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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려면(14) -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시다!’ [롬14:7-9]
고대 철학자들은 늘 이야기하며,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 할 일이 없다보니깐 그냥 말장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 또 깊은 사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을 서로 나누고, 논쟁하고, 답을 찾아가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심오하게 여기며, 추구하고 찾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삶이 다한 이후에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조용기 목사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의 인생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았다’고 종종 죄인으로 살아갔던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주의 백성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보다 ‘누구를 위해 사는가?’를 깨닫고,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은 주인되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디 피조물을 창조주를 위해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 꼬임에 빠져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하며 창조주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주시며 찾으시던 주님을 외면하며 회개치 않자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피조물인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편의와 자랑거리, 유희를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셔서, 사랑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의 대한 답이 바로 오늘 제목입니다.
특별히 7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해석이 불안합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더 나은 해석을 해보면 ‘우리 중에 아무도 스스로에 의해 사는 자가 없고 스스로에 의해 죽는 자가 없도다’
즉, 스스로 존재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며, 영원히 살게하시는 그분과 함께 할 때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을 믿습니까? 아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물론 부모님을 선택할 순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모든 크고 작은 것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너무 어려서는 부모님께서 선택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 시기가 오면 먹는 것을 선택하고, 입을 것을 선택합니다. 저희 예진이는 요새 얼마나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선택하는지, 한동안 저희 아내와 옷 때문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아마 고학년이 되고, 청소년 시절이 되면 더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며, 청년(성인)이 되면 대학을 갈지, 취업, 직장, 누구와 만나 결혼할지 등등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들이 전부일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영접할지 거부할지도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개인이 선택하는 영역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무엇을 선택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한 근거와 이유입니다. 따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멘??
그것이 바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성도의 삶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된다면? 곧 주인 되신 예수님과 함께 주님이 책임지시며! 요한복음 10장 10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것들을 더 누리게 되는 행복한 인생인 줄 믿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 행복한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14:13]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방금 읽은 13절 이전 로마서 14:1-12절에서 말하는 요지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판단하지 말라고 했을까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쓸때에 두 부류의 성도로 나뉘어집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자! 그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오늘 읽은 성경에서의 믿음은 어떤 사람의 믿음(예: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구원의 믿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어떤 일을 하게 하는 확신! 믿음에 따라 실천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당시 두 부류는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음식에 관련된 논쟁과 날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에 관한 논쟁입니다. 핵심은 율법입니다. 한쪽은 율법에 관련되어 음식을 구별하여 채소만 먹어야 한다!, 율법에 따라 구별된 날과 절기를 지켜야 된다는 된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한쪽은 이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고기도 먹어도 된다! 무엇이든 먹어도 괜찮다! 그리고 꼭 안식일에만 예배해야하나?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이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예배해도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가지 주장에 어떤 주장이 맞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경에 기록된 부정한 음식이 있는데 먹어도 될까요? 구별해야 할까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 아니다! 성령을 통해 자유를 주셨는데 뭐가 문제냐? 자유롭게, 은혜안에서 할 수 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은 사라진 것이 아닌, 예수님으로 완성이 되었단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5절에 기록된 것처럼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 중에 담배는 피워도 되나요? 술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셔도 괜찮지 않나요? 이성과의 관계는 어느정도까지 괜찮나요? 이런 여러가지에 대한 생각과 행동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을 드렸나요? ‘하나님께서 과연 이것을 기뻐하실까?’ 오늘 이것과 연결이 됩니다. 바로 ‘믿음에 따라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 종종 논란이 되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일날 일을 해도 되냐? 안 해야 하냐? 주일날 직장문제로, 시험으로 인해 빠져도 된다? 안된다? 뭐가 맞을까요?
1998년 타이거 우즈가 그의 첫 마스터스 대회에서 우승한 후 명성이 치솟습니다. 그래서 마이클 조단과 골프 경기를 하기 위해 한 지역에 갔습니다. 그리고 루카스라는 청년에게 캐디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루카스는 주일날 예배를 빠질 수 없기에 그 엄청난 기회를 거절합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해 했고, 누구도 그러한 선택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예배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루터 – ‘크리스천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모든 것에서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다. 또한 크리스천은 모든 것에 종속되는 가장 의무에 충실한 종이다.’
