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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발이라면 무척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당연히 자장면은 그 입맛 중 가장 상위에 속하리라.
그리고 음식에 대한 글이 많지만 특히 자장예찬에 대한 글이 많아 여기시리즈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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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탄)
자장예찬
심 종 은(j-e-sim@hanmail.net)
모처럼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싶어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는데, 아내가 일어나라고 성화다.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무조건 버텨볼 생각도 했었으나 여자들만의 모임이 하필 오늘 우리 집에 올 차례라고 해서 결국 밖으로 내몰렸다.
마침 점심때도 되었기에 조영구(연예인)가 운영하는 식당이 근처에 있다는 딸의 말에 이끌려 들어갔다. 요즘 젊은이들이 접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이 참에 모처럼 서양식 파스타를 접하게 되었다.
스파게티 종류도 많았으나 제일 싼 것이 만원이었다. 스우프가 나왔을 때만 해도 간이 맞아 그럭저럭 먹을 만했으나 정작 본 음식이 나오면서 우거지 인상이 되엇다. 차라리 중국집에 가서 자장이나 우동을 시켜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물을 곁들인 파스타를 맛있게 먹어대는 딸의 표정을 바라보며 수저를 들었으나 목구멍을 겨우 통과시킬 정도로 나로선 고역이었다. 얼큰하고도 시원한 짬뽕 맛이 오히려 눈에 선했으나 지금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단연코 자장면이다. 고교시절 방과 후에 우리는 문화극장 앞 싸구려 식당으로 몰려갔다. 식당 안은 비좁았으나 이곳은 지나가는 길목이라 언제라도 학생들로 만원을 이루는 곳이라 좀처럼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석진 곳에 빈 탁자를 발견하고 얼른 그 자리를 차지하며 신바람나게 외쳐댔다.
“아저씨, 여기 자장면 네 개 주세요!”
오랜만에 먹어보는 자장이다. 분식집인데도 자장면을 팔았다. 주인은 중국집에서 배달하다가 자장면 기술을 배워 독립한 것은 아닐까. 원조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런 대로 입맛에 맞는다. 내게 자장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중화요리라도 느끼하지 않으면서 깔끔한 맛이 있어야 아주 일품이다. 자장면의 별미는 역시 춘장이라고 하는 자장소스에 있다. 밀가루와 콩을 배합해 만든 메주를 소금물로 간을 해서 1년 동안 묵히는데, 직접 햇빛에 발효시켜야 독특한 장맛이 난다.
여기에다 감자와 고구마, 양파를 썰어 넣고, 계절 따라 오이, 배추 등 약간씩 재료를 달리하여 춘장과 함께 볶는다. 우리 식으로 변형된 한국인의 자장은 감자를 크게 썰어 넣고 장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볶은 춘장이 별도로 나오는 간자장을 시키면, 행여 조금이라도 뺏길 가봐 나오는 즉시 통째로 면 위에 쏟아 붓곤 했다. 한껏 배터지게 먹고 나서 돼지처럼 끅끅거리다가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밉살맞다며 눈총을 받았다.
어쩌다 혼자 식사를 하게 되면, 발길은 어느 새 중국집으로 향한다. 직장을 새로 옮기면, 중국집이 어디에 있나 그것부터 확인하려드는 버릇이 생겼다. 자장을 좋아하는 동료만 있으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주식은 자장면이다.
매일 매일 자장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을 남들은 괴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점심에 자장을 먹었어도 야근하면 또 자장을 선택한다. 그것을 먹어야 속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나로선 언제라도 질리지 않는 영원한 천상음식이다.
놀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겠으나 그것이 나만의 취향이요, 생태적 현상인 것을 어찌하랴만, 자장 먹는 걸 빗대어 속 시꺼먼 놈만 먹는다고 그걸 빗대어‘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우겨대는 사람도 있다.
변 색깔이 자장색으로 변하는 게 사실이겠지만, 심성마저 까맣게 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를 상기하며,‘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로 응수해 버린다.
그렇긴 해도, 자장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진짜로 병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변이 딴딴해지는 것이었다. 워낙 국물을 잘 먹지 않는 습관으로 차츰 변이 굳어지다가 결국은 바윗돌처럼 딴딴하져 버렸다.
