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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리로서 다라니 납탑의 확대와 밀교경전
무구정탑의 확산 속에서 『무구정경』의 다라니뿐 아니라 다른 밀교경전에 근거한 다라니를 법사리로서 탑에 안치한 예도 나타난다. 『불정존승다라니경』과 『준제다라니경』이 그것이다. 『불정존승다라니경』과 관련 있는 것은 법광사 삼층석탑 출토 사리구이다. 이 사리구의 겉면에는 '불정존승다라니'라는 글씨가 묵서되어 있었다. 또 광평사 석당에는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다라니 명칭을 새겼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갈항사지의 서삼층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병 안에는 부패한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준제진언이 적혀 있었던 데에서 『준제다라니경』의 영향을 추측할 수 있다.
먼저 불정존승다라니가 법사리로서 납탑(納塔)된 예인 법광사 출토 사리구를 살펴보겠다. 법광사 출토 유물 중 이 글에서 주목하는 유물은 법광사지 삼층석탑[약칭 삼층석탑]‧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약칭 중수비]‧법광사 석탑기[약칭 석탑기]‧사리호 등이다. 현재 법광사지 사리호로 알려진 것은 납석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사리호①]과 청동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사리호②]이다. 이 중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묵서명이 씌여 있는 것은 사리호①인데, 이것이 신라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법광사지 삼층석탑 출토 사리구는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먼저 사리호의 재료 및 사리호의 형태를 기준으로 하여 살펴보면, 납석을 주재료로 하여 가로로 넓어진 형태이다.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863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호, 867년 축서사 삼층석탑 사리호, 870년 보림사 사리호들과 비교해 보면 9세기 신라 시대 제작된 사리호의 양상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법광사 사리호①은 9세기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사리호 겉면의 묵서가 신라 시기 이후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점을 검토해 보면, 기존의 것을 수리하면서 공양물을 추가로 납입하는 등의 변동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와 비교했을 때, 만일 사리호에 묵서를 가필했다면 법광사 석탑기 두 개 중 하나에는 그 사실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공양물 추가 등이 아니라 기존의 사리구에 '불정존승다라니'라고 가필을 하는 것은 신앙 형태의 변화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욱 그 정황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사리호의 묵서는 추후 가필보다는 제작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묵서명을 남긴 이유를 추측해 볼 때 앞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설하게 된 배경이 『무구정경』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무구정경』의 규범에 따른 건탑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정존승경』이 받아들여졌고 그 신앙형태가 『무구정경』과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간소화된 형식이었다. 이 점이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묵서명이 씌어진 사리구를 안치하게 한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불정존승경』 관련 자료인 광평사 석당(廣平寺石幢)을 살펴보겠다. 이와 관련한 현존 자료는 매우 미비한 탓에 광평사 석당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전무하다. 광평사의 석당은 현재 문서로만 14개 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다만 『관암전서』‧『해동금석원』‧『조선금석총람』‧『한국사찰전서』에 매우 단편적이지만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각 자료를 정리해보면 다음 표Ⅳ-1-4와 같다.
