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마사다(Masada)가 있다면 춘천엔 봉의산이 있다!!
2009.12.10. 21:07
이스라엘하면 선민의식과 함께 이 나라를 상징하는 많은 사건과 용어들이 뇌리 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용어는 마사다일 것이다. 너무나 애절한 절규가 지금가지도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메아리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춘천에도 이와 유사한 애절함과 절의 그리고 비장한 결의를 엿볼 수 있는 우리 선조의 절규가 서려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봉의산이다. 이에 이스라엘의 마사다에 얽힌 이야기와 춘천 심장부에 우뚝 솟아 춘천의 항쟁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봉의산에서의 선조들의 절규를 들어보며, 우리도 봉의산을 이스라엘의 마사다로 여겨봄이 어떨까한다.
이스라엘의 성지 마사다는 사해 수면보다 높이가 약 410m 높은 지역에 길이 약 600m, 폭이 약 250m의 마름모꼴의 천연요새로 고립되어 우뚝 솟아 있다. 또한 사면이 가파른 절벽의 경사로 둘러싸여 있어 정상을 쉽게 정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지이다.
마사다(Madada)는 본래 히브리어로 산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켜 5년이나 반란이 지속되자 70년 8월 로마의 티투스(Titus)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때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거느린 유다의 열혈단이 마사다로 진격해 가서 로마 수비대를 무찌르고 그곳을 점령하고 대로마항쟁을 졀의하며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72년에 로마의 실바(Silva)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 1만 5천명(로마군 9천명과 유대인 포로 6천명)에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천명도 채 못 되는 수비대는 거의 2년을 버텼으나, 73년 4월 요새로 올라오는 경사로를 만들어 진격해온 로마군에 함락되었다. 함락되기 바로 전날 저녁,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명의 유대인 열심당원을 모아놓고 로마인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영광스런 죽음을 택하자고 설득하였다. 그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전부 끊게 하고 열 사람씩 조를 짜서는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식량을 제외한 모두가 불을 지른 후 자결하였다.
다음날, 성에 진격한 로마군은 타다 남은 재속에 놓여 있는 96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도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인, 그리니까 일곱 사람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마사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 질 수 있었다.
오늘의 마사자는 유디인들이 힘이 약해서 죽음으로 항거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젊은 병사들에게 애국 애족의 강인한 이스라엘 특유의 항전 불패의 군인정신을 함양하는 도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마지막 훈련과정에서 군대의식을 행할 때에 마사다는 이제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는 구호를 선언하고 있다.
춘천의 상징이자 진산인 봉의산은 높이가 301.5m이다. 상서로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위의를 갖춘 모습이라 하여 봉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고 8부 능선에산의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한 봉의산성(강원기념물 제26호)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축성하였으며 크기는 1,241.5m, 높이 5-6m이다. 봉의산은 남쪽에 진병산, 서남쪽에 삼악산, 서북쪽에 화악산, 북쪽에 용화산 그리고 동쪽에 대륭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뒤편으로 소양강을 흘러 보내고 화천 쪽의 북한강 물을 받아 의암호수를 이루면서 우두평야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봉의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잦은 침입으로 격전장이 되었고 봉의산성은 끝까지 사투하는 항전장이 되었다. 고려 고종 4년(1217) 음력 5월에 거란의 침입으로 당시 안찰사였던 노주한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고 봉의산성의 함락으로 봉의산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후 38년이 지나 몽골군과 유례없는 혈전을 벌인다. 몽골의 4차 야굴군의 침입(몽골은 모두 7차례 고려 침입) 때에, 춘천 주민들은 봉의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포위가 오래 지속되어 산성의 물이 말라 주민들은 우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연명을 하며 버티었다. 우마의 피 마시기도 한계가 있어 도저히 버티기 힘들게 되자, 당시 문학 벼슬에 있던 조효립은 자기의 처를 단칼에 베고 적진의 불 속에 뛰어들어 산화하였고, 또 안찰사인 박천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몽골군이 포위하고 쌓아 놓은 목책을 부수면서 싸워보았지만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성 안에 있던 주민들도 항전하다가 대부분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에도 봉의산은 왜구의 출몰을 막는 기지였고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에도 방어 내지는 군사를 정비하는 기지였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임시 수도격인 유수부가 설치되어 임금이 피난하여 정사를 보는 이궁이 봉의산 아래에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의봉봉기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성채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오늘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말없이 춘천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봉의산은 이민족의 침략에 결사항전하던 의미있는 산이다. 이스라엘이 마사다를 성지로 여기며 민족적 결의를 다지고 군인정신의 도장으로 여길 때, 우리는 봉의산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내 고을과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전하던 우리 선조들의 곧은 절의와 정신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본받아야 되지 않을까? 늘 봉의산을 바라볼 때마다! (2009년 12월, 춘천성시신문, 9면에서 발췌. 글쓴이 김동정(관동대 사학과 겸임 교수/강원도사 편찬실 상임위원/신성감리교회 권사)).
첫댓글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뿐아니라 강원도 나아가 우리나라를 대표할수있는 호국충절을 간직한 산이라는 생각입니다..
봉의산을 도심근린공원으로 놔두지말고 역사유적공원으로 지정하는것이 앞으로의 관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민단체들중 몆개의 단체들이 봉의산 역사유적공원지정에 동참할것을 전하고있습니다.
특히 춘천 생명의숲은 봉의산 역사유적공원지정에 적극찬성인 입장이고요..
현재처럼 방치하다보면 봉의산은 유원지 정도로 치부될것입니다...도의원님들중에도 그런 계획을 가지신분들도 있고요...
춘천의 진산 봉의산 !
봉산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린것은
분명 저뿐만은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봉의산은 단순한 공원 개념이 아니라 수많은 애환이 서린 유적지가 있는 역사유적 공원으로 위상이 재정립돼야 합니다. 또한 봉의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봉수대복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70년대 이후 뜻있는 분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추진돼 온 방송탑 철거 내지는 이전도 추진돼야 하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