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Sweet Home ♣ "즐거운 나의 집" Words by John Howard Payne 작사 : 하워드 페인 Music by Sir Henry Rowley Bishop 작곡 : 핸리 비숍
.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아프리카 튀니스 (Tunisia)에서 사망했다.
. 그가 죽은 지 31년이 지났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이송해 왔다.
. 31년 만에 그의 시신이 군함으로 뉴욕에 돌아오게 되던 날,
. 항구에는 미국 대통령, 국무위원, 상원위원들과 수많은 국민들이 나와 모자를 벗고 조용한 귀국에 환영과 조의를 표 했다고 한다.
.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며 또 무슨 업적을 남겼기에 이처럼 추앙받았던 것일까?
. 그는 고향과 고국을 사랑하며, 피를 같이한 부모형제 있는 허름한 내 집을 그리워하고, 구차해도 행복한 내 집을 노래하며 수많은 희곡과 시(詩)를 남기고,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 작사했기 때문이며, 또한 문화와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보물. 그것은 바로 가정인 것이다.
. 그가 1851년 3월 3일 C. E. 크라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한 얘기 같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것이오."
라는 글이 비통하게 적혀있었다.
. 그는 이 편지를 쓴 1년 뒤 튀니스(Tunisia)에서 집도 없이 거의 길가에 쓰러지듯 이 세상을 떠났다.
. 그리고 31년이 지난 1883년에서야 고향인 워싱턴의 오크 언덕 공동묘지(Oak Hill Cemetery)에 안장됨으로써 죽어 서야 편히 쉴 곳을 얻게 되었다.
<하워드 페인이 안장되 있는 워싱톤 DC 근교 오크 힐 공원묘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 영국 작곡가 헨리 비숍 경(Sir Henry Bishop)이 작곡한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의 첫 부분 가사이다.
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한 비숍 경은 헨델이 죽은 지 7년 후에 태어났으며 오페라, 음악극, 발레 등 많은 극장 음악을 작곡하였다.
. 그런데 지금은 그의 많은 작품들이 잊혀졌고 몇 곡만이 연주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곡이 '즐거운 나의 집' 이다.
. 이 노래는 작곡가인 비숍의 조국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 해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 이처럼 단순한 화성을 가진 멜로디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 단순한 발라드(ballad)로 전해지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의 멜로디는 1816년에 극장용 음악인 음악극(musical drama) '누가 아내를 원하는가?(Who Wants a Wife?)'에 맨 먼저 선을 보였다.
. 이 곡은 미국 시인 패인(John Howard Payne)의 대본에 작곡한 오페라 '밀라노의 아가씨 클라리(Clari, The Maid of Milan)'의 주제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 그 후 패인이 개작한 가사와 함께 이 노래가 유명해 졌고, 비숍 경 자신이 멜로디를 그의 서곡 '즐거운 나의 집(Home,Sweet Home, 1829)에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Donizetti)의 오페라 '안나 볼레나(Anna Bolena, 1830)' 에서 주제선율(leading motif)로 사용되었다.
. 또한 이 곡은 매우 감동적인 일화를 가지고 있다. <남북전쟁에서 울러퍼진 'Home, Sweet Home'>
. 남북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억되는 1862년에 있었던 버지니아의 레파하녹크 강(Rappahannock River) 전투 때의 이야기이다.
. 이 전투에서 남군과 북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며 싸웠다.
. 낮에 치열한 전투를 한 후 밤이 되면 양 진영에서는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매일 밤 각각 음악회를 열었다. 그런데 북군 군악대에 의해 연주된 음악은 아주 특별했다.
. 그 음악은 흔히 대단한 곡으로 인정된 곡도 아니었고, 그 날의 연주가 특별히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 그저 단순하기 그지없는 멜로디가 그 밤 조용히 북군 진영에 흘러 나오고 있었고, 그 때 그리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며 쉬고 있던 군인들이 하나 둘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oh, there's no place like home!
. 이 멜로디는 남군 진영에도 울려 퍼졌고, 그리고 고향을 그리 워하고, 부모를 그리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던 군인들은 강을 헤쳐 서로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은채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서로를 안고 손잡으며‘즐거운 나의 집’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서로를 찔러 죽이며 대적하였던 이 곳은 조국과 동포애로 남아 고향의 평화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준 것이다.
