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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 仁者 樂山) 지자동(智者動) 인자정(仁者靜) 현자락(賢者樂)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떠 올리며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짐을 배낭에 넣기 전 일기예보를 먼저 챙겼습니다. 오전 11시경부터 비소식이 있고, 오후 6시경 끝 친다는 예보가 눈 길을 끌었습니다. 짐의 내용물을 우중산행을 이어가는 것을 중심으로 선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 비옷을 선택하기로 하고 오버트러스 상하의를 찾았으나 어디 깊은 곳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 판초우의로 급변경하고
2. 여벌옷으로 티셔츠와 반바지를 추가하였습니다,
3. 트레킹화도 여름용으로 물, 공기 순환이 좋은 메쉬 구조로 바꿨습니다. 또한 미끄러움을 방지할 수 있는 엣찌가 좋은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4. 배낭도 방수가 좋고 가볍고 방수 덮개가 달려 있고 외부로 크게 노출되어 있는 비상시 수납역할이 좋은 것으로
5. 모자는 가벼운 여름 운동모자와 캔버스 재질로서 면적이 큰 전문 트레킹 모자를 추가했습니다.
6. 흡수력이 좋은 별도의 수건과 손수건도 챙겼습니다.
7. 그리고 중식으로, 냉온 전문 밥통에 볶음밥을 만들어 담은 후 오이지와 황태로 넣고 담근 김치만 챙겼습니다. 스틱을 챙기고 의자를 넣으려다 오늘 후배가 자동으로 펼쳐지는 등산전문용 의자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빼놓았습니다.
준비물을 끝낸 시간은 오전 7시 정각, 샤워 후 약속장소로 정해 진 우이동 만화상회 앞 테이블까지 교통동선을 체크하여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지하철을 선택하였습니다. 약속시간은 9시 40분, 그리고 20분의 여유시간을 만들어 10시까지 도착하면 지각이 아니라는 우리들만의 방식이 있지만 9시 40분에 도착하는 동선을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3번의 환승을 하면서도 1시간에 도착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보문역에서 우이역으로 가는 자동으로 운행되는 작은 전철을 타면서 시계를 보니 35분에 도착가능한 조짐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여 지상으로 오른 후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 약 4분, 산을 오르는 일정이라 허기를 채우는 것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이라 소중한 판단입니다.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 하나와 쵸코우유를 사들고 나와 도로 주변에 조성해 놓은 피크닉 의자에 앉아 마시며 악우들을 기다렸습니다. 다 마시고 먹은 후 재활용 처리목적으로 샌드위치 플라스틱 공간에 일체화시켜 버리려 할 때 등반대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 후니 형! 어디세요?" 늘 이후배는 선후배들 이름을 부를 때 발음을 흔드는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 공손하게 답변으로 편의점 앞입니다" " 아니 형! 1.5m 위로 올라오셔야 되는 것 아니 시간요?" "응?" 일어나서 비치파라솔 사이로 바라보니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편의점부터 시작하여 여러 개의 상점이 밀집해 있다 보니 각자 상점 앞에 적치한 물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 서로 확인불가 했던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그러면서 악수와 인사 나누고 인사를 받으며 산행의 동지적 입장으로 단합을 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의 의식을 치른 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귀천 곁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옛적부터 만화상회라는 곳은 도선사라는 산사 아래에 있던 사화촌(寺下村) 즉 절 아래 마을에 있던 시주물이나 일반 상품을 팔던 상회였습니다. 만 가지 잡화물건을 판다는 이유에서 만화상회라 이름 짓고 절에 가는 신도들이나 산꾼들이 애용하던 정이 깃든 상회였으나 시류에 옛 정취는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사들여 새 건물을 짓고 편의점, 식당 등으로 재개업하였으나 우린 아직도 만화상회라 부르며 그 앞에서 지금도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60여 년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 그런지 이 버릇은 곱게 물들어 가는 백운대 노을처럼 우리들 마음에 정이 쌓이고 흐르는 마음풍경입니다. 참! 물이 맑고 소리 또한 정겹게 다가옵니다. 물 길은 늘 인적과 함께 발자국 소리도 실어 아래로 끌어내리는 마술을 부린답니다. 물소리에 리듬을 빌려 가벼운 걸음으로 용개울 근처 후미진 숲 바위 뒤로 우선 숨었습니다. 집을 나서면서 차려입은 옷을 해체하고 여름 산에 적당한 복장으로 변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숨은 것입니다.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도 모르게 이정선이 부른 여름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습니다.
