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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11.1 km
소요 시간 6h 29m 6s
이동 시간 5h 42m 41s
휴식 시간 46m 25s
평균 속도 1.9 km/h
최고점 760 m
총 획득고도 603 m
난이도 보통
프로로그
자동차는 휘발유나 경유 같은 연료를 넣어주면 엔진에서 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 내연기관이다. 연료가 떨어지면 멈춰서야 한다. TV는 전기코드를 연결하여 전기에너지로 작동한다. 핵잠수함은 핵연료를 이용하며 그 핵연료가 고갈될때까지 움직일 수 있다. 우주를 날아가는 화성 탐사선이나 지구괘도에 떠서 우주선의 이착륙을 원활하게 해 주는 우주정거장은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한다. 이처럼 기계는 사용하는 에너지원은 다르지만 에너지를 공급해줘야 작동한다.
사람은 음식물을 소화시켜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양소를 흡수하여 산소와 결합시켜 연소시킴으로써 얻어진 에너지를 혈액에 섞어서 온몸으로 보내 몸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에너지를 사용하고 난 노폐물은 똥오줌과 땀 그리고 호흡을 통해 배출한다. 이런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필요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음식물 공급을 중단하거나 산소를 차단하면 더 이상 에너지를 만들 수 없어 죽게 된다.
신사역 가는 길 건물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장식
우리가 먹는 음식물 중 식물자원은 햇볕에 들어 있는 태양광 에너지와 물과 탄소를 결합하여 소위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축적한다. 그렇게 축적된 에너지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고 또한 남은 에너지는 잎에 축적하여 땅으로 떨어뜨린 후 그 에너지를 다시 거름으로 흡수한다. 이처럼 반복하여 순환하는 식물 에너지원이 무슨 계기가 있어 배출이 안되는 경우 돌과 같이 단단하게 에너지를 함유한채로 굳어져 석탄이 된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이와 같은 원리로 동물의 몸속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석유가 된다. 중학교 때 배운 과학이론에 따르면 에너지는 그 형태가 바뀔 뿐이지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 한다. 자연속에 사는 생물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필요한 영양소가 부족하면 활동을 멈추게 되고 너무 과해도 안된다. 식물은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서 죽게 되고 햇볕이 너무 강해도 살 수 없다. 동물도 몸에 흡수한 에너지를 운동으로 발산하지 않으면 체지방이 몸에 쌓이게 되어 당뇨 등 병에 걸려 신체가 제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자연의 조화속에서 생명체는 나고 자라고 병들고 늙어 죽게 되며 죽은 후에는 유기물로 되었다가 다시 무기물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여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간다.
인간이 고도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은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여 항상 공기를 정화시키고 물을 순환시키며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한다. 건물내에서는 맛있는 과일이 열리고 가축도 키울 수 있어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을 자체 조달한다. 건물에 사는 인간은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과일이나 채소를 먹으면 된다. 필요한 단백질은 가축을 잡아서 가공한 음식으로 충당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인간이 할 일은 그 건물을 관리하는 일뿐이다. 그런 인간에게도 고민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가 죽고 나면 이 건물은 소용이 없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도 건물을 후손에게 물려줄 예정이다. 다만, 자식이 늘어나면 그들끼리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건물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몸이 필요로 하는 양 이상을 섭취하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그 이상을 먹을 수 없다. 짐승들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사냥해서 먹고 남은 것은 그보다 좀 낮은 포식자가 차지한다. 그 차례는 점점 더 낮아져서 최종적으로 개미와 곰팡이가 마지막 단계를 담당한다. 사람은 먹고 남은 것을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쓴다. 창고를 여러 개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평생 창고를 늘리고 그 안을 채워넣다가 수명을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창고 옆에서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도 있다. 굶어 죽지는 않더라도 배고파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창고주인에게서 필요한 음식을 얻기 위해 창고주인에게 노동력과 용역을 제공한다.
