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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병원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나신 병든 아버님의 유언을 이행하다.
2022. 1. 30일 이경용 올림
넷째 아들 경용이에게 남기신 아버님의 살아생전의 유언을 이행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 17세의 넷째 아들에게 남기신 유언
➀. 내 죽으면 저 어린 것들이 불쌍하다.(초등학생이던 어린 자식 3명을 부탁하셨다)
➁. 나 5월 6일날 죽는다.(임종 일을 알리셨다)
➂. 돈이 없어서 부모님이 묻힌 고향 선산에 갈 수 없으니, 공동묘지에 튼튼한 나무 말뚝을 깊게 박으라고 하셨다.(나무 말뚝이 없어지면 공동묘지에서 묘지를 못 찾는다고 하셨다)
1973년도에 아버님이 61세의 나이에 중병으로 전남대학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배나무 과수원과 시골 주택을 105만원에 팔아서 상계동에 집(70만원 정도)을 마련하고 아버님 병원비에 사용하려 하였다.
그런데 7남1녀의 장남인 큰아들은 가족 부양은 외면한 채 과수원 팔은 돈을 손에 쥐고 사라진 뒤에 전부 탕진해 써버렸다.어머님은 큰 충격을 받아 상계동 식당 안에서 통곡을 하였고 밤을 새우다시피 우셨다.
이경용도 수없이 괴로워하며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버님은 나이 18세에 홀홀 단신 일본에 건너가서 갖은 고생을 한 뒤에 짚세기 신을 신고 다닐 당시에 일본에서 고무신 공장을 하였고
1945년도에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자 고무신 공장을 처분한 큰돈을 가지고 귀국해서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얻은 큰아들을 황제처럼 대우해주고 애지중지 너무 많은 사랑을 퍼부어 잘못 키우신 아버님 때문에 일어난 집안 대참사였다.
아버님의 사촌 동생인 이황종 당숙께서 경용이에게 너의 큰형은 너의 아버님이 잘못 키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로지 큰아들! 큰아들!하며 사랑만 퍼부어..
아버님은 병원비가 없어 1973년 여름에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쫓겨났고, 이경용은 막걸리 배달을 중단하고 급히 전남 광주에 내려가서 아버님 옆에서 병간호를 하시던 외할머님을 모시고 돌아와야 하였다. 병원에서 쫓겨날 때까지 외손자를 기다리던 외할머님의 얼굴은 낙담과 괴로움으로 찌들어서 보기가 안쓰러웠다.
돈이 별로 없어 좌석권이 아닌 입석권을 구입하여 전남 광주에서 서울역까지 오는 기차를 탔고, 이경용이는 서서 오고
기차칸 사이에 늙으신 외할머니가 바닥에 주저 앉아 오는데 밤의 어둠 속에서외할머님의 흰머리를 보니, 슬프고 처량하고 왜 세상이 이런지 원망스러웠다.
강제 퇴원을 당한 아버님은 식당에 딸린 방안에서 스스로 앉지도 못했고 아버님의 대소변을 받아내던 어머님이셨다.
이경용은 막걸리 배달로 매달 약 54,000원의 큰돈을 벌었건만, 아버님의 치료 약값, 셋째형의 하숙비와 학비,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 3명의 학비와 먹고사는 비용을 먼저 우선해서 써버렸기 때문에
이경용은 본인의 야간 전수학교의 싼 학비마저 제때에 내지 못하자 담임이던 고** 선생님이 고등공민학교때도 수업료를 못 내더니 지금 또 못 내냐고 종례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큰소리로 화를 내며 말하여 정말 괴롭고 현실이 한탄스러웠다.
초등학교때는 남들이 부자라고 불렀던 정미소 집 아들이었고 먹는 것, 학비를 전혀 걱정을 안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먹는 것도 부실하고 죽도록 막노동을 해도 싼 학비조차 제대로 안낸다고 돈 재촉과 야단을 받을 정도이니,
늦은 밤 11시경에 집에 돌아오는 하교 길에 달 빚에 비친 배달 짐 자전거와 이경용의 몸댕이 그림자는 왜 그리 슬프고 처량한지 눈물이 쭉 흘러내렸다.