행장을 정리한 후 다시 걸어 북한산국립공원을 알리는 표지석에 섰습니다. 이 지점은 사하촌에서 점점 산 안으로 접어들어가는 등산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소귀천이라는 물 길도 도선사와 용암문과 만경대 부근에서 발원되는 물과 합수되어 그 세를 늘리며 힘차게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풍광이 뛰어난 곳에 절을 찾는 신도나 산객들을 위한 여흥을 즐기는 장소가 있던 곳이지요.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곳으로 변모되었지만~~~ 그리고 현대건설로서 가업을 이룬 정주영 회장께서 직접 건축한 당대 유명한 요정으로 이름을 날린 선운각이 소귀천과 도선사천과 합수되는 지점에 문을 열게 됩니다. 당시 정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모습은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커피와 웨딩홀로 바뀌었습니다. 이 표지석 뒤로 잘 보이던 인수봉의 자태도 쥐꼬리만큼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적마다 수줍은 듯 살짝살짝 보이는 곳입니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면 수목이 자라는 속도에 완전히 나무그늘에 인수봉은 완전히 가려질 것입니다. 세월은 늘 그늘이 드리워져 현실을 삼켜버리는 것은 역사의 그늘이라는 생각을 이곳에서 자주 하게 되는군요
습도가 높고 기온은 상승 추세다. 도선사로 가는 신작로를 피하고 선운각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오름길에서 느끼게 되는 마음부담을 줄이려 스스로에게 우문을 던져 보며 올랐다.
너에게 산은 무엇인가? 그런 후 바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리며 답을 스스로 얻어내기 위하여 마음 부산을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소환한 것은 20대 초반에 읽은 법구경이었으며 설담 지우스님의 시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산악회 회장직을 연임하시며 즐겨 사용하시던 이은상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로 외치시던 요산요수(樂山樂水)도 뒤를 이어서 마음 갈피에서 찾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유의 자락은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 仁者 樂山) 지자동(智者動) 인자정(仁者靜) 현자락(賢者樂) 인자수(仁者壽)까지 접근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지적욕구를 채우려 분주하게 탐구생활을 하지만 어진사람은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고 고요하게 지낸다. 그러하여 지혜로운 이는 즐기며 살고 어진 이는 수를 다 이룬다. 맑은 사유 끝에 기억해 낸 글들입니다. 어느새 세 번째 징검다리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면서 설담 지우스님의 시가 또렷하게 다가섰습니다.
산은 인자(仁者)의 길을 열고
물은 지인(智人)의 마음을 씻네
풍경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암자(庵子)는 수풀 속에 숨어 있네
그렇다~~ 인자의 길을 가려고 통섭의 산, 그 산을 찾기 시작한 것이 바로 자신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미치자 계곡물 가운데 서서 갈증이 느껴졌습니다. 징검다리를 또 하나 건너 이어져 나가는 산 길을 올라서며 길을 재촉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졌습니다. 극심한 습도는 오히려 입술을 타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소귀천 계곡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 무더위 영향 같습니다. 이럴 때 골바람이라도 불어 주면 좋으련만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습도를 높여 주어서 그런지 몸의 힘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물 흐르는 소리를 듣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소귀천 코스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선택하며 오르는 날은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소걸음으로 변신하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은 비소식 때문인지 좀 조급하게 구는 것 같습니다. 우보(牛步) 즉 소걸음은 재촉이 필요치 않는 걸음인데. 마음의 변덕이 나를 성급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토끼 걸음이든 소 걸음이든 앞으로 발자국을 옮기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소귀천 중단을 지켜 온 샘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의 이름을 용담샘이라 불러왔습니다. 소귀천에는 용이 들어가는 지명이 이외로 많은 곳입니다. 깊고 너른 웅덩이를 용개울이라 부른답니다. 수심이 깊어 사고가 잦았던 곳이지요. 악동들이 동무들과 몰려와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하다 다시 떠오르지 못한 일이 자주 생기다 보니 현재는 그물망을 쳐 놓고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샘가에 플라스틱 바가지 두 개가 걸려 있습니다. 청색과 붉은색, 순간적으로 청실과 홍실의 의미가 나의 선택을 잠시 붙잡았습니다. 이것을 갖다 놓은 사람은 남녀의 유별을 근거로 선택한 행위 같다는 생각에 주춤한 것이다. 