입암저수지 너머 뾰족한 봉우리가 입암산(笠岩山 삿갓바위봉)인가 보다 - 그러고 보니 모양이 닮은 듯 하다
내 생각은 여기서 멈춰선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세상의 에너지는 순환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에서 취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후손을 두는 것이 어쩌면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우리의 사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이 길어진다. 깊어간 가을이 끝나고 계절은 겨울의 문턱을 넘었다. 1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이 벽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다.
산행기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어 시골에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에는 당질 결혼식에 참석하려 일찍 올라왔다. 평소같으면 토요일 산행을 마치고 시골에 내려갔을텐데 이번에는 일요일에 산행을 한다. 작년 이맘때쯤 계방산 등산을 하다 만났던 ‘수색대’ 박민기 군과 함께 산수 산악회를 따라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방장산에 가기로 했다.
가을 단풍철이 끝나고 겨울 눈산행이 시작되기 전이라 좀 어중띤 계절이라서인지 산악회 버스가 좀 헐렁하다. 내 옆자리도 예약했던 사람이 오지 않아 오고 가는 6시간을 편안하게 보낸다. 버스는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에서 15분 정차한 후 정읍IC를 빠져나가 서울을 출발한지 3시간만인 10시 15분 들머리인 장성갈재에 도착했다. 전라북도 정읍과 전라남도 장성군의 경계이다.
오늘의 산행코스 : 장성갈재에서 시작해 석정온천에서 마친다.
버스에서 산대장이 방장산(方丈山 743m )에 대해 설명해준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사이에 위치한 방장산은 주변에서 제일 큰산이라서 마치 깜빵에서 대장을 방장(房長)이라 부르는 것처럼 방장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산이름을 이렇게 쉽게 설명해 준다. 원래 방등산(方等山) 또는 반등산(半登山)이라 불렀는데 산이 높고 험하여 반쯤 오르다 내려온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명나라를 숭배하던 조선의 사대가(事大家)들은 중국의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여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 그리고 제주도 한라산을 영주산(瀛州山)으로 산이름을 바꾸었다. 호남에서는 부안의 변산을 봉래산으로 방등산을 방장산으로 하고 무등산을 영주산으로 바꾸어 불렀다.
중국 삼신산 전설 발췌 내용
중국의 삼신산 전설에 따르면, 삼신산들이 발해(渤海: 발해만?)의 동쪽으로 몇 억만리나 떨어진 곳에,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인 귀허(歸墟)의 개울 속에 있는데, 그 산들은 주위가 3만리이고 꼭대기는 너비가 사방 9천리이며, 산과 산 사이가 7만리나 떨어져 있다. 그 정상에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는 어전(御殿)이 있고 주변에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과일나무가 있다. 그리고 선인들은 산과 산 사이를 하루 몇 번씩이나 날아다닌다.[1]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B%A0%EC%82%B0
어찌 되었든 고창과 장수에 걸쳐 있는 이 방장산은 주변 평야위에 우뚝 솟아 있어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터이고 이 산을 차지하는 자가 기름진 평야를 갖게 되었을 터이니 이 산을 둘러싼 각축이 얼마나 심했을까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장성갈재에 우리를 부려놓고 버스는 휭하니 떠나 버린다. 몇명씩 무리를 지어 온 사람도 있고 혼자서 온 사람도 있다. 오늘 함께 산행하는 박민기 군은 산행 속도가 무척 빠르다. 처음부터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쓰리봉으로 오르는 첫번째 작은 봉우리를 지날때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가다가 내가 주변 나무와 풀들을 둘러 보면서 행선이 늦어지니 어느 새 꼬리도 보이지 않을 만치 달아나 버렸다.
산행 들머리 : 장성갈재 - 갈대가 많아서 갈재인가 ?