변은 마려운데, 덩어리 앞부분이 너무 커서 항문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다. 아랫배를 움켜쥐며 강제로 힘을 주입하려는데, 그곳이 째어져 피가 흘러나오며 눈앞이 깜깜해진다. 얼굴이 발개지며 사태는 매우 심각해졌다. 눈물을 머금고 손가락을 동원했으나 시멘트 덩어리처럼 딴딴하게 굳어진 그것은 긁어도 쉽사리 패이지를 않았다.
간신히 처리를 끝냈을 때는 하늘이 노오랗게 변해 있었다. 그 이후로 엄청 겁을 집어먹은 건 사실이다. 이제는 자장을 먹고 나면 의무적으로 물을 한 컵씩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도 자장만큼은 내 입맛에 온전히 남아있다.
아들 또한, 아빠를 쏙 빼어 닮아 집에서도 혼자 꼭 자장을 시켜 먹다가 엄마한테 들켜 혼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랑 둘이 있으면 의기투합하여 공범이 된다. 자장을 먹고 싶어 사달라고 하면 한 번도 싫다는 소릴 해본 적이 없다.
엄마만 나가면 아들 방에 들어가 함께 자장을 시키던가 아니면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면발을 쭉쭉 끌어당기며 함께 자장을 먹는 맛이 우리의 행복이요 즐거움이다. 그런 솔직한 아빠의 모습을 아들은 더욱 좋아하는 눈치다.
자장을 맛나게 먹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식성마저도 같은 아들이 하도 대견해서 성큼 내 몫까지 덜어주었다. 그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진정한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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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탄)
자장 파티
심 종 은
“밥 먹고 합시다!”
한참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데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모든 시선들이 일제히 벽시계로 쏠렸다. 열두 시였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와르르〜 사무실 밖으로 몰려나갔으나 무엇을 먹을지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짧은 시간 내에 쉽사리 일치될 것 같지가 않았다.
‘청요리’로 하자고 내가 제안을 했더니 “또, 자장면이냐?”며 중국 음식에 넌덜이가 난다고 몇 사람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자장면이 어때서!”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만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앞장 서 걸었더니 모두들 시큰둥하면서도 따라오는 것이었다.
자장면뿐만이 아니다. 냉면부터 시작해서 쫄면, 우동, 짬뽕, 당면. 그 뿐인가 칼국수에 라면까지…. 국수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기에 밀가루 음식을 보면 질색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그들과 전혀 딴판이라도 내 식성인 걸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외식이란 건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나마 처음 먹어본 것이 고등학교 끝날 무렵이던가? 미도파 백화점에서 옷 장사를 하시던 큰 누님이 근처 중화반점에서 자장면을 사준 것이 아마 내 생애 최초의 외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시절 파나 마늘, 고추 등 양념이라면 골라내기 일쑤였던 내가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핥는 모습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매우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자장면에 대한 본격적인 식도락의 출발점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비싼 음식도 자장면보다는 못했다. 감기증세가 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질리는 일도 없었다. 비교적 작은 체구였지만 자장면만큼은 곱빼기를 먹어야 속이 든든했다. 자장면을 좋아하는 친구나 직장동료를 만나면 의레껏 중국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이었다.
주문한 자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자리에 남녀 한 쌍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입맛이 없는지 입에 께적대다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같이 온 남자가 먹는 것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 앞에 통째로 남겨진 자장면이 어찌나 먹음직스러운지 모르겠다. 기다리는 동안 허기로움에 더욱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그녀가 먹든 말든 상관 않고 혼자만 열심히 먹어대는 사내 녀석의 면상이 꽤나 밉살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직장에 첫발을 들여놓을 무렵에 시중에 처음 라면이 나왔었다. 공단이 막 생겨나고 신작로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때여서 사무실 주변에는 식당은커녕 밥을 대먹을 장소조차 없었다. 현지사정을 잘 모르는 초년병시절이라 점심은 늘 구멍가게에서 라면으로 때워야 했다.
고작 다섯 명뿐이라 직원들이 교육가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면 덤으로 숙직을 연 이틀 계속하게 되어 열 끼를 꼬박 라면으로 때워야 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러면 한 끼에 라면을 세 개씩 끓여 먹었다. 이렇게 라면으로 전쟁 치르듯 끼니를 때워야 했으니 몸 상태가 오죽했을까.