마음을 청색으로 돌려세운 후, 다시 붙잡은 바가지에 넉넉하게 물을 담아 여러 번 나누어 마셨습니다. 마신 후 청량감이 열기로 가득한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습니다. 얼마나 상쾌한지~~ 순간 나도 모르게 피정이란 단어를 불쑥 떠올렸습니다. 잠시 속세를 벗어나 산을 찾는 일은 흡사 피정(避靜) 같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다시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징검다리 물이 맑아 손을 담그고 가고 싶었습니다. 턱 밑에 감아 놓은 손수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물에 담가 놓고 돌하나 집어 올려놓았습니다. 꼬리를 잡힌 손수건은 물흐름에 따라 펄럭거립니다. 허리를 굽혀 얼굴에 아내가 얼굴에 무엇인가 바르는 것처럼 계곡물로 얼굴을 적셔가며 두드리자 한결 시원함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손수건을 묶자 빙수 한 모금을 떠서 넘기는 것처럼 목에 찬기가 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느끼는 기분이었습니다. 고운 감정을 오래도록 붙잡을 수 있으려면 스스로 이입하는 훈련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보고 듣는 것에 고운 것들을 평소에 많이 담아 놓아야 언제나 고운 감정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다시 길을 열어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오를수록 산길은 좁은 산길로 변하게 됩니다. 특히 장마철 동안 웃자란 폴과 나무들이 길의 폭을 상당히 좁혀 놓습니다. 모기 기피제를 뿌려지만 땀에 씻겨 내려 효과가 없는지 산모기가 따끔하게 물고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 산초나무 가지를 하나 꺽어 들고 두드리며 걸었습니다. 산초향이 강해 가지를 두드리면 향이 퍼져 모기가 달라붙지 못한답니다.
등반대장을 하고 있는 후배 스틱을 타고 오르는 하늘소가 우리들의 걸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혹시 사슴벌레가 아닌가 하고 유심히 관찰해 보니 하늘소가 맞습니다. 혹시 등산객들의 발걸음에 다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숲 깊은 곳에 내려놓고 다시 걸음을 능선으로 옮겨 나갔습니다. 나무계단을 두 번 오르고 나면 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높은 습도가 자꾸 걸음을 무겁게 만들어 성가셨습니다. 능선에 부는 바람이 얼마나 산객을 유혹하는지~~ 배낭끈을 조이고 신발 끈을 조인 후 능숙하게 바윗길을 오르며 고비를 넘어섰습니다. 약 15분 동안 숨이 차도록 오르자 비로소 능선 참나무 그늘 아래 쌓아 놓은 돌의자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고 땀을 닦으며 악우들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계곡등반을 하면서 흘린 땀들이 능선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상쾌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약 20여분을 기다리자 대장이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이어서 다른 후배가 올라섰습니다. 잠시 참나무 그늘에서 15분가량 땀을 식히며 휴식 취한 후 이곳에서 대동문 까지는 200m의 거리를 단숨에 올라 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대동문은 많은 산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점심때 여지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점을 생각하고 우리 일행은 태고사 절터 상단에 있는 엠포르산악회 간이 대피소까지 이동하여 점심을 챙긴 후 용암문- 도선사- 우이동으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용암문 - 노적봉- 만경대- 위문 - 백운산장- 하루재- 도선사- 우이동으로 하산하려고 계획을 염두에 두며 올랐습니다. 비소식 영향으로 줄어든 산객 덕분에 너무 한가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일정을 수정하기로 하고 잠시 주변을 살피며
새롭게 설치한 북한산성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입니다. 길이는 12.7km, 산성 내부면적은 약 188만 평(6.2 km2)입니다.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은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북한산성 축조 논의는 임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 배후에 산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하자 하였으나 축성은 숙종 37년 171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축성을 쌓은 기간은 경우 6개월이었습니다. 성벽은 평지, 산지, 봉우리,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다르게 쌓았습니다. 계곡부는 온전하게 쌓고 가파른 곳은 1/2도는 1/4만 쌓고 여장만 올린 곳도 있습니다. 봉우리 정상부는 성벽을 세우지 않았는데 그 길이는 무려 4.3km입니다. 성벽에는 대문 6곳, 암문 8곳, 수문 2곳 병사들의 초소 성랑 143곳을 두었습니다. 임금이 머물던 행궁, 북한산성 수비 삼군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주둔부대 유영 3곳과 군사지휘소 장대 3곳을 두었고 군량미 비축창고 7곳, 승병이 주둔하던 승영사찰 13곳을 성안 곳곳에 두었습니다.