산길은 이제까지 다니던 큰 산의 들머리와 사뭇 다르다. 일반 나뭇꾼들이 다니는 그런 길이다. 크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낙엽이 덮인 길이 가파르게 치닫는다. 산길 초입에 느티나무가 많은 것이 특이하다. 참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은 우리나라 일반적인 산들과 마찬가지다. 다만, 중턱쯤 올랐을 때 산길 왼쪽으로 수령이 십십여쯤 돼 보이는 삼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다른데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삼나무 숲
산행 들머리엔 여러 산악회에서 걸어놓은 표식(시그널)이 마치 티벳 불교의 오색깃발(다루초)을 달아 놓은 것 같다
능선에 오르기 전 중간쯤에 작은 봉우리를 넘는데 돌로 쌓아 놓은 담장이 보이고 그 이어진 곳에 시멘트 벽돌로 쌓은 방공참호가 있다. 돌담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종의 성벽이었을 테고 벽돌은 근래 들어 예비군이나 군인들이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용으로 파 놓은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나중에 산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을 때 이 산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콩제비꽃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둥그스름하게 우뚝 선 쓰리봉이 보인다. 오후 5시 30분까지 약 7시간 산행시간을 주었기에 여유를 부려본다. 이렇게 아랫녘 산행을 하면 윗녘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나무나 풀들을 볼 수 있다. 이 산에는 때죽나무와 쪽동백나무가 유난히 많은 것 같다. 땅에는 콩제비꽃 잎이 아직 초록빛을 띠고 있는 것이 이대로 겨울을 나는 모양이다.
능선에 가까워지자 조릿대군락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허리 언저리까지 올라 오던 것이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커지더니 사람 키를 덮을 만큼 무성하다. 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이라 스틱을 짚으면서 오르기에 편안하다. 능선에 올라 서자 바위가 나타나고 비로소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조망이 확 트인다.
조릿대 군락
때죽나무가 많이 눈에 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겨울산행 채비를 단단하게 하고 왔는데 버스에서 내려서는 기온이 포근한 것 같아 파카와 풀오버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비니모자도 벗고 대신 차양이 있는 여름모자로 바꿔 썼다. 가파른 산을 오오를 때 한겹 등산복임에도 땀이 날 정도로 덥더니 산위 바위에 올라서니 차가운 바람이 엄습한다. 그래도 춥지는 않고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 멀리 오늘 아침에 지나온 입암리 입암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가 정읍인가 본데 미세먼지로 인해 희미하게 보인다. 방금 올라온 산허리 너머가 백양산과 내장산이라는데 역시 먼지가 자욱한 모습이 답답하다. 이런 먼지를 봐도 무던하게 그냥 지나치려 해도 이렇게 짙은 먼지가 시야를 가리면 마음에 두터운 먼지층이 쌓이는 것 같아서 언쨚다. 잘 살기 위해 기름을 태워야 하고 편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야 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이렇게 허구헌날 갑갑증을 앓아야 하니 시쳇말로 ‘뭐가 중헌디?’ 하는 의문이 솟아난다.
시야가 흐릿한 풍경 - 입암리 방향이다.
써래봉 (734 m)
방장산 산행에서 처음 만나는 봉우리 이름이 쓰리봉(734 m)이다. 산이름의 유래를 보면 원래 이 봉우리의 높이가 방장산(743) 과 봉수대(715)에 이어 세번째 높은 봉우리여서 쓰리봉이라고 불렀다 한다. 한국전쟁때 제일 높은 봉우리였던 봉수대가 집중 포격을 맞아 깍여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또는 이 방장산 능선에 방장산 봉수대 쓰리봉 이렇게 세 봉우리가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그 세번째 봉우리라서 쓰리봉이라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아주 희한한 산이름에 대한 설명이 좀 우스꽝스럽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설명이다.
쓰리봉 : 써래봉 ?
다른 한편으로 쓰리봉이란 이름을 써래봉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써래봉이란 봉우리 이름은 우리나라에 제법 많이 있다. 방장산에서 가까운 내장산에도 있고 지리산에도 있다. 이들 산이름에 관한 설명을 찾아 보면 한결같이 농기구 이름을 언급한다. 써래는 특히 봄에 벼를 심기전 논을 갈고 나서 큰 흙덩이를 고르게 펴주는 나무로 된 농기구다. 큰 흙덩이를 깨야 하기 때문에 마치 얼기미빗처럼 굵직한 나무에 여러개의 나무가래를 박아서 만들었는데 보통 이것을 소가 끈다. 쟁기질을 한 후에 써래질을 한다. 써래봉이란 산이름을 설명할 때 산의 봉우리 여러 개가 마치 써래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럴 듯 하다며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좀 더 진지한 설명도 있다. 즉 불교에 기인한 이름인데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을 의식하여 붙여진 서래봉(西來峰)이 기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인들 절이 없는 곳이 있을까. 또한 상당히 많은 산봉우리 이름들이 불교에서 기인되었다.