석 달이 넘어서자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런데도 계속 입맛이 당기는 게 마치 라면 중독증 환자 같았다. 3년여 만에 그 곳을 용케 벗어나지 않았다면 병원신세를 지고도 남았으리라. 그 라면 맛을 지금껏 입맛에 다져왔다. 요즘도 늦은 밤에 시장 끼가 돌면 아들, 딸하고 한통속이 되어 먹곤 한다.
애 엄마 몰래 함께 라면을 끓여 먹다가 들통이 나서 아빠체면이 깎이는 일도 있었으나 고요한 밤중에 몰래 끓여먹는 라면 맛은 정말 일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는 아내와 식성이 맞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일요일 점심때 국수나 라면을 먹고 싶어도 찬밥이 많다고 밥 먹기를 강요한다. 밥 많이 먹는 사람을 ‘밥보’라고 해서 지금의 바보가 되었다고 유래도 설명해 주었으나 밥 제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아내 입장에선 ‘억지’일 수밖에 없다.
‘모처럼 휴일이면 단 하루라도 대접받고 싶은 게 여자들 마음’이라며 밥 차려줄 생각도 않고 집안 일 시켜먹을 궁리만 했다. 그럴 바엔 나 혼자라도 밖에 나가 차라리 냉면이나 자장면을 시켜먹는 게 오히려 마음 편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들 녀석도 만만찮았다.
일요일이면 애 엄마만 빼고 아들, 딸하고 나랑 셋이서 자장이나 라면 파티를 곧잘 즐기는 편이었다. 라면이라도 이왕이면 자장면 쪽이 좋다. 아들이 요리사, 딸은 감별사, 나는 총 감독관이다. 한창 자장 파티를 벌이는 중인데, 뒤늦게 밖에서 돌아온 아내한테 현장을 발각당했다.
“찬밥이 밥통에 하나 가득한데, 또 라면 타령이네! 삼심(三沈)이 작당질하느라 나만 없으면 항상 문제라니까!” 떠벌리는 아내의 말에 멋쩍어하던 아이들이 엄마에게 달려들어 요리조리 간지럼을 태우며 아양을 떤다. 나도 곁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당신도 삼심(三沈)대열에 합류하지 그래?”
“그럼, 나만 빼놓을 수 있나요!”
성질내다가도 심술이 옮겨갔는지 어느 새 젓가락을 찾아들고 다가서는 아내다. 그 입가에 웃음이 맺힌 것을 보자, 둘러앉은 삼심(三沈)의 얼굴에서도 사랑스러운 미소가 여운처럼 방안에 훈훈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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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탄)
내가 좋아하는 자장면
심 종 은(j-e-sim@hanmail.net)
모처럼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싶어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는데, 아내가 일어나라고 성화다.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무조건 버텨볼 생각도 했었으나 여자들만의 모임이 하필 오늘이고 순번이 우리 집에 올 차례라고 해서 결국 밖으로 내몰렸다.
밖으로 나왔으나 정작 갈 곳은 마짱치 않았다. 마침 점심때도 되었기에 조영구(연예인)가 운영하는 식당이 근처에 있다는 딸의 말에 이끌려 들어갔다. 요즘 젊은이들이 접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이 참에 모처럼 서양식 파스타를 접하게 되었다.
스파게티 종류도 많았다. 가격은 제일 싼 것이 만원 가량이다. 처음 스우프가 나왔을 때는 간간한 게 맛이 좋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러나 정작 본 음식이 나오면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차라리 중국집에서 자장이나 우동을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해물을 곁들였다는 파스타를 딸은 맛있게 먹는 표정이었으나 나로선 입안을 겨우 통과시킬 정도로 고역이었다. 음식값은 자장이나 짬뽕 두 그릇과 맞먹는다. 얼큰하고도 시원한 짬뽕 맛이 오히려 눈에 선했으나 지금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단연코 자장면이다. 그외에도 냉면으로 시작해서 우동, 칼국수, 잡채면, 쫄면, 막국수까지 국수라면 밥을 젖혀두고 달려든다. 그 중 자장면이 내겐 최고의 기호식품이다. 예전엔 냄비우동을 주로 찾곤 했었는데, 특히 국물맛운 최고였었다.
