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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도장(導掌)
정의
궁방에 소속된 농장의 전세 등을 대신 징수하거나 궁방전을 관리하던 궁방의 청부인.
개설
조선 중종대 이후, 궁방(宮房)에서 토지와 어전·염분에 대한 세금을 거두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궁방에서는 이들 토지나 어전·염분·노비 등에 대한 수세(收稅)를 위해 소속 하례(下隷)를 직접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도장’이라고 하였다. 궁방에서 관리하는 장토(莊土)가 형성되면서 도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도장은 성격이 바뀌었다. 궁방에서 직접 파견한 하례에 대해서는 궁차(宮差)라 부르고, 도장은 조세 청부인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현종실록』 1년 10월 7일].
하나는 이 시기 공인 계층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궁방전이 형성되는 초기에는 궁방 소속의 하례를 직접 파견하는 방법과 공물 청부인인 공물주인(貢物主人)에게 의뢰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후 공물주인이 대행하는 궁방전의 조세 청부가 하나의 독자적인 이권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를 대행하는 청부인들은 국가의 공물주인 업무와 구별하여,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사용된 명칭이, 궁방 소속 하례를 부르던 명칭인 도장이었다. 그러면서 궁방에 속하지 않은 조세 청부인은 도장이라고 부르고, 궁방에 소속된 직원으로 조세를 징수하는 업무를 맡은 이들은 궁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궁차와 도장을 구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궁방전의 형성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즉, 궁방전은 궁방의 재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궁방 외부인의 도움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궁방에서는 궁방전 형성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대가를 줄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주로 조세 청부와 궁방전의 관리 운영을 위탁하였다. 이들이 곧 도장으로, 이들은 궁방의 직원은 아니었다.
내용 및 특징
도장이 되려면 궁방에서 지급하는 임명장인 도서첩문(圖書帖文)이나 완문(完文)을 받아야 했다. 임명장에는 도장으로 임명하는 이유와 직무를 기록하였고, 도장권의 처분은 도장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지에서의 임무 수행과 도장권의 상속·전매를 위해서는 이러한 첩문이나 완문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도장에 임명되는 방법은 궁방전의 형성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우선 궁방에서 직접 재원을 마련해서 새로운 궁방전을 개설할 경우였다. 이 경우 도장이 되기 위한 가장 흔한 방법은 일정한 금액을 상납하고 도장에 임명되는 것이었다. 혹은 궁방전을 마련하는 재원의 일부를 부담하거나 또는 소유권이 불분명해진 궁방전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워 도장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자기의 토지를 궁방전에 투탁하는 경우였다. 이는 무거운 조세 부담이나 관리들의 침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방전에 가탁하는 것이었는데, 이 경우에도 도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국가에서 이러한 투탁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문서상으로는 일반 도장과 동일한 형식의 임명장을 받고 도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장은 조세 청부인은 아니었고 지주에 가까웠다.
도장이 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거주 지역은 상관이 없었다. 다만 지적·경제적으로 도장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였다. 그리하여 도장은 어떤 신분, 어느 지역 사람인가를 막론하고 궁방의 청부와 궁방전 관리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 궁방과 지방관청·궁방에 소속된 농민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구비한 사람들이 발탁되었다. 다만 궁방에서는 도장의 임명이나 관리를 위해 도장방(導掌房)을 설치하였고, 각 궁방전마다 20명 내로 도장 수를 제한하려고 하였다. 한 지역 내에 도장이 여러 명일 경우에는 이들 내부에 도장도중(導掌都中)이라는 기구가 조직되어 여기서 이들 하나하나가 수행할 일을 맡아 하였다.
도장의 임무는 수세 상납이 주였고 그 밖에 장토의 관리도 포함되었다. 궁방에 상납할 금액은 처음에 규정된 액수가 있기 때문에, 도장은 반드시 그 액수만큼은 상납해야 했다.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일에 대한 값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를 맞거나 옥에 갇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장토민의 농업 경영에도 간여하여 보다 많은 생산을 올리도록 독려하였다. 한편 흉년 등의 사정으로 토지가 묵히거나 생산이 줄어들어도 규정된 세액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많이 거두는 폐단도 있었다. 또 감관(監官)이나 마름 등이 소작인과 결탁하여 항조(抗租)나 항세(抗稅)를 하면 그에 대한 처벌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임무를 다하면 궁방에서 상당한 보수를 지급받았다.
이들은 청부인이었기 때문에 궁방과의 관계는 자유로웠으나 실제로는 궁방에 대해 예속 관계에 있었다. 반면 이들은 장토민에 대해서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지급되는 보수 외에 불법적인 침학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도장의 수세 상납 권리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공물주인이나 여각주인(旅閣主人)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매매되었다. 그러한 매매 관계에서 정상적인 장토의 도장권이면 값이 늘 올랐다. 그러한 도장권을 얻는 것을 마치 좋은 벼슬자리를 얻는 것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Ⅰ·Ⅱ』, 일조각, 1990.
도진순, 「19세기 궁장토에서의 중답주와 항조: 재녕 여무평장토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3, 1985.
박준성, 「17·1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소유 형태의 변화」, 『한국사론』 11, 1984.
도장(島長)
정의
울릉도 거주민의 보호와 관리 및 일본인들의 무단 침탈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직 내지 명예직.
개설
조선후기 울릉도(鬱陵島)는 삼척영장(三陟營將)과 월송만호(越松萬戶)가 돌아가면서 관리하던 곳이었다.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이민과 개척보다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일본인이 울릉도의 삼림과 해산물을 절취해 가는 사태를 야기하였다. 1881년(고종 18) 5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일본인의 무단 벌목을 금하고 일본 외무성에 항의한 뒤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로 임명해 조사하도록 했다. 이규원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산도(芋山島)와 송죽도(松竹島)로 보고하였고 우산(芋山)이란 바로 옛날 우산국의 국도(國都) 이름이며,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쯤 된다고 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식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1882년(고종 19) 정부 차원에서 부세와 요역을 감면해 주는 울릉도 개척이 시작된 후 농업과 어업 개척인이 증가하고 농지가 개간되었다. 1882년 8월 20일 울릉도의 제반 사무를 임시로 담당할 도장(島長)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1896년(건양 원년) 울릉도의 11동 저포동, 도동, 사동, 장흥동, 남양동, 현포동, 태하동, 신촌동, 광암동, 천부동, 나리동 등의 호구 수는 277호 1,134명으로 남자 662명, 여자 472명이었다. 개간 농지는 4,774.9마지기였다. 1883년(고종 20) 16호 45명, 310마지기와 비교하면 인구는 21배, 농지는 15.3배 증가하였다.