관련 자료를 정리해보면 『관암전서』를 통해 1744년 이전과 1826년 당시의 광평사 석당의 존재를 알 수 있다. 1744년 이전에 이덕수는 이 석당과 글자를 보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세워졌으며 읍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라고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파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0여년 후인 1826년에 홍경모는 이덕수의 글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홍경모가 '광평사'에서 '탁본을 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평(廣平)이 신라시대 현명임을 확인하고 신라시대의 옛 자취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로부터 5년 뒤 편찬된 『해동금석원』에서는 이 글씨가 고려시대의 것이며 광평사는 광평등(廣平等)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후 광평사 석당의 존재를 전하는 자료인 『조선금석총람』‧『조선사찰전서』의 내용은 『관암전서』의 내용과 같은데, 이 자료들의 편찬자가 『관암전서』의 주장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동금석원』의 저자 유연정이 금석문과 관련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덕수는 문인으로서 명망이 높았으니 이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또한 직접 그것을 본 사람으로서 갖는 가치를 우선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홍경모는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러한 홍경모가 직접 광평사에서 탁본을 한 자료라고 하였다면, 그 석당은 광평사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광평사의 석당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광평사의 석당의 명칭은 각 자료에서 조금씩 다르게 판독하였는데,(표Ⅳ-1-5) 특히 뒤에서 세 번째와 두 번째 글자에 대한 판독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해동금석원을 참조한다면 해당 글자를 만(萬)과 보(寶)라고 판독하여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편, 존승다라니라는 글자가 포함된 경전은 대정존승다라니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정황상 14글자는 '광평사불정존승다라니압만보당(廣平寺佛頂尊勝陁羅尼壓萬寶幢)'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보당(寶幢)'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존승당의 위력과 신효함을 불가사의한 정도로까지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칭하여 '보당'이라고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불정존승경』이나 다라니를 새기는 일반적인 석당의 경우와 달리, 석당을 만든 주체자들의 이름과 당을 만들게 된 이유를 새기고 제액을 남긴 특징이 있는데, 당을 세운 목적은 불정존승다라니를 위험과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수명을 늘여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즉 단순히 '불정존승다라니당'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불정존승다라니라는 글자 뒤에 특정한 기원을 담은 수식어를 쓰고 난 후 보당이라는 글자를 더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염만(厭萬)'이라는 글자는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이 경의 내용을 다시 상기해봄으로써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정존승경』의 주요한 내용은 불정존승다라니가 "모든 죄업의 장애를 제거하여" "삼악도의 고통을 덜어주며" 나아가 "(이 다라니의 이름을 들으면) 문득 해탈할 수 있으니" 이 다라니를 써서 탑에 안치하고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평사 석당의 제액의 염(厭)을 '막다'의 의미로 보고, 만(萬)을 '여러 가지 악한 과보'의 의미로 풀어서 여러 악한 과보를 막아내는 보배로운 불정존승다라니를 새긴 광평사의 당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에서 살펴본 법광사지 사리호와 광평사 석당의 공통점은 『불정존승경』이나 불정존승다라니 전문을 써서 안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명칭만을 남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신라에서는 불정존승다라니의 전체를 서사하지 않고, 단순히 '불정존승다라니'라는 글자를 쓰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고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지바하라 역본인 『최승불정다라니정제업장주경』에서는 "내가 설하는 이 다라니의 이름[다라니名]을 들은 자는 악한 과보가 소멸되어 문득 해탈하게 되리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다라니의 명칭만으로도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신라 전통의 법사리 신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 하대 『불정존승다라니경』과 관련한 신앙은 기본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신라 기존의 전통 속에서 지바하라 역본을 기반으로 한 법사리신앙의 맥을 잇는 동시에 쉽고 평이한 다라니신앙의 모습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준제다라니와 탑과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갈항사지에 남아 있던 동‧서 삼층 석탑은 그 중 동탑 상층 기단 면석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758년(경덕왕17)에 영묘사의 언적법사와 조문황태후, 경신태왕의 이모, 이렇게 세 남매가 발원하여 만들어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석탑의 기록에는 758년에 탑을 건립했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탑에 새긴 것은 원성왕(재위 785~798) 이후로 추정된다. 기록에 등장하는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 계오부인 박씨로 조문황태후는 원성왕 즉위년에 추봉받은 명칭이다. 또 다른 여성은 경신태황의 이모라고 하였는데, 원성왕의 휘가 경신(敬信)이므로 그녀는 원성왕의 이모가 된다. 조문황태후라는 추봉명을 썼다는 점에서 원성왕 즉위년 이후, 원성이라는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 원성왕 사망 이전 시기 어느 때인가에 남긴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본래 갈항사는 승전(勝詮)이 상주 영내 개녕군에 정사를 짓고 돌 무리를 거느리고 화엄을 개강하였다는 절이라고 전한다. 이때는 작은 규모의 절이었겠지만, 758년 탑을 만들면서 확장되고 이후 원성왕대까지 이어져 왕실의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한하였을 때 원성왕대에는 특별한 불사 기사가 없고, 금석문 자료에서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원성왕 가계를 살펴보면 많은 불사 활동이 나타난다.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孝讓)은 숙부를 위해 무장사(鍪藏寺)를 세웠고,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숙이자 원성왕비 숙정왕후의 외조부가 되는 파진찬 김원양(金元良)이 주도하여 곡사(鵠寺)를 만들었는데 곡사는 자리를 옮겨 원성왕의 추복과 관련 있는 사찰로 변화하여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원성왕의 어머니 3남매가 갈항사에 석탑을 세웠다. 원성왕 즉위 이후 즉위년에 고조부까지를 추봉하고 5묘제도를 도입했던 것을 비롯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던 시기에, 아마도 경덕왕17년에 언적법사 등, 원성왕 어머니의 직계 가족 구성원을 위한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던 갈항사(葛項寺)는 그 성격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새롭게 탑기를 적어 남겨서 그 성격을 분명히 했던 것 같다.