또 다른 표현은 수리봉 기원설이다. 수리는 독수리를 의미하는데 옛날부터 하늘 높이 날면서 매서운 눈으로 사냥감을 찾아 내는 수리를 영물로 여겨졌었다. 이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고대 유럽이나 미국인디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으며 그 흔적은 여러가지 휘장 등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독수리가 흔하지 않은 철새이나 매는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맹금류였다. 이에 근거하여 현재 산이름 중에 매봉, 응봉, 수리봉 등은 산봉우리의 형태가 매나 술를 닮아서 그랬다기 보다는 주변 산봉우리 중에서도 탁월하게 높이 솟아 빼어난 전망을 펼치는 봉우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써리봉도 그런 수리봉을 발음할 때 강하게 하다가 마침 일반 농군들에게 쉽게 연상이 되는 농기구인 써래로 대치하여 써래봉으로 자연스럽게 불린 것 같다.
백암산 내장산 방향
써리봉에서 다시 한 번 미세먼지에 뒤덮인 주변을 둘러보고 방장산 주봉으로 향했다. 일단 쓰리봉까지 올라가면 능선길을 따라서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진다는 산대장의 설명을 떠올리면서 산세를 살펴본다. 안부에 오를때까지는 전형적인 흙산인데 능선을 따라서 크고 작은 암릉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으니 멋진 풍경이 펼져진다.
앞으로 가야할 방장산 능선길
앞이 탁트인 바위에 서서 백암산 내장산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나던 산객이 다가와 옆에 서서 말을 붙여 온다.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이 산꾼은 방장산 휴양림에서 방장산 정상을 밟고 내려가려다 기왕 올라온 산이니 좀 더 둘러볼 심산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차를 그곳에 주차해 두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원래 산악자전거를 탔는데 팔목이 아파서 등산으로 취미를 바꾸고 난 후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 산을 찾는데 최근 100대명산 코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제는 속리산을 타고 왔다는데도 지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전주에 살면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그 산꾼과 봉수대(715)까지 동행하고 헤어졌다.
봉수대(烽燧臺 715 m)는 산 이름 그대로 예전 통신수단이 없던 시절 적의 침범을 알리는 군사목적의 통신수단이었다. 5개의 대를 설치하여 평상시에는 1개, 적이 시야에 들어오면 2개, 가까이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서면 4개, 우리 방어군과 접전이 일어나면 5개의 홰를 올려 상황을 전달했다고 한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빛을 내어 시각을 이용하는 통신어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적인 통신수단이 도입되면서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져 사용을 중지했다고 한다.
분꽃나무가 길가에 많이 보인다.