집 근처 우동가게에서는 국물만 따로 팔기도 해서 밥맛이 없는 날이면 반 그릇에 국물을 담아온다. 거기다가 밥을 말아먹다 보면 배가 ‘볼록’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자장에 맛을 들이면서 우동은 자연적으로 차차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자장을 처음 먹기 시작한 것은 당연히 중화요리 집이다. 원래 인천은 청나라 시절부터 화교들이 많이 모여 살아 일찌감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장면이 인천에서 처음 만들어지게 된 연유가 되었다.
자유공원에서 인천역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화교들 애만이 다니는 중산학교가 나온다.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이 화교촌인데, 인천역 쪽에서 바라보면 길 건너편에 보이는 동네가 바로 그곳이다. 골목을 들어서면 입구를 가로막 듯 정면에 패루(牌樓)가 우뚝 서있는 게 보인다. 기둥 네 개로 받치고 선 대문의 지붕은 복층 구조로 높이가 11미터 가량이나 되는 전형적인 중국 건축물로 현판에는 중화가(中華街)라고 씌어있는데, 이곳이 바로 차이나․타운의 관문 노릇을 한다.
골목 안에는 바람결 따라 살랑대는 홍등(紅燈)이 보이고, 붉은 대문과 금빛 간판을 내건 중국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중국인 특유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번성하던 예전에 비하여 쇠락한 터라 그전과는 전혀 비할 바가 못되나, 한 때는 화교가 1만 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명맥이 남아있는 것을 추측하건대, 그 때는 고급 음식점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이 갈만하다.
자장면은 원래 산동 지방에 있던 작장(炸醬)이 변형된 것으로, 인천항 부두 근로자들이 점심시간에 많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최초의 중국음식점이라는 ‘공화춘’에서 우리 입맛에 맞춰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새로이 개발한 식품이라고 한다. 자장면은 특히 50~60년대 우리나라 외식문화의 길을 열게 만든 최초의 음식이 되었다.
산동 지방에서는 밭일을 할 때면, 새참으로 빵에다 대파를 춘장에 찍어 반찬처럼 함께 먹는 식습관이 있었다. 상술에 탁월한 중국인들이 빵 대신 면을 즉석에서 삶아, 미리 볶아둔 춘장과 함께 비벼먹는 간식을 처음 개발해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외식으로 자장면을 먹게 된 것은 순전히 누나 덕분이다. 큰누나는 미도파백화점에서 코너를 맡아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점심 무렵 우연히 그곳을 들렀다가 누님하고 백화점 앞에 있던 중국요리점에 가서 난생 처음으로 자장면을 먹게 되었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진짜 처음이었다. 쫄깃한 면발은 물론이고 소스까지도 입맛에 딱 맞았다. 누님들은 가끔씩 드시는 터라,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속을 때우는 정도였으나 나는 삼분도 안 되는 극히 짧은 시간에 그것을 다 해치웠다.
그런 후에도 부족한 듯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그릇을 넘보았다. 면은 물론이고 양념장까지 샅샅이 핥아먹는 모습에 식구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러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자장은 나의 단골 메뉴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는 단짝 친구가 넷 있었다. 키 작은 순서로 번호가 6번부터 9번이 주어졌다. 나는 그 중에 8번을 부여받았다. 우리는 서로 한 구텡이 책상에 몰려 앉아 우리들만의 황금성을 쌓았다. 담임선생님이 기말고사 성적표를 나누어주는데, 우리 반은 반 석차가 전체 석차를 차례대로 나열할 만큼 단연 우수반이었다.
학업성적이란 워낙 특출한 놈을 빼놓고는 늘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내가 삼십 등 밖에 쳐졌다가 한순간에 8등으로 급등했다. 뛰어 오른 덕분에 기분이 매우 흡족한 상태였다. 친구들하고 비교했더니, 상승폭은 과연 내가 제일 컸다.
두 놈은 현상유지 상태였고, 한 녀석은 소폭으로 올랐을 뿐이다. 물론 나보다 실력이 나은 녀석이 있었지만, 그 놈이야 근본부터가 우수한 족속이라 원래부터 내 상대가 아니었다. 내 딴엔 기쁜 마음으로 몹시 들떠있었는데, 이 녀석들이 머릴 맞대고 잠시 속닥거리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속인가 했더니, 성적이 많이 오른 사람이 한턱내야 한다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표정들이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친구들 간에 정리를 저버리기는 싫었다. 그 눈초리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분식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방과 후 우리는 문화극장 앞 싸구려 식당으로 몰려갔다. 식당 안은 비좁았다. 더구나 이곳은 지나가는 길목이라 언제 봐도 인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다행히 구석진 곳에 빈 탁자가 보이자 우리는 얼른 그 자리를 점령하고 주인을 향해 신바람 나게 외쳐댔다.
