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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저물어가는 정유년(丁酉年)
해담 조남승
올 한해가 시작되는 첫새벽에 힘차게 홰를 치며 청아하고도 희망차게 울어대는 장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저마다의 기대를 품고 출발했던 정유년의 한해가 속절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한시도 고요하지 않고 쉼 없이 물결치며 흐르는 삶의 강물 속에서 진주 같이 오래 간직할 만한 삶의 값진 추억거리 하나쯤 낚아 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아내와 내가 더 크게 아프지 않고 손녀들의 재롱 속에 기쁨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하루하루의 일상이 다행스러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와 날로 복잡해져가는 사회현실을 돌아보면 참으로 안타깝도록 답답하고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특히 북한이 핵개발에 이어 핵보유국으로서의 국제적 인정을 받기위해 무모하게도 남북전체를 위험의 불길로 거침없이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를 둘러싸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강한 자국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오고 있는 현실이 우려스럽기만 하다. 설상가상으로 온 국민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어려운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이 엄중한 시기에 정치권의 갈등으로 사회가 불안하기까지 하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던 격동의 정유년(丁酉年)을 보내면서 문득 정유년의 유(酉)자가 떠올랐다. 유(酉)자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닭유’자로만 알고 있지만 서쪽에 있는 별을 뜻하는 ‘별유’ 12띠에서의 ‘열째지지 유’자인 동시에 ‘술 유’ 또는 ‘술을 담는 그릇 유’자이기도하다. 한자(漢字)는 글자의 기원에 따라 자전(字典)이 편집되어있는데 술 주(酒)자가 수지부(水之部)에 있지 않고, 유지부(酉之部)에 들어있는걸 보면 술 주(酒)자는 원래 물수변이 없는 유(酉)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전(字典)에 보면 유(酉)자가 들어있는 글자 중에 술괼발(醱), 술괼효(酵), 술빚을 양(釀), 잔질할 작(酌), 취할 취(醉), 술 깰 성(醒)등... 술과 관련된 글자가 수없이 많은 것 또한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술을 생각하다보니 목이 말라왔다. 한동안 술을 멀리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이런저런 마음에 술이 고파진다. 술은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고흥물(高興物)이긴 하나 외롭고 쓸쓸하고 누군가가 그립고 괴로울 때 술을 더 많이 찾게 되는 것 같다. 일찍이 중국의 도연명은 음주이십수(飮酒二十首)에서 술을 두고 근심걱정을 잊게 해주는 망우물(忘憂物)이라고 하였으니, 마음이 이토록 답답하고도 쓸쓸한데 망우물(忘憂物)을 마시지 않고서야 어찌 세월을 낚을 수 있겠는가? 마침 고향친구가 보내준 가양주 한 병이 냉장고에서 며칠째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 귀한 술을 어찌 마셔야 좋을지 궁리를 하다 보니 몇몇 애주선인(愛酒先人)들이 떠올랐다.
중국 제나라의 술에 도통한 손우곤이란 사람은 제일 맛있는 술은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혼자 마시는 풍광독작(風光獨酌)이라고 하였다. 국화주를 좋아했던 중국의 도연명(陶淵明)과 주선(酒仙)이라 불리는 이태백(李太白), 그리고 백낙천(白樂天) 역시 독작(獨酌)을 즐겼다. 백낙천(白樂天)의 권주(勸酒)라는 시 중간에 “천지초초자장구(天地迢迢自長久) 백토적조상진주(白兎赤鳥相趁走) 신후퇴금주북두(身後堆金拄北斗) 불여생전일준주(不如生前一樽酒)”라는 구절이 있다. 시구(詩句)대로 ‘천지는 영원하리만큼 아득히 장구한데, 달(흰 토끼)과 해(붉은 까마귀)는 서로 쫓듯이 달려가네. 죽은 후에 북두칠성을 떠받칠 만큼 황금을 쌓아도, 생전에 한 동이의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네.’라고 술을 찬미했다. 