울릉도 개척의 성공으로 기존 수토(守土) 제도의 개편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후 도장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1888년(고종 25)부터 강원도의 만호가 울릉도도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겸임도장은 매년 울릉도를 수토하고 토산물을 바치며 호구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조선의 적극적인 울릉도 개척은 점차 정식적인 지방 관제를 정착하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이에 따라 1895년(고종 32) 박영효의 건의로 월송포만호가 울릉도장을 겸임하던 것을 폐지하고 울릉도전임도장을 두어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담당 직무
울릉도 도민의 관리와 농지 개척 권장, 일본인과의 문제 해결 등 울릉도와 관계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도장이 활동하던 시기인 1895년이 청일전쟁이 벌어지던 때이므로 일본인의 불법 행위를 막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변천
1884년(고종 21) 1월 11일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道開拓使) 김옥균은 일본인들이 도장의 표빙(票憑)을 가지고 나무를 도벌해 간다면서, 당시 도장 전석규(全錫圭)가 금지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익을 탐내어 법을 위반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1888년(고종 25) 평해군(平海郡) 소속 월송진만호(越松鎭萬戶)의 자리를 만들어 도장을 겸임하게 해서 울릉도를 왕래하며 검찰(檢察)하도록 했다. 1895년 월송만호가 겸하던 도장을 별도로 독립된 도장으로 두어 업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1895년 8월 도장제가 판임관 대우의 도감제(島監制)로 바뀌었다. 첫 번째 도감은 울릉도 개척 초기 입거한 인천 영종도 출신 배계주(裵季周)였다. 1900년 칙령 제41호로 강원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였다.
참고문헌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
이규원, 『울릉도검찰일기』
면주전(綿紬廛)
정의
조선시대 국내산 견직물을 취급, 판매하던 육의전(六矣廛)의 하나.
개설
면주전은 국내산 비단을 판매하는 대신 정부관서의 각종 시역(市役)을 지던 유분전(有分廛)의 하나이다. 후에 중국산 생사(生絲)의 수입 및 판매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立廛)과 국내산 면포를 취급하는 백목전(白木廛)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시전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시전은 왕실과 정부관서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한편 도성민들의 생활물품을 공급하는 시장기구로 기능하였다. 건국 초 정부에서는 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도성에 1,000여 칸의 시전행랑을 지어 특정 상인에게만 상업을 허용하고, 이들에게 상세(商稅)는 물론 왕실의례와 국가행정에 필요한 제반 역을 수행하게 하고 여타의 물품도 제공하도록 하였다.
조선전기의 시전으로는 면주전 외에도 어물전(魚物廛), 목화전(木花廛), 면자전(綿子廛), 마전(馬廛), 모전(毛廛) 등이 확인되지만, 1551년(명종 6) “우리나라의 모든 물건은 모두 시전에 있다[我國百物 皆有市廛]”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도성에 각종 시전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정부로부터 금난전권(禁難廛權)을 부여받은 시전이 늘어나고 한편에서는 이들의 교역활동을 침해하는 난전, 도고상인들이 부상하면서 시전상업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주전은 세 번째로 큰 유분전으로 연이은 통공정책 속에서도 금난전권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누렸다. 이로 인해 19세기 면주전의 운영에 있어서의 위기는, 사상(私商)의 성장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금난전권을 부여한 정부와의 조달 관계에서 야기되었다.
조직 및 역할
면주전의 주요 업무는 정부관서와 왕실에 비단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또 대청사행에 지참하는 세폐(歲幣)와 방물(方物), 청국사신에게 제공하는 예단(禮單), 부산에 거류하는 왜인사절과 막부(幕府)의 장군에게 보내는 예단을 마련해야 했으며, 호조의 요구에 따라 그때그때 납품하는 명주인 토주(吐紬)와 수주(水紬), 상주(上紬)도 진배해야 했다. 이밖에 시역으로서 궁궐이나 종묘, 한성부 등에 수선과 창호지 도배, 세폐 방물의 포장, 국왕의 거둥 시 잡역, 왕실 행사 때 의막 설치 등을 담당하였다.
면주전의 조직을 살펴보면, 면주전 전체의 주요한 운영자금을 관리하는 보용소(補用所), 보폐소(補弊所) 외에 세폐계(歲幣契), 왜단소(倭單所), 수주계(水紬契), 토주계(吐紬契), 상주계(上紬契) 등 물품을 조달, 납품하는 조직과 생식계(生殖契), 무주계(貿紬契), 호장소(護葬所) 등 구성원의 상호부조를 담당하는 하위기구가 다수 운영되고 있었다.
변천
면주전 운영에서의 위기는 1880년대에 이르러 가시화되었다. 19세기에 작성된 『수가책(受價冊)』들을 살펴보면 면주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여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대금이 원가 이하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이마저도 정부에서 제때 지급하지 않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에 19세기 후반부터 면주전은 정부조달에 있어 배타적인 영업 이익을 누리기보다, 손실이 누적되는 경향을 보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육의전에 허용되던 배타적 특권이었던 금난전권은 소멸되고 공납제 체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면주전의 견직물 납품은 개항과 한일병합의 격변 속에서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고동환, 「개항 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면주전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박평식, 『朝鮮前期 商業史硏究』, 지식산업사, 2009.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오언 밀러(Owen Miller), 「시전-국가 간 거래와 19세기 후반 조선의 경제위기 : 綿紬廛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민비공물(民備貢物)
정의
중앙 각사에 납부하는 공물 가운데 각 군현의 민가에서 거두어들여 상납하는 공물.
개설
공물은 중앙의 호조 및 각사, 외방의 각도와 각관에 비치된 공안(貢案)에 의거하여 대개 각사 → (각도 감사) → 각관 수령 → 각면(各面) → 각호(各戶)의 체계로 부과·징수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공물 중에는 해당 군현의 관부에서 공물을 준비하는 관비공물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각 군현의 민가에서 수취하여 상납하는 민비공물이었다.