이러한 갈항사의 서삼층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병 안에는 부패한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준제진언이 적혀 있었다. 이 자료는 상품의 신라의 닥종이에 중앙에서부터 밖으로 원형의 이어진 묵선을 긋고 그 안쪽에 묵서로 실담과 준제진언을 기록한 것이다. 준제진언은 지바하라의 『불설칠구지불모심대준제다라니경』‧금강지의 『불설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경』‧불공의 『칠구지불모소설준제다라니경』에서 설하는 다라니를 말한다. 지바하라‧금강지‧불공역 모두에서 인(印)으로 탑을 만들고 다라니를 염송하면 관세음보살‧다라보살‧금강수보살을 보거나 보리의 수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이나, 탑이나 사리탑 앞에서 주를 외고 공양하면 금강수보살을 만난다거나, 전법륜탑 등 모든 탑 앞에서 주문을 외고 탑돌이를 하면 아발라시다보살(阿鉢羅是多菩薩)과 가리저보살(訶利底菩薩)을 보고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에 따라 준제다라니를 적어 탑 안에 봉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다라니는 26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단히 적어 쉽게 봉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칠억의 정등각존에게 귀의합니다. 유행존(遊行尊), 정계존(頂髻尊), 청정존(淸淨尊)이여 환희 있으리"이다. 이것은 현존하는 종이에 묵서된 범어진언으로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일본에서 문실정삼(文室淨三)이 칠구지탑을 만들었던 것과 같이 8세기 신라에서도 탑과 관련하여 준제진언을 이해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탑을 세우고 탑이 중심이 되는 의례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라니를 탑에 안치하는 것에 공덕이 있음을 설하는 경전들이 7세기 후반 이후 다수 한역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무구정광경』은 한역 직후 신라에 전해져 8세기 이후 신라 탑의 중수나 건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탑 안에 봉안하는 사리 장엄을 구성할 때, 법사리라고 할 수 있는 다라니를 신사리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매우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이 밖에도 신라에서는 『불정존승경』과 『준제다라니경』을 『무구정경』과 마찬가지로 조탑의 사상적 배경으로 이해하여 각 경전에서 설한 다라니를 탑에 봉안한 사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무구정경』‧『불정존승경』‧『준제다라니경』은 치병‧장수‧소원성취, 죄업의 제거, 정토왕생, 정각에 이르는 다양한 공덕의 성취를 위해 다라니의 위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라니의 서사와 봉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8세기 신라인들은 『무구정경』의 다라니 서사를 충실히 행하여 실제로 경에서 설한 다라니를 77번, 99번씩 서사하고 작은 탑을 같은 수만큼 만들어 탑안에 함께 안치하거나, 『불정존승경』과 『준제다라니경』의 다라니만을 서사하여 탑 안에 봉안했다. 이는 다라니를 단순히 주술적인 면에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불법에 기대어 다양한 기원을 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라니의 위신력에 대한 신라 사람들의 믿음이 이전보다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밀교경전의 유통과 그 영향/ 옥나영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