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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책(孟子策)
왕은 묻는다.
맹자는 공자 이후의 일인자이며, 《맹자》7편은 맹자의 도가 실린 것이다.
신은 대답합니다.
신은 일찍이 성현의 도통(道統)은 위로 무왕(武王)에 그치고 아래로 맹자에 그쳤으므로 그분들의 기상도 서로 비슷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지금 만약 《맹자》글을 인하여 맹자의 도를 구한다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맹자의 평생 정력은 곧 백리(百里)의 땅에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나, 그 방법은 불과 오묘(五畝)되는 집터에 뽕나무를 심고 닭이나 돼지의 번식 시기를 잃지 않으며, 상(庠)이나 서(序)의 학교 교육을 신중히 하여 효제(孝悌)의 뜻을 거듭 밝히는 등 몇 구절뿐입니다. 이를 지금 본다면 참으로 평이하고 천근(淺近)한데, 당시의 제후들이 귀담아듣지 않다가 끝내 전쟁하는 일에서 탈피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왕 이후로 왕도(王道)가 끝내 종식되어, 무왕이 ‘늙어서 천명을 받았다.[末受命 《중용》 제19장의 말]’는 세 글자가 마침내 천고의 뜻 있는 선비의 한(恨)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옛날 공자가 소(韶 순 임금의 음악 이름)를 일러 ‘진선(盡善) 진미(盡美)하다.’ 하였고 무(武 무왕의 음악 이름)를 일러 ‘진미하나 진선하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후학들이 볼 때 공자와 맹자에게도 진실로 소(韶)와 무(武)의 분별이 없지 않으나, 맹자가 이단을 배척하고 심성(心性)의 근원을 환히 논했으니, 맹자는 참으로 신성(神聖)의 다음입니다. 불행히 맹자를 비방하는 의논이 순경(荀卿 순황(荀況)을 말함)의 비십이자(非十二子 《순자(荀子)》의 편명)의 설에서부터 시작되어 꼬집고 늘어지는 자들이 대대로 연이었습니다. 오늘날 성인의 학문이 퇴폐하고 이단의 학설이 멋대로 날뛰므로 맹자의 도를 하루 속히 천양해야 하는데, 전하의 물음이 때마침 미치시니, 신이 어찌 감히 간담을 피력하여 대양(對揚)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대문은 삭제되었다.
어떤 이는 ‘맹자가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자, 물러나서 《맹자》를 저술했다.’ 하고 어떤 이는 ‘돌아간 뒤에 그 문인들이 《맹자》를 추기(追記)했다.’ 하니, 두 설에서 어떤 것이 옳은가. 《논어(論語)》에는 다만 인(仁) 자만 말하였는데, 《맹자》에는 인ㆍ의ㆍ예ㆍ지 사덕(四德)을 아울러 말하였고, 《춘추(春秋)》에는 유독 주(周) 나라만을 높였는데 《맹자》에는 누구나 왕도(王道)를 행하라고 권하였으니, 맹자의 소원은 공자를 배우는 데 있었으면서도 서로 반대되는 듯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는 말은 참으로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했던 것을 발명한 공로가 있는데, 다만 ‘성(性)이 선(善)하다.’고만 말하였으니, 기(氣)를 논하는 데 구비하지 못한 혐의가 없지 않겠는가.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은 말하기 좋아하면서 《주역(周易)》의 글만은 인용하지 않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으면서 오히려 전국(戰國) 시대의 습속을 면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며 규구(規矩)를 확립하였으나 천 길 절벽에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채화(綵花 색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를 만들어냈으나 흔적이 없는 조화의 공부가 모자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술했느니 추기했느니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장주(莊周)가 장자(莊子)라 자칭하고 안영(晏嬰)이 안자(晏子)라 자칭하였으니, 《맹자》에서 맹자라 자칭한 것을 보면, 추기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하고, 추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등 문공(滕文公)과 양 양왕(梁襄王)의 죽음이 다 맹자보다 뒤였으므로 그 시호를 미리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요, 공도자(公都子)와 악정자(樂正子)의 무리가 다 맹자에게 집지(執贄)하였으므로 자(子) 자로써 존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니, 두 말이 다 근리합니다. 