하는 복의 기준을 가졌구나’ 이렇게 된다.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이 분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무시하면 망한다. 개인이고 나라고 가정이고 멸망이다. 어느 시대이던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복의 근원적인 말이니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면 멸망을 받는다. 반대로 사람이 강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만이 의사성에서 비진리에 넘어가지 않고, 또 지혜지식적 도덕성적인 면에서도 아주 뛰어나게 된다. 이게 강한 거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적으로 같이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 강한 분이니 이 하나님이 같이 하는 사람도 강하다. 왜냐?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기 때문에. 이보다 더 강한 사람은 없다.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과 그 자식들과 아브라함 집의 권속이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을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에 대한 말이 잘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할 일이 뭐냐? 오로지 말씀에 순종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뭘 이루시겠습니까? 내가 그 일을 거들어 드리지요’ 이게 아니라 말씀에 순종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거다.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소돔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는 것은 결국은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소돔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 소돔 고모라만 망했느냐? 그 옆의 성인 아드마 스보임 등도 같이 망했다. 이게 뭐냐? 소돔 고모라 옆에 있어서 서로가 왔다 갔다 하더니 소돔 고모라의 물이 들어버린 거다. 같이 썩어버린 거다.
이걸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어디로 왔다 갔다 하느냐?’에 따라 거기에 물이 들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교회에서 소돔 고모라에 대해 일반적으로 몸 파는 창녀들의 소굴처럼 생각을 하는데,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영적인 창녀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든 대로 말을 하게 되는데, 남에 대해 말을 할지라도 그 말이 남이 아닌 본인의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말이 되는 거다. 먹은 대로 뒤로 빠지듯이 안 좋은 것을 들었으면 안 좋은 것이 그대로 나오고, 좋은 것을 들었으면 좋은 것이 그대로 나오는 거다. 이는 마치 녹음기와도 같은 건데,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할 때 잡음이 안 들어가도록 하려면 잡음이 없는 곳에서 녹음을 해야 하듯이 믿는 사람 속에 잡된 정신 사상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잡된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 잡된 소리를 들으면 이 사람에게서는 생명의 소리는 없고 잡음만 크게 나온다.
소돔 고모라는 음녀교회를 말하는데, 이 음녀교회는 뭐가 없는가 하니 진리생명이 없다. 이게 음녀교회의 질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룰구원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진리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른다. 아는 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생명이 없구나’ 이걸 아는 거지 음녀교회는 자신들에게 뭐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외부적 표면적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뭐가 없다는 증거냐? 진리생명이 없다는 증거로구나. 본인의 입으로 그 말을 하는구나.
교회들이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고 말은 하는데 그 믿음 좋음이 뭔지를 잘 모른다. 그리고 롯이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을 받은 것만 알지 왜 그렇게 된 건지 신앙 면에서 영적 속성을 잘 모른다. 영적 속성이나 소원 목적은 이룰구원의 정신에서 알게 되는 거지 일반신앙을 가지고는 모른다. 그러니까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전부가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주는 일종의 비유요 비사적 사건이니 소돔 고모라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의 영적인 정신 사상 면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건 모른 채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지어서 유황불 심판을 받았다고만 알고 있다.
우리가 볼 때는 눈으로 보이는 것은 껍데기이고 그 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의 신앙정신 사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째서 눈에 보이는 그런 일을 당했구나’ 이게 있는 거다. 오늘날 표면적으로 보면 유형교회와 목사가 얼마나 많으냐? 그래서 교회가 부흥 같아 보이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거의가 소돔 고모라라. 전부 세상을 향해져 있다.
롯은 비록 세상적으로 믿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롯이 그곳에 살면서 설교를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겠느냐, 우상의 이름으로 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이름을 가지고 한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말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전달은 없다. 성도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정신개조가 안 되는 거다. 진리복음의 물이 안 들어간다.
소돔 고모라 주위의 동네도 같이 심판을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다가 소돔 고모라와 같이 심판을 받았는지 생각을 못한다. 이들은 소돔 고모라 옆에 살면서 소돔 고모라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옮아져서 자신들에게도 심판의 불똥이 튄 것인데도 ‘왜 우리가 타져 죽지?’ 라고 하면서 죽어간 거다. 신앙 면에서 영적 정신 사상의 질을 모르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모른 채 심판의 길로 달려가는 거다.