내용
민비공물은 수령이 현물로 징수하거나 민정(民丁)을 사역하여 조달하였다. 민호에 공물을 분정할 때에는 각 집마다 일률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등급을 나누어 적용하였다. 민가에서 경작하는 토지[所耕田]의 많고 적음에 따라 5등호로 나누어 공물을 수취하는 원칙이 시행된 것은 1435년(세종 17)이었다[『세종실록』 17년 3월 6일]. 이후 공물도 이에 근거하여 분정한다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가호의 크고 작은 정도에 따른 공물 부담액이라든가 부과율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군현의 관리들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공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공물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기 때문에 설사 가호의 규모에 따라 공물을 분정한다 해도 균일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것이 5등호제의 제도적인 미비점이자 결함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8결작공제(結作貢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박도식, 「조선전기 8결작공제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 89, 1995.
이성임,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분정과 수취: 경상도 성주(星州)를 대상으로」, 『역사와 현실』 통권 72호, 2009.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어의」, 『한국사학보』 제34호, 2009.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방납(防納)
정의
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공물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代納)하고 보상받는 행위.
개설
방납은 백성이 준비할 수 없는 공물을 대신 바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대납(代納)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물건까지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공물 대납의 허용은 이미 『속육전』 단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백성이 준비할 수 없는 공물에 한해 일부 특수 기관 혹은 불사(佛事)와 관계된 간사승(幹事僧)에게 부분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다.
공물 대납에서 하나의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은 세조대부터였다. 1461년(세조 7) 정월, 공물 대납은 공물 부담자와 대납인과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허용되었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대납 금액은 수령이 중간에서 조정하여 민가에서 값을 받아 대납자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희망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대납하는 방납 행위, 대납 금액을 정가(定價) 이상으로 징수하는 행위, 청부인이 관에 신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직접 민가에서 대가를 징수하는 행위는 금지하였다. 그러나 세조대에 허용하였던 대납은 예종이 즉위하면서 반포한 교유(敎諭)에 따라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그 후 『경국대전』에 “공물을 대납한 자는 장(杖) 80대, 도(徒) 2년에,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연원 및 변천
각 군현마다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이념에 따라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가운데는 토산물뿐만 아니라 그 군현에서 나지 않는 불산물(不産物)도 속해 있었다. 한편 공물로 제정될 당시에는 생산되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것도 적지 않았다. 또한 활[角弓]·배[船隻]와 같은 공물은 민가에서 쉽사리 준비해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활 하나를 만드는 데는 3~4마리 소와 말의 힘줄[筋]이 필요하였고,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선재(船材)와 공역(功役) 및 기술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민가의 대부분은 쌀이나 포[米布]를 거두어 무역하여 상납하였다.
각 군현의 수령은 공안(貢案)에 의거하여 당해 군현에 부과된 공물을 마련하였고 공리(貢吏)는 이것을 납부하였다. 공리가 각사에 공물을 상납할 때에는 당해 군현의 수령이 발급한 공물 명세서인 진성(陳省)을 첨부해야만 하였다. 진성은 전적으로 수령의 관장 하에 발급하였기 때문에 이를 얻으려면 수령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였다.
간사승은 최초로 합법적인 방납 활동을 허용받았다. 이들은 왕실·종실의 비호 아래 방납을 행하였기 때문에 진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였다.
공물은 각 군현 단위로 분정되었기 때문에 왕실·중앙의 각사에 대한 수송과 상납의 책임은 수령에게 있었다. 특히 공물의 납(納)·미납(未納)은 수령의 해유(解由)에도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다. 한 군현의 수령이 중앙의 6사(司) 이상에 미납할 경우 파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공물 상납의 책임을 맡았던 수령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부상대고와 결탁하여 방납하기도 하였다.
권세가들은 수령보다 상위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권세를 이용하여 수령에게 강제로 요청하여 진성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권세가들은 직접 방납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부상대고와 결탁하여 방납하기도 하였다.
부상대고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수령·각사 이노(吏奴)에게 방납에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주거나, 지방관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승려 등과 결탁하여 방납에 종사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대납이 공인됨에 따라 부상대고의 활동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양성지는 국가 재정에서 공물이 전체의 6/10을 차지하는데, 공물 상납은 거의 대납에 의한 것이며 그 대납의 대부분이 부상대고에 의해 납입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원래 대납 허용의 취지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돕게[有無相資]’하여 공사(公私)에 적절하고 편리하게 하는 데 있었다[『세조실록』 14년 6월 18일]. 그런데 수령이 권세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백성들이 쉽게 준비할 수 있는 물품까지도 강제로 문권(文券)을 만들어 권세가와 결탁한 부상대고에게 대납을 허용하였다. 그러면 부상대고는 관의 세력을 빙자해 마을을 횡행하면서 직접 대납 금액을 징수하여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각사의 이노는 공물 수납을 담당하였던 실무자라는 점에서 방납 활동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469년(예종 1) 6월 공조판서 양성지는 이들이 그 실무를 빙자하여, 생초(生草)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푸른 풀을 시들었다 하여 물리치고, 돼지 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살찐 돼지를 수척하다 하여 물리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남문으로 물리쳤던 생초를 서문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기르던 돼지는 대납하며 또 물리쳤던 돼지는 자기 집에서 길러 나중에 대납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이들은 공리가 바치는 공물이 아무리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온갖 꾀로 물리치고 방납을 자행하였다. 각사에 공물을 상납하지 못한 공리는 견책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각사 이노에게 많은 월리(月利)를 지급하고 요구를 들어 주고서야 공물을 겨우 바칠 수 있었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각사 이노의 활동을 문제 삼아 이에 대한 처분을 제정한 것은 1524년(중종 19)에 와서였다. 이해 여름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백성이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변방에 죄인을 들여보내 부족한 인구를 채우려는 전가사변죄(全家徙邊罪) 12조를 제정하였다. 방납 행위도 그중 한 항목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납 활동은 더욱 확대되어 명종대에 이르면 각 고을에서 정공(正供)하는 물건은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사주인(私主人)은 공리와 결탁하여 방납 활동을 하였다. 사주인과 공리의 결탁은 세조대 이전에 이미 나타나지만, 1471년(성종 2)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사주인과 공리 등에 대한 단속·감독의 강화와 함께 처분·제재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
방납은 16세기에 들어와 지주층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일이 성행하면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토지 지배 관계의 기본적인 경향은 수조권적 지배에서 소유권적 지배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는 바로 지주제 확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경제 변동 아래에서 이익을 누린 층은 척신을 중심으로 한 권세가 및 궁가에 치우쳐 있었다. 척신을 비롯한 권세가들은 권력이 강대한 만큼 그것을 이용한 경제적 사익 추구도 활발하였다. 이들은 시전상인들을 통하여 교역품을 처분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들이 획득한 부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여 해외무역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특히 방납은 그들의 대표적인 경제활동의 하나였다. 당대의 실권자인 권세가들은 모리 수단으로 수령들에게 직·간접으로 방납을 강요하여 방납 활동의 주체자 혹은 배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개가 시전상인과 연결하여 방납에서 이득을 얻고 그 이권을 뒷받침해 주는 관계를 가졌다. 당시에는 이것이 하나의 추세였다. 방납의 대상 물품도 각사의 공물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왕에게 바치는 어공(御供)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들은 방납을 통해 몇 배 이상의 이익을 얻었고, 농민은 파산하여 떠도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방납은 심한 수탈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가에서 법으로 금하는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 단속하였다. 방납인을 처벌하는 법으로는 북방으로 전 가족을 보내는 전가입거(全家入居)나 사형 등의 강력한 형벌이 있었다. 그러나 방납은 근절되기는커녕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방납이 국가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차 더 확산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적분화라는 현실적인 측면이 작용하였다. 당시에는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경연작(常耕連作)이 가능해졌다. 연해지·저습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수전 농업이 확대되었고 목면 재배도 성행하였다. 이와 같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가 소득을 늘리고 이에 따른 잉여를 창출하여 농민의 유통경제가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농민의 입장에서도 공물 조달이 농사에 커다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자구책으로 가장 쉽게 채택할 수 있는 것이 대납이었다. 특히 왕실·정부의 필요에 따라 상납해야 하는 별공(別貢)·불시진상(不時進上) 등의 물품은 납부 기한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이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대납이 불가피하였다.
