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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귀신 축사(逐邪)/ † 귀신 축사와 방언 기도에 대하여(4)
행2:4절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니라”고 말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께서 나를 인격적으로 완전히 지배하시는 것을 말한다. 곧 성령께서 나를 주관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령 충만 했던 초대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위의 말씀을 잘 읽어보라! 이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만 방언이 나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과거에 방언을 했던 사람도 성령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방언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충만치 않다는 것이다. 곧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을 때 계속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뜻은 방언을 말함으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방언을 말한다는 뜻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훨씬 더 많이 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나에게 늘 도전이 되었던 말씀이다.
고전14: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한다.
성령은 사람들의 지식에 의해 제한받지 아니하신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적인 요소이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제어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것이다.
막16:17절에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한다.
귀신을 쫓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이 같은 믿음의 수준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으로 귀신을 쫓을 뿐만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표적들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우리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멸시를 받아야 하는 일이라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고전14:2절에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말한다.
고전14:28절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모두 알아듣는 것이 아니기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말하고 없을 때는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을 말할 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지만 금한 적은 없었다.
또한 “교회에서는”이란 말은 회중을 말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방언을 말할 때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말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전14:14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생각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누가 인사하려는 마음으로 방언을 한다고 하여 그 말이 “안녕하십니까?”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자기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단 한마디도 방언으로는 안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을 하는 것은 자기가 방언을 하면서 자기 생각에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것을 말한다는 뜻이다.
방언은 자기 영이 기도하는 것이므로 생각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통역이 나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방언을 하는 동안 마음에도 생각이 떠오른다. 이 언어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곧 지식에서 생각과 마음으로 그리고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식에서 오는 마음의 생각은 어떤 사람과 마주쳐 인사를 했는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으나 한참 후에 ‘아! 우리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었구나!’하고 생각이 낫다고 하자.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금방 마음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한참 후에 떠오르는 것은 지식에서 마음의 생각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있어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우리가 방언으로 말하게 된다. 그러다가 또 마음에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면 말로 기도하게 되는 것을 사람들은 방언 통역한다고 잘못 알고 있다. 귀신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방언은 영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으로 기도하면 혼, 곧 생각, 감정, 의지가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귀신을 쫓는 믿는 이들은 귀신 축사는 성령으로 하는 것이므로 자연적으로 방언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방언은 우리 영에 대해 얼마나 분명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특히 육신의 신경 계통(신경 계통은 혼과 몸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한다)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성령으로 순간에 쫓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 주님의 능력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지식과 이론과 지혜는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나 일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언제나 말해왔던 바로 그 성경의 구절들이 예수님의 영을 통하여 해석될 때, 귀신은 드러나고 회중은 고질병에서 치유되고 생명으로 충만하기 시작한 것이다.
막1:27절은 “이는 어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은 매주 교회를 나가 설교를 듣게 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성령의 통로가 되지 못하므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능력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역자의 자격이 없는 인본주의적 사역이 오늘날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이요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즘 나사로 가정교회의 나와 가족들은 창세기 연구를 끝내고 로마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가족들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으로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 건축 기간이 수십 년이나 걸린 대역사였다. 노아는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날에 세상에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기가 만든 방주가 그때에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오리라 굳게 믿고 방주의 건축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태도이다. 노아가 수십 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한 번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순종했던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의 믿음이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 어느 기간동안만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오며 또 그 후세대가 왔다 가며, 그리고 어떤 나라가 존재했다가 없어지고 또 다른 나라가 세워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노아는 방주가 다 지어질 때까지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지배하게 했으며 그 말씀의 교훈에 따라 계속 움직였다. 아마도 노아가 하던 일들은 그 당시의 많은 사람에게 보기 드문 조롱거리였을 것이다. 큰 홍수를 대비하여 큰 배를 만드는 작업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노아는 배를 다 완성한 다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그의 가족들을 배안에 들어가게 했으며 다른 모든 짐승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각각 암수로 방주에 들인 후 문을 닫았다. 그 후에도 곧 비가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거나 혹 유혹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칠 일이 지난 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비는 높은 산을 덮어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결과를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세례라고 말한다(벧전3:20-21).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가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세례는 하나님과 복음으로 연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9:1-17절에서 창1:28절과 똑같은 복을 내리셨다.
막연히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복음으로 연합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고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작업해 온 노아를 높이셨다. 그리고 노아에게 그 보상으로 생명을 주시고 그의 가족 전부를 구원하셨다. 수십 년 동안 순종의 결과로 그들은 최후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했다. 각 지파에서 뽑은 훈련되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든 그들을 데리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그들을 주목하셨다.
숫자에 관계없이 몇 번이고 하나님이 행동하라 명하셨을 때 그들은 그대로 행동했으며, 강을 건너라 명하셨을 때 건넜고, 성을 돌라 하셨을 때 성을 돌고 또 돌았다. 아무런 표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말씀대로 순종했다. 마지막 날 일곱 번 성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은 평지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수6:15-20).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지기를 바라시며, 그 가운데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시고 또 사용하려 하신다. 때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의심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굴복시킴으로 하나님의 생각에 복종케 하고 그분을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혼, 곧 생각, 감정, 의지가 하나님을 좇아 협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승리하게 만들 것이다. 여호수아는 자기의 군대보다 약 다섯 배가 넘는 적군과 격전을 벌였다. 적군은 훈련이 잘된 군대였으나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저 연령 별로 뽑아낸 별로 훈련받지 못한 군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적진을 향해 갔을 때 많은 활을 쏘지도 않았는데 적군의 많은 수가 길에 쓰러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신앙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가는 골짜기가 있다. 물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의 순종하고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흐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로 그의 모든 계획에 대한 약속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귀신 축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만이 성령의 통로가 되는 조건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갈 때 오직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12:49-50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하나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임을 안다”라고 하셨다.
우리의 신앙은 지배하는 이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이 자신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의 열심보다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열심이 지배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이 지배해야 하는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을 드러내는 책이다!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요14:26). 또한 성경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요15:26).
아버지도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님 자신도 예수를 증거한다고 말한다(요8:18). 신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요5:39).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지 다른 수단으로는 알 길이 없다.
교리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묶어두고, 그것만을 진리인양 따르게 하는 것은 성령의 흐름을 제한하고 훼방하는 마귀적인 행태인 것이다. 태양을 통하여 태양을 보는 것같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일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르♡♡♡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방언으로 성령충만이 드러나는 삶이 되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