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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천지, 승리섬 ⑤
야에야마에 빛나는 구도심
오키나와의 야에야마제도(諸島).
이곳에도 불멸하는 ‘사제(師弟)의 황금역사’가 빛난다.
야에야마 광포의 발자취, 사제의 유대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신심은 그리고 사제는 거리도 환경도 아니다.
광포를 위한 실천이며 마음으로 일체가 정해진다고
여러분의 행복승리의 모습이
위대한 불법의 실증이다.
지금 있는 장소가 바로 본무대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사도유배의 와중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거주하고 있는 일승(一乘)을 수행하는 곳은 어느 곳일지라도 상적광(上寂光)의 도읍으로 될 것이로다.”(어서 1343쪽)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지금 있는 지역에서 광선(廣宣)의 깃발을 흔들며 벗을 격려하기 위해 달린다. 학회원은 어떤 환경도 ‘사명의 천지’로 바꾸는 지용(地涌)의 용자(勇者)다.
계속해서 대성인은 이렇게 쓰셨다.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天竺)의 영산(靈山)을 보고 본유(本有)의 적광토로 주야로 왕복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도다. 말할 수 없도다.”(어서 1343쪽)
사제의 진열에 나란히 서면 어딘가 별다른 ‘이상향’으로 가지 않아도 광포를 위해 힘쓰는 땅이 부처의 세계가 된다. 인간혁명의 드라마를 펼치는 본무대가 된다. 우정을 넓히는 행복의 꽃밭이 된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승리섬부(部)의 벗을 칭찬하고 이렇게 써서 보냈다.
“어러분이 각자 사명의 천지에서 ‘행복승리’의 모습을 나타낼 때 ‘본유상주상적광토(本有常住常寂光土)라는 위대한 법리를 실증할 수 있다.”(수필 인간세기의 빛)
오키나와에서 4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야에야마제도에는 개성 넘치는 유인도(有人島) 10개가 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이빙 명소가 있는 등, 세계가 동경하는 천지다. 이곳에도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지역에 공헌하고자 꿋꿋이 달리며 사랑하는 섬을 ‘행복섬’으로 바꾼 동지의 분투가 있다.
이렇게 활약하게 된 원천에는 광포의 스승과 엮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만남이 있었다. 벗은 야에야마의 아름다운 바다처럼 순수하게 스승을 구도하여 모였다. 스승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처럼 벗을 따뜻하게 격려했다.
대기실에서 격려
1974년 2월 3일, 오키나와를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은 나하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시가키섬에 갔다. 어제까지 거세게 내리던 비가 마치 거짓말처럼 개이고 하늘은 맑았다.
공항에 도착한 선생님은 차를 타고 지역의 집회장으로 갔다. 이날은 야에야마의 동지와 함께하는 기념촬영회와 세이쿄신문사 제1회 도서증정식, 지역우호를 위한 야에야마 축제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미 행사장에는 각 섬에서 구도심을 불태우며 스승 슬하에 모인 벗의 모습이 있었다.
오후 12시 30분, 대기실로 들어간 선생님은 곧바로 지역 멤버와 가진 간담회에서 온 힘을 다해 격려하고, 촬영장소에 입장하기까지 불과 얼마 안 되는 시간에 멤버가 준비한 주먹밥과 채소 절임, 오키나와 명물인 파래국으로 단숨에 식사를 마쳤다.
[당시의 이야기] - 요코메 미치요 씨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행사요원인 우리에게도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그다지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듭 질문하고 상황을 물으시는 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리오모테섬에서 가족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전날은 비가 와서 결항이 되는 바람에 배를 빌려 바다를 건너오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배로 오는 사람도 있을 텐데 뱃멀미를 하지는 않을까.’ 하고 선생님이 마음을 쓰셨다고 합니다.
학회원으로서 분발한 사람을
영원히 칭찬하고 싶다
기념촬영회
이케다 선생님이 기념촬영회 장소에 모습을 나타내자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스승과 첫 만남에 모두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마이크를 들고 온화하게 말했다.