공납에서의 대납·방납의 보편화는 당시 성장하던 유통경제와 농민의 경제활동을 결합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유통경제의 대표적인 매개물로는 쌀과 포를 들 수 있는데, 공물의 대가로서 쌀·포를 거두는 형태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쌀·포가 농민 사이에서 교역의 매개물로 사용된 것은, 이것들이 농민 생활의 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지배층의 주된 수탈 대상물로 누구에게나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면화 재배가 널리 보급되면서 면포는 농민들의 의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면포는 민간 사이의 거래나 부세 납부에서 마포(麻布)를 밀어내고 정포(正布) 혹은 상포(常布)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방납의 매개물은 16세기 초까지 면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쌀과 포가 병용되다가 지역적 편의에 따라 산지[山郡]는 포(布), 바닷가[海邑]는 쌀로 고정되어 갔다.
결국 국가에서도 당시 발전하는 경제 체계 속에서 점차 비중이 커져 가고 있던 방납 행위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리를 제거하고 상품유통 경제와 수공업의 발달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에서 수용하여, 물품[本色] 대신 교환수단인 쌀·포로 수취하는 합리적인 운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는 물품보다 쌀·포로 바치는 것이 농민에게 편하고 이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농민은 농사만 짓고 공물은 그것을 생산하는 자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 재정상으로나 혹은 농민 경제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각 군현의 전결 수를 헤아려 공물의 종류·물량을 분정하고 가격을 결정하였다. 이를 사대동(私大同)·대동제역(大同除役)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의 수취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공물 금액 징수의 확대·정착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율곡 이이는 해주 지역에서 행해지던 전지 1결마다 미 1두를 거두는 수미법(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한다면 방납의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는 농민에게는 물품보다 쌀을 바치는 것이 편하고 이롭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내용
방납은 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물건까지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방납 모리배들은 정치권력을 매개로 교역에 기생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특히 흉년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했을 때에는 그 틈을 타서 더욱 많은 이익을 얻었다. 방납이 그들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를 담당하는 농민에게는 가혹한 수탈 행위로 작용하여 파산·유망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전기 위정자들은 일찍이 공물 방납이야말로 민생에 폐해를 끼치는 모리 행위일 뿐만 아니라 왕조의 현물 재정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이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발전하는 경제 체계 속에서 방납은 점차 비중을 높여가고 있었다. 결국 국가는 방납 행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용함으로써 본색공물(本色貢物) 대신 교환 수단인 쌀과 포로 수납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대동법은 생산물의 현물 징수가 미·포·전을 매개로 전세화되는 부세 형태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전의 본색공물 대신 관용 물자를 시장 구조를 통해 구매·사용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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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方物)
정의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로 왕과 왕비 등 왕실에 바쳐지는 예물.
개설
진상은 지방(地方)의 토산물(土産物)을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다가와 고조[田川孝三]는 진상을 물선(物膳)진상, 방물(方物)진상, 제향(祭享)진상, 약재진상, 응자(鷹子, 매)진상, 별례(別例)진상의 6종류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에 왕이 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예물도 방물(方物)이라 하였다. 제후가 다스리는 지방의 토산물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방물이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방물은 매년(해마다) 바치는 공물이라는 의미에서 세공(歲貢)이라고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방물은 명일(名日)방물, 행행(行幸)방물, 강무(講武)방물, 칭경진하(稱慶進賀)방물로 나뉘었다.
이중 명일은 명절과 축일을 가리켰다. 설날·원단(元旦)인 정조(正朝), 국왕 탄생일, 왕비 탄생일, 동지, 정월 초이렛날인 인일(人日), 단오, 입춘, 유두, 추석, 동지 뒤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 삭망 등이 속하였다. 특히 정조와 왕 탄생일, 동지를 합쳐 삼명일(三名日)이라 불렀다. 이러한 명일 때 중앙에서는 대소 조회(朝會)를, 지방 각 관에서는 하례를 거행하였으며, 왕실에 대해 진하하는 전문(箋文)과 함께 지방의 토산물을 방물로 바쳤다. 명일방물은 갑옷·활·창·화살·칼 등 무기류와 모피가 주종을 이루고, 이 외에 대구·전복·김 등 수산품이나 기타 물품 등이 봉진되었다.
행행방물은 왕이 선왕·선왕비의 왕릉을 참배하거나, 휴양 및 그 밖의 목적으로 행차할 때 해당 지역 감사·병사·수사·수령 등이 직접 또는 차사원(差使員)을 보내 문안하면서, 예물로 바치는 토산물이었다.
강무방물은 강무할 때 토산물을 방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강무는 열병(閱兵)과 습진(習陣)으로 이루어졌다. 1년에 봄·가을 두 번 거행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중앙에서는 왕의 주관 하에, 외방에서는 관찰사나 절제사 등의 지휘 아래 열렸다. 강무 때 연도(沿道) 지방관은 문안사(問安使)를 파견하여 물소의 뿔로 제작한 활 각궁(角弓), 공작의 깃 전우(箭羽), 말을 타거나 부리는 데 쓰는 마구(馬具), 말, 매 등을 바쳤다.