1974년 4월의 어느날, 막걸리 배달을 마치고 식당 집에 도착하니 병든 아버님은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너(이경용)는 다 커서 괜찮은데, 식당 안에 앉아있던 초등학생인 자식 3명을 가리키며 저 어린 것들이 불쌍해서 어떡하냐 하셨다.
이경용은 아무 대답도 안하고 듣기만 했는데, 아버님 자신은 곧 죽을텐데 죽은 후에 불쌍하게 살아갈 어린 자식 3명의 장래를 걱정하신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담한 현실이었다. 경용아 나 5월 6일날 죽는다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 대답없이 듣고만 있을 뿐이었고 헛소리를 하시나 싶었다.
또 그 다음에 또 그다음에 경용아 나 5월 6일날 죽는다고 했는데 알고 있냐 하셨다. 대답없이 듣기만 했는데 정말, 5월 6일에 돌아가셨다.
식당에 딸린 방안에서 아버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이 어린 자식들을 놔두고 나혼자 어떻게 살라고 하시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는 어머님의 슬픈 울음의 목소리가 식당 집에 울려퍼졌다.
만 49세의 젊은 과부가 된 어머님의 통곡소릴 듣고 있던 이경용은 너무 비참하고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울음도 안나왔다.
나 죽거든 공동묘지에 묻더라도 튼튼한 비석용 나무 말뚝을 깊게 잘 박아야지, 얇게 박았다가는 말뚝이 없어져서 공동묘지의 어디에 묻혔는지 영영 묘지를 못 찾을지 모르니 튼튼한 나무 말뚝을 깊게 박아야 한다고
그래도 제일 믿음직한 넷째 아들 이경용이에게 몇 번이고 신신 당부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 아버님의 유언을 받들어 나무 말뚝 대신에, 시멘트 비석을 만들었다.
돌 비석을 살돈이 없어서 사과 괘짝을 뜯은 나무 판대기로 틀을 만들어 그 틀안에 시멘트를 부어 비석을 만들었고 7남1녀의 자식들 이름도 써 넣었다.
막걸리 배달의 일당인 약 500원(1통당 5원 ⅹ 약 100통 배달)을 병들어 누워 계셨던 아버님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매일 드렸고 월급(1통당 13원ⅹ하루 약 100통ⅹ한달 일수)현금 봉투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갖다드릴 때마다 너무나 좋아하셨던 웃으셨던 아버님이셨기에
만 17세의 넷째 아들에게남기신 유언을 받들어야 하였다.
➀. 내 죽으면 저 어린 것들이 불쌍하다.(초등학생이던 어린 자식 3명을 부탁하셨다)
➁. 나 5월 6일날 죽는다.(임종 일을 알리셨다)
➂. 돈이 없어서 부모님이 묻힌 고향 선산에 갈 수 없으니, 공동묘지에 튼튼한 나무 말뚝을 깊게 박으라고 하셨다.(나무 말뚝이 없어지면 공동묘지에서 묘지를 못 찾는다고 하셨다)
이런 슬프고 비참한 과거를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이 글을 쓰니 눈물이 쏟아진다.
아버님이 한국 나이로 62세(1913년~1974년)로 세상을 뜨셨다. 영산포의 고향을 뜬지 5년(1969년 봄~1974.5.6일)동안에 넷째 아들 이경용만이 돈을 벌어 아버님과 어머님께 바쳐서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갔고, 셋째 아들의 전남 광주의 하숙비와 학비까지 댈 수 있었던 것이다.
큰 아들은 과수원 팔은 돈을 쓰느라 아버님 장례식에도 불참했고,둘째아들은 돈을 벌어 거의 갖다 주질 않았고, 셋째아들은 5년 동안 중고등학교(광주 서중 2년 봄~광주일고 졸업 1974.2월)를 다니느라 돈을 벌 수가 없었다.