“조금 전 이곳에 와서 야에야마의 주먹밥을 대접받았습니다. 야에야마의 채소 절임도 먹었습니다. 야에야마의 맑은장국도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야에야마’라고 말할 때마다 벗은 감동이 복받쳤다.
“드디어 제가 왔습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죠?”
선생님의 물음에 “예” 하는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촬영장소에는 ㄷ자 모양으로 단상 9대가 놓여 있었다. 지역의 동지들이 며칠에 걸쳐 만든 촬영대다.
선생님은 부인부와 장년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저보다 연배고, 제가 아들이나 손자 뻘이지만 불법(佛法)의 눈으로 보면 제가 아버지고, 여러분은 딸이고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날마다 제목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어서 선생님이 ‘오늘 참석한 사람과 야에야마 광포의 공로자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건립합시다.’라고 제안하자 환호성이 일었다.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 창가학회 멤버로서 열심히 분발하셨으니까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995년, 야에야마제도에 묘법(妙法)의 씨앗 한 톨이 탄생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토속신앙 때문에 반발이 심하고 몰이해의 벽이 두꺼웠다. 촌락마다 행하는 장례나 행사 때 학회원이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학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파트 입주를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절복(折伏)을 하러 가면 욕을 하거나 소금을 끼얹기도 했다. 낫을 들고 쫓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청년부 멤버는 폭력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모두 분한 눈물을 참으며 섬의 발전을 기원하며 대화를 거듭했다.
야에야마는 ‘태풍 긴자’라고 하여 태풍이 지나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폭풍우 피해에도 시달렸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시가키섬과 이리오모테섬을 중심으로 배를 몇시간씩 타고 섬들을 오가며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희망의 불을 밝히는 착실한 투쟁을 계속했다.
그런 벗의 분투는 점점 야에야마의 광포를 진전시켰다. 선생님이 제3대 회장에 취임한 1960년에는 지구(地區)를 결성하고, 1964년에는 대망의 지부가 탄생, 2년 뒤에는 총지부로 발전했다. 회원 세대는 조금씩 늘었지만, 야에야마 사회의 학회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낮았다.
그럴 때 동지는 이케다 선생님의 섬 방문 소식을 들었다. 광선유포의 투혼은 더욱 불타올라 벗은 성실한 대화로 지역에 공헌하고자 더한층 도전했다. 착실한 대화가 쌓여 몰이해의 두꺼운 벽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리고 선생님이 섬에 오신 날에는 지역의 명사들도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바뀌었다.
모두 선생님 제자다
선생님이 자리에 앉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자, 찍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촬영을 마치고 선생님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은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니 시간이 있는 분은 놀러 오세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참석자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옆에 있는 촬영대로 이동하자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하고 멤버들이 여기저기서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모습은 모두 세이쿄신문에 싣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많은 빛을 비추겠습니다. 그리고 또 영화로도 찍을 예정입니다. 언젠가 한달, 두달 쯤 지났을 때 전부 상영하겠습니다. 좋습니까?”
모두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한번 촬영에 선생님은 온 힘을 쏟았다.
부인부와 함께한 촬영에서는 친근함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지요. 반갑습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여유 있게 만나지는 못하지만 전부 사진으로 남기겠습니다. 전부 이름을 적어놓겠습니다. 벌써 다 외웠습니다. 남편분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모두에게 말을 걸자 “예!” 하고 대답했다.
맨 앞줄에 있던 연배자들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선생님은 그 멤버에게 다가가 어머니를 위로하듯 격려했다.
그리고 염원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여러분의 이름을 멋진 돌에 새겨, 되도록이면 내년쯤에 제막식을 하고 싶습니다. 제막식까지 건강하십시오. 아시겠지요. 오래 사셔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장수를 기원하겠습니다.”
소년소녀들이 모여 있는 촬영대로 옮겼다. 선생님이 “안녕하세요” 하며 말을 걸자 활기찬 대답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일었다.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니 모두 악수를 청했다.
