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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 | ||||
여진족 추장서 조선 건국공신으로 | ||||
우리는 오랫동안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왔다. 또 최근 들어 국인과 외국인이 혼인한 가정을 뜻하는 ‘다문화 가정’이 보편화됨으로써 단일민족이라는 특성이 사라져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오래 전 우리 역사에서 다문화 형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의 공주였고,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해야만 하였다. 또 처용랑이나 괘릉의 무인상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나, 이민족의 수많은 귀화와 복속 등을 통해 볼 때 한국사는 자의든 타의든 충분히 개방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여진족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이지란의 경우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의 처음 이름은 퉁두란(?豆蘭)이며, 남송시대 제일의 명장으로 꼽히는 악비(岳飛)의 7세손이자 여진의 천호(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는데, 천호는 처음에는 관할하는 민가의 숫자를 표시하였으나, 후에는 장수의 품계를 나타내는 말로 변하였다. 따라서 이지란이 1천 호를 거느렸다는 의미보다는 일정한 규모의 세력을 가진 부족의 추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지란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여 빛을 발하는 것은 이성계(李成桂)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당시 이지란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북청으로 이사하였으며, 이성계는 동북면병마사인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함흥에 살고 있었다. 이지란은 이성계의 출중함을 듣고 무예를 겨뤄보고자 이성계를 찾았다. 이성계는 흔쾌히 승낙하고 뜰에 쭈그리고 앉은 채 1백 보 앞에서 자신을 향해 활을 쏘라고 하였다. 평소 활솜씨가 뛰어났던 이지란은 이성계의 얼굴을 향해 화살 세 개를 쏘았으나, 이성계는 손으로 화살을 잡거나 몸을 낮추어 피하였다. 이성계의 비범함에 놀란 이지란은 곧바로 활을 내던지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하여 이지란은 비록 이성계보다 네 살이 많았으나 스스로 동생이 되어 의형제를 맺었다. 이어 이지란은 고려에 귀화하여 이(李)씨 성을 받아 이두란(李豆蘭)이 되었는데, 거주하고 있던 청해(靑海; 북청)를 본관으로 삼아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이성계는 자신의 처조카를 이지란과 혼인하게 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후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면 이지란은 항상 선봉장으로 선두에 나서서 공을 세웠다. 훗날 이성계는 이를 두고 “이지란의 말달리고 사냥하는 재주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지만, 싸움에 임하며 적을 무찌르는 데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며 이지란을 높이 치켜세웠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모두 활쏘기의 명수였다. 한 아낙네가 이고 가는 물동이를 이성계가 철환(鐵丸)을 쏘아서 뚫으면 이지란은 화살촉에 솜을 끼워 쏘아서 구멍을 막아 물이 새지 않게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들의 활솜씨는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할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380년 왜구가 삼남지방에 들이닥쳐 온갖 약탈을 자행하자 이성계는 삼도도순찰사, 이지란은 원수가 되어 왜구 토벌에 나섰다. 이때 15세의 왜군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는 중무장을 하여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었는데, 이성계가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벗기는 순간에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꽂아 살해함으로써 대승을 이끌었다. 이밖에도 이지란은 동북면 일대의 여진족 토벌, 함주에서 왜구 격퇴 등 여러 차례 전공으로 선력좌명공신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에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가담하였으며, 밀직사·판도평의사사·지문하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에 건주위(建州衛) 여진족 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진압하여 명나라로부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고, 이어 이성계를 조선의 태조로 추대한 공으로 참찬문하부사에 오르는 동시에 개국 1등공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이때 비로소 태조한테 이지란이라는 이름도 받았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태종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두 차례 일어나자 이지란은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나머지 북청으로 돌아가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하여 많은 살상을 한 것을 뉘우치고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안곡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는 부도가 세워져 있다. 한편 이지란은 조선 건국과 왕자의 난을 거치며 세 번씩이나 공신에 책록되었기 때문에 여러 번 영정이 그려졌지만 당시의 영정은 남아있지 않고 나중에 옮겨 그린 영정이 전해온다. 훗날 박세당이 이지란의 영정을 보고 남긴 시가 이채롭다. ‘한나라 장량과 당나라 위지경덕처럼[漢代留候唐鄂公]/ 재주가 용맹함과 지혜로움을 겸해 고래로 따를 자 없도다[才全勇智古難同]/ 화상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비슷하여 괴이하나[畵傳好女休相怪]/ 이것이 바로 인간 제일의 영웅임을 알겠도다[識是人間第一雄].’ 남으로 북으로 수없이 전쟁터를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운 용장의 풍모가 의외로 여성스런 모습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이지란은 가장 성공한 귀화인으로 평가된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이 그를 도왔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태종 때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선정된 사람은 이지란을 비롯하여 조준(趙浚)·조인옥(趙仁沃)·이화(李和) 등 단 네 명뿐이다. 그만큼 이지란의 공은 절대적이었고, 더 이상 이민족이 아니라 조선의 진정한 충신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청해백사당의 처지와 후손의 안타까움 이지란이 함경도 출신인 까닭에 청해이씨의 후손은 대체로 북청과, 평안남도 양덕군에 많이 거주하고, 남한 지역에는 그리 많이 살고 있지 않다. 그 중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오산시 가수동,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다. 오산 시가지에서 화성시 정남면으로 향하는 82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곧 성심학교·오산초등학교 등이 나란한 가수동이 나온다. 이곳은 이지란의 후손이 자리 잡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족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도회지로 떠나고 겨우 몇 집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지란을 모신 청해백사당(靑海伯祠堂)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오산초교 정문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200여 미터 오르면 조그만 고개를 만나는데 정상부에서 오른편으로 10여 그루의 소나무 숲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아 사당의 뒤쪽에서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고, 간단한 안내문이나 이정표 하나 갖추지 못한 데다가 제대로 된 진입로 자체가 없는 것 같다. 대로변에서 성심학교 옆으로 난 길도 마찬가지여서 마냥 방치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당에는 이지란의 영정과 함께 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음력 4월10일과 7월10일에 제향을 올리며 정초와 추석에도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사당은 본래 누읍동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어 가수동 오산변전소 자리로 옮겨지었고, 1969년에 변전소가 건설되면서 다시 지금의 위치에 건축하는 등 부침이 심하였다. 그런데 현재 사당이 있는 곳마저 택지개발지구에 편입되어 수용됨으로써 후손들의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보상도 그렇거니와 사당을 옮겨 짓는 문제로 문중 갈등까지 겪었고, 결국 용인으로 옮길 계획이란다. 수백 년 유지되던 동족마을이 해체된 것이나 시조의 사당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점,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등 모든 게 안타깝다며 긴 한숨을 내쉬는 이재홍(이지란의 19세손) 어르신의 눈가에 끝내 이슬이 맺히고 만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