잠시 비오는 성곽 주변을 조망하고 배낭 짐을 젖지 않토록 하기 위하여 성루에 올라 있을 때 박쥐처럼 나타난 후배가 보여 찍어 준 사진입니다.
한적한 대동문 안을 살피는 사이 일행이 도착하여 대동문 안 고목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점심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대장이 준비한 떡, 해삼, 소라숙회 그리고 불광동 김옹이 준비한 돈가스와 전, 무알콜 맥주를 따라 마시며 점심을 해결하는 사이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긴급하게 대장이 늘 들고 다니는 우장구 천막을 꺼내 긴급하게 설치를 끝내고 옹기종기 몰려 앉아 점심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세찬 바람과 맞이한 여름 폭우, 산방정담 거리로 추억으로 되새김될 것입니다.
폭우는 지속적으로 내렸습니다. 일기예보가 전한 비소식 영향으로 산객들이 줄어든 대동문 안 숲 속의 빈터를 차지하고 앉아 장시간 소일할 수 있었던 배경은 우장구용으로 지니고 다니던 천막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내리는 폭우성 비를 판초우의로 막아 내며 내려왔으나 몸에서 발생하는 열기의 영향으로 배출되는 땀과 결로로 상의는 흠뻑 젖었습니다. 그리고 하산 길의 등산로는 폭우 때문에 발목까지 빠지는 물이 계속 흘러 트레킹화와 양말을 적셔 놓아 거북스러웠지만 오랜만에 경험하는 우중산행의 경험은 나름 극복의 엄중함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깨달음의 수확도 있었습니다. 산행이라는 하는 것은 극한을 극복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우중산행이며 설산 산행입니다. 대장이 정릉 아리랑 고개 부근에 민어회와 탕을 잘하는 식당이 있다 하여 지하철로 이동하여 찾아갔으나 민어는 주말이라 소진되었다 하여 병어 무침과 고등어구이로 후배들은 소주잔을 나누고 본인은 저녁밥을 먹은 후 7시에 식당을 나와 귀가를 서둘러 8시경 도착하였습니다. 귀가 때까지 여름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귀가 후 배낭을 비롯하여 모든 장비를 세탁 후 건조대에 널어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편히 쉴 무렵 후배들이 귀가여부를 묻는 인사 전화를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늘 등산의 끝은 하산이 아니라 무사히 귀가하는 것이 바로 등산의 끝이라는 옛적부터 엄중한 교육을 시킨 결과가 만든 전화입니다. 악우들과의 우정은 산 곳곳에 놓여 있는 바위처럼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은 바위를 닮은 인성 때문이며 숲이 지니고 있는 통섭의 가치를 익히고 배우며 함께한 세월 덕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함께 우중에 산능선에 앉아 조만간 백운대 오를 것이라 하였더니 함께 오르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자 하였습니다. 더 늦기 전에 백운대 정상에 올라 호쾌하면서도 수려한 북한산 동서남북 자락을 살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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