이경용만이 나홀로 어린나이 13살부터 18살까지의 5년 동안, 정식 중고등학교를 전혀 다니지 못하고 그 10대의 나이에 소년 노동자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믿을 만한 자식은 넷째아들 이경용”이 밖에 없어서 죽기 전에 상기의 3가지를 “미성년자인 넷째 아들에게 사후일을 신신 부탁”하셨던 것이다.
이경용의 형 3명은 아버님의 유언을 지금까지 전혀 모를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에 넷째 아들 이경용의 정확한 나이는 만17세 7개월(1956.9.14.일 양력~1974.5.6.일)로 미성년자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2년(1974~1976년도)을 더 자전거를 배달을 하다가 그만두고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경용은 위로 형이 3명이 있었건만
소년기(나이어린 10대초반~19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소년 노동자(식당과 배달)로, 소년공(기와공장)으로 사춘기를 겪을 여유도 없이 힘든 노동일을 해야만 했던, 대가족을 부양하는 소년 家長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넷째 아들에게 임종일을 알려주시고 유언하셨던
➀. 나무 말뚝의 비석은 단단한 시멘트 비석으로 깊게 박아드렸고 후에 아주 좋은 돌비석으로 교체하여 드렸습니다.
➁. 죽음을 앞두고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자식 3명이 불쌍하다고 넷째아들에게 유언하셔서 동생 3명은 이경용이가 집 장만하게끔 도와드렸으니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은 특히 똑똑하지 못한 여섯째 아들(어머님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 딸을 낳고 싶은데 배속에 남자 아이는 유산시키려고 독한 한약을 먹어도 아이가 태어나 머리가 좋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셨기에이경용은 여섯째 동생이 막노동 일을 하지 않게 하려고,
돼지 사육 농장, 금세공 공장, 제과기술 학원, 일식요리 학원에 보내서 기술을 배우게 했으나,
도저히 기술 습득이 잘 안되어서, 동대문구 전농동 우성 아파트 41평을 2억1400만원에 팔은 돈 중에 2억의 큰돈을 여섯째 동생에게 잘 살라고 주었습니다.
1997년도에 2억원의 돈 가치는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 값이 1억5천만원할 때 였으니, 2억원이면 큰 돈이었습니다.
아버님의 살아생전의 유지를 잘 받들어 이행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시멘트 비석은 검게 변하고 자식들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아서이경용이가 나서서 멋지고 좋은 돌 비석으로 교체해드렸습니다.
지금 98세의 어머님께서 18년전인 80세 때에 묘지 걱정을 많이 하시길래,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4.5평 묘지 땅도 구입해놨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넷째아들 이경용이를 초등학교만 보내주시고 7년 동안을 식당, 공장, 자전거 배달하게 하셨어도 그 깊은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자식된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자전거 배달을 그만둔 어느날(1976. 9월)에 서울신문에 실린 국세청 5급을류 시험공고문을 보고나서 1달간 죽기살기로 공부해서 합격하여 1977.2월에 공무원이 되어중부지방국세청 소속인 청량리 세무서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식당에 계신 어머님께 합격소식을 알려드리니 어머님께서 감격하여 우셨습니다.
시험공고일(1976.9월)→시험일(1976.10월)→공무원 발령(1977.2월)까지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한날로부터 총 5개월만에 공무원이 될 줄이야, 막노동자였던 이경용이가 일사천리로 빠르게 공무원 신분이 되는 것은 정말로 기적이었고 하늘에서 지켜보시면서 아버님이 도와주셨나 봅니다.
1976년도에 1달 공부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1997년도에 2달 공부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는 자질과 67세의 나이에도 치아가 전부 좋아서 아버님과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복받은 유산입니다. 고맙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배나무 과수원을 팔은 돈을 가지고 사라졌던 큰아들은 이제 자식이 아니라고 넷째 아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넷째아들은 그런 큰아들을 용서해주었기에 혈육의 정으로 형제우애하며 살아갈 목적으로 큰돈 들여서 집까지 사줬지만 개과천선이 안되었습니다.