“아저씨, 여기 자장면 네 개 주세요!”
오랜만에 먹어보는 자장이다. 분식집에서도 자장면을 팔았다. 이 아저씨도 중국집에서 배달하다가 자장면 기술을 배워 독립한 것은 아닐까. 중국집보다 솜씨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입맛이 당긴다. 언제 먹어도 자장면은 질리지 않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자장면은 역시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음식점에 가야 제 맛이 난다. 값싸고 먹으면 언제나 든든하게 느껴지는 자장면. 한 끼 식사로는 만점이다. 면을 뽑는 것이 기계화되어 요즘은 손쉽게 요리할 수 있지만, 맛은 아무래도 수타면이 정성이 배인 손맛이라 기계면보다 월등히 낫다.
지금도 중구 북성동에 있는 자금성은 전국 최고의 자장면 전문점으로 손꼽히지만, 태흥루, 소림각, 산동반점, 북경반점, 영빈관 등 어느 직장이나 집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서도 역시 자장 맛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더구나,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면발이 마술처럼 여러 갈래 쏙쏙 빠져나올 땐 무척 신기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면발을 뽑는 묘기를 시범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방을 바라보고 있으면, 요리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를 반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반죽한 밀가루를 다듬어 길게 늘어뜨리곤 하는데, 그것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결코 닿지 않는다.
중화요리라도 느끼하지 않으면서 깔끔한 맛이 있어야 아주 일품이다. 자장면의 별미는 역시 춘장이라고 하는 자장소스에 있다고 한다. 밀가루와 콩을 배합해 만든 메주를 소금물로 간을 해서 1년 동안 묵히는데, 직접 햇빛에 발효시켜야 독특한 장맛이 난다.
여기에다 감자와 고구마, 양파를 썰어 넣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이, 배추 등 약간씩 재료를 달리하여 춘장과 함께 볶은 것을 전통 자장면으로 치는데, 우리 식으로 변형된 한국인의 자장은 감자를 크게 썰어 넣고 장도 제 맛이 나지 않아 별 수 없이 이름난 정통중화요리점을 찾게 된다.
자장면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좋아해서 한창 젊었을 때는 늘 곱빼기를 먹었다. 라면도 보통 세 개씩 끓여먹을 때니까 위대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먹어도 소스마저 전혀 그릇에 남아있지 않았으니 내가 생각해도 보통 좋아한 정도가 아니다.
볶은 춘장이 별도로 나오는 간자장을 시키면, 행여 조금이라도 뺏길 가봐 나오는 즉시 친구들도 먹지 못하게 통째로 면 위에 쏟아 붓곤 했었다. 한껏 배터지게 먹고 나서 불룩 나온 배를 보며 돼지처럼 끅끅거렸다. 그러다가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밉살맞다고 눈총을 받곤 했다.
요즘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자장면집도 상당히 많아 한국 음식업 중앙회에 등록한 업체만도 전국에 2만 4천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입맛에 맞는 곳을 능히 골라 다니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 많은 음식점들이 서로 경쟁을 함으로서 전국적으로 배달을 안 가는 데가 없다.
농촌에서도 끼니때만 되면 자장을 시킨다고 한다. 농번기가 되어 논밭으로 지고 나오던 새참의 풍속이 어느 새 바뀌어가고 있다. 농삿일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최근에는 자장면도 많이 개발되었다. 자장, 간자장은 보통이고, 소고기를 잘게 썬 유니 자장이나 새우를 첨가해 만든 삼선자장마저 이미 시대를 벗어난 요리가 되었다. 지금은 색깔마저도 특이하게 고추를 원료로 해서 만든 빨간 면이 나오지 않나 노란색, 쑥색 가지각색 자장이 선을 보인다.
