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守靜堂公(弘宙) 戒子書《수정당공(홍주) 계자서》
수정공 휘 홍주(弘宙․1558~1634)는 괴봉공(魁峯公) 휘 대용(大用)의 장남으로 초휘는 홍인(弘寅)이며 자는 희성(希聖)이며, 호는 수정이다. 그는 둘째 아들 정보(廷寶)가 갑자란 때 진무훈(振武勳)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추증 받았다.(지장록 p. 1102)
「曰汝山寶廷寶國寶西寶聽父言爲人子止於孝爲人臣止於忠山寶廷寶旣蒙 國恩皆有職守宜恩夙夜勤勞而止於忠國寶旣當在家奉養之任宜思日夜恭勤而止於孝是老父之望也汝等須體父母之心勉栴勉栴」
〈해설〉너희들 산보, 정보, 국보, 서보는 애비가 이르니 들으라. 사람의 자식 되어 효도에 그치고, 사람의 신하되어서는 충성에 그쳐야 한다.
산보와 정보는 이미 국은을 입어 모두 직책이 있으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충성하는데 애써야 할 것이다.
국보는 집에 있으면서 봉양의 책임이 있으니 마땅히 밤낮으로 부지런히 효도에 그쳐야 할 것이니 이는 늙은 애비의 바람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쓰고 힘쓸지어다.
□ 菊泉公(廷獻) 遺詩 《국천공(정헌) 유시》
국천공 휘 정헌(廷獻․1570~1643)의 자는 회가(誨可)며 호는 국천이다. 그는 청계공 장남으로 당시 고을에서 3인의 효자 가운데 한 분으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갑자(甲子),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이 일어나자 창의(倡義)*에 앞장섰다.
* 창의(倡義) : 국난을 당하여 의병에 앞장섬(게재자)
하지만 정치적 혼란에 염증을 느껴 과거보기를 단념했다.
공은 출사할 실력을 갖췄으나 거듭된 반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화친파와 척화파로 갈려 대립하다 항복하는 수모를 당한 모습에 환멸을 느껴 출사를 포기하고 임천에서 생애를 보냈다. (지장록 p.1144)
■ 娥池堂偶吟 (아지당우금)
種松種竹又種菊 솔도 심고 대도 심고 또한 국화도 심으니
多種多花不是貧 많이 심어 꽃 많이 피니 가난하지 않네
居世何須談世事 세상 살면서 하필이며 세상 일 말하리오
談山談水又談心 산도 말하고 물도 말하며 또한 마음도 이야기 하네
■ 夢不醒 (몽불성)
「把經當日君民志晩歲林居保性情 老劒空鳴虯影動鹿銅頻覺鶴毛生 心懸北闕憂爲火跡韜關山夢不醒 虛負初年忠孝計秖敎身世獨煢煢」
〈해설〉글 읽은 당일에도 나라에 충성할 뜻으로 만년에도 임천에 살면서 성정(性情)을 보존하네. 칼도 늙으면 속절없이 우는데 그림자만 꿈틀거려 움직이고 티끌속의 구리인줄 자주 깨달으나 흰머리만 생기네.
마음만은 대궐에 있어 근심이 불같은데 고향에 자취를 감추니 꿈도 깨지 않네. 초년에 계획했던 충효를 허무하게 저버린 신세 홀로 괴롭구나.
□ 聽禽公(廷勳) 遺詩 《청금공(정훈) 유시》
청금공 휘 정훈(廷勳․1578~1662)의 자는 가겸(可謙)이며 호는 청금 또는 기재(幾齋)이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 때 동생 반계공과 의병을 모아 서울로 가다 왕의 항복소식을 듣고 귀향, 종제인 만회재(晩悔齋) 방어사공 등과 더불어 임천에서 지냈다.
그는 어느 날 친구 선세휘(宣世徽)와 아육탑에 갔다가 승려의 부름을 받고 의상암(義相庵)으로 피신, 재앙을 면한 전설의 주인공이다.(지제지 구정암 및 아육탑붕편)
■ 種竹詩 (종죽시)
(진사 金汝重이 천관산 구정암에 중국 소상(瀟湘)지방에서 자생한다는 아롱진 대나무인 소상반죽(瀟湘班竹)을 심은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哀壑何年種此莖 슬픈 골짜기 어느 해에 이 대를 심었던고
色分湘岸萬條淸 분명한 소상반죽 만 가닥이 청풍이어라
金陵亦有黃陵廟 금릉에도 또한 황릉의 묘가 있음이니
別起秋山夜雨聲 따로 가을 산에 밤 비 소리 들리리라
■ 種竹詩 追和 (종죽시 추화)
(聽禽公은 金汝重의 종죽시를 보고 다음과 같이 같은 韻으로 화답했다)
種得瀟湘玉一莖 옥과 같은 소상반죽 한 그루 심어 놓으니
瀟瀟寒葉帶淸風 쓸쓸한 찬 잎에 맑은 바람 띄었구나
當年辛苦移栽意 당년에는 모진 고생하며 옮겨 심은 뜻을
欲向窓前淸風聲 창밖을 향한 바람소리 듣고자 함이네
■ 阿育塔崩 (아육탑붕)
「忽崩天上崩石 盡讀人間未讀書」= 문 듯 하늘이 무너지고 돌이 내려앉았으니 인간이면 마땅히 읽어야할 글은 다 읽지 못하였네.