예배를 사모하고, 참석하기 위해 큰 제안을 거절한 것은 청년의 믿음입니다. 설령 그가 캐디를 봤다해서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배를 사모함으로 인해 그 증거, 행함으로 그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판단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서로를 사랑함으로 이해하고, 용납하며,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지만, 판단하여 나눔, 분열은 마귀의 공격임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13절에 ‘다시는 판단하지 말라’고 1-12절의 말씀을 요약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7:1-2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결정은 누구의 권한일까요? 결단코 저와 여러분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심판자이고, 판단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 여겨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정죄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주인되신 하나님께 서로 맡기며 때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태도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공동체를 분열하는 판단은 하나님께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서로 비판함으로 인하여 분열이 되고 파괴된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솔히 여기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각자 입장을 주장하다보니 분열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 누구든지 서로 판단하며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이 하면 문제고 내가 하면 괜찮다! 남이 침묵하면 생각이 없고,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 것이다! 남이 자리를 비우면 노는 것이고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것이다!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많습니다.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유별나다하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면 간절한 기도라고 말합니다. 남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기복 신앙이다 하고, 내가 하면 믿음이라 합니다. 남이 헌금을 적게 하면 인색한 것이라 하고, 내가 적게 하면 과부의 엽전 두 닢과 같다며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남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나 계신다는 성숙한 신앙 때문이라며!!! 남에 대해선 칼 같으면서 자신에 대해 관대한 모습들이 교회에 왜 그리 많은지요,,,
그렇다면 판단 안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남을 비판하기보다 자신을 항상 돌아보면 됩니다. 성숙한 신앙으로 끝까지 하나됨을 고집하고, 형제를 사랑할 때 결단코 판단은 사라지고, 분열의 영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판단보다 사랑이고, 성령으로 인한 하나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을 주장하기 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하나 됨’ 아니 하나됨을 지키는 것, 끊임없이 하나를 위한 서로의 희생, 섬김, 사랑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판단하지 않고 성숙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집중해야 합니다![롬14:17-19]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믿음이 강한 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제사상에 차린 음식을 먹어도 되나요? 먹으면 안되나요? 이것 가지고도 교회안에서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상 앞에 놓인 제물도 아무것도 아니다! 먹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 내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으로 시험에 든다면, 그가 믿음에 흔들림이 온다면 나는 먹지 않겠다!
고전8장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 사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려면?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화투를 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놀이입니다. 단 거기에 돈이 개입되어 서로가 욕심을 부리고 다툼이 난다면 그것이 문제 아닐까요? 서로 하나되기 위한 게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여 그것으로 인하여 참여한 이들이나, 바라보는 형제들이 시험에 든다면? 절제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처가 식구들이 모이면 윷놀이를 자주 합니다. 실제로 돈을 걸고 합니다. 윷놀이를 할 때 분위기가 장난 아닙니다. 누군가는 돈을 땁니다. 그런데 가족이 불화할까요? 아닙니다. 돈을 딴 사람이 식사를 사고, 모자라면 그 사람이 더 내야할 지경입니다. 물론 순간 돈을 잃은 애기들은 그것도 모르고 울고불고 난리가 나긴 하지만,,, 만약 이런 가정의 분위기가 아니라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집중하라는 것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먹냐? 어떤 행위를 하냐 안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에 우리들의 행동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율법으로 얽메여서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형제가 연약한 믿음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 절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우리의 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단단하게, 건강하게, 확장되어 세워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필리핀 세부에는 라프라프 동상이 있습니다. 1521년 4월27일 마젤란은 막탄 섬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막탄 섬의 추장 라프라프의 목숨을 건 항거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라프라프는 유럽의 침략자를 막은 민족의 영웅입니다. 그런데 같은 곳에 마젤란 기념비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지구를 항해한 모험가를 기념한 동상입니다. 이렇든 마젤란은 한쪽에선 위대한 모험가이지만, 한쪽에선 침략자입니다. 바라보는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라도 평가가 전혀 상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착한 사람일까요? 라프라프? 마젤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 판단을 맡겨야만 합니다. 주님이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착한 사람은 그냥 다 져주고, 들어주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하고 잘되기 위해 힘을 써야만 합니다. 착하게 사느라 돈도 쓰고, 시간도 씁니다. 그러다보니 시간도 줄어들고, 돈도 모으기 힘들어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합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에게도 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착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것입니다.