그러나 조기(趙岐)가 일찍이 《맹자》의 외서(外書) 4편은 그 문체가 넓고 깊지 못하여 《맹자》와 같지 않다 하여 산삭해 버리고 주(注)내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전습(傳習)이 모두 맹자의 저술이었다고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덕(四德)을 아울러 말한 것이 《논어》와 다르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사덕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어버이를 섬기고[孝] 형을 따르는 것[弟]으로 사덕의 실제를 삼았으며, 공자도 효(孝)와 제(弟)로써 인(仁)의 근본을 삼았으니, 이를 말미암아 말한다면 맹자는 사덕을 합쳐 인(仁)ㆍ의(義)를 삼았고 공자는 인ㆍ의를 합쳐 인(仁)을 삼은 것이니, 일찍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도(王道) 정치를 행하라고 권한 것이 《춘추(春秋)》와 다르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공자가 온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한 것은 주왕(周王)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왕도를 행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일찍이 애공(哀公)의 물음에 답한 것에, 그 규모와 절차가 분명히 한 제왕(帝王)의 제도였지만, 한 마디도 주왕을 높여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았으니, 공자의 평소 뜻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춘추》에서 주왕을 높이는 것을 대서특필(大書特筆)한 것은 진실로 그 글이 사서(史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맹자 때에 주 나라가 더욱 쇠약한 때문에 제후들에게 왕도를 행하라고 권했다 하는데, 신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말하고서 다만 성선(性善)만을 말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맹자의 성선설은 천명(天命)에 근본한 때문에 일찍이 기질성(氣質性)을 겸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요, 기질성에 대한 학설도 막힘이 있으므로 신은 감히 맹자를 구비하지 못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시경》ㆍ《서경》은 말하면서 《주역》은 인용하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논어》ㆍ《예기》와 선진(先秦)의 제자(諸子)들도 《주역》을 인용한 적이 없었고, 시서를 인용한 것들로는 《좌전(左傳)》ㆍ《국어(國語)》에 가끔 인용하곤 하였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성인의 경지(境地)에 들어갔으면서 전국 시대의 여습(餘習)에 가까웠던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성인은 그 투(套)를 똑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堯)ㆍ순(舜)ㆍ탕(湯)ㆍ무(武)의 기상이 현격하게 달랐으니, 문장이 날카롭고 의논이 준엄한 것을 들어 전국 시대의 여습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천길 절벽에 우뚝 선 듯한 것은 그 기상이 준엄한 때문이었고, 채화를 만들어 낸 것은 그 광휘(光輝)의 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등의 의논은 직접 모시고 배운 사람이 아니고는 망령되게 품평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맹자》는 배우려고 해도 의거하여 힘쓸 만한 곳이 없다.’ 하고 어떤 이는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왕도(王道)가 실행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여 선유(先儒)의 의견이 각기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박사(博士)를 처음 설치한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학과(學科 과거의 과목) 설치를 청한 것은 어떤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는가. 송 고종(宋高宗)이 《맹자》를 손수 써서 병풍으로 만들었으니 《맹자》를 매우 좋아했다 할 수 있겠으며, 염희헌(廉希憲)이 ‘맹자’라 호칭받았으니, 《맹자》를 잘 배웠다 할 수 있겠는가. 전당(錢唐)이 죽음으로써 직간(直諫)하였으나 이에 앞서 문장을 절취(竊取)하여 글을 지었고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을 말함)이 《맹자》를 의심하여 책으로 엮고도 말로 비방까지 하였으니 이를 낱낱이 지적하여 자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아래는 빠졌다.
배우려 해도 의거할 데가 없다고 한 것은, 맹자의 영기(英氣)가 넘쳐흘러서 그 실천 공부가 들어나지 않은 때문이고,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왕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말씀이 평이(平易)하여 권모술수의 말과는 같지 않은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박사를 설치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한 문제(漢文帝) 때에 처음으로 전기박사(傳記博士)를 두어 《논어》와 병렬(竝列)되었으나 오히려 유가류(儒家類)에 소속해 있었고, 양(梁)ㆍ수(隋) 무렵에 이르러 비로소 경류(經類)에 승격되었으니, 그 시대를 상고할 수 있습니다.