산에 갔을 때 그 산에 불이 나면 바람이 부는 반대방향으로 피해야 한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피하다가는 연기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불이 자기에게 다가온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우리의 이룰구원도 마찬가지다. 이룰구원의 이치를 바로 알면 일반이치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가 나온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신 말씀을 수없이 보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른 채 열심히 충성봉사 하는 게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고, 말세가 되면 예수를 안 믿고 세상에서 죄만 짓고, 도둑질만 하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자신 역시도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직접 가서 듣고 보고 확인한 후에 판단을 하겠다’ 이 말이다. 이 말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심판자는 정확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듣고가 아니라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판단을 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말을 듣고 판단을 하면 이건 인간기준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을 하겠다는 의미의 말이다.
남의 말만 듣고 판단을 하다가는 자기가 도로 그 말에 걸려버린다. 자기 길은 똑바로 가지 않으면서 왜 남을 간섭을 하느냐? 정신없는 사람이다. 정신없는 사람들이 자꾸 남의 말만 하는 거다. 이게 죄악세상이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두 사람은 소돔으로 가고 한 사람만 남았다. 아브라함은 이 한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고 하면서 이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계약대로 이루는 자’인데, 아브라함이 이 분 앞에 섰다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지금 아브라함 앞에 있는 분이 두 명이다, 세 명이다. 사람이다, 하나님이다’ 이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계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을 하며 나가는 아브라함의 신앙차원이 하나님 앞에 선 상태라는 거다.
23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가까이 나아가.’ 아브라함이 누구에게 가까이 나간 거냐? 언약과 계약대로 일을 하시는 그 분 앞에 나간 거다. 가까이 나간다는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짝 붙어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거다. 성경은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이방 불신의 눈으로는 해석도 안 되고, 말을 해 줘도 못 알아듣는 거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아브라함이 누구를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하는 거냐? 롯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롯을 의인으로 생각을 하고 이 말을 하는 거나, 악인으로 생각을 하고 이 말을 하는 거냐? 의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셨다. 아브라함도 이런 심정으로 말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비록 믿음은 없지만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듯이 아브라함도 롯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 롯을 위해 기도를 한 거다.
24절-32절: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 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45인으로 시작을 해서 10인까지 내려왔다. 19장에 보면 결국은 소돔성에 의인이 열 명도 없어서 유황불의 심판이 내려졌고, 롯은 소돔성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이 때 롯의 종들도 롯을 따라 같이 나왔느냐? 안 나왔다. 이걸 보면 롯의 종들은 소돔 고모라의 죄악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의 유황불의 심판에 사라져 버린 거다. 심지어 아내와 딸까지 다 소돔의 죄악에 물이 들어버렸다.
의인이 있으면 용서해 주겠다는 것을 볼 때 죄악이 만연한 오늘날 세상에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누구 덕이냐? 의인들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냐? 믿음의 사람이 의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인으로 보신다.
그런데 롯이 처음에는 안 나가려고 자꾸 주저앉았다. 안 따라 나오려고 하면 ‘그래, 거기 있어라’ 하고 밀어버릴 텐데 천사는 롯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 냈다. 그러니 ‘천사가 얼마나 힘이 들고 속이 상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3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니시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
19장.
1절: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날이 저문 시간에 롯이 어디에 앉았느냐? 소돔 성문에 앉았다. 말은 성문에 앉은 건데 이 성문이 어디에 있는 거냐? 화산 구덩이에 있다. 소돔성은 화산지대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다 자기 집이 있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온 집안 식구들이 어디에 앉아 있느냐? 이 말의 의미를 알겠느냐? 이룰구원에서 이 면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 다닌다면 진리생명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건데 세상정신을 불어넣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이게 어디에 앉아있는 거냐?
날이 캄캄해질 때 롯이 앉아있는 곳이 어디냐? 소돔 성문이다. 캄캄해지는 시각에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앉아있는 거냐? 이게 다 롯의 신앙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가 거한 곳이 어디이며, 무슨 마음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거냐? 세상은 불심판을 받게 될 일종의 소돔성인데, 이런 소돔성에서 목사가 될 수 있는 거냐?
