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장 13-16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하프세타이 ἅψηται)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파이디아: παιδία)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께로 데려온 목적은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만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데려왔다. 이 어린아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마가복음 10장 1-12절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혼해서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했다.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 간음을 하면,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부모 중의 한쪽의 잃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되므로 아이는 가정적으로 상처를 받게된다. 어린아이로 번역된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소년, 소녀 또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만져주다” 라고 번역된 하프세타이(ἅψηται)는 소속되다, 관계되다, 만지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의미상으로 아이가 파괴된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마음의 상처가 생기고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그런 상태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데려왔음을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마치 세상의 가정이 회복되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가 다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당시의 어린아이는 현대사회와 같은 위치와 권리를 누리던 존재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부모는 신생아를 버려 노출에 죽게 내버릴 법적 권리가 있었다. 때론 낯선 사람이 신생아를 데려갔는데, 대부분 그런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방 문화에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자주 일어났다. 당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체벌은 심했다고 한다. 유대의 어린아이도, 당시 주변 문화처럼 대체로 천한 존재로 여겨졌다. 방어 능력도 없고 생산능력이 없던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종해야 할 뿐 그 어떤 높임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모습은 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를 천하게 여기는 것을 반영한다. 영적으로는 부실한 가정의 어린아이,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시고 노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가정적으로 소외된 자,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가 다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런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풍요롭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와 어린아이를 받드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유하셨다. 어린아이를 받드는 것은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의미가 된다. 현대의 가정에서는 당연히 여길지 몰라도, 당시 유대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는 가정의 중심에 있지 못함을 말해준다. 어린아이는 가정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남녀가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고, 그 열매가 어린아이인 것이다. 영적으로는 어린아이는 복음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를 뿌리고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씨뿌리는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의 열매는 부활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두고 첫 열매라고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16-20절에서『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부활을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만 큰 관심은 없다. 대부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을 통해서 죄 용서만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예수님이 그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것은 소외되고 불쌍한 자를 품에 안은 모습이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병든 자, 세리, 창녀를 치료해주시고, 죄를 사해주시며,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 것이다. 반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호통하셨다. 그들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이고, 율법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대한 표면적인 지식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발견하지는 못한 자들이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 선지서 등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수없이 많이 예언하셨건만, 실제 이 세상에 메시야가 왔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 분을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교만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안에서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안수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축복까지 하셨다. 축복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축복이다. 세상적으로 가정의 회복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