학과 설치를 청한 것은, 신이 살피건대 조기(趙岐)와 육선경(陸善經)이 주해(注解)를 낸 것이 염한(炎漢 한(漢)을 가리킴) 때에 시작되었는데, 이후부터 모든 경서(經書)의 뜻을 풀이하는 데 《맹자》를 인용하여 사리를 밝혀야만 박문(博文)이라 칭하였으니, 학과로 세우자는 의논은 당연히 이보다 뒤에 있었을 것입니다. 송 고종이 손수 써서 만든 병풍은, 신이 생각하건대 송 고종의 어병(御屛) 글씨가 의(義)ㆍ이(利)와 왕(王)ㆍ패(覇)의 분별에는 합치되지만, 《맹자》를 좋아하기만 하고 그 단서를 캐내지 못하였으니,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염희헌이 맹자라 호칭받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염선보(廉善甫 선보는 염희헌의 자)가 비록 뛰어난 자품이 있었으나 원 세조(元世祖)의 맹자란 호칭은 한때의 칭찬에 불과하였으니, 이도 서술할 것이 못됩니다. 전당이 죽음으로써 직간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맹자의 초개(草芥)처럼 여긴다는 말은, 대개 나를 어루만져 주는가 나를 학대하는가[撫我虐我 《서경》 태서(泰誓)의 말]라는 글에서 기인하였으니, 역시 당시의 제후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기(詞氣)가 너무 격하여 마침내 돈후(敦厚) 권면(勸勉)하는 뜻이 모자랐으니, 명 태조(明太祖)가 곧바로 맹자의 위패(位牌)에 활을 쏠 때 전당이 배[腹]를 내밀고 화살을 맞은 것에 대하여는 신이 감히 그 사이에 혀를 놀릴 수 없습니다.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맹자》를 의심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사마광의 《의맹(疑孟)》11편은 현행 7편의 글을 맹자의 저술이 아니라고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안(建安)의 여윤문(余允文)이 다시 《존맹변(尊孟辨)》7권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이태백(李太白 태백은 이구(李覯)의 자)의 《상어(常語)》, 정후숙(鄭厚叔 후숙은 정원(鄭原)의 자)의 《예포절충(藝圃折衷)》,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서 맹자를 비방한 말과 소동파(蘇東坡)의 논어설(論語說) 가운데 맹자와 달랐던 것들을 모두 자세하게 변박하였으니, 이것이 성인을 따르는 옳은 뜻입니다. 신은 이것으로써 그 귀결을 삼는 바입니다.
한(漢) 나라 이후로 《맹자》가 이미 《논어》ㆍ《중용》ㆍ《대학》과 경류(經類)에 병렬(竝列)되어, 어떤 이는 ‘겸경(兼經)’이라 하고 어떤 이는 ‘소경(小經 《중용》과 《대학》은 소경에 끼이지 않았으니, 당연히 다시 상고해야 함.)’이라 하여, 배우는 이들이 높이고 신봉할 줄 알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장(章)과 구(句)를 분석하여 그 뜻의 귀결을 밝혔으니, 이 길을 따라 수사(洙泗 공자의 연원(淵源)을 말함)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의 한 자리에서 맴돌거나 갈 길이 막히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인지 이 글이 밝혀질수록 사문(斯文)이 더욱 어두워져 양지(良知)의 학문은 고자(告子)에게 전수되고 노상(路上)에 들리는 말은 태반이 다 향원(鄕愿 실제가 없이 칭찬을 받는 행위를 하는 향인(鄕人))이다. 이하는 빠졌다. 오늘날 맹자가 입언(立言)해 놓은 뜻을 알고 현재 행사하는 가운데서 안택(安宅 인(仁)을 말함)에 머물고 정로(正路 의(義)를 말함)를 행하는 계제(階梯)를 삼으려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 윗구절은 삭제되었다 ……
아, 성인의 세대가 멀어지고 말씀이 인멸되어 향훈(香薰)과 성예(聲譽)가 모두 없어졌으니, 그 한 부분이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聖經)뿐입니다. 대저 칠서대전(七書大全)만이 단독 유행하면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려서 늙기에 이르도록 50책(冊)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 점 한 획도 하늘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여기고 한 글자 반 구절도 철칙으로 알아 스스로의 영명(靈明)한 지혜를 폐쇄하고 감히 따로 생각하거나 의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유(先儒)들의 주(注)와 소(疏)가 이미 기벽(奇僻)한 글로 되고, 후세 선비들의 논변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습니다. 이런 것뿐만 아닙니다. 3년마다 치르는 대비과(大比科)에서 명경과(明經科)로 선발된 자는 대체 무엇하는 존재들입니까. 토서(土書)를 전습하는 것으로 출세의 계책을 삼고, 음화(淫話) 따위를 표기해서 기억력을 도우면서 이를 ‘성령(醒令)’이라 칭하여 혼돈(混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시끄럽게 읽어대기만 하니, 신은 조정에서 이런 사람을 얻었다 해서 무슨 도움이 있으며, 이런 사람을 잃었다 해서 무슨 손실이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단(異端)의 해독으로 말하면, 후래에 노장(老莊)과 불씨(佛氏)가 가장 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본래 도교(道敎)가 없고 불교만이 신라와 고려에서 흥성하여 그 끼쳐진 해독과 기세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크고 높은 집들이 명산마다 들어앉고 범패(梵貝 불교)의 서적이 서가(書架)마다 가득 찼는데, 그 집은 그대로 두고 그 서적만을 소각시키라는 명령은 들을 수 없으며, 여러 능(陵 왕릉)을 수호하는 절과 후궁(後宮)들의 소원을 비는 집들이 곳마다 즐비하고 날마다 새로워져 가기 때문에 신이 한밤중에 통분해 하면서, 전하의 도를 잡으신 권병(權柄)이 행여 확고하지 못하신가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재앙과 복의 문이 여럿이라 생각하여 의심난 것을 우선 그대로 두고 요행을 바라시어, 마치 한 무제(漢武帝)가 방사(方士)들에게 빠져 참다운 도사(道士)를 만날 것을 바랐던 예와 같은 것이 아닙니까. 《시경》에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데 사특함이 없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여 전고에 뛰어나시니, 어찌 재앙과 복의 근원을 모르고 이처럼 현혹되시겠습니까.