“여러분이 건강하니 기쁘군요. 훌륭합니다. 모두 내 제자이니까요. 영리하게 생겼군요.”
그리고 홍콩 방문 때 구입한 그림엽서를 나눠주고, 즉석카메라로 아이들을 찍어 그 자리에서 선물하며 격려했다.
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탁한다!
학회의 후계자
중등부, 고등부 멤버에게는 기대와 신뢰를 담아 말했다.
“중등부, 고등부 여러분은 학회의 뒤를 이을 후계자입니다. 힘든 일도 있겠지만 건강하게, 야간대학이라도 좋으니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대학에 가십시오. 여학생 여러분은 복운이 넘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왕으로 성장하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지급부터 복운을 쌓으십시오.
금(金)은 어떻게 세공을 해도 금입니다. 납이 되면 안 됩니다. 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당시의 이야기] - 니무라 젠지로 씨
고등부 멤버로 참석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선생님은 우리 미래부 멤버에게 “이중에서 재계인, 공인회계사, 변호사, 학자가 될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하고 한없는 기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멤버들은 스승과의 맹세를 원점으로 삼아 지역광포의 용자(勇者)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이야기] - 가세모토 에리코 씨
당시 저는 중등부였습니다. 맨 윗줄에서 보고 계시던 이케다 선생님의 다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타계하셨습니다. 슬픔 속에서 선생님이 이시가키섬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동급생과 함께 날마다 창제하고 기념촬영에 갔습니다. 촬영회에서 기몀으로 받은 물건은 지금도 소중히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왕이 되라.’고 격려해주신 선생님의 지도가 지금도 가슴을 울립니다.
100세 그룹
선생님은 장내에 있던 장년부, 부인부 멤버를 둘러보고 모두 100세 이상 살기를 염원했다. 모인 벗에게는 ‘100세 그룹’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여자부에게는 부모가 안심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집안을 복운의 꽃으로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했다.
[당시의 이야기] - 이시가키 이와오 씨
이케다 선생님은 남자부와 함께한 촬영 때, “아버지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청년은 훌륭한 후계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야에야마의 청녀을 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 염원입니다.” 하고 힘차게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야에야마의 청년을 보라’는 말을 지역우호의 사명이라고 자각하고 지금도 각자 사명의 장소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전국 첫 도서기증식
기념촬영회가 끝나고 바깥 광장으로 이동해 도서기증식을 가졌다. 이는 세이쿄신문 창간 23주년 기념사업으로 전국 벽지에 있는 학교에 도서를 증정하는 기획이다. 제1회 증정식은 이리오모테섬 오하라 중학교에서 있었다.
또 2016년 말까지 학회는 전국 총 1178개 학교와 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했으며 기증한 도서는 50만권이 넘는다.
싱그러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세이쿄신문사의 사주(社主)인 선생님은 약 1000권의 도서목록을 오하라중학교 대표에게 건네주었다. 감사의 말에 이어 학생대표가 인사에 나섰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 - 하테루마 기요미 씨
저는 그날, 가족과 함께 이리오모테섬에서 참석했습니다. 오하라중학교 학생회 대표로 이케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내 마음의 벗은 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슬플 때나 괴로울 때, 내 마음의 벗은 책이었습니다.” 긴장하면서도 다 일고 나자 선생님은 손을 내밀어 악수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세요.”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스승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후 갖가지 숙명이 덮쳤지만 선생님과 새긴 원점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싸우면
어떤 지역도 바꿀 수 있다
야에야마 축제
이어서 ‘야에야마 축제’가 열렸다.
행사장 한쪽 구석에 있는 억새로 지붕을 인 집에서는 여러가지 민속 공예품을 전시했다. 그곳에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선생님은 민속공예품을 감상한 뒤 연배자를 불러 앉게 한 뒤 자신은 미래부 속으로 들어갔다.
행사장에는 시민을 포함해 약 2000명이 모였다.