식사시간에 여럿이 어울려 가노라면, 때로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밥 많이 먹어야 밥보 아닌 바보밖에 더 되랴. 한번쯤 자장을 먹고도 싶은데 젊은 친구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사를 하러갈 때면 주위와 보조를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따라는 가지만, 나 혼자라면 단연 밥보다 자장을 우선적으로 택한다.
어쩌다 혼자 식사를 하는 날이면, 발길은 어느 새 중국집에 가 있는 것을 본다. 직장을 새로 옮기면, 중국집이 어디에 있나 그것부터 우선적으로 확인하려드는 버릇이 생겨났다. 자장을 좋아하는 동료만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중국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주식은 자장면이다. 매일 매일 자장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을 남들은 괴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점심에 자장을 먹었어도 야근하면 또 자장을 선택한다. 그것을 먹어야 속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나로선 언제라도 질리지 않는 영원한 천상음식이다.
놀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겠으나 그것이 나만의 취향이요, 생태적 현상인 것을 어쩌랴. 자장을 먹는 걸 빗대어 속이 시꺼먼 놈만 먹는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그걸 빗대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며 시조를 인용하여 대꾸도 한다.
더군다나 자장을 먹으면 진짜로 변의 색깔이 시커먼 자장색으로 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듯이 얼핏 착각을 가져올 수도 있겠으나 심성마저 까맣게 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요즘 사회 구조를 보면,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라는 시조가 오히려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 다음 구절을 보더라도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로 이어지는 것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자장면을 매일 먹게 되면 대변색깔이 시커멓게 변색되는 걸 말릴 수 없다.
까치보다 훨씬 더 이로운 새가 까마귀라는 사실을 요즘 학설로 새로이 인정받고 있다. 까마귀의 진정한 고마움을 모르면서 선량한 이웃의 자그마한 잘못을 물고 늘어지는 속 검은 짓거리를 나타낸다. 그 잘못된 습성이 요즘 현실에 그대로 만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자장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진짜로 병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변이 딴딴해지는 것이었다. 워낙 국물을 좋아하지 않아 잘 먹지 않는 습성 탓으로 차츰 변이 굳어지더니, 결국은 바윗돌처럼 딴딴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변은 마려운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은 너무 대가리가 커서 항문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다. 아랫배를 움켜쥐며 강제로 힘을 주입하려는데, 그곳이 째어져 피가 흘러나오면서 사태는 아주 심각해졌다. 눈물을 머금고 손가락을 동원했다. 시멘트 덩어리처럼 딴딴하게 굳어진 그것은 긁어도 쉽사리 패이지를 않았다.
간신히 해결하고 났을 때는 하늘이 노오랗게 변해 있었다. 절대 싫다 소리는 안 하지만, 그 이후로 엄청 겁을 집어먹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자장을 먹고 나면 곧바로 물을 한 컵씩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도 자장만큼은 입맛에 온전히 남아있다.
아들 또한, 아빠를 쏙 빼어 닮은 것 같다. 집에 있어도 혼자 꼭 자장을 시켜 먹다가 엄마한테 들켜 혼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나랑 둘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엄마만 나가면 아들 방에 들어가 함께 어울려 자장을 시켜먹던가 아니면 함께 라면을 끓여먹곤 한다.
자장을 먹고 싶어 사달라고 하면 한 번도 싫다는 소릴 해본 적이 없다. 면발을 쭉쭉 끌어당기며 함께 자장을 먹는다. 국이나 물을 자주 먹으라는 말에 아들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지난날 겪었던 아빠의 경험담까지 솔직히 들려주는 게 다소 창피한 마음도 들지만, 솔직한 아빠의 모습을 아들은 더욱 좋아하는 눈치다.
자장을 맛나게 먹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식성마저도 같은 아들이 대견해서 성큼 내 몫까지 덜어준다. 그것마저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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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탄)
(수필)
맛없는 자장면
심 종 은
진짜 맛없는 자장면을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원래 자장면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경제사정이 호전되면서 외식문화가 싹이 텄고, 더욱이 자장면은 인천에서 최초로 발아된 식품이라 외식의 선두주자요 대명사라 할 수 있었다. 집에서도 그렇지만, 직장에서도 자주 자장면을 시켜먹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 그 날도 잔무가 많아 야근을 하게 되었다. 열심히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제공하고자 인근 중화식당에 가게 되었다. 언제나 내 입맛은 변함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밀가루 음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친구들도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끌려가곤 했었다.