롯이 성문에 앉은 것은 문지기 행사를 하려는 것인데, 문지기는 눈이 밝고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적으로는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을 잘 아는 게 문지기다. 다른 말로 하면 심판자다.
롯이 성문에 앉아서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니 평소에 보던 소돔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보는 사람이라면 발을 씻고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롯이 두 사람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는데, 절을 하는 모양새는 아브라함과 같은데 롯의 속 중심은 소돔 식이다.
2절: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의 이 행동을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말과 행동이 아브라함처럼 정감이 있는 게 아니라 차갑다. 사람은 자기 마음의 생김새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다. 아브라함은 수은자 입장에서 행동을 했는데 롯은 시은자 입장에서 하고 있구나. 롯의 이 중심을 천사들이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하나님의 사자들의 말을 보면 이 사자들의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러분들도 어느 집에 손님이 되어 갔는데 그 집에서 하는 게 손님입장에서 ‘괜히 왔구나’ 하며 마음이 불편한 것이 있느냐?
3절: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이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간청을 하는데도 이 말을 듣는 입장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썰렁하고 편하지 못하다. 왜 그러냐?
아브라함의 집과 비교를 해 봐라.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온 가족이 사자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만들고 했는데, 롯의 가정에서는 아내와 딸이 어디로 갔느냐? 또 종들은 어디로 갔느냐? 가만히 보면 롯이 혼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 마음이 썰렁하고 좋지 않다. 소돔의 분위기가 온통 죄로 물들어 있는데 아내와 딸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 동네 깡패들에게 갔을 거다. 세상적으로는 깡패들이라고 말을 하는 거지만 이걸 신앙적으로 보면 비진리, 세속화된 신앙의 길로 나간 거다. 이게 깡패다.
4절: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이들은 잠도 없는 거냐? 왜 오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롯의 집을 에워싼 거냐? 저녁밥을 먹고 밤이 되었으면 잠을 자야 할 텐데 잠은 안 자고 밖으로 나와서 뭘 하겠다는 거냐? 이것을 오늘날 교회적으로 본다면 어떤 장면이 될까?
시2: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한 나라 안에서 이렇게 떠들어대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떠들어대기도 한다. 온 세상이 금방 뭐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하나님께서 이걸 모르시겠느냐?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지금 식으로 말을 하면 롯은 이런 곳에 전도를 하러 간 거다. 그곳의 사람들을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거다. 그런데 이건 자기 말일 뿐이지 문제는 자기가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지 않은 이질적인 신앙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도는커녕 자기부터 망하는 거다. 결국 있는 것도 다 빼앗기고, 식구들은 다 세상으로 날아가 버렸고, 불심판을 받은 거다.
5절: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나그네들이 막 누우려고 하는데 무리들이 롯의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롯을 부르고 난리가 났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이걸 볼 때 나그네들이 저녁밥을 먹은 게 소화가 되겠느냐? 그리고 이곳에 사는 자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일반 도덕성도 없구나. 그래서 해만 지면 난폭성이 튀어나오고 음란의 활동들의 시간이 돼버린다. 여름에 해만 지면 모기들의 세상이 되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 말세가 되면 소돔 고모라 때와 같고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 했는데,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볼 때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영적인 면을 봐야지 일반적인 눈으로 보게 되면 지금 현실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소돔 고모라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교회들이 경건의 능력이 없어지는데, 이 말은 교회들이 진리가 없어서 영적인 면에서 구별력이 없어지고, 못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신앙의 규모가 없어진다는 거다.
6절: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롯이 사자들을 집안에 있게 하고 무리에게로 나갔는데,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고 나간 거냐? 어떻게 보면 그 판국에 문 밖으로 혼자 나간 것이 대단한 희생정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롯의 신앙의 차원이 그럴 정도냐 그 말이다. 말하자면 인본주의 차원의 신앙으로 허풍을 떨고 있다는 거다. 그 증거가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 버렸다.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소돔 고모라와 같고 노아 때와 같은 교회가 많은데, 이런 자들이 교회의 주격이 되어있다. 깡패 같은 자들이 주격이 된 게 교회냐? 이런 자들은 진리의 종의 말을 듣지 않는다. 소돔 고모라와 롯을 들고 오늘날 교회를 보여주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