봉수대
전국적으로 봉수산, 봉서산, 봉화산 등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많은데 이들은 모두 한때 이런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이용되던 시설이 갖춰져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역에 따라 이런 시설을 복원하여 놓은 곳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 남산에 있는 봉화대가 있다. 작년 남해를 여행할 때 금산에서도 잘 보존된 봉화대를 본적 있다. 100여년전 근대적인 통신수단이 들어온 후에 이런 봉수대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미 나라를 적에게 내어준 이후라서 더 이상 봉화가 소용없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쪽 해안에서부터 출발하는 봉화는 일본군을 감시하는 것이었고 북쪽 함경도부터 시작하는 것은 청나라를 견제하는 것이었으니 갑오개혁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을 맺을 때까지 조선은 이미 국가의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1894년 2월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은 일본에 협력을 구했고 일본은 얼씨구나 하고 군대를 파병했다. 6월에는 청일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승리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는다는 핑계로 거문도까지 내려와 정세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밝히는 그런 코미디 같은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봉수대 아래 쌓이 성터의 흔적
어쨌든 봉수대는 사방에서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방장산의 세 봉우리중 제일 낮은 산이지만 여기서는 정읍과 고창 그리고 장수가 잘 보인다. 물론 이 봉수대와 연결된 이웃 봉수대가 어디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의라고 생각된다. 전주에서 왔다는 산꾼은 나에게 봉수대 인증사진을 찍어주고 일정이 바쁘다며 먼저 방장산쪽으로 떠났다. 난 잠시 주변을 둘러 보고 점심 먹을 장소를 살펴보녀 정상쪽으로 향했다. 앞서간 박민기 군은 벌써 방장산 정상을 지났다며 일찍 내려가서 술한잔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바라본 백암저수지 방향 마을과 산줄기
길가 전망이 좋은 양지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아침에 먹었던 흰떡을 보온통에 꿀을 섞어서 넣은 것이 아직도 굳지 않았다. 단감과 사과를 몇조각 먹고 나니 배가 불끈 일어난다. 커피를 마시면서 멀리 백양산과 내장산 산그리매를 바라본다. 발 아래는 백양사역이 있는 장수군 북이면 백암리인가 보다. 작은 저수지 주위 농경지에서 출발한 산길이 길게 숲으로 이어진다. 숲에는 삼나무인지 편백나무인지 푸른 잎을 피운 나무들이 갈색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오른쪽으로 작은 산등성에는 잎이 져버린 참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는 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병아리 솜털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햇빛을 받아 물고기 비틀처럼 반짝거린다. 발아래에는 때늦은 구절초꽃이 두어송이 피어 있다. 모든 것이 한가로운 가을 풍경이다. 지나가는 산객들이 기분좋은 인사를 건넨다.
물고기 비늘같은 구름층
구절초 꽃이 아직도 피어 있다
백암 저수지 방향 - 저 너머로 내장산 줄기가 보인다
시간이 두시를 향해 걸어간다. 산악회 회원들은 모두 앞서 지나간 것 같다. 5시 30분까지 여유롭게 걸어가면 된다. 어짜피 온천욕을 할 생각은 없다. 요즘처럼 집에 샤워시설이나 목욕을 할 수 있는 탕이 있는데 굳이 시간에 쫒기면서 온천을 즐길 마음이 안생긴다. 방장산(743m) 정상은 금방 나타난다. 규모가 큰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나온 산 능선길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가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비친다. 이제 봉우리 두개만 넘으면 산행이 끝난다.
방장산 정상에서 바라본 봉수대 방향
앞서가던 회원 서너명을 만났다. 나처럼 여유를 부리면서 걷는다. 콘크리트 포장으로 잘 다듬어진 임도를 만나면서 이 산에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다는 걸 상기했다. 임도 옆으로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큰 왕릉같이 둥그스름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이곳이 억새봉(636 m)이다. 행글라이더 활공장으로 사용되는 펑퍼짐한 봉우리이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행글라이더를 즐기는 사람은 하나도 안보이고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기웃거리는 햇살만 잔디위에 가득하다. 희끄무레한 미세먼지 너머로 넓은 평야와 작은 도시가 보인다. 아마도 저곳이 고창인가 보다. 산행하기 전 집에서 지도를 봤을 때는 바다가 가까워서 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하였다. 지도에는 고창 너머 선운산이 있고 거기서 더 가면 변산으로 이어진다. 아직 변산에 가보지 못했는데 내년 봄에는 변산바람꽃이나 보러 가볼까 생각해 본다.
방장산에서 억새봉으로 가는 한적한 산길
길가에 군락으로 자라는 별꽃이 봄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겨울도 오지 않았는데........
편백나무 숲
억새봉으로 가는 길에 임도를 만난다.
억새봉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어 임도를 이용해 자동차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이곳에 제단도 마련해 놓고 시산제도 지내는 모양이다. 또한 시산제단 옆에는 큰 돌을 다듬어 방등산가시비(方登山歌詩碑)를 세워 놓았다. 방등산가라는 싯구를 새겨 놓았는가보다 하고 들여다보니 싯구는 없고 그 시에 대한 설명을 써 놓았다. 설명해 놓은 것을 읽어보니 방등산가는 이미 전해지지 않고 그 내용만 고려사악지에 써 있다고 한다. 내용인 즉슨 신라말에 도적이 나타나 마을의 양가 자녀들을 여럿 납치하여 이 방등산에 기거하였는데 그 잡혀온 사람중 장일현의 여자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빨리 와서 구해주지 않는데 대해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억새봉 정상
지나온 봉수대와 방장산이 보인다.