이 착함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착함입니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그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때론 절제하며, 참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평강’은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수평적인 조화입니다. 이처럼 ‘의’와 ‘평강’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서로 수평적인 조화를 이룰 때에 ‘희락’이 주어짐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18절의 말씀처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아멘!
이 모든 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의의 모습으로 살게 하시며, 평강을 이루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희락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 동두천순복음교회에 넘쳐나게 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에 집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3.무엇이든 믿음으로 좇아 행해야 합니다![롬14:22-23]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따라해볼까요?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아멘? 반대로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죄가 아닌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죄가 아닌 의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사람을 만들고, 올바른 가치관이 올바른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있지만 때로 그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조금씩 타협하고, 조금씩 양보할 때가 있습니다. 왜요? 조금 더 이득을 보려고,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일이 조금씩 반복되면 믿음이 변질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했습니다.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을 지경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가보아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 가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부자는 계속해서 걸었고, 그러다 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것 보세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마침내 죽고 말았어요.”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거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야.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는 거란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거나 꺼림직한 행동, 일을 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믿음에 따라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반듯하게 세우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양심과 믿음대로 살라 그 사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지켜나갈 때 하나님의 복 안에서 살아갈 줄 믿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조용기 목사님을 통해서 생겨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인 저게 늘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던 가정에 믿음 좋은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 저희 가정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려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되어서는 동두천순복음교회 좋은 교회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주셨고, 그 중 둘째는 부활의 기쁨까지도 깨닫게 하시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성도를 만나게 하시며, 기쁨으로,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도록 더 많은 좋은 것으로 베푸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예배 전에 믿음의 고백, 장자권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말이라고 하는 단순한 훈련이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십니까? 죄송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목사가 하라니깐 하시나요? 그러면 그런 분들에게는 절대 그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고 선포하면 믿음대로!! 아무리 불가능해보여도 하나님께서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일본 MK택시는 독특한 경영으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MK는 일반택시보다 요금이 10% 저렴하지만 서비스는 최상이다. 교토시민들은 이 회사를 '교토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2013년에는 40명의 신입사원을 선발하는데 응시자가 무려 8천명에 이르렀다. MK는 대졸 운전자들을 채용해 학사 운전자도 양성하고 있다. 1960년 택시 10대로 출발한 MK택시는 현재 34개의 주유소와 수백 대의 택시를 소유한 최고의 운수회사로 성장했다.
이 회사의 주인인 유봉식. 태식 형제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성경에서 경영의 비결을 배웠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라" 이들 형제는 운전자를 가족처럼 섬기며 화목에 주력했다. 그 결과 운전자들은 최고의 서비스로 최대의 수익을 올렸다. 그들은 지금도 기름때가 묻은 옷을 입은 채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믿음대로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도 잘 되게 하십니다. 물론 어떤 이는 복음을 위해 가난하게 살기도 합니다. 때론 질병을 안고 살기도 합니다. 수많은 오해를 받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과 행복안에 살아갑니다.
저보다 무려 20년이나 늦게 예수님을 만난, 30대 후반이 되어서 예수님을 만난 한 누님은 지금 선교사가 되어 방글라데시아에 가신지 5년이 넘어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귀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비량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후원받는 작은 선교금으로 그 땅에 있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능인 수학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합니다. 8월에 온 편지에는 과격한 대중교통으로 인한 사고, 불편함, 불법을 저지르는 수 많은 경찰들과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나라를 떠나지 않고 감사하며 성령의 불을 기대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왜 이러한 삶을 살아갈까요? 쾌적한 환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형편에 처해질 것도 없고, 있는 돈은 다 쓰고, 하루하루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안해질 것이 분명한데 왜?? 이런 바보짓을 하고 있나요? 아마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교사님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사는 것임을 깨닫고, 그것이 행복한 인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주의 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요? 다시는 판단하지 말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집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십시도. 그것이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진리임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