지금 맹자의 글을 읽고 맹자의 도를 발휘하고자 하신다면, 성인의 경전(經典)을 밝혀 정학(正學)을 보호하고 이단(異端)을 종식시켜 사곡한 뜻을 끊어버리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생각해 보니, 성인의 경전이 밝아지지 못한 것은 전공(專攻)을 않은 연유요, 이단이 종식되지 않는 것은 학문이 밝아지지 않아서입니다. 대저 소경이 귀가 밝고 귀머거리가 눈이 밝은 것은 뜻을 하나로 하여 애써 노력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키[箕]나 갖옷[裘] 만드는 재주를 대대로 전습하고 수레바퀴[輪]나 수레틀[輿] 만드는 재주를 대대로 전해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漢) 나라에서 전문직을 두어 책임지게 한 것인데, 더구나 이치에 분명하지 못하고 말뜻에 자세하지 못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금지시켜 본받지 말라고 한다면, 백성들의 뜻은 더욱 의혹될 것입니다. 진실로 어리석은 지아비나 아낙네들로 하여금 석가(釋迦)ㆍ관음보살(觀音菩薩)의 말이 패망(悖妄)하다는 것과 윤회(輪回)ㆍ인과(因果)가 허황된 말임을 알게 한다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를 때리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거나 기욕(嗜欲)을 끊으라고 종용하며 머리를 깎고서 소나 돼지 같은 중들에게 절하라고 요구하여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전하께서 마땅히 명을 내리시어 새로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고 고금의 경(經)에 대한 학설을 수집하여 이를 회통(會通)하고 분별하게 하시며, 나머지 경전에도 각기 학과(學科)를 두어 전공의 효과를 책임지울 것이며, 따로 한 과(科)를 두어 벽불(闢佛)할 방법만을 연구케 하되, 논변(論辯)이 명확하고 의논이 절실한 자를 높은 등급에 두며, 그 중에 정미하고 순수한 것을 뽑아 한 책을 만들어 팔방에 간포(刊布)하여 각기 그 쌓인 의혹을 풀고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추맹씨(鄒孟氏)의 평생 고심이 후세에 와서 펴지게 되어 대도(大道)를 천양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아래 대문은 삭제되었다.
* 맹자책 : 정약용이 27세 때인 1788년 도기유생(到記儒生) 추시(秋試) 및 초계 문신 친시(親試)에 써낸 대책문이다. 《맹자》의 저자가 누구이며 그 핵심 사상은 무엇이고, 《맹자》를 널리 보급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1] 《맹자》의 외서(外書) 4편은 : 지금 전하는 《맹자》 7편은 내편(內篇)이고, 외서 4편은 성선(性善)ㆍ변문(辯文)ㆍ설효경(說孝經)ㆍ위정(爲正)을 말한다.