. 이처럼 Home, 즉 내 집과 가족은 사랑과 기쁨, 평안함과 포근 함을 안겨 주며, 세상에서 어떤 좋은 것이 유혹해도 바꿀 수 없고,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그 집과 가족을 생각하면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 또 집과 가족을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도 부드럽고 넉넉해 지게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 집이 금전적으로 풍요로워야 평안함과 포근함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다리 아래에 있는 초라한 거지의 집에서 흘러 나오는 웃음소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듯이, 가족은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과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우리에게도 음악교과서에는 빠질 수 없는 곡으로 만인이 알고 있는 이 곡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럼 링컨(Abraham Lincoln)과 그의 부인이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 평생 독신으로 살아 혼인을 통한 가정의 즐거움을 경험한 적이 없는 그가 200년 가까이 미국 시민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는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유니언 대학의 존 하워드 페인을 기념하는 정문 'Payne Gate'>
[ John Howard Payne ] ( 1791 ~ 1852 )
. 존 하워드 페인은 1791년 6월 9일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 14세 때부터 첫 작품을 쓰기 시작한 존 하워드 페인은 뉴욕에 있는 유니언 대학(Union College)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갑자기 가정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졸업을 하지 못하고 1813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 그는 영국에서 1년간 머물면서 돈을 벌기로 계획한 것이 그만 22년간 영국을 떠나지 못했다.
. 영국 런던에서 잠시나마 성공이 보이는 듯했으나 존 하워드 페인의 삶은 사실상 방황이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려 봤지만 입에 풀칠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등 댈만 한 공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 1822년 마침 헨리 비숍 작곡가를 만나 그의 작품에 페인이 가사를 붙여 오페라 히트곡‘홈, 스위트 홈’을 만들어 첫해에 3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음악 출판사는 페인의 작품을 통해서1만 달러의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페인에게 돌아온 수익금은 불과 250달러에 불과했다.
. 이에 실망과 환멸을 느낀 존 하워드 페인은 1832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20년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안정된 삶을 살 수 없었다.
. 1842년 존 하워드 페인은 아프리카 튀니지(Tunisia) 미국 영사로 임명되어 10년간 활동하다가, 1852년 4월 9일 그곳에서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 1883년 3월 22일, 페인이 죽은 지 31년 만에 그의 유해가 뉴욕 항으로 봉환되었다. 제24대 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 Arthur, 1829-1886) 대통령을 비롯한 컬럼비아 대학 총장 등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모인 가운데, 65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홈, 스위트 홈' 연주로 뉴욕 항을 감동시켰다.
▶ 조국은 나를 잊지 않는다
.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국민을 결코 잊지 않는 미국,
. '내가 죽어 이국 땅에 묻혀도, 내가 포로로 잡혀도 조국은 나를 잊지 않는다' 는 자부심과 확신을 심어 준다.
. 미군은 전쟁에서 싸우다 포로가 됐거나 실종된 미군을 끝까지 찾아내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국가의 당연한 사명' 으로 여기는 것이다.
. 미국이 위대한 나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중 하나는, 그것은 자국민을 적극 보호하고, 그들의 국가를 위한 헌신과 영웅적 업적을 끝까지 추적하여 결국 미국 역사의 가치로 다듬 는다는 것이다.
. 30여 년 전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죽은 존 하워드 페인의 유해를 발굴하여 기어코 미국땅으로 봉환하는 미국은 위대한 나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 천안함 폭침 희생 장병들과 연평해전 희생자들에 대한 국방부 와 청와대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 심지어 지난 3월 26일 천안함 폭침 9주기 추모행사에 대통령이 불참했다. 한나라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당연히 이곳을 찾아 전사자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나라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추모 했어야 했다.
. 조국에 헌신한 국군 장병들은 대한민국의 영웅들이다. 어떻게 그들을 홀대할 수 있을까? 그들의 영웅적 헌신과 희생을 존경 하는 것이 위대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헨리 비솝 경(Sir Henry Rowley Bishop)> ( 1786 ~ 1855 )
.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Home, Sweet Home”의 작곡자인 비숍은 영국 출신의 작곡자이며, 1842년에 기사작위(Knight Bachelor)에 서임 되었다.