또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란 시에도 “고당명경비백발 (高堂明鏡悲白髮)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 인생득의수진환(人生得意須盡歡) 막사금준공대월(莫使金樽空對月) 고래성현개적막 (古來聖賢皆寂寞) 유유음자유기명(唯有飮者留其名)”-‘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맑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보고 슬퍼하네, 아침에는 청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에는 눈처럼 희게 되었으니..., 인생이 뜻을 얻으면 모름지기 즐기기를 다해야지, 금술동이를 헛되이 달빛만 비치게 하지 말게,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하였으나, 오직 애주가들만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네.’라는 내용으로 술을 권하고 있다. 권주가에 마음이 동(動)한 나는 ‘나도 오늘 풍광독작(風光獨酌)이나 즐겨볼까?’라는 생각으로 술맛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안주거리와 아끼는 도자기 술잔을 챙겨들고, 산마루의 차가운 바람을 기꺼이 안아줄 수 있는 등산복차림에 한시집(漢詩集)을 손에 들고 서둘러 인근의 산을 찾아 나섰다. 해가 짧은걸 감안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더니 이내 땀이 났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버리고 더욱 힘을 내 정상을 향하여 걸었다. 무릎이 약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쓸 만한지 길지 않은 시간에 정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난 등산로를 피하여 양지바른 펀펀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바람에 녹색의 향이 더욱 짙어진 주변의 소나무들과 벗하여 주향(酒香)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목이 말랐던지라 정말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술의 참맛을 보는 것 같았다. 술 한 잔을 마시니 눈이 밝아지는 듯 멀리까지 내다보이며 가슴에 안겨오는 겨울바람이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잠시 취기(醉氣)를 안고 겨울 산경(山景)의 풍광에 빠져들었다. 술이 얼마나 좋았던지 법금(法禁)을 피하기 위해 술을 곡차라 부르면서 평생 애주(愛酒)를 하였던지라 비승비속(非僧非俗)임을 자처하였으며,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던 진묵대사의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이 생각났다.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월촉운병해작준(月燭雲屛海作樽) 대취거연잉기무(大醉居然仍起舞) 각혐장수괘곤륜(却嫌長袖掛崑崙)”-‘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깔 자리이니 산은 베개를 삼고, 달은 등불이요 구름은 병풍일지니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 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되는구나.’-진정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이 대자연과 하나 된 신선과 같은 호방(豪放)한 삶의 노래가 아닌가! 이 시와 같이 애주(愛酒)를 하였던 선인(先人)들은 자연과 벗이 되어 이른 봄엔 설중매(雪中梅)의 고매한 향(香)에 취해 술을 마시고, 춘색(春色)이 짙어지면 이화(梨花), 도화(桃花), 행화(杏花)와 대작(對酌)을 하였으며, 여름엔 유강선유(流江船遊)하면서 가슴에 안겨오는 시원한 바람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우리고, 가을엔 온 천지(天地)에 교교월색(皎皎月色)이 가득한 밤에 국향명월(菊香明月)을 술잔에 담아 마시며, 겨울엔 대숲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지섣달 긴긴밤을 주향(酒香)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하나 되어 꽃과 달을 벗 삼아 술을 마시며 취흥(醉興)에 젖어 시를 짓고 자음(自吟)을 하면서 풍류(風流)를 즐겼을 주호선인(酒豪仙人)들이 그리워진다. 난 다시 술잔을 비우며, 시만 읽어도 취기(醉氣)에 젖어들게 되어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주선(酒仙)들의 취흥작시(醉興作詩) 몇 수를 읊조려보았다. 겨울철인데다 평일이라 등산객이 뜸하였으니 망정이지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시조창을 흉내내보다니 참 가소롭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산정취중(山頂醉中)에 읊어본 시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명인시선(名人詩選)에 나오는 고의후(高義厚)의 영국(詠菊) -“유화무주가감차(有花無酒可堪嗟) 유주무인역내하(有酒無人亦奈何) 세사유유불수문(世事悠悠不須問) 간화대주일장가(看花對酒一長歌)”-‘술 없는 꽃이야 있으나 마나, 임 없는 술 또한 무엇 하리, 세상사 유유하여 물을 것도 없으니, 꽃 보며 잔 잡고 노래나 부르세.’