억새봉 행글라이더 활공장 뒷편 구석에 누군가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방등산가비
이 억새봉부터는 본격적인 하산길이 이어진다. 산행 날머리로 잡은 양고살재까지 2.7 km 이니 한시간 남짓 걸릴 것 같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니 버스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있다. 등로 옆으로는 산악자전거 코스도 만들어 놓았다. 포장된 임도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다가 울퉁 불퉁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는가보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박민기 군이 전화를 했다. 벌써 내려가서 육개장집에서 술마시고 있으니 빨리 내려오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지 멋도 없는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여유를 부려본다. 그러다 하산길에 있는 마지막 작은 봉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원래 산길은 봉우리를 우회하여 산허리를 감아 지르는데 선명하지는 않지만 산봉우리 정상으로 이어진 산길도 눈에 띄었다. 시간적 여유도 있는데다 기왕 산행을 하는 김에 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타보자고 나섰다. 조릿대가 울창하게 나 있는 길 아닌 길을 더듬어 봉우리를 넘었으나 이미 희미하던 발자국마저 없어지고 산 정상 아래는 바위 낭떨어지로 이어진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또 만만하게 앞으로 나갈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주변을 살피면서 경사가 그나마 조금 덜한 곳으로 나무를 잡아가며 걸었다.
한적한 하산길
산길에서 벗어나 험한 바윗길에서 만난 바위손 군락
양고살재로 내려서는 곳에서 다시 정상적인 등로를 만났다. 삼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바위 낭떨어지에는 바위손 군락이 펼쳐져 있다. 스마트폰에 깔린 등산앱인 램블러를 살펴보니 정상적인 등산로가 그리 멀지 않다. 다만 그 길에 이르는 산비탈 경사가 너무 급하다. 다른 쪽으로 돌아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정상적인 등로를 만났다. 짧은 구간이지만 길이 없이 잡목이 핧켜대는 통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4시 조금 넘어 날머리인 양고살재에 도착했다. 1636년 (인조 14년) 고창 출신 장군 박의(朴義)가 청태종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이곳의 고개이름을 양고를 죽인 고개란 뜻으로 양고살재라 불렀다고 한다.
미소사로 가는 길에 만난 개구리발톱 - 따뜻한 남쪽에만 자라는 꽃이다.
미소사 전경
미소사 경내에 자라는 마삭줄속에 속하는 백화등 덩굴
미소사에서 바라본 일몰풍경
버스가 서 있는 석정온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미소사에서 일몰을 보았다. 미소사는 꽤 넓은 터에 산신각과 종각을 포함해 고풍스런 한옥 건물이 3개 있고 스님이 기거하는 곳인지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도 두세채 보인다. 한 스님이 멋드러진 소나무 가지치기에 열중이고 보살님인 듯 한 여인이 그런 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석정온천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본 석양
석정온천
서울로 올라 오는 길에 정안 휴게소를 들렀다.
아직 식당에 앉아 소주와 얘기하고 있는 민기군을 만났다. 관광지 식당이 그러하듯 식당 메뉴판에 올라온 음식 이름이 구미를 당기지 않는다. 돈까스며 육개장이 있고 온면과 메밀국수가 올라 와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 혼재하는 걸 보면 전문적인 음식점이 아니다. 그냥 구색을 맞춰서 어쩌다 들르는 뜨내기 손님에게 먹이는 음식이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으나 서울에 도착하면 시장할 것을 생각하며 메일국수를 주문했다. 예상했듯이 별 맛이 없다. 여행지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 될 터이지만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멋진 여행의 흠이 될 수도 있다.
오후 5시 30분 예정대로 석정온천을 출발하여 밤 9시쯤 서울에 도착하였다.
첫댓글 ㅎ오늘 일 많이 하시네요~
방장산 함께해서 즐거웠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