진작부터 자장면은 나의 입맛과 찰떡궁합이었다. 먹어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 음식이라 외식이라고 하면 몇 년 전만 해도 자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만큼 옛날과 다름없이 아직도 자장면은 서민들과 가장 친근하면서 인기 있는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기적으로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터라 우리 사무실도 매 한 가지였다. 직원들이 싫든 좋든 무조건 자장면을 선택해야 했다. 상황이 그랬는데…, 우리가 애용하던 그 중국음식점도 역시 사정이 별반 좋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한꺼번에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이 반색을 했다. 메뉴판을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장면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메뉴에 불만이 있어 볼이 부운 친구가 몇 놈 있었으나 못들은 척 아예 무시해버렸다. 여건상 그들을 달랠 처지도 아니라서 주문부터 했다.
그래놓고 기다리며 앉았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 입에서 불평이 슬슬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갈수록 그 소리는 시간을 타고 자꾸 커져만 갔다. 식도에서 목구멍사이로 내뱉는 기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 먹성이 좋을 시기라 배고프면 참지 못하는 애숭이들은 한마디씩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역시 위장축소작용으로 허기에 시달려 배창자가 엉겨붙듯 했으나 대장 체면에 참는 중이었다. 좌중의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지면서 몹시 험악해져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주인은 몹시 ‘안절부절’이었다. 평소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눈이 자꾸 주방으로 쏠렸다. 잔뜩 긴장이 된 얼굴로 주방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방에다 대고 자꾸 재촉해봐도 ‘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우성 소리에 주인이 마지 못해 주방으로 들어갔으나, 나오는 얼굴빛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투로 물주전자랑 단무지 등을 내오고는 또 함흥차사다. 카운터자리로 되돌아가 앉고는 고개를 벽 쪽으로 외면한 채, 침묵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심통 난 직원들 몇 사람이 큰소리로 떠벌리자 이제는 아가씨들까지 소프라노 목청을 돋구어 합세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배창자가 졸아붙어 앉아있던 내가 오히려 불안해지는 마음이었다. 다른 데로 가고 싶었으나 여유 돈이 없을 만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별 수 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거의 구십도 각도로 휘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자장면을 담은 그릇이 나왔다. 자장이 나오자 배를 움켜 쥔 직원들이 서로 먹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들 있었다. 눈을 부릅뜨며 쳐다보고 있는 직원들의 눈초리가 몹시 사나웠다.
가장 먼저 내 앞에 보냈지만, 가장 등치 좋은 직원들 쪽으로 그릇을 떠밀었다. 윗사람 대접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동료 간에도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난 몹시 시장하여 침이 돌았지만 눈을 꼭 감았다. 직원들 앞으로 모두 배달되고 난 후에야 수저릃 들었다.
편안한 마음이 되어 점잖게 면발을 끌어올렸다. 입술에 닿자 시장 끼가 발동하여 체면치레도 생각 않고 입에 쑤셔 넣기 바빴다. 오로지 먹느라 모두들 한눈 팔 시간도 없었다. 얼마나 면발을 물어 삼켰을까. 갑자기 어느 식탁에선가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이게 뭐지?”
한 직원이 먹고 있던 입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높이 쳐들었다. 그 끝머리에는 코르크 마개 같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야, 별 거 아냐, 배고픈데 참고 먹어두어라. 다 약이 된다. 그냥 먹어둬!”
누군가가 소리쳤다. 더구나 거의 태반은 무슨 소리가 들리든 말든 식사하기에 바빠 쳐다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우거지 인상을 쓰고 있던 직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래도 시장한 터라 마지 못해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라~, 이건 또 뭐야!”
이번엔 찌그러진 병 뚜껑이 그 직원의 손끝으로 집혀 나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앞자리에 있던 직원도 덩달아 무언가를 불쑥 앞으로 꺼내놓는다.
“요것 봐라. 이 건 비닐 껍데기잖아…”
여기저기서 우리가 먹던 음식 안에서 이물질이 자꾸 발견되는 것을 보자, 한 녀석이 캑캑거리며 음식을 토설하느라 발광을 해대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자 주인 여자가 깜짝 놀라 부리나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음식 안에서 이물(異物)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주방으로 쫓아갔다.
