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사(舍那寺)>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방문일 : 2020.4.23.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923년 대경(大鏡)이 제자 융천(融闡) 등과 함께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367년(공민왕 16)에 보우(普愚)가 중창하였다. 보우가 140여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여 비로소 거찰의 면모를 갖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경내에 보우 관련 사적이 여럿 남아 있다.
양평은 경기도 동쪽에 있어 서울 쪽으로는 남양주, 하남 등과 맞닿아 있고, 강원도 쪽으로는 원주, 홍천 등과 맞닿아 있는 넓은 지역이다. 무려 서울의 1.5배 정도 된다. 유명한 곳이 하도 많아 여기가 아직도 군 단윈가, 의아할 정도지만 넓은 땅에 인구는 12만 정도니 군이 맞는 거 같다.
용문사, 두물머리 등은 이웃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서 넓은 군단위에 인구도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름난 용문사는 거찰이지만, 양평에는 용문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넓은 땅에 맞는 큰 사찰로는 용문사가 어울리지만, 인구로는 작은 지역인 양평에는 작고 아담한 사찰 사나사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노거수 은행나무를 보고 역사의 향기를 맡고 싶다면 용문사를 먼저 보고, 여력이 있으면 조용히 양평의 향기도 맡을 겸 사나사에 들를 것을 권한다.
양평에는 천미터가 넘는 용문산이 있다. 용문산의 동쪽에는 용문사가, 다른 한쪽에는 사나사가 있다. 사나사는 용문산의 주봉인 백운봉 기슭에 있다. 그러나 일주문은 역시 용문산사나사 현판이다.
용문사에 가면 아래 사하촌에 갖가지 산나물을 지천으로 팔고 산채백반하는 집도 많이 있다. 사나사에는 사하촌이라고 할 만한 마을이 별로 형성되어 있지도 않지만, 사나사가 속한 옥천면에는 북한 황해도에서 온 유명한 옥천냉면이 있다. 이제는 황해냉면에서 옥천냉면이 되어 이 지역 특별식으로 안착한 셈이다.
옥천냉면을 먹고 사나사를 천천히 구경해보자. 옥천에서 사나사까지는 길이 좀 구불구불하고 절 가까이에 이르면 1차선도 있지만 절 밑까지 비교적 편하게 들어올 수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주차장을 만난다. 주차장 바로 위가 사찰이어서 좀 걸어 들어오고 싶은 방문객에게는 서운할 수도 있다.
사찰도 좋지만 계곡은 더 좋다. 길고 깨끗한 계곡물은 손이 안 닿은 듯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르는 길의 계곡이 아쉬우면 한참 아래서부터 걷는 것도 좋다.
자세히 보면 역사의 아픔에 동참하느라 여러번 파괴되어 그렇지,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찰을 기대하고 왔어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907년 의병 거병으로 소실되고 6.25때 타버렸다. 그럼에도 이만하게 의연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을 대단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대적광전. 비로사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 혹은 대광명전이라고 한다.
*대적광전 법당 안의 불상. 본존은 비로자나불,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을 협시 봉안하였다. 비로사나는 노사나, 석가모니 등과 불교 삼신불 중 하나이나 이 삼신불은 같은 부처를 지칭하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봉선사 기록에는 사나사는 창건 당시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였다 하나 남아 있지 않고, 보우가 중창한 140여칸 웅장한 불사 또한 원형을 찾을 수 없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은 노사나불 부처님을 봉안하려는 불사가 진행 중이다.
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만구족 성취의 뜻이다.
절 앞마당 거목 높은 나무는 보리수이다.
*대적광전과 극락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나사는 의병 거사지다. 한국은 의병의 나라다. 승병은 사명대사를 비롯 의병을 이루는 중요한 줄기다.
관군의 부족을 의병이 보완하였으므로, 평시에는 관군을 먹여 살리는 백성의 수고를 덜었고, 전시에는 적군이 예상치 못한 군사력으로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 시 왜군이 실패한 원인이 의병의 존재를 예측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사나사는 1907년 의병의 거사로 모두 소실되었다. 1909년에 계헌이 대방을, 1937년에 광명전과 조사전을 신축하였다.
*경기도 문화재 자료 21호. 삼층 석탑. 고려 중기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형문화재 73호. 원증국사석종비.
보다시피 탑비가 파손되어 내용을 판독할 수 없다. 탑비의 비문은 정도전(鄭道傳)이 짓고, 글씨는 재림사(梓林寺) 주지였던 선사 훤문(諠聞)이 썼으며, 1386년에 제자 달심(達心)이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증(圓證)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 보우(普愚)의 시호이다.
*원증국사탑. 원증국사는 보우의 시호이다. 제자 달심이 조성한 탑으로 보우의 사리탑이다. 1382년 원증국사 입적하고 그 이듬해 1383년 조성하였다.
보우 스님의 사리가 일부가 이 탑에 봉안되어 있고, 이외 양산사, 청송사(靑松寺), 태고암에 분장되어 있다.
*극락전
*삼성각과 내부. 중앙에 산산과 좌우에 칠성 독성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조성되었다.
*함씨각과 내부.
함씨각은 사나사의 중건에 공헌이 있는 함씨집안을 기리는 사당이다. 함씨각은 1956년 세운 것이다.
사당 아래 비석은 <당사대공덕주 영월신씨 송덕비>다. 1973년에 조성되었고, 후면 비문에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거주하는 함명기 선생 영부인이신 영월 신씨가 재건에 공이 커서 공덕비를 세웠다고 기재되어 있다.
6.25 때 전소된 사찰을 재건하는 데 함문기 부부가 세운 공덕을 기려 공덕비와 함씨각을 세운 것이다 . 함씨각 안에는 함씨의 시조 영정을 봉안하였다. 함씨각은 서울 용두동 거주 함문성 단월의 도움으로 조성되었다. 함명기와 함문성은 양근 함씨 부자지간으로 추측된다.
사찰 아래 있는 두 개의 비석 중 <불양비>에 기재된 '함희'가 위 공양주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일대는 양근 함씨와 관련이 많다. 함왕혈, 함왕성지 등도 모두 함씨 관련 설화나 유적이다. 함왕혈은 함씨 중시조 고려태조 공신 광평시랑 함규의 탄생담이 얽혀 있다. 함씨각의 시조 영정도 바로 함규인 것으로 추측된다.
*범종각. 범종각 지붕 위로 올라가는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미륵불
절 아래 두 개의 비석이 별도의 안내문 없이 서 있다.
*사나사 불양비
'경기좌도 양근군 경내 당상계 <불양비>...' 읽어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고 파손되었다.
아마 사찰의 운영을 위해 시주한 것을 밝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내막을 기재한 비석으로 보이지만 비문이 군데군데 파괴 결락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1773년 세운 것으로 양평군 내의 당산계원이 경내의 비석 원증국사탑비를 세운 경위를 적은 것으로 파악된다.
1,20년 전에 비해서도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다. 전각을 세워 보호하는 것이 좋겠고, 지금이라도 탁본을 떠서 현재 판독 가능한 내용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앞쪽의 큰 비석은 최근에 중건하며 세운 것이다. 아름다운 한글 서체로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나사 #양평가볼만한곳 #대적광전 #원증국사 #함씨각
사나사 일주문. 용문산사나사 현판이 걸린 아래 처마에는 단청이 없어 무게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