/ 조선조의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대주음(對酒吟) -“유화무월화향소(有花無月花香少) 유월무화월색고(有月無花月色孤) 유화유월겸유주(有花有月兼有酒) 왕교승학시가노(王喬乘鶴是家奴)”-‘꽃 있어도 달 없으면 꽃향기가 적고, 달 있어도 꽃 없으면 달빛이 외롭지만, 꽃도 있고 달도 있고 겸하여 술도 있고 보면, 학을 탄 왕자교(王子喬)도 나의 집에 종이지.’/ 북송(北宋)때 회도인(回道人:呂洞貧)의 시(詩) -“서린이부우부족(西隣已富憂不足) 동로수빈낙유여(東老雖貧樂有餘) 백주양래연호객(白酒釀來緣好客) 황금산진위수서(黃金散盡爲收書)”-‘서쪽의 이웃은 이미 부자이건만 부족함을 근심하고, 동쪽의 노인은 비록 가난하나 여유롭게 즐기네. 술을 빚어 오는 것은 좋은 손님과 인연을 맺고자함이요, 황금을 다 쓰는 것은 책을 사서 글을 읽기 위함 일세.‘/ 중국의 주호(酒豪)로서 주선(酒仙)이요, 시선(詩仙)이며 취성(醉聖)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음주시(飮酒詩)에 뛰어난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네 수중 둘째 수
“천약불애주(天若不愛酒)-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부재천(酒星不在天)-주성이란 별이 하늘에 있을 턱이 없고
지약불애주(地若不愛酒)-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응무주천(地應無酒泉)-땅에도 응당 주천이란 샘이 없었으리라.
천지기애주(天地旣愛酒)-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
애주불괴천(愛酒不愧天)-술을 좋아해도 하늘에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이문청비성(已聞淸比聖)-내가 이미 들으니 청주는 성인에 견주고
복도탁여현(復道濁如賢)-또 탁주는 현인이라고 하였다네.
성현기이음(聖賢期已飮)-성인과 현인 같은 술을 이미 마셨거늘
하필구신선(何必求神仙)-어찌하여 반드시 신선이 되기를 구하겠는가.
삼배통대도(三杯通大道)-석 잔 술을 마시니 대도에 통달하였고
일두합자연(一斗合自然)-한 말 술을 마시고나니 자연과 하나 되었네.
단득취중취(但得醉中趣)-다만 취중에만 얻을 수 있는 아취(雅趣)이니
물위성자전(勿謂醒者傳)-깨어있는 사람들에겐 전하지 말지어다.“
취흥(醉興)을 노래한 시 몇 수를 음미하면서 겨울철의 청냉(淸冷)한 풍광과, 술과, 시에 취하여 잠시 눈을 감고 옛 주선(酒仙)들을 그려보았다. 다시 눈을 떠 술잔을 잡으면서 술병을 보니 어느새 술이 반병가까이 비워져있었다. 향긋한 주향(酒香)이 가슴까지 전해져오지만 해가 서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 마셔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난 미련 없이 배낭을 챙겨 메고 하산을 재촉하였다. 채근담에 ‘꽃은 반쯤 피었을 때가 보기에 좋고 술은 거나하게 조금만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좋으니 그 가운데 무한히 아름다운 멋이 있다’는 “화간반개 주음미취 차중대유가취(花看半開 酒飮微醉 此中大有佳趣)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바야흐로 송년회니 뭐니 하면서 술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많을 때이다. 누구에게나 술을 마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취흥(醉興)에 젖어 감흥(酣興)을 느끼고자 함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게 되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져 주실(酒失)이 따르기 십상이고, 술이 과하면 감흥의 단계를 넘어 정신이 혼미(昏迷)해질 뿐만 아니라 자제력을 잃고 감정 관리를 못한 나머지 주란(酒亂)과 주사(酒邪)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져 있는 글자가 적지 않다. 주정할 후(酗)자에는 재앙을 뜻하는 흉(凶)자가 들어 있으니 술에 취하여 주정을 하다보면 결국엔 재앙이 뒤따르게 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취할 취(醉)자는 죽음을 뜻하는 졸(卒)자가 들어있고, 술 깰 성(醒)자에는 삶을 뜻하는 생(生)자가 들어있는 걸보면 술에 많이 취하면 죽을 수도 있고, 술이 깨야만 살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술과 관련된 금언 중에 공자(孔子)는 술이 취했을 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 참다운 군자라 하여 주중불어진군자(酒中不語眞君子)라 하였다. 또 주자(朱子)는 취중광언성후회(醉中狂言醒後悔)라 하여 취중에 함부로 말을 지껄이면 깬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며, 주색(酒色)은 망신지독약(亡身之毒藥)이라 하여 술과 여색은 몸을 망치는 독약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술은 모든 약 중에 으뜸인 백약지장(百藥之長)인 동시에 과할 땐 미친 사람처럼 된다고 하여 술을 광약(狂藥)이요, 만병지원(萬病之源)이라고 하였다. 