. 그는 1804년에 소품들을 발표했으며, 1806년에는 런던에서 발레곡을 상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 1810년에는 코벤트 가든 극장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임명 되었고 1813년에는 로얄 필하모니 협회의 설립자겸 지휘자 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였고 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고 수많은 음악 활동을 하였다.
. 비숍은 'Home, Sweet Home'을 작곡하여 오페라“밀라노 의 소녀”에 넣어 1823년에 초연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작은 1820년의 비숍의 민요집에 나와 있다.
. 곡은 소박하고 아름다움에 찬 멜로디로 가난하지만 내 집만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는 노래이다.
< 화가 '월터 댄디 세들러'가 그린 '홈 스윗 홈' > < Home Sweet Home (Painted by Walter. Dendy Sadler : 1854-1923)> "즐거운 곳에서는 날오라 하여도 내 쉴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 마치 이 노래가 흘러나올 것같은 분위기의 그림이다.
. 책을 보던 엄마도 인형놀이를 하던 막내딸도 차를 드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온 가족 모두 이모의 반주에 맞춰 피아노 앞에 모여 노래를 부른다. 한 목소리로 같은 노래를 부르는 가족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림이지요.
< 1914년 발매되었던 음반의 표지 >
< 배경음악 > < 즐거운 나의 집 / 해바라기 > ※ 아래 개별음악을 감상하실때는 위 음원을 닫아 주세요.
♬ 가곡 감상 ♪ < Home Sweet Home / Joan Sutherland >
. 1926년11월7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출생한 소프라노 가수 데임 조안 서덜랜드(Dame Joan Sutherland)는 시드니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1959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에서 도니체티(Donizetti)의 <루치아:Lucia>를 불러 세계 적인 프리 마돈나로서 인정을 받게된다.
. 그후 라 스투펜다(La stupenda / 위대한 인물)라는 별명과 함께 금세기 최고의 디바(Diva:유명 여가수)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 2010년10월10일, 8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1)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we may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즐겁고 화려한 곳을 다녀볼지라도 비록 초라하지만 나의 집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A charm from the skies Seems to hallow us there Which seek thro' the world is ne'er met with elsewhere
하늘의 안식을 나 찾아 보지만, 이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그런 곳은 만날 수 없네.
( refrain )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나의 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나의 집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나의 집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2) I gaze on the moon as I tread the drear wild, And feel that my mother now thinks of her child;
쓸쓸한 들판을 거닐면서 달을 쳐다볼 때 어머니도 이 자식 생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네.
As she looks on that moon from our own cottage door, Thro' the woodbine whose fragrance shall cheer me no more
어머니가 시골집 창문으로 달을 바라볼 때 피어있던 담쟁이덩굴 향기도 이제는 더이상 위로가 되지 못하네.
(3) An exile from home Splendor dazzles in vain; Oh, give me my lowly Thatched cottage again1
집을 떠나온 뒤, 헛된 영화를 쫓았건만 오, 다시금 나의 초가지붕 시골집이 새삼 그립구나
The birds singing gaily That came at my call: Give me them and that Peace of mind, dearer than all
그곳에는 새들이 흥겹게 지저귀며 나를 부른다 그런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 편하게 살고 싶구나
To thee, I'll return, overburdened with care, The heart's dearest solace will smile on me there.
그대여 나는 돌아가리다. 모든 괴로운 짐을 벗어 던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안위와 미소가 나를 반기리니
No more from that cottage again will I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이제 내 보금자리를 떠나 다시는 방황을 하지 않으리 아무리 초라한들 우리 집 같은 곳 아무데도 없어라!
< 즐가운 나의 집 > 김재인 역사 김은하 편곡 소프라노 정은숙
※ 김재인 씨가 개사를 한 것인데, 원문과는 약간 다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 뿐이리
< 후렴 >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 뿐이리
고요한 밤 달빛도 창 앞에 흐르면 내 푸른 꿈길도 내 잊지 못하리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디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 별 눈 뜨네
※ 소프라노 정은숙(2절생략)
그 집을 떠나 멀리 방황하네 또 다시 가고파 내 정든 고향집 새 소리 들리고 시냇물 흐르는 내 밖에 안식처럼 다시 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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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정의 달 오월을 맞이하여 "가난하지만 내 집만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 이라는 노래 올립니다. 즐거운 연휴 즐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