“야에야마의 광선유포는 19년 전부터 시작했답니다. 그것이 이렇게까지 넓혀진 거죠. 다시 말해 20년 동안,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싸우면 어떠한 지역이라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결의와 행동이 아니면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바꿀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싸움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분투한다는 점이지요.”(소설 《신·인간혁명》 제19권 ‘무지개의 춤’)
축제는 류큐왕조시대부터 내려오는 북 연주로 막을 열었다. 부인부 네명이 연주했는데 두 사람은 학회원이 아니었다.
‘이케다 선생님 앞에서 북을 꼭 연주하고 싶다.’며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북 연주에 이어서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구로시마구도치’와 야에야마에 전해오는 자장가 ‘고네마누슈야’를 선보였다.
이리오모테섬의 동지가 ‘마키오도리’를 추기 시작하자 벗이 선생님에게 윗옷과 머리띠를 가져왔다.
“좋아요, 함께 춥시다!”
선생님은 겉옷 상의를 벗고 ‘도쿄 출신’답게 익숙한 손놀림으로 윗옷을 입고 머리띠를 맺다. 선생님이 마키오도리 대열 속으로 들어가자 환희에 찬 노랫소리와 춤은 한층 기세를 더했다.
‘영차 영차’ 하는 구호와 함께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원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가 엮는 한없이 밝은 광경은 참석한 내빈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었다. ‘폭력종교’라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진실은 그와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마키와도리가 끝나자 모두 선생님에게 달려가 악수를 청했다. 벗의 환희가 폭발했다.
선생님도 한사람 한사람을 끌어안듯 계속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했다.
끝으로 선생님 목소리에 맞춰 모두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것은 야에야마의 벗이 맹세하는 만세이며 승리의 외침이었다.
음지에서 노고하는 사람에게 격려
다음날인 4일, 이케다 선생님은 이시가키섬을 둘러보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비라만 주변으로 이동했다.
해안으로 난 길을 달리자 바다를 끼고 섬 북쪽 끝에 있는 히라쿠보반도가 보였다. 이곳에서도 한 장년부 멤버가 책임지고 분투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현지 간부에게서 지역을 위해 착실하게 노력하는 멤버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 멤버를 격려했다.
‘오키나와의 벗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심 어린 교류를 하고 싶다.’
이것이 선생님의 진심이었다.
[당시의 이야기] - 가히라 야스히로 씨
저는 선생님을 수행하는 차량의 선두차를 맡았습니다. 당시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운전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행사요원에게도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긴장을 풀어주는 꾸밈없는 행동, ‘음지의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는 진지함,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의 따뜻함을 느끼고 ‘생애 선생님과 함께’ 하자고 맹세한 기억이 납니다.
야도피케노하마
선생님은 ‘야도피케노하마’라고 하는 해안으로 갔다. ‘남자부를 중심으로 다함께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데 꼭 와주십시오.’ 하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도피케노하마에 도착하니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멤버 서른명 정도가 바다에 들어가 설치해 놓은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샌들을 신고 바다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말을 걸면서 함께 그물을 당기자 100마리 정도가 걸려 있었다. 낙지와 숭어, 감성돔도 있었다.
풍어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 곳에 바다거북도 찾아왔다. 선생님은 거북을 바다에 놓아주었는데 거북은 다시 선생님 곁으로 돌아왔다.
“거북이도 선생님과 함께 있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고 누군가 말하자 큰 웃음이 터졌다.
[당시의 이야기] - 오노 마사나리 씨
거북이가 나타났을 때 선생님은 “이곳이 바로 용궁이군.” 하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조리사인 제가 물고기를 굽고 모두 함께 먹었습니다. 선생님도 기뻐하시고 황금의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날의 원점을 가슴에 간직하고, 야에야마조리사협회 회장도 하며 지역공헌에 도전했습니다. 기념촬영회 때 주차장이던 자리에 제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나무 그늘에 있는 사람도 불러
해변을 둘러싼 무성한 나무숲에는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선생님이 모두 오라고 손짓했다. 선생님을 뵙고 싶어 모인 멤버는 기뻐하며 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로 했다. 모두 선생님을 둘러쌌다. 선생님이 어린 남자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자 웃음꽃이 피었다.