(144-023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22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22일차에서는 '수정당공(홍주)의 계자서', '국천공(정헌)유시', '청금공(정훈) 유시'가 게재됩니다.
짧은 문장속에 한평생의 인생관을 농축해 다 담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 '수정공(홍주) 할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효도와 충성에 대하여 진심어린 당부를 하셨습니다.
▲ '국천공(정헌) 할아버지'께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으신 상태에서도 나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 '청금공(정훈) 할아버지'께서는 병자호란때 서울로가다 왕의 항복소식에 귀향하는 등 국가에 대한 충정어린 마음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닥쳐온 재앙도 승려의 부름에 따르다 비켜가게한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 주)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등 계속)/ 무곡
천관산을 등정하다보면 아육탑이 솟아 있는거죠. 아육왕이 세운 팔만사천개 탑중의 하나는 아니고 자연산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곡
"金陵亦有黃陵廟 금릉에도 또한 황릉의 묘가 있음이니"
청금공의 종죽시에 금릉이란 글귀가 나오네요. 금릉은 중국에도 있는데 김천과 금릉군이 통합되어 김천시가 되었답니다./ 벽천
碧泉 위윤기 !
금릉같이 유명한 지명은 여기저기서 사용빈도가 높은것 같습니다.
강진의 금릉, 김천의 예전 금릉군
유사한 사례로
중국 한나라 전후의
양양과 강릉, 그리고 함양 (秦나라 수도)등은 모두 중국과 한국에 공히 존재하는 지역이죠
특히 강릉같은 경우는 서로가 자매도시로 협정도 맺은 것 같더군요
그러나 코로나의 진원지로 알려진 중국의 우한(삼국시대 형주)은 우리나라에
없어 그나마 다행으로 보입니다./ 무곡
호칭의 일관성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괴봉공의 아드님이신 수정당공(22세 휘 홍주)의 경우에 문장마다 '수정공', '수정당공'으로 비슷한듯 또 다른듯 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정공과 수정당공으로 쓰는것이 무방해 보이지만 이런일을 잘 접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헷갈림의 여지가 충분해 보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수정당'공으로 호칭하고 있으며 족보에도 호를 '수정당'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수정당'으로 통일했으면 합니다./ 채치
무곡님!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하셔서 연제해 주시니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몇년 전에 원산 족숙님께서 책을 선물로 주셔서 한 번 읽었는데 한자 실력도 부족하고, 족보공부도 많이 못한 문외한 본인으로 연재 내용도 따라 읽고 또 책자도 다시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여러 종친들께서 많이 읽고 도움을 받을거라 사료됩니다./ 운정 광주종친회장
위 금식 운암공 33세 51년 생 님!
감사합니다. 도리어 제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부장공파외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원산께서 쓴 책자를 보니 다소 공론화를 거쳐야 될것 같은 부분도 있을지라도 그 맥락을 살펴볼때 우리가 나아가야할 큰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사실 소설보다도 더 리얼하고 재미가 더 있는 부분도 많은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실존 인물이 등장하고 적극적인 삶을 사시다가 떠나신것 등으로 해서 말입니다.
저의 생각은 댓글을 좀 유연하게 하여 오류를 잡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상님들의 삶의 궤적을 스크린해보고 조상님과 대화하는 " 대화의 장"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족하나) 지금까지 등장한 충렬공이나 원감국사님,
그리고 괴봉공, 청계공등의 선조님 인생역정만 보더라도 제 생각은 열국지나 삼국지 좀더 나아가면 사기보다 더 리얼하고 감동적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감사합니다./ 무곡
¤ 수정당 위홍주 칭호(稱號)
위홍주 공의 족보에 등재된 아호는 수정당(守靜堂)이다. 이런 이유로 위홍주(22세) 공의 칭호는 公의 아호를 빌려 수정당공으로 쓰이고 있다.
본문 상단에는 수정당공이라 했고 하단에는 수정공이라 했는데, 동일인이다. '수정公' 칭호를 '수정당公'이라고 해야 올바르지만 '수정공'이라 해서 꼭 틀리다고 볼 수도 없다.
병조참판을 지내신 만회재(22세 정철) 公도 만회라고 칭호하기도 했다. 한 예로 공의 문집명이 '만회당실기'가 있다.
이런 예도 있었으니 홍주公 칭호를 수정公이라고 하여 이를 탈자가 생겼다고 볼 수 없다. 또한 틀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집필자의 저작 세계관과 편의상일 수도 있다. 비록 독자에게 혼동이 있을 수 있기에 지적은 있을 수 있겠으나 자칫 지적함에 감정이 실리면 상대방 측에서 월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심 접근이 좋다는 관점이다. / 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