술이란 이런 것이니 절대로 술을 강권(强勸)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술 때문에 곤란한 괴로움을 겪는 일을 하지 말라는 불위주곤(不爲酒困)을 가슴에 새기면서 스스로 지나친 과음을 삼가 해야만 한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을 중턱쯤 내려오자 산동국(山冬菊)의 꽃이 서두르지 말라며 엷은 미소로 발길을 붙잡는다. 그렇잖아도 그새 술이 다 깨었는지 목이 말라왔던 터였다. 난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낙엽만 계곡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소나무를 이웃삼아 자리 잡은 들국화 몇 송이가 이 큰 산을 다 지키겠다는 듯 당당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애처롭게만 보였다. 난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과연 누구를 위해 이 추위를 이겨내며 진한 지조(志操)의 향기를 철이 지나도록 내 품고 있단 말인가! 들국화를 벗 삼고 꽃의 향기를 안주삼아 술을 한잔 마시고나서 잠시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자음(自吟)을 해본다. 공산암좌낙정독(空山巖坐樂靜獨) 세사부대안심청(世事不對安心淸) 국화합작명상자(菊花合酌冥想自) 천지개탁암미래(天地皆濁暗未來), 오호세란호하하(嗚呼世亂好何何) 유간망원부상쟁(唯懇望願不相爭) 사방상이화상양(四方想異和相讓) 민부안락기평통(民富安樂祈平統) - ‘텅 빈 산중의 바위에 앉아 홀로 고요함을 즐기며, 세상일에 대응하지 않고 마음을 맑고 편안히 하네, 국화와 함께 술을 마시며 자연스레 명상에 잠겨보니, 온 세상이 다 혼탁하여 미래가 암담하기만 하구나. 아! 현세의 어지러움을 어찌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오직 간절히 바라고 원하노니 서로가 다투지 말고, 사방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여, 국민들이 부유하고 안락한 가운데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해보네.’-라고 합장을 하면서 자리를 떴다. 시제(詩題)는 ‘어지러운 세상에 간절히 바란다.’는 뜻으로 난세간망(亂世懇望)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을 향하여 발길을 서둘렀다. 오늘 산행은 몸으로 걷지 않고 마음으로 걸었기에 전혀 힘들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이 기쁨으로 이어졌다. 특히 옛 주선(酒仙)들을 그리며 그분들의 시와 함께 즐긴 값진 시간이기도 하였다. 누구나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생각하기에 따라 보람을 찾을 수도 있고, 세상을 다 잃은 듯 허무함에 맥이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잠시라도 기쁘고 좋았던 추억을 더듬어보면서 지나온 한해에 대한 삶의 가치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한 단계 더 성숙되고 값지게 새 역사를 열어갈 수 있도록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나무가 먼저 썩어감에 따라 벌레가 생긴다는 목선부충생(木先腐蟲生)이란 말처럼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게 되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훼손한 후에 남이 그 집안을 훼손하게 되며, 국가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뒤에 남이 그 국가를 정벌하게 된다는 인필자모연후인모지(人必自侮然後人侮之) 가필자훼이후인훼지(家必自毁而後人毁之) 국필자벌이후인벌지(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는 말과,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라는 맹자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랫동안 쌓여온 잘못된 폐습을 일소일신(一掃一新)시키되 어떻게 하는 것이 균형적이고 중용(中庸)의 정신에 부합하여 화합을 깨트리지 않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바라건대 과거에 너무 집착하거나 먼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우선 우리의 현실에 닥친 급선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상호간에 공경심(恭敬心)과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상대를 용서할 줄 아는 관대한 포용심을 발휘하여, 정치와 사회 각 분야에서 대화합을 이루어야만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였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이젠 진정으로 아무 사심도 미련도 없이 그동안 먼지 묻고 냄새가 밴 꺼풀들을 스스로 훌훌 벗어던지고 더 나아지는 새해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