[당시의 이야기] - 다케시마 유미코 씨
당시 여자부였던 저는 야도피케노하마에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벗을 격려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느끼고, 섬의 여자부 개척에 끝까지 달리자고 깊이 결의했습니다. 그날의 맹세를 가슴에 품고, 재작년에는 3세대의 어본존 유포를 달성했습니다.
용궁에서 구원의 벗과 만남인가
일본의 하와이가 되어라
기념촬영을 마친 뒤 선생님을 둘러싸고 간담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진심 어린 환대에 감사를 표하고 시 두 수를 발표했다.
“잊지 않으리 야도피케노하마의 환호 그물”
“용궁에서 구원의 벗과 만남인가”
멤버들은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이어서 선생님은 일본 최남단에서 활약하는 야에야마의 동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보다 존귀한 사명이 있는 향토의 변혁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랐다.
야에야마는 ‘일본의 하와이가 되어라’를 구호로 내걸고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야에야마의 미래를 전망했다.
“저는 20년, 30년, 50년 뒤에는 야에야마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떠오르는 국토’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공덕을 듬뿍 받아 착착 준비해 체제를 갖추고, 조금씩 힘을 북돋우면서 확보하기 바랍니다.”
[당시의 이야기] - 스기나와 도시오 씨
‘야에야마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생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떻게 하면 섬을 바꿀 수 있을지 의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해안선은 쓰레기 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공원이나 강도 황폐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일본의 하와이가 될 거라며 야에야마의 가능성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후 현지 남녀 청년부가 ‘거리를 깨끗이 하는 모임’을 발족해 제가 초대 책임자를 맡았습니다. 한달에 한번씩 각 해안을 몇시간씩 청소했습니다. 그 일을 몇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계속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지역신문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지도가 있었기에 지역에 공헌하는 길을 열 수 있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사도야윤타
이 자리에 모인 멤버들로 ‘야도피케그룹’을 결성하자고 선생님이 제안하자 모두 기뻐서 찬동의 박수를 보냈다.
간담회를 마치고 선생님이 “다함께 춤추며 노래합시다.”라고 하여 합창이 시작되었다. 잇달아 민요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이 흘렀다. 야에야마에 전해오는 ‘아사도야윤타’를 노래할 때는 선생님도 머리띠를 매고 함께 춤을 추었다. 동행한 간부에게도 ‘신발을 벗고 바다에 들어가자’고 하셨다.
야도피케노하마에는 손가락으로 부는 피리소리와 산신(민속악기)을 켜는 소리와 함께 명랑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밝고 즐거운 민중 찬가가 터져 나왔다. 고난을 뚫고 나온 벗은 환희에 넘쳐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역 주민들은 ‘이토록 생기발랄한 얼굴로 장대한 향토의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감동했다.
[당시의 이야기] - 아라시로 에미 씨
모두 즐겁게 아사도야윤타를 춤추고 나서 선생님은 우리 여자부 멤버에게 “절대로 퇴전하면 안 됩니다.” 하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절대로 퇴전하지 않을 건데 어째서 저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숙명의 폭풍우가 잇달아 덮쳐왔습니다. 사고로 아들을 잃고 부모님은 종문(宗門)사건으로 탈회해 괴롭고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날의 선생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절대 신심에서, 학회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 후 둘째 아들을 낳고 부모님도 재입회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책임자의 자각이
자신의 경애혁명에 통한다
야에야마 최고협의회
그날 밤, 대표멤버가 모여 야에야마 최고협의회를 열었다.
선생님은 야에야마의 상황과 동지의 활약상을 듣고 장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우리의 염원은 섬 사람들의 행복과 향토 번영입니다. 따라서 사회와 창가학회 사이에 벽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을 위해 온 힘을 다하자. 사회에 공헌하자.’는 강한 일념이 있어야 비로소 불법을 사회에 열 수 있으며 광선유포 확대도 이뤄집니다.