칭경진하방물은 왕실에 세자의 가례(嘉禮)를 비롯한 각종 경사가 있을 때 의정부·육조 및 관찰사·병사·수사 등 지방관이 진하 물선과 함께 방물을 봉진하는 것이었다. 명일방물처럼 군기와 모피가 주종을 이루었다. 정례적인 명일방물과는 달리 부정기적인 방물이었다.
1751년(정조 27)에 편찬된 『선혜청정례』를 보면, 경기감영이 상납하는 대전(大殿)의 명일방물은 탄일(탄생일)·정조·동지 때에는 생꿩〔生雉〕·생선·생노루〔生獐〕·산포도정과(正果)·날밤〔生栗〕으로 동일하며, 수량도 날밤을 제외한 5품목은 동일했다. 단오에는 생꿩·생선·생노루, 추석에는 생꿩·생노루, 납일에는 생노루·생토끼였다. 입춘 때에는 청모(菁茅)·황모(黃茅)·생총(生葱) 등으로 다른 명일의 물품과는 차이를 보였다.
변천
강무방물은 원래 왕 강무 때만 봉진하였다. 그러나 성종 이후 강무의 거행 여부를 막론하고 봄·가을로 봉진하였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행행방물과 강무방물이 폐지되었다. 명일방물은 조선전기에는 무기를 중심으로 모피나 약간의 식료품이 주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피물을 구입하기 위해 지급되는 방물가(方物價)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 중면자(中綿子)·저주지(楮注紙) 등도 포함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에는 공인에게 공가를 지급하여 사서 납부하도록 하였지만, 일부 물품은 토산품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선혜청정례』 대전조를 보면 경기감영이 바치는 입춘방물 가운데 산개침채(山芥沈菜)·신감채(辛甘菜)·아총(芽蔥) 3종은 생산하는 군읍에서 상납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일조각, 1984.
김옥근, 『조선후기경제사연구』, 서문당,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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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이, 「17~18세기 초 조선의 대청 세폐·방물 규모와 조달 방식
방자(房子)
정의
궁중 상궁들의 사사로운 잔일을 맡았던 여종 또는 지방관청의 사환.
개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 나인[內人], 무수리[水賜], 방자, 의녀(醫女), 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속하였다. 궁녀는 경력에 따라 품계가 달랐으며, 품계가 같더라도 소속된 처소와 맡은 직책에 따라 격이 달랐다.
지방관청의 방자는 관청의 사환이었다. 이 가운데 경주인방자(京主人房子)는 경주인이 관할 읍에 발송하는 공문·통신 등을 전달하는 하인을 일컫었다.
담당 직무
궁녀는 내명부(內命婦)의 품계를 받은 여관(女官)과 품계를 받지 못한 천비(賤婢)로 나뉘었다. 여관에는 나인과 상궁이, 천비에는 방자와 무수리 등이 있었다. 궁녀는 일반적으로 양가(良家)의 딸보다는 각사(各司)에 속해 있던 여종 가운데 뽑았다. 왕 측에서는 가급적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양가에서는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조혼(早婚)의 풍습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종 때부터는 양가의 딸을 뽑지 못하게 하였다.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궁녀를 각사의 여종 중에서 뽑아 들이도록 규정하였다. 방자의 경우에는 관속(官屬)이나 입궁한 나인의 친척 중에서 뽑았다.
궁중의 방자는 원래 처녀들만 채용하였다. 그들은 머리를 땋아 늘였고 보통 평복에 쪽을 찍었으나, 복색에 옥색(玉色)·백색·황색·다홍색·자주색은 금지되었다. 옥색·백색은 궁중에서 국상(國喪) 때 입는 복제 색이었고, 황색·다홍색·자주색은 왕비나 공주의 복식에 쓰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궁궐의 방자 중에는 ‘글월 비자’가 있었다. 이들은 색장나인(色掌內人) 밑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문안 편지를 돌리는 등 바깥 근무를 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상궁의 사사로운 잔일을 맡았다. 상궁들은 궁중에 자기만의 처소가 있었는데, 상궁이 직접 살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자에게 모든 일을 시켰다. 방자는 시간제로 부리는 반(半)방자와 붙박이로 부리는 온방자로 나뉘었다. 반방자는 일종의 시간제 파출부라고 할 수 있고, 온방자는 그곳에서 먹고 자는 식모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급료는 국가에서 지급하였는데, 이들의 보수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1470년(성종 1)에 방자는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5명, 왕대비전(王大妃殿)에 7명, 대전(大殿)에 12명이 배속되었다[『성종실록』 1년 2월 6일]. 영조·정조대 호조(戶曹)에서 왕실의 각 궁(宮)·전(殿)과 중앙 각사 등의 재정 용도를 규정한 『탁지정례(度支定例)』에는 자전(慈殿)에 23명, 중궁전(中宮殿)에 13명, 세자궁(世子宮)에 16명, 세자빈궁(世子嬪宮)에 15명, 원자궁(元子宮)에 16명, 원자빈궁(元子嬪宮)에 16명, 세손궁(世孫宮)에 15명, 세손빈궁(世孫嬪宮)에 15명이 배속되었다.
변천
방자는 조선시대 궁궐이나 관청에서 말단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담당하였던 하층 노비로서 왕실의 유지와 행정 업무 등의 필요로 인해 왕조말기까지 존속되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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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아(分兒)
정의
관리에게 연례적으로 물품을 지급하는 것.
개설
조선시대 관료들은 대신에서 일반 서리, 복례(僕隸)에 이르기까지 녹봉이 매우 박하였다. 그래서 녹봉만으로 살아갈 수 없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부족한 녹봉을 보전해주었다. 한 예로 진봉(進奉)이라는 명목으로 지방관으로부터 선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며, 또 각 관청에서는 관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물품이 있으면 분아라는 명목으로 소속 관리들에게 물품을 지급하였다[『명종실록』 8년 9월 18일].
