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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의 가을을 보내며
이 재 익 (시인) / 소답자한 69호(2014.11.)에서
인간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서 단순화하기기 쉽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어떤 것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 이라고 크리슈나 무르티는 명상했다. 생각은 항상 집착하고 불안이나 소유, 애정 등 무언가에 점령당해 있어서 비움을 전제로 하는 단순화는 쉽지가 않다.
‘단순화는 게으름이 아니라 소유 복잡계에서 행복으로 지표하는 것’<통영 미륵산, 이재익> 이라고 나도 읊었다. 자신을 이해하려면 단순화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만에 대한 반성이 나오고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단순화하고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누구나 불타는 가을산 단풍 속에서 세속일을 잊고 잠시 동안 마음의 단순화를 경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시나 한시를 많이 읽어보면 마음을 집중하고 단순화 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시인 폴랭은 가을의 자연을 묘사하면서 상대적으로 불확실하고 변질되기 쉬운 인간들의 사랑을 곁들여 읊었다.
태양은 우리들에게 빛으로 말을 하고/ 향기와 빛깔로 꽃은 얘기한다./ 구름과 비와 눈은 대기의 언어/ 지금 자연은 온갖 몸짓으로 가을을 얘기하고 있다./ 벌레들이 좀먹는 옛 탁자 앞에서/ 사람들은 가짜 사랑을 말하고 있을 뿐. //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 이라고 하였듯이 당나라 때는 한시가 뛰어났다. 다음은 설직의 <秋朝 擥鏡> 이라는 당시(唐詩)다.
나그네 마음 지는 잎에 놀라/ 밤 새워 앉은 채로 가을바람 소리 듣네. 아침 되어 얼굴 모습 비추어보니/ 생애가 바로 그 거울 속에 있네. / 설직(당) ; 客心驚落木, 夜坐聽秋風, 朝日看容鬢, 生涯在鏡中.
(* 擥 잡을 람, 驚 놀랄 경, 看 볼 간, 鬢 귀밑 털 빈) 거울 속에 히긋희긋한 머리털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까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 온 것일까?’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인생의 유죄’ 라고 하늘 법망에 대하여 ‘나는 여한 없이 살아서 나는 무죄다’ 하고 자신 있게 외칠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법정 문턱에도 가지 않은 많은 선량한 사람들도 결실의 풍요와 향기로운 가을을 아쉽게 보내고 스산한 으스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조락凋落하여 흩날리는 낙엽과 찬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은 없을까? 하고 회고한다, 그래야만 추운 겨울을 아무 탈 없이 보내고 새 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인데’ 하고 겸허히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며칠 전에 왕년의 인기 코미디언 김병조 씨 이야기를 관심 있게 접했다.(조선일보 2014.11.15. why) 1980년대 '배추머리'란 별명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개그맨 김병조 씨가 광주 조선대학 초빙교수로 16년째 일반인과 대학생에게 '명심보감'을 강의하는 교수로 변신했다. ‘명심보감은 어렸을 적 서당 훈장인 아버지께 배워, 괴롭고 슬플 때마다 펼쳐보며 자신을 되돌아본 인생의 가이드북”이었다. 이제 그 가업家業을 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병조 씨는 1980년대 한순간의 말실수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7년 6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민정당은 정(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당시 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한 말이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비난 여론이 일어 엉겁결에 정치적 구설에 올랐다.
"민정당 측에서 사전에 준 대본을 읽었을 뿐이었지만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엄청난 '죄인'이 되어 있었다. 7년 인기가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는 1990년대 중반 개그계를 떠났다. 개그맨 대신 교육자로 반성하는 제2의 인생을 개척했다. 누구나 인생에는 다소간에 이와 같은 우여 곡절이 많을 것이다.
마침 오늘(2014.11.22.) 신문에 정두언 의원의 소식도 접하며 사색의 문을 두드려 준다. 불법 정치자금 혐의로 재판을 받아 온 정두언 의원이 무죄가 확정되면서 지난 2년 반 동안의 고난이 억울하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한 대답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말이지 억울하기는커녕 모든 게 감사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지난날 저는 너무 교만했고, 항상 제가 옳다는 생각으로 남을 비판하면서 솔직히 경멸하고 증오했다, 저는 법으로는 무죄이지만 인생살이에서는 무죄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법으로는 무죄이지만 인생살이는 유죄’ 라고 스스로 단죄, 반성하는 모습이 숙연하고 아름답다. 정두언 의원의 말을 들으며 옛날 감명 깊게 본 영화 <빠삐용> 이 생각난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주인공 빠삐용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외딴 섬에 유배돼 처절한 나날을 보낸다.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획득하는 강인한 의지의 인간을 잘 그려 놓았다. 몇 해 동안 독방에 갇혀서 영양부족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고 이빨이 빠지며 죽음직전의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매일 아침 ‘나는 약해지지 않는다.’고 되풀이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원기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으로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다. 희망변수希望變數가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 희망希望의 힘, 신념信念의 힘, 의지意志의 힘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사를 통해서 실제로는 죄가 없었으나,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고,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는 바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 죄’ 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내가 나의 삶을 허송하는 것은 단순히 내 삶을 낭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살면, 나를 위해 주고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이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큰 죄가 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오랜 유배의 절대고독 외로운 순간에 등불로 꽃그림자를 만들어 벽을 쓰는 그림자놀이로 긴 가을밤을 달랬고, 선비들은 국화꽃이 한창인 계절 음력 9월 9일 국화의 대명사인 중양절重陽節을 챙겨, 시회詩會를 열고, 국화전 국화주를 음미하며 이 가을을 뜻 깊게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음력 시월 첫 일요일은 가문의 묘사일이다. 올해는 윤9월이 들어 좀 늦게 들었다.(11월 23일) 이 가을이 마지막 가는 11월 29일은 결혼 36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여곡절 파란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서로 의지하여 행복의 밀도가 점점 더 높아가고 있음이 다행이다. 무주구천동의 아름다운 단풍을 음미했고, 마산의 국화전시회에 다녀와 국화를 실컷 보고 스스로 겸허한 만추를 보내고 있음을 자작시 한편을 다시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
山寺의 국화 / 이재익
느지막이 피는 꽃이 오래 견디고, 향기 더 짙어 곱지만 소박하고 깨끗하나 차지 않다.
그윽한 향기에 마음 경건하고 얼굴도 따라 핀다. 희다가 노래지고 다시 보라, 자주색.
만추晩秋의 등촉 앞에 조용히 혼자 앉아 꽃그림자 만들어 벽을 쓸고,* 대나무 달빛 그림자가 또 쓸고 지나간다.
깊은 산사 마당엔 낙엽 쓸던 노승이 합장하고 중양重陽* 잊고 사는 속인俗人은 가을 옷깃 한구석 한떨기 국화 앞에서 마음밭 애련愛憐의 벽을 쓸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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