[주2] 염희헌(廉希憲)이 …… 호칭받았으니 : 염희헌은 원(元) 나라 사람으로 나이 19세에 궁중에 들어갔고 경사(經史)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 하루는 「맹자」를 읽다가 갑자기 세조(世祖)의 부름이 있어 책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세조가 책의 내용을 묻자, 그가 성선(性善)ㆍ의리(義利)ㆍ인폭(仁暴) 등을 들어 대답하므로 세조가 가상히 여기며 ‘염 맹자(廉孟子)’라 호칭하였다. 《元史 卷126》
[주3] 전당(錢唐)이 …… 직간(直諫)하였으나 : 전당은 명(明) 나라 사람으로 학행(學行)이 높았다. 하루는 태조(太祖)가 《맹자》 이루(離婁)하(下)에, 임금이 신하를 견마(犬馬)나 국인(國人)처럼 본다면 신하가 임금을 토개(土芥)나 구수(寇讐)처럼 본다는 대문을 보고, 이는 신자(臣子)로서 할 말이 아니라고 하고는, 맹자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키려 하므로 전당이 웃통을 벗고 화살을 받으면서 이를 직간한 일을 말한다. 《明史 卷139》
孟子策
王若曰孟子。孔子後一人。而孟子七篇。孟子之道所載也。
臣對曰。臣嘗謂聖賢之統。上焉而止于武王。下焉而止于孟子。故其氣象。亦大槪相近。今若因孟子之書。而求武王之道。則亦庶乎其無悖矣。孟子之平生拳拳。卽百里興王之道。而其事則不過曰五畝之宅。樹以桑。雞豚之畜無失時。謹庠序之敎。申孝弟之義。數句語而已。以今觀之。何其至平易至淺近。而當時諸侯。聽我藐藐。卒不能擺脫於堅甲利兵之功。斯所以武王之後。王道遂熄。而末受命三字。終爲千古志士之恨者也。昔孔子謂韶爲盡美盡善。謂武爲未盡善。後學之於孔孟。固不能無韶武之分。而觝排異端。洞辨心性之原。誠乎神聖之亞也。不幸誹毀之論。始作於荀卿子非十二之說。而啄之噆之者。代有紹述。今聖學蓁莽。異說縱橫。孟子之道。急於闡揚。而淸問適及。臣敢不披瀝而對揚
哉。第二節刪
或以爲歷聘不遇。退而著書。或以爲沒後門人追記其言。二說何者爲是歟。論語只說仁字。而孟子竝言四德。春秋獨尊周室。而孟子勸行王道。所願學孔。而若相反者然何歟。善養浩氣。誠有發前未發之功。而只道性善。得無論氣不備之嫌歟。好說詩書。獨不引周易之辭。優入聖域。而猶未免戰國之習何歟。把定繩墨而有千仞自在之象。剪出綵花而乏造化無跡之功何歟。
自著追記之有二說者。臣以爲主自著之說者曰。莊周自稱莊子。晏嬰自稱晏子。則篇中之自稱孟子。不足爲追記之證也。主追記之說者曰。 膝文梁襄之薨。皆在後時。則不當預擧其諡。公都樂正之倫。皆嘗執贄。則不當尊稱爲子。二說皆近之。然趙岐嘗於外書四篇。以其文不弘深。不類孟子。刪而不注。則當時傳習之皆以爲自著可知也。竝擧四德之異於論語者。臣以爲四德本無二致。故孟子以事親從兄。爲四德之實。
而孔子以孝弟爲仁之本。由是言之。則孟子以四德合而爲仁義。孔子又以仁義合而爲仁。固未嘗有二也。勸行王政之異於春秋者。臣以爲孔子之轍環天下。其爲尊王歟。抑爲行王歟。嘗答哀公之問。規模節目。粲然一王之制。而一言未及於尊王。則夫子平日之志。槪可知也。春秋之大書特書。誠以其文則史也。或以爲孟子之時。周衰益甚。故勸諸候 行王者。臣未之信也。旣說養氣。而只道性善者。臣以爲孟子言性。主於天命。故固未嘗兼包氣質。而氣質之說。亦有窒礙。臣未敢以孟子爲未備也。說詩書而不引周易者。臣以爲論語禮記及先秦諸子。從未見援引易詞。如引詩書者。唯左傳國語。時有引述。斯不足疑也。入聖域而猶近戰國者。臣以爲聖人不必一套。堯舜湯武。氣象懸殊。恐不可以詞氣之遒逸。議論之頓挫。便謂戰國之餘習也。壁立千仞。以其氣象之峻截也。剪出綵花。以其光輝之有跡也。然此等議論。苟非親炙之人。不當妄有評品也。