내용 및 특징
분아 명목으로 지급하는 물품은 매우 다양하였다. 각 관청마다 반찬거리를 지급하였는데, 명절 때는 세찬(歲饌)을, 여름철에는 젓갈류를 지급하였다. 당시 지급된 것으로는 메주·새우젓·솜·북어·김·꿩·곶감·담배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외에도 과거시험에 사용된 시험지나 각종 의궤류와 같은 서적 등의 여분 종이도 해당 관원들에게 분아라는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심지어 각 나루의 내구 연한이 지난 나룻배를 공조(工曹) 당상과 낭관에게 분아라는 명목으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분아를 빌미로 한 관리들의 침학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분아로 받은 과거 시험지의 품질이 떨어지면, 해당 관리가 지전(紙廛) 상인을 잡아들여 곤장을 때리는 경우까지 있었다[『숙종실록』 24년 9월 11일].
참고문헌
『반계수록(磻溪隧錄)』
『우서(迂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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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마(分養馬)
정의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말 중 각 군현에 분정하여 기르게 한 말.
개설
조선시대에 말은 수송 수단으로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수단으로서 군사상 이용도도 매우 높았다. 조선 정부는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사복시(司僕寺)를 설치하고 말에 관한 행정, 즉 마정(馬政)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각 도에 관설 목장(官設牧場)을 설치하여 말을 먹이고 기르며 사양(飼養)하였다. 또 각 군현에서도 사양하게 하였다. 시대의 추이에 따라 변화는 있었으나, 숙종대에 분양마의 정해진 수는 600필이었다.
형태 및 생태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기 이전, 공물(貢物)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貢納制)에서는 사복시에서 각 군현에 분양(分養)했던 소와 말을 서울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관련된 부담이 규정되지 않았다. 사복시에서는 각 관에서 분양마를 상납할 때 말을 단장하는 데 드는 비용인 마장가목(馬裝價木)을 징수하였다. 또한 분양마를 잃어버릴 경우 이를 변상하는 고실가(故失價)를 책정하였다. 1594년(선조 27) 경기감사 김수(金睟)는 분양마 고실가를 시가(時價)의 2배나 책정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대동법에서는 사복시가 각 군현에서 분양마를 다시 거두어들일 때 마장가목, 고실가, 견군가(牽軍價) 등의 비용을 대동미로 지급하였다. 견군가는 말을 몰아 서울로 상납하는 일을 맡은 견군에게 주는 급료였다. 각 군현에서 분양마를 상납할 때에는 마장가목 2필을 유치미(留置米)에서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고실가에 대해서는 말 1필(匹)에 속전(贖錢) 60냥을 변상하되 30냥은 말을 맡아 길렀던 사양자(飼養者)가 부담하고 30냥은 유치미에서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충청도·전라도에 배정한 분양마를 사복시에 상납할 때에는 말 1필에 견군(牽軍) 1명씩을 배정하고, 견군에게 지급하는 품삯[役價]은 해당 관의 대동미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분양마를 잃어버렸을 때 배상하는 값은 말 1필에 가포(價布) 40필이었다. 그중 20필은 그해 읍의 대동미에서 지급하고, 나머지 20필은 사양자가 부담하도록 규정하였다.
역사적 관련 사항
『속대전』 「병전(兵典)」 「구목(廐牧)」에는 각 군현에 분양한 말이 죽거나 여위거나 또는 길들지 않으면 수령을 논죄하였다. 1필이면 엄중히 추문하고, 2필이면 1자급, 즉 관품 1등급을 강등하며, 3필이면 2자급을 강등하고, 4필이면 파직하였다. 말이 죽었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다른 말을 대신 내도록 하였다. 말이 죽거나 여위어서 2자급을 강등할 경우 당상관이면 자급을 강등하고 당하관이면 녹봉을 감봉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 「어영청(御營廳)」 「군마(軍馬)」에 따르면, 관마(官馬)는 사복시의 분양마로 해마다 받아 와서 별무사(別武士)에게 나누어 주는데, 보통의 해에는 12필이고, 식년(式年)에는 25필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분양된 말이 8년의 기한이 경과한 뒤에 죽게 되면 그 값을 물게 하지 않고 가죽만 사복시에 보내게 하였으며, 만약 8년 내에 죽게 되면 사양자가 본인 부담으로 말을 다시 채우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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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산공물(不産貢物)
정의
해당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데도 분정하는 공물.
개설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칙에 따라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이어야 하였다. 그런데 공물을 특산물의 산출 지역에만 분정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으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공물도 분정하였다. 강원도 평강 등지의 종이, 제주의 철, 강릉의 활[角弓]·화살[長箭], 갑산의 꿀, 강원도의 대구어, 황해도의 저주지(楮注紙)는 원래 그 지방 산물이 아니었다. 또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과거에 그 지방에서 산출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양이 줄거나 더 이상 나지 않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함길도 6진에는 담비 가죽[貂鼠皮]이 공물로 분정되었지만, 성종 초년에 이르러 그 산물이 적어지자 그 지역 백성은 오로지 여진과 무역하여 이를 납부하였다[『성종실록』 22년 2월 25일]. 특히 연산군대에는 6진에 초피를 많이 분정하였는데, 이곳 백성들은 담비 가죽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야인은 우리 백성들이 담비 가죽을 사야 된다는 절실함을 알고 항상 이를 준비하였고, 매매할 때 그 값으로 소와 말[牛馬], 철물(鐵物)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우리 백성들은 말 혹은 소 한 마리로 담비 가죽 1장을 바꾸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망(流亡)이 6진에서 끊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라도 해변 여러 고을의 공물로는 제호유(鵜鶘油)가 있었다. 제호유는 사다새의 기름으로, 사다새는 토산물이 아니어서 해변 7읍이 돌아가면서 해마다 1마리를 상납하였다. 그런데 중종 무렵부터 이 새가 전혀 날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차례가 된 읍에서는 민간에서 높은 값을 거둔 다음 멀리 평안도까지 가서 구매하거나 혹은 경상(京商)에게 구입하여 상납하였다.
변천
불산공물은 그 공물이 산출되는 산지에 가서 높은 값으로 구입하여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해당 군현의 백성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이에 대한 개정 논의는 세종대 이후 수차례에 걸쳐 있었지만 별다른 대책이 마련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불산공물의 분정은 방납을 촉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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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객(지대)(使客(支待))
정의
수령이 자기 관할 구역을 지나는 관료들을 위하여 지출하는 비용.