1996년 추석 명절날, 이경용의 집에서 넷째는 많이 도와주었는데 셋째 너는 큰형한테 도와준게 없다고 탐욕을 부리고 가족 분란의 싸움을 벌여서
집 밖에 나와, 큰형에게 왜 가족분란을 일으키냐고 했더니, 갑자기 넷째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겨 직장을 잃게 되면 경용이 너가 사준 안양 평촌 아파트를 팔아서 준다는 말을 해서
왜 그런 재수없는 이야기를 하냐 했는데 약 1달 뒤에 말이 씨가 되어 1996. 11. 5일날 재수없는 억울한 누명사건이 발생하여 직장을 잃어버렸습니다.
평촌 아파트를 팔아서 돈을 주지도 않았고 이경용이한테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지 왕래도 안합니다. 안보고 사니 불편한 일이 안생겨서 마음이 너무 편합니다.어머님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경용은 67세의 나이로,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부모와 형제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죄악(불효와 가정 파괴적인 과수원 돈 사건)을 저질렀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과수원 필은 돈을 몽땅 탕진하여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빌 붙어 살려고 가난에 빠진 식당 집에 돌아와서,
행패 사건(식당 칼 사건)과 수없는 불화를 일으킨 큰아들의 죄(형제가 아닌 웬수나 다름 없음)에 대해서는성당의 신부님이나, 사찰의 스님도 그런 형제는 가까이 하지 말고, 도와주지도 말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용은 이런 큰아들이 형제라고 형제우애하며 살기 위하여 너그럽게 완전히 용서해주고서 32평의 아파트를 사줬다는 것은 대한민국과 세상천지에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큰아들은 아버님의 지극한 일방적인 사랑만을 받았고, 어려서부터 정미소에서 생긴 큰 돈을 몰래 훔쳐 가서 물을 쓰듯 하던 버릇이 깊게 깊게 박혀 집안에 마지막 재산(과수원)마저 물 쓰듯이 탕진해버렸습니다.
아버님이 큰아들을 사랑만 했었지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도록 방치한 죄“입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최악의 불효와 대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악업(과수원 돈 사건)을 상쇄하고도 남을 선업(선행)을 쌓아야하건만,
큰아들은 현세의 악업(죄악)을 지고 살 운명인가 봅니다. 큰아들에게 집을 사 준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경용은 싸게 분양받았던 경기도 안산 주택지를 팔아서 큰 돈이 생기자 1969년초에 정미소가 부도났던 아버님의 살아생전의 빚을 이자붙여 1992년도에 갚았고, 2006년경에는 마지막 한집(국제양화점 서씨)의 빚까지 찾아내서 많은 이자(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채무 원금 2만원을 100만원으로 갚음)붙여서 전부 갚아드렸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넷째 아들이 빚을 갚아주어 발을 뻗고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하면서 너무 좋아하셨고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아버님이 받을 돈도 많았지만 돈을 갚는 사람은 없었고 그들 인생 몫입니다.
이경용은 아내와 단둘이만 상의해서 부모님의 빚을 갚았는데 적극 찬성해준 아내에게 한없이 고마웠습니다.학교를 못 다니고 식당에서 일할 때와 막걸리 배달할 때에 빚을 받으러 오면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당시 아버님과 어머님의 심정은 더 하셨을 겁니다.
살아생전에, 세상을 뜨시기 전에 아버님이 어머님께 말씀하시길, 죽으면 다시 환생해서 여자와 남자로 바꿔 다시 만나 살자했고
7남 2녀까지 낳아주었던 아내를 즉 이경용의 어머님은 지금 98세로 이경용 부부가 여생을 편히 모셔드리겠습니다.
살아생전 아버님과의 현세에서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낳아주고 키워주셔서 고마웠습니다.
2022. 1. 30일 이경용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