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찬국어학원]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권순진🦋
스토리디자이너그린비 ・ 2022. 8. 5. 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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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 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만해 한용운은 한국 근대사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과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민족의 선각자였다. 이 땅의 침체된 불교를 개혁하여 근대화하고자 애를 쓴 불교사적 공적 또한 지대하다. 그의 불교 운동은 민중불교, 생활불교 운동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의미는 소중하다. '불교 사회주의'를 주창했다고 해서 일부 오해가 있으나, 당시 ‘사회주의’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불교의 근본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봐야겠다.
민족 운동사에 있어서 3.1운동의 주도적 참여 등을 통해 자유평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체계화하여 구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독립투사이자 빼어난 사상가였다. 특히 일제 패망 직전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서 ‘심우장’의 냉돌위에 스러져 순국하기까지 보여준 정신의 일관성과 지절은 참으로 귀한 민족적 사표가 아닐 수 없다. 광복을 불과 1년 남긴 1944년 6월29일, 66세의 나이였다. 순국 75주년이자 3·1운동 100주년인 뜻 깊은 올해, 여러 곳에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학술제와 예술제 등 추모행사가 열렸다.
지난 토요일 백범기념관에서는 (사)이상화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우국시인의 민족애와 시세계>란 주제의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독립기념관에 상설 전시된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네 분의 애국정신과 문학을 조명하는 행사였다. 이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을 1-2년 앞두고 순국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의 기회도 가질 겸 모처럼 대구의 문인들이 대거 상경한다고 해서 행사에 합류했다. 이상규 교수의 기조발표에 이어 송희복 교수의 주제발표 ‘한용운의 옥중시와 자유 독립사상’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송 교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수많은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그가 3.1운동의 첫머리에 서서 ‘기획하고 모의하고 주도하고 실행하였다’는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음을 무척 아쉬워했다. ‘기미년 거사의 실마리는 1918년 11월말에 한용운과 최린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다. 한용운은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천도교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고, 최린을 통해 오세창, 손병희 등의 인물과 접촉했다. 또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과 영남지역 유교세력에도 손을 뻗쳤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유교측은 선언서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흥미로운 주제발표가 계속되었고 나로서는 귀한 공부의 시간이었다. 한용운은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겪고 석방되었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운문은 시조 1편과 한시 13편이었다. 그리고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편 가운데 가장 옥중 체험이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되는 시편이 바로 ‘당신을 보았습니다’라고 했다. 그 이유는 3.1운동 전후의 시대상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에 적시된 ‘당신’을 가리켜 송욱 시인은 그의 ‘님의 침묵 해설서’에서 무심의 경지이므로 이미 오래 전에 민족의 독립을 암시한다고 지적했다.
송욱은 ‘한용운 같은 시인이 존재한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일을 무한한 행복으로 여긴다.’고 했던 분이다. 시에서 당신이 갔다는 진술은 실체가 없음, 즉 국권상실을 꼭 집어 말하고 있다. 물질적인 소유의 결여와, 민적과 인권으로 상징된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의지가 말살된 시대적인 삶의 조건을 의미한다. 정조를 유린하고 능욕하려드는 장군은 다름 아닌 일본 제국주의이며, 항거의 격분은 바로 거족적인 독립 쟁취운동인 3.1운동을 말한다. 이 격분은 제 스스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슬픔이 된다.
그러나 이 슬픔은 결코 무력한 슬픔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힘을 지닌 슬픔이라는 사실. 미래의 새 사명이 움트고, 새롭게 ‘당신’이 다가오고 있는 이때, 그들의 졸렬한 망나니 짓을 다시 보다니 없던 힘이 솟구칠지 모르겠다.
권순진
[출처] [늘찬국어학원]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권순진🦋|작성자 스토리디자이너그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