개설
사객은 자기 관할 구역을 지나는 관료들을 말하고, 지대는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물이나 일용품 등을 공급하는 비용을 말한다. 사객지대는 군읍이 놓인 대로·중로·소로 등 교통상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사객의 왕래 빈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경우 71개 고을을 12등급으로 나누어 최하 쌀 10석(石)에서 최고 120석에 이르도록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동법 시행 이전, 공물(貢物)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貢納制)에서 각 군현은 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관둔전(官屯田)을 경영하여 관아의 지출 경비[官需]를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체의 필요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세 중 유치미로 사용되는 영읍소용미(營邑所用米)는 기존의 아록전·공수전·관둔전에서 거두는 수입에 비해 그 규모가 크게 책정되었다.
영읍소용의 규모가 증가한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원래 아록전·공수전·관둔전에서 지급되던 항목의 지출 규모를 현실화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래 아록전·공수전·관둔전에서 지급되지 않던 항목들에 대해서 새로 대동미를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경우는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와 감사지공미(監司支供米) 액수가 늘어난 것이 해당되었다. 감사지공미는 감사가 각 군현을 순시할 때 접대하기 위한 비용이고, 사객지공미는 사객을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이었다. 충청도 각 군현의 액수를 모두 합하면, 이 두 가지는 각각 980석 정도였다. 왕을 대신하여 도를 순력하는 감사나 중앙관료로서 지방에 내려온 사객의 경우, 지방 수령으로서는 이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수령은 재정적으로 호조(戶曹)의 명령에 태만할지언정 감사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감사가 수령을 평가하여 점수 매기는 고과(考課)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접대 비용은 관수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부담은 군현의 백성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대동법에서는 영읍소용비 가운데 사객지공미와 감사지공미의 액수를 늘려 책정하였다.
변천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각 군현이 접한 길의 대소(大小)에 따라 크게는 100석에서 적게는 30석씩을 사객지대로 지출하였다. 이것은 현물 공납제 때의 지급액보다 상당히 증가한 양이었다. 작은 마을[殘邑]의 1년 관수(官需) 전체가 100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과 지방 사이 안정적 교통을 위하여 기울였던 노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조병로, 『한국 역제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2.
사대동(私大同)
정의
군현에서 현물로 거두어들이던 공물을 쌀이나 포목으로 거두고 이를 사주인 등에게 지급하여 공물을 마련하던 방식.
개설
현물 공납제 하에서는 공물(貢物)의 종류와 양을 군현을 단위로 배정하였다. 각 군현의 수령은 부과된 공물을 8결(結) 단위의 민호(民戶)에게 윤회분정(輪回分定)하였다. 즉, 토지를 8결씩 묶고 공물 지급 명령이 내려올 때면, 8결 단위에 속한 민호에게 돌아가며 공물을 마련도록 하였다. 이것은 다양한 불균등을 낳았다. 우선 각 군현에 대한 공물의 부과가 각 군현의 경작지 결수에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현마다 단위 전결(田結)당 공물 부담은 군현에 따라 몹시 불균등하였다. 또한 각 군현 안에서도 일부 전결은 공물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심지어는 공물을 부담하도록 편제된 전결 안에서도 그 부담은 고르지 않았다. 국가가 요구하는 공물의 종류와 양이 때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돌아가며 공물을 마련하다 보면 경우에 따라 8결 단위로 묶인 특정 민호가 큰 부담을 져야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각 군현은 자체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체적인 방향은 1년 치 공물가(貢物價)를 예측하여 가능하면 고르게 전결에 따라 나누는 것이었다. 이것을 사대동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 공물을 비롯한 요역(徭役)·군역(軍役) 등의 수취는 국가가 직접 민호(民戶)에 부과한 것이 아니라 군현을 단위로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군현을 단위로 하여 공물이나 역을 부과하였다 하더라도, 그 최종적인 부담은 민호가 졌다.
공물은 각 민호에 일률적으로 배정한 것이 아니라 민호의 등급에 따라 정하였다. 군현에서 각 민호에 공물을 배정하는 원칙은 호등제(戶等制)에 준한다는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개별 민호에 공물을 어떻게 배정할 것인가의 구체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물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종류가 있었기 때문에 설사 민호의 대소에 따라 공물을 배정한다 하더라도 균일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곤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호등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 ‘8결작공제(結作貢制)’였다. 이 제도는 토지를 8결 단위로 묶고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배정받은 공물을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회분정(輪回分定)에는 여러 부작용이 뒤따랐다. 1년에 여러 차례 군현에 부과되는 공물의 값이 똑같기는 어려웠다. 즉, 공물에 따라 그 부담이 가볍거나 무거웠다. 이렇다 보니 자기 차례에 무거운 부담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부담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돌아가는 순번이 차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부과된 공물이 다른 차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거우면 자기 순번에서 빠지고 다음 순번으로 건너뛰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는 물론 당사자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윤회분정 방식에서는 각 군현이 1년 동안 내야 할 공물가의 총액을 사전에 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취 과정 중에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이 자행하는 자의성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관아의 서리(胥吏)들이 달라는 대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 대동(大同)은 이런 문제점에 대한 각 군현 차원에서의 자구책이었다.
선조대에는 공물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의견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정철(鄭澈), 유성룡(柳成龍) 등의 제안이 그것이다. 1580년(선조 13)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사대동의 운영 방식을 환자[還上]의 운영 방식과 관련시켰다. 즉, 사대동의 운영을 별도로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에게 익숙한 환자 운영 방식을 통해 그 일부로 처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유성룡 역시 원칙적으로 정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유성룡은 사대동이 각 군현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대동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정은 사대동을 금지하지 않았다. 각 군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물을 수취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각 군현 수령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편 각 군현에 배정한 공물은 그 지역에서 나는 작물을 공물로 내도록 하는 임토작공(任土作貢)에 따라 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지역에 전혀 생산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이나 그 지역에서 마련하기 어려운 난비지물(難備之物) 등을 배정하기도 하였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만 거둘 경우, 다양한 물품을 생산하는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공물을 자주 바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산공물이나 난비지물을 배정받으면 다른 방법을 통해 구해야만 했고 이 때문에 공물 수취는 원래부터 방납(防納)의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공물 대납(代納)이 공인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군현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품을 공물로 납부하기 위해서는 쌀과 포(布)를 이용해 직접 구입해야 했다. 당시 쌀과 포는 화폐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쌀과 포를 가지고 공물 상품이 구비된 산지에 가서 직접 이를 구입하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해야만 하였다.