<입정안국론>에도 ‘일신(一身)의 안도(安堵)를 생각한다면 우선 사표(四表)의 정밀(精謐)을 기도해야 하느니라.’(어서 32쪽)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부 여러분은 모든 사람의 행복과 섬의 번영을 실현하는 책임자라고 자각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자기자신의 경애혁명에도 통합니다.”(소설 《신·인간혁명》 제19권 ‘무지개의 춤’)
협의회에서는 대학부 출신이 섬에 돌아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격려를 보냈다.
[당시의 이야기] - 야마다 다다히로 씨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시가키섬에 돌아왔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섬을 방문하셨을 때는 행사에서 서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2월 4일 밤, 선생님이 머무시는 곳에 가니 입구에 선생님과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먼저 ‘자넨가! 알고 있다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앞으로 대학부 출신이 돌아올 터이니 잘 보살펴주기 바란다. 대학회를 만들테니 자네가 회장을 맡아주게. 그런데 나도 회장이니까 간사하고 하자!”며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해주셨습니다. 끝으로 어깨에 손을 얹고 ‘악수하자’며 손을 꽉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창가학회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반드시 소원만족한 인생을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진심과 기대를 느끼고, 섬의 발전을 위해 힘쓰자고 결의했습니다.
맹세의 무지개가 뜨다
야에야마 방문 마지막 날인 5일에는 이시가키 시내에서 ‘야에야마제도 선조대대 추선법요’를 거행했다.
이는 선조대대, 전쟁희생자, 해난사고 사망자, 경찰 순직자 등 모든 정령의 명복을 기원하고, 향토사회의 새로운 발전을 기하기 위해 이케다 선생님의 발원으로 열렸다.
법요는 창가학회 오키나와총합본부가 주최하고, 지역의 4개 단체가 협찬, 야에야마 마이니치(每日)신문사 후원으로 실시했다. 각계 명사와 지역의 우인도 많이 참석해 지역행사가 되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지 미래부 멤버가 진심을 담아 만든 현수막 아래서 선생님은 지역 분들을 직접 맞이했다.
법요에서는 추선 제목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참석자들이 차례로 분향했다. 지역간부와 내빈 인사에 이어 선생님이 답례로 간결하게 인사했다.
“지금까지 섬의 발전을 지원해주신 선조대대의 명복을 빌고 동시에 여러분의 건강과 장수를 늘 기념하겠습니다.”
법요에 이어 뜰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야에야마회관 기공식을 거행했다.
사제의 진실한 모습이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
[당시의 이야기] - 하에바라 미쓰히로 씨
첫날 기념촬영회와 마지막날 법요 등으로 학회의 진실한 모습을 본 지역의 유력자들은 놀람과 동시에 학회에 대한 편견이 바뀌었습니다.
멤버들의 악수 요청에 응하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을 건네며 온힘을 다해 격려하시는 선생님과 순수하게 스승을 구도하는 동지 사이에 장애물 따위는 없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시는 선생님이 야에야마의 땅에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대하는 모습은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또 선생님은 내빈 한분 한분에게도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응대하며 단 한번의 만남으로 커다란 신뢰를 구축했습니다.
선생님이 이시가키섬에서 미야코섬으로 가실 때는 시장 일행이 일부러 선생님을 배웅하러 달려왔습니다. 선생님은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며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행동이 야에야마 사회의 학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야에야마의 동지는 선생님이 보여주신 지역광포와 사회공헌의 길을 똑바로 나아가고자 분투에 분투를 거듭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는 천지가 되고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학회원이 여기저기 탄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야에야마는 구도심을 불태우겠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 방문지인 미야코섬으로 가는 비행기로 향했다. 체류 중에는 2월의 날씨로는 드물게 맑은 날씨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오르기 직전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트랩에 올라 기내로 들어가니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빗발이 약해지고 하늘에는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절묘한 ‘하늘의 연출’에 동지는 환성을 질렀다.
그 무지개를 향해 나아가듯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배웅하러 온 벗의 환희와 결의에 찬 목소리도 또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명의 천지, 승리섬 ⑤ 야에야마에 빛나는 구도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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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