或謂學之則無可依據而用力。或謂讀而後始知王道之易行。先儒之論。各有牴牾何歟。始置博士。昉於何代。請爲學科。出自何人。高宗手書屏風。可謂之篤好。希憲號稱孟子。可謂之善學歟。錢唐以死直諫。而先有節文之撰修。溫公起疑成書。而又有言之詆譏。皆可歷指詳言歟。此下缺
學之無可依據者。以其英氣發越。不見踐履之工也。讀而始知王道者。以其所言平易。不似權謀之說也。始置博士者。臣按漢文帝時。始置傳記博士。與論語竝列。而尙隷儒家。至梁隋之際。始進經類。時代固可考也。請爲學科者。臣按趙岐陸善經注解之作。肇於炎漢。而自是諸經通義。得引孟子以明事。謂之博文。則立科之論。當在是後也。高宗之手書屏風。臣以爲宋帝御屏之書。有契乎義利之辨。王霸之分。而說而不繹。不足多也。希憲之號稱孟子。臣以爲廉善甫雖有魁偉之姿。元世祖之號稱孟子。不過一時之獎詡。此不足述也。錢唐之以死直諫。臣以爲孟子草芥之說。蓋本於撫我虐我之文。亦以爲儆戒時君而發也。然詞氣
太激。終欠於敦厚勸忠之義。則高皇之直射祠版。錢唐之開腹受矢。臣不敢容喙於其間也。溫公之起疑成書。臣以爲司馬光疑孟十一篇。蓋疑七篇之文。非孟子自著也。然建安余允文又作尊孟辯七卷。其中李泰伯常語鄭厚叔折衷王充論衡之刺孟語及蘇東坡論語說中與孟異者。皆辨之極詳。此爲遵聖之正義。臣以是爲歸也。
自漢以來。已與論語庸學。竝列于經。或以爲兼經。或以爲小經。庸學不入小經。當更考。 學者知尊信矣。曁乎程朱。爲之句分章析。明其指歸。遵是路而溯洙泗者。庶乎無沿洄斷港之患。奈之何此書愈明。斯文愈晦。良知之學。傳法於告子。塗聽之說。太半是鄕愿。此下缺。 今欲使眞知立言之旨。見諸行事之間。爲居安宅行正路之階梯。則其道何由。
上節刪〇噫。聖遠言湮。薰聲俱歇。而其或有一斑之可窺者。唯聖經耳。自夫七書大全之單行獨擅。生斯世者。童習自粉。不出乎五十冊圈套之中。一點半畫。認爲天造。隻字片句。看作鐵案。自鎖靈明。不敢思議。先
儒注疏。已成奇僻。後儒辯駁。咸歸亂賊。不唯是也。三年大比。其所薦拔於明經之科者。誠何人哉。土書傳習。作爲家計。淫話標籤。號稱醒令。混沌未鑿。哇吹徒聒。臣未知朝廷之上。得此人何所補。失此人何所減耶。至於異端之害。後來唯老佛爲首。然我國本無道敎。惟佛敎盛於羅麗。遺毒餘烈。至今未泯。宏宮邃宇。盤據名山。梵書貝文。充塞棟宇。廬居火書之令。已矣莫聞。而諸陵守護之寺。諸宮發願之堂。在在相望。出出愈新。此臣所以中夜憤痛。不能無疑於大聖人操道之柄。或不能堅確無移也。抑將以爲禍福多門。姑存疑以僥僥。如漢武帝羇縻方士。冀遇其眞之爲也。詩云豈弟君子。求福不回。殿下聖學高明。度越千古。豈不知禍福之原本。而眩惑若是哉。今欲讀孟子之書。而闡孟子之道。則亦不外乎明聖經以衛正學。熄異端以絶邪志。然臣嘗思之。聖經之不明。由不專也。異端之不熄。由不明也。蓋矇瞍精於耳。聾聵精於目。以其志一而力會也。故箕裘代襲。輪輿世傳。斯漢氏所以責之以專門也。
何況理有所不明。語有所不詳。而禁民勿效。民志愈惑。誠使愚夫愚婦。皆知釋迦觀音之爲悖妄。輪回因果之爲幻誕。則雖日撻而求其棄親絶嗜。髠而拜牛豕。將不從也。今宜丕降明命。創置五經博士。蒐羅古今經說。會通而辯明之。其餘經傳。各立學科。以責專治之效。另立一科。專治闢佛之法。辯說明覈。議論剴切者。置之高第。採其精粹。裒成一帙。刊布八方。使各開其蔀惑。克反正軌。則鄒孟氏平生苦心。得以展布於後世。而其於闡揚大道。蔑以加矣。下節刪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