공물을 사기 위하여 쌀·포를 거두는 형태는 이미 세종 이후부터 일반화되고 있었다. 가령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외방 각 군현의 공물이 참으로 토산물이 아닌 경우 농민들은 모두 쌀을 가지고 사다가 상납한다.” 하거나, 혹은 “여러 읍의 민호에 배정한 자리[席]를 백성이 스스로 준비할 수 없어서 쌀·포를 거두어 안동에 가서 사서 납부한다.” 하였다. 이이(李珥)나 유성룡에 따르면, 선조대에 와서는 배정받은 공물을 직접 현물로 납부하는 현물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각 군현에서 공물을 현물이 아닌 그 값에 해당되는 쌀로 바꾸어 내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와 같이 공물을 쌀로 대신 납부하는 방식인 공물작미(貢物作米)는 중앙정부가 규정한 공물의 수취 형태로서의 쌀을 뜻하였다. 즉, 중앙정부가 현물이 아닌 쌀을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적 형태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뜻하였다.
공물을 현물로 바치던 것이 언제부터 공물가·역가(役價)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선조대에 이르면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현물을 준비할 수 없었고, 대부분 공물가 형태로 납부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정에서도 이미 파악한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규정은 현물납을 고집하였다. 당시에는 방납의 폐단이 심하여 방납자를 거치지 않은 공물은 품질이 나쁘다고 하면서 도로 물리치는 점퇴(點退)가 성행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방납자는 높은 방납가를 요구하였는데, 국가의 현물납 고집은 높은 방납가와 점퇴를 유지하게 할 뿐이었다.
일시적으로 현물납을 포기하고 쌀로 대신 내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부터였다.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민간에서는 쌀·포 형태로 공물을 거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정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공물의 최종적 납부 수단에 대해서 점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공물의 품질 여부와 관계없이, 현물납은 납부할 때의 품질을 납부자가 책임져야 했기에 높은 방납가를 피할 수 없었다.
사대동은 각 군현에서 수령의 자율적 권한으로 확산되었다. 달리 말하면 사대동은 국법에 의하거나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었다. 사대동이 향촌에서 자율적으로 퍼져 나갔던 것에 비해, 공물작미는 중앙정부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공물 수취 관행의 변화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선조대에 공물작미는 1592년(선조 25), 1594년(선조 27), 1607년(선조 40)에 세 차례 이어졌다. 1592년의 공물작미는 단지 납부 형태를 쌀로 바꾼다는 의미만을 가졌다. 1594년 공물작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당 균일한 공물가를 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공물작미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해서 공물 변통의 논의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곧바로 혁파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1607년의 공물작미는 전라도·충청도에서 납부하는 제사용의 진상을 제외하고 공물을 모두 쌀로 내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길게 이어져서 대동법으로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김덕진,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 선인, 2002.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고석규, 「16·17세기 공납제 개혁의 방향」, 『한국사론』 12, 1985.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에 대한 일고찰」, 『전남사학』 10, 1996.
이정철, 「대동법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공공성 관념과 현실」, 『역사비평』 94, 2011.
사부(斜付)
정의
중앙 각사에 속한 노비들을 본래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 빼내어 다른 관서에 소속시키는 것.
개설
사부는 노비의 입장에서 고된 역을 피하고자 할 때, 합법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속대전』 「형전(刑典)」공천(公賤) 조에는 중앙 각사의 노비 중에 일이 고된 곳을 피하여 힘이 덜 드는 곳으로 가는 자, 관리 중 노비를 사사로운 부탁에 따라 제멋대로 옮겨 준 자는 모두 군적(軍籍)을 제멋대로 옮겨 주는 율에 의거하여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처하였다. 또한 양곡[米糆]을 관장하는 관서의 노비는 사부와 투속(投屬)을 허용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사환을 잃은 중앙 각사는 사주인(私主人)을 통해서 이를 보충하고, 사주인은 이를 통해 방납(防納)을 정당화시켰다.
내용 및 특징
사부의 원인에 대해서는 1487년(성종 18) 대사간 김수손(金首孫)의 상소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그는 각사노비(各司奴婢)가 줄어드는 것을 지적하면서 장흥고(長興庫)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원인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흥고 소유의 노비는 모두 115명으로서 여러 관서 가운데 가장 노비가 넉넉한 편이었다. 실제로 『경국대전』에 장흥고 소유의 노비 정액은 차비노(差備奴) 14명, 근수노(跟隨奴) 2명이었다. 16명이 늘 입역(入役)하는 인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15명을 모두 7번으로 나눈다 하여도 1번당 15명을 입역할 수 있는데, 그중에는 서울에 사는 노비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 넉넉한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15명 가운데 실제로 입역하는 자는 남자 종인 노(奴) 8~9명, 여자 종인 비(婢) 10여 명에 지나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김수손은 그 원인을 9가지로 들었다. 즉, 115명 가운데 ①) 수복(守僕)이 된 자가 2명, ② 각 색장(色掌)이 된 자가 3명, ③ 별감(別監)이 된 자가 5명, ④ 구사(丘史)가 되고 공신노(功臣奴)가 된 자가 6명, ⑤ 장인(匠人)·악공(樂工)·가동(歌童)·잠실고지기[蠶室庫直]가 된 자가 43명, ⑥ 조라치[照刺赤]·잠모(蠶母)·방자(房子)·무수리[水賜]가 된 자가 10명, ⑦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국역(國役)을 면제받는 시정(侍丁)이 된 자가 6명, ⑧ 양인(良人)이 된[從良] 자가 10명, ⑨ 도망하여 거지가 된 자가 10명 등 모두 92명이 장흥고의 입역 대상에서 빠져 버렸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결과 지금 현역 노가 8~9명이고, 비가 1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①~⑥의 69명은 모두 다른 관서에 예속되어 있는 사부한 경우였다. 즉, 사부한 노비가 전체 노비의 절반을 넘었던 것이다.
사부 현상은 1499년(연산군 5)에도 지적되고 있었다. 사온서(司醞署)의 경우 원 노비는 28명인데 사부자가 25명이라 남은 노비는 3명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재감(司宰監)의 경우 원래는 노비가 57명인데 사부자가 48명이라 남은 노비는 9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이들 관서뿐만 아니라 다른 관서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중종대에도 사부가 각사노비의 줄어드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로 인해 성균관·사학(四學)·봉상시(奉常寺)의 노비들을 다른 관서에 소속시키는 것은 금지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사부가 왕실 궁방에서도 자행되어, 각사노비를 사부하여 왕실 내정(內庭)의 역에 충당하는 사례가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효종실록』 즉위년 12월 9일 1번째기사].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지승종, 『조선 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