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이시비(孫李是非)
경주 양동마을에서 외숙인 우재(禺齋) 손중돈(孫仲墩)은 생질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가르치고 후원하였으나, 회재(晦齋)가 동방 오현(東方五賢)이 되는 등 대학자로 성장하자 여강이씨 문중에서 손중돈(孫仲墩)에게 배운 바 없다고 하여 시비가 일어 났다.
물을 건너는데 여강 이씨가 오만하게 나를 물 건너 달라고 말하자 손씨가 자네가 말을 놓으면 나는 손을 놓네 하고 하며 물 가운데 빠지게 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양동마을은 서백당과 무첨당, 관가정과 향단, 동강서원과 옥산서원, 서당 등 양 문중에서 경쟁과 주도권 다툼이 심하였다.
서백당을 삼현지지(三賢之地)라 하여 손중돈(孫仲墩)과 외손인 이언적(李彦迪), 후에 나올 현일을 위하여 딸들이 해산을 못하게 금지하고 있다.
● 양강시비(兩岡是非)
영남 성주 사도실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외손서(外孫壻)이자 곽재우(郭再祐)와 동서이며 남명의 성성자(惺惺子) 방울을 전해 받음 / 정인홍(鄭仁弘)은 경의검(敬義劍 : 칼)을 전수)과 퇴계(退溪) 남명(南溟) 문하 최대의 학자(學者)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과 후손(後孫) 제자(弟子)간의 우열 시비(是非)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회연서원에 합사하였다가 청천서원으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위패(位牌)를 독자적으로 옮김으로서의 시비(是非)가 일어남.
● 한려시비(寒旅是非)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질서(姪壻)이자 문인(門人)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후손(後孫)간 시비(是非)인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문(祭文)을 장현광(張顯光)이 쓰면서 문인(門人)이 아닌 질서(姪壻)라고 쓴 것을 가지고 장현광(張顯光) 후손(後孫) 제자(弟子) 측에서 문인(門人)이 아니라고 하여 정구(鄭逑) 문인(門人)에서 장현광(張顯光)은 제외되고 수제자는 웃갓 매원의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와 경기도 연천의 미수 허목에게로 정리된다.
장현광(張顯光)이 퇴계학설(退溪學說)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파문을 일으키고 제자(弟子)를 200명 이상 배출한 대학자였다.
● 회니시비(懷尼是非)
조선후기 제19대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을 말한다..
• 개 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 발생 동기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 [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 [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였다. 이 ‘신유의서(辛酉擬書)’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내용
1684년(숙종 10)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증 자신은 춘추관에 편지를 보내어 율곡(栗谷)은 입산한 과오가 있지만, 자신의 부친은 아무 과오가 없다고 주장하였다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함께 저술한 책인데, 1711년(숙종 37)에 유계의 집안에서 단독으로 간행하였고, 또 송시열의 제자 정호(鄭澔)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한 것 때문에 큰 물의가 빚어졌다.
결국 1716년(숙종 42) 7월에 숙종이 처분을 내려 송시열은 잘못한 것이 없고 윤증은 잘못한 것으로 판정하여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접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회니시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 병호시비(屛虎是非)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 발생한 류성룡과 김성일의 배향(配享) 때 위차(位次) 시비를 계기로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이 병파(屛派)와 호파(虎派)로 나뉘어 전개된 향전(鄕戰)으로,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의 배향 시 양인의 위패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경세의 자문을 받아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19세기 초반 류성룡과 김성일 등의 문묘 종사 청원과 이상정(李象靖)의 서원 추향(追享) 문제 등으로 병파와 호파가 대립하였다.
