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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 (1.1km) - 천지연(윗길)산책로, 칠십리공원 - (0.8km) - 하논성당터 - (0.8km) - 하논생태길 - (1.8km) - 솜반내 - (1km) - 흙담소나무길 - (0.4km) - 후박나무가로수길 -(0.8km) - 홍로현현청길 - (0.3km) - 지장샘 - (0.3km) - 홍로성당터, 면형의집 - (0.9km) - 서귀복자성당 - (1.2km) - 서귀복자성당터, 6월항쟁기념비 - (0.8km) - 이중섭거리 - (0.4km) - 서귀포성당 |
하논성당길은 서귀포의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진 순례길이다. 걷는 내내 눈이 즐겁고 마음이 가뿐해지는 길로 서귀포성당에서 시작해 서귀포 신앙의 모태인 하논성당터와 홍로성당이 있었던 면형의 집을 거쳐 다시 서귀포성당으로 귀착함으로써 시작과 끝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하는 성찰의 길임을 알 수 있다.
아찔한 아름다움을 지닌 천지연 산책로를 지나 ‘살아있는 자연 박물관’이라 불리는 하논분화구와 서귀포 모태성당인 하논성당 터를 만나게 되고, 솜반내와 흙담소나무길, 후박나무가로수길 등을 거쳐 서귀포성당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면형의 집과 이중섭거리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순례길의 핵심인 하논성당터는 현재 공터로 남아있다. 하논은 제주어로 ‘큰 논’이라는 뜻의 ‘한논’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 논 성 당 터
서귀포 지역의 모태성당터다. 1899년 이곳(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에 하논공소가 설립되고 다음 해에 김원영 신부가 부임하면서 하논성당이 설립되었다.
1899년 5월 프랑스 선교사 페레 주임신부의 보좌 신부로 제주에 들어온 김원영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900년 6월 12일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에 4칸 초가집을 구입하여 하논 지역에 초가집 성당을 세운다.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성당인 하논성당이다.
김원영 신부는 한국인 사제중 7번째 서품을 받았는데 당시 31세의 젊은 신부로 ‘수신영약(修身靈藥)’을 저술, 의욕적인 선교활동으로 설립 당시 20명이었던 신자가 한 해만에 138명이 되고 예비신자는 620명이 되는 등 급성장하여 제주 산남 지역의 천주교회 정착에 기여하였다.
수신영약은 천주교 교리 특징, 천주교에 대한 제주민들의 의식, 제주도 풍습과 미신 등 사료 가치가 높은 총 43장의 글로 구한말 가톨릭과 토착종교(민간신앙)의 충돌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이러한 하논성당의 급격한 교세 확장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지역 토착 세력과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1901년 2월 이곳에서 1901년 5월 천주교인 309명(교회측 추정 500~600여 명)이 살해 당하는 제주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논성당은 신축교안 당시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으며 천주교와 민간인이 갈등이 심화되어 새로 부임한 제3대 타케(파리 외방선교회) 신부가 부임했을 때는 신자 35명(예비자 6명)만 남아 있는 등 선교활동이 곤란해져 1902년 6월 17일 서귀포 홍로지역으로 이전하여, ‘홍로본당(현 서홍동 면형의 집)’으로 변경하였다가 1937년 제10대 라(羅 라이언 토마스) 신부에 의해 현재 ‘서귀포성당’으로 이전하고 정착함으로써 이곳 하논성당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논성당 이전 후 하논마을은 쇠락을 거듭하다가 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의해 주민 100여 명(가옥 16채)이 소개(疏開)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버렸다. 그 후 60여 년이 지난 2010년 서귀포본당 설립 ‘110주년 뿌리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하논성당터 발굴과 초가성당 복원 계획 및 하논성당 순례길을 조성하였으며, 2013년 4월 20일 제주교구는 하논 성당터를 중심으로 10.6㎞에 이르는 순례길 ‘하논 성당길’을 개장했다.
지금은 성당 터에 호주국화인 호주아카시아(와틀)와 은행나무, 테에다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성당의 흔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