그러지 않아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워낙 시장해서 나 역시도 정신 없이 뱃속으로 기계적으로 쑤셔 넣었을 뿐이다. 주인은 미안하다며 서둘러 3인분을 다시 만들어 바꾸어 주었다. 소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그릇 속에 담겨진 음식이 거의 비어질 무렵이다. 내 입안에서도 딱딱한 물체가 목구멍에 걸리는 듯했다. 캑캑거리다가 얼른 손가락을 넣어 잇새에 걸린 물체를 꺼내들어 바라보았다.
“우-어-억!”
이 건 도저히 말도 안 된다. 이빨과도 부피가 맞먹는 거무스름한 쇳덩어리 같은 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누가 봐도 쾌심한 생각을 들게 만드는 분명 큼직한 돌멩이였다.
“아니~ 누가 음식에다 바윗돌을 처넣고 그래, 도대체 무슨 짓거리야!”
자장면이라면 환장해서 국물조차 깨끗이 비워놓는 습성이다. 그래야 뱃속이 시원해진다. 자장면을 좋아한 나만의 특성인데, 이번만큼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몸살이 너무 심해서 겨우 몇 젓갈 먹다 남긴 이후로 자장면을 남겨놓는 일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처음 직원이 이물질을 들추어낼 때만 해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연거푸 여기저기서 이물질이야기가 터져 나오면서 비위가 상했으나 워낙 출출한 터라 뱃속으로 씩씩하게 받아들였는데, 직접 당하자 속에 삼킨 음식들이 오히려 나오려고 요동을 친다.
이제 와선 식욕이 완전 나락으로 가라앉아 수저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직원 것까지 연상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입안에서 개 거품마저 빠져나오며 방금 먹은 음식마저 도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주인 여자가 더욱 민망해서 또 다시 만들어 내온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식상한 마음에 다시 그것을 주어 삼킬만한 여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심상 거래하던 식당에 돈을 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음식점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니, 영업이 잘 안되어 주방장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심통난 주방장이 주인 여자를 골탕 먹이려고 저지른 엉뚱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주방장의 행실이 너무 괘씸했으나 주인도 미웠다. 속은 상했으나 마지못해 음식값을 치르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속이 불편해서 그날은 종일 기분이 엉망이었다. 모두들 기분이 그랬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 집에 가려는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자장면을 좋아해서 거의 날마다 주문해 먹던 친구들도 학질 떼우듯 진절머리를 쳤다. 밥보다 자장면을 좋아하는 나도 역시 이번만큼은 두 손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이 없는 자장면이 바로 이곳에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던 게다.
누님의 손에 이끌려 외식하러 들어간 곳이 자장면 집이었고, 난생 처음 중화요리점에서 자장면을 먹은 이후로는 이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이 좋은 지상 최고의 음식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게나 꿀맛처럼 여기던 자장면의 환상적인 미각이 허망하게 망가뜨려 놓는 순간이었다.
주로 먹어왔던 추억의 맛배기 자장 맛은 잃었지만, 요즘에도 자장면을 가끔 즐기기는 한다. 하지만 점차 입맛이 고급화되는 현상을 빚으면서, 동네음식점을 벗어나 중국집도 명소만 찾게 되는 것이었다. 입맛을 찾으려면 시내 중심가 고급 요리점이나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취향에따라 독특한 맛을 보이는 것이 자장면이다. 한 단계이상 미각의 품격이 높아지면 유니나 사천 자장 등을 즐겨먹는다. 서민의 애환을 담아 빚어내던 그 진한 맛은 아직도 내게 그리움으로 남아 있지만, 입맛은 갈수록 부르조아 현상을 빚고 있다. 소문난 곳이라면 무조건 별미를 찾아다니는 습성이 내게도 차츰 젖어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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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에 대한 색다른 맛을 잘 감상하셨나요?
※ 작가 약력 소개
0 한국문인협화 및 인천문협회원 시분과 회원
0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및 인천펜클럽 회원,
0 제2대 갯벌문학회 회장과 초대 서곶벌 및 부평뜰문학회 회장 역임
0 3대,7대 청라문학회(서구문학회 후신) 회장 역임
0 7대 서구문화예술인회 회장 역임
※ 현주소)404-807인천광역시서구가좌2동81-22현대아파트5동406호,(HP)010-5117-7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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