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흥인지문> 야경
과연 한양의 동쪽을 풍성하게 채울만한 위엄과 무게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맛이 서울이 고도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서울 성곽의 동쪽문이어서 동대문이라 불린다. 2008년 남대문 숭례문이 소실되면서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한 성문이 되었다. 동대문역이 정말 이 동대문에 있는 역이다.
1.방문지 대강
명칭 : 흥인지문 興仁之門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문화재 : 대한민국 보물 1호
2. 방문일 : 2023.11.13.
입장료 : 없음.
옹성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음
3. 돌아보기
동대문역에서 나오면 바로 이 동대문을 만난다. 동대문역이 동대문의 역이다. ㅎㅎ. 서울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도성 8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문이어서 외관과 실용성을 함께 갖춘 듯하다. 덕분에 외관도 더 견고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공해와 빌딩에 찌든 것만 같은 서울에 이런 역사, 이런 건축물도 있을 거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인구와 공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도시 서울이 역사의 구심이기도 하다는 것을 장엄한 동대문을 보면서 다시 깨닫는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풍스런, 역사의 깊이를 일상 속에서 만난다. 서울이 어디로 가야할지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를 보는 거 같다. 일상 속에서도 안고 가야할 숭고와 깊이, 모두의 삶도 그러할진저.
3-1 작명 내역 소개
태조 5년 병자(1396, 홍무)
05-09-24[02]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전재)
태조 6년 정축(1397, 홍무) 4월 28일(경술)
흥인문에 거둥하여 옹성을 둘러보다 (태조실록)
외사씨 왈
동대문이라는 이름도 이때1396년 명명 시부터 흥인문과 함께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옹성을 둘러보니 태조의 곁에 서있는 거 같지 않은가
3-2 흥인지문 소개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건축 양식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국보 제1호인 숭례문과 비교하면 전체 모습과 규모는 비슷하되 화려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특이하게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조형을 보여준다.
서울의 풍수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빈약하다 하여, 이를 보강하기 위해 꾸불거리는 산맥의 모습을 한 '지(之)'라는 글자를 이름의 중간에 넣은 까닭에 다른 성문보다 1자(字)가 많은 4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반달형의 옹성도 같은 이유로 문 밖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 다포계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다음백과 전재)
3-2) 옹성 소개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석축은 화강암을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 장대석의 일종으로 보통의 성을 쌓는 성석(城石)보다 훨씬 정밀하고 반듯하게 가공한 돌)으로 쌓았고 중앙에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석축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석축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석축위에는 누각 주변으로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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