서원에 양인의 배향 결정이 순탄치 않아, 배향으로 결정된 후 가장 큰 난제가 양인의 위차 문제였다. 같은 배향이지만 동(東)·서(西)에 대한 인식상의 차등이 있었고, 위차에 따라 양인의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류성룡 계열에서 작위를 내세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김성일 계열에서 나이를 내세워 4살 위인 김성일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란 속에 영남을 대표하던 정경세(鄭經世)의 자문을 받아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두는 ‘애동학서(厓東鶴西)’로 결정되어 일단락되었다. 김성일 계열에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당시 정경세의 위치 등을 감안하여 그대로 따르면서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여강서원은 1676년(숙종 2) 중앙 남인 세력의 지원을 받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바뀌어 사액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류성룡 계열은 풍산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활동, 김성일 계열은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해갔다. 이런 이유로 류성룡 계열을 병파, 김성일 계열을 호파라 불렀다. 1796년(정조 20) 김성일과 류성룡 · 정구(鄭逑) · 장현광(張顯光)에 대한 문묘(文廟) 종사(從祀)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호파의 주도로 나이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 관철되었다. 이로부터 병파는 약 10여 년 동안 호계서원 출입을 하지 않았다. 1805년(순조 5) 이들에 대한 문묘 종사 운동이 다시 추진되는 과정에서 병파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면서 분란의 불씨가 제공되었다.
이후 1812년(순조 12) 호파에서 이상정(李象靖)을 호계서원에 추향(追享)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이상정의 추향을 통해서 호계서원이 이들의 거점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며 퇴계학파의 최대 계파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병파는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리는 등 반발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나서서 이를 중재하려고 하였으나, 병파는 정치력을 동원하여 호파를 압박하였고, 호파는 혈연, 학연, 지연을 동원하여 대응하면서 양자의 사이를 벌려나갔다.
양측의 시비를 보합하려는 노력이 고종 초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류성룡의 8대손인 류후조(柳厚祚)를 정승으로 임면하고, 안동부사에게 시비의 진상을 파악해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는 한편 보합을 위한 조정책을 거부하는 자를 적발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지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등 복잡한 정세로 인해 시행되지 않고, 1870년(고종 7) 8월 흥선대원군은 다시 안동부사에게 보합에 대해 지시하였고, 8월 27일 호계서원에서 호파의 유림 600여 명, 병파의 유림 400여 명이 모여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 때에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양측의 시비가 온존하는 가운데 2013년 5월 호계서원의 복원 사업을 계기로 경북에서 내놓은 중재안이 받아들여져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배향하며, 이상정을 서쪽에 배향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호락논쟁(湖洛論爭) 또는 호락시비(湖洛是非)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人物性 同異)에 관한 논쟁으로 호락 시비(湖洛是非)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權尙夏) · 한원진(韓元震)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그러나 권상하는 더 이상의 논변은 무익하다고 생각, 한원진에게 중지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는 두 차례의 왕복 논변을 끝으로 직접적인 논변은 없었지만 서로의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간의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 : 지금의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서(湖西 : 지금의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어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 칭하게 되었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은 대개 《중용》 경(經) 1장의 주희(朱熹) 주(註)의 “사람과 물(物)이 각각 그 부여된 바의 이(理)를 얻어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이 되었다.”에 근거해 인과 물이 모두 균등하게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은 대개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주의 “이(理)로써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수(禀受)가 어찌 물(物)이 얻은 바가 전(全)하리오?”에 근거해 사람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었지만 물(物)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호론과 낙론은 주희의 설(說) 가운데 두 가지씩을 중심적으로 자기의 설의 근거로 삼으면서도 모두가 다 나머지 두 가지 설도 모두 자기의 설에 합치되는 것으로 해석해 자기의 주장을 펴고 있다.
낙론은 성동기이(性同氣異)·이동기이(理同氣異)를 공안(公案)으로 삼아 인과 물의 성과 이는 같고 기가 다르다고 하면서 성즉리(性卽理), 이즉성(理卽性)로서 성과 이는 같은 개념으로 본다.
호론은 이절부동(理節不同)·이유편전을 공안으로 삼아 이때의 이는 일원(一原)의 이가 아닌 분수의 이라면서, 이 때문에 바로 성으로서 성즉리는 되나 이즉성은 안되며 성과 이의 개념은 같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과 물이 같은 것은 일원의 이고, 기뿐만이 아니라 분수의 이인 성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 뒤 계속된 호락 논쟁은 사제(師弟) 관계를 떠나서 호론과 낙론으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는 학술적 논쟁을 넘어서서 학파 또는 당파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