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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주간 설교 4
“빌라도의 고민, 비겁함, 그리고 허영심”
마태복음 27:11-2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오늘은 수난의 파사드 중 하나인 ‘빌라도의 고민’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 어쩌면 우리 실존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늘 고민거리가 찾아오기 때문이죠.
아마도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민은 우리 인생의 매 순간마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민할까요? 인생의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고민의 순간도 있지만 결단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답을 알면서도 결단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빌라도 역시 오늘 그의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려고 하는 것은 빌라도가 왜 고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고민의 순간도 있고 결단의 순간도 있다!
고민은 인생의 답을 몰라서 하는 것이고,
결단은 답을 앎에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결단의 순간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민하는 빌라도의 모습을 보면서, 결단의 순간에 고민하는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결단을 인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책임과 고통을 모면하려는 ‘비겁함’,
그리고 결단의 책임을 모면하는 포장된 ‘허영심’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빌라도의 고민은 우리들에게 이 둘을 극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책임적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를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빌라도의 고민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빌라도의 비겁함!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22절에서 우리는 고뇌하는 빌라도를 만나게 됩니다.
유대의 총독이라는 막중한 자리에서 어떻게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은 ‘확신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NIV 성경으로 22절과 23절을 보겠습니다.
22 "What shall I do, then, with Jesus who is called Christ?" Pilate asked. They all answered, "Crucify him!"23 "Why? What crime has he committed?" asked Pilate. But they shouted all the louder, "Crucify him!"
영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Jesus who is called Christ’
빌라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지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예수를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부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확신의 부재’, 그것이 우리를 비겁하게 만드는 거죠.
여러분 빌라도가 확신의 부재가운데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하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But they shouted all the louder, "Crucify him!"
우리들의 삶에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귀얍사’라고 합니다. ‘귀가 얇은 사람들’
확신이 부재한 사람이 귀가 얇습니다.
불의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을 앎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잘못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을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세종문화회관의 사장도 지낸 꽤 알려진 분입니다.
이분이 문화계 쪽에 있다 보니 이어령 전 장관과 또 한 분의 유력한 인사과 식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서로 깜짝 놀랐답니다.
세 명이 다 식사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놀라서 “당신도 예수 믿어요?” 했대요. 그
때가 이어령 전 장관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어령 전 장관이 유력한 한 인사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도 하나님 믿어?” “예, 믿어요.”
“그럼 예수님의 부활도 믿어?” “음... 그건 좀..”
“그럼 믿는 거 아니야.”
우리는 그런 얘기 참 쉽게 합니다.
“나는 교회 다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 삶에 그리스도로 고백되지 못하면 우리는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확신의 부재 가운데서 빌라도와 같은 비겁한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다 이 부분을 아주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진실이 아닌, 주변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는 사실을. 반대로 우리에게 확신이 있다면 주변의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빌라도는 그렇게 나약한 사람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죠.
더욱 확실한 증거는 본문 18절과 19절에 드러납니다.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는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지만 유대인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재판정에 데려 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아내조차도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저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진리도 알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힘들지 않나요?
진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겁하게 만드는 것들 말입니다.
또한 그 비겁한 결정들에 대하여 아무리 핑계를 대지만,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 19절은 빌라도에 대하여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비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사람들에게 우유부단한 말을 던지는 ‘결정 장애자’ 빌라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을 듯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fact’가 있습니다.
처음에 그가 마음먹었던 것은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문맥으로 보아, 죄 없는 예수님의 억울함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오히려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그의 노력은, 아내의 권유도 한 몫을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수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빌라도’라는 이름만이 사도신경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 유아를 학살했던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아들들이 유대를 분할해 통치하도록, 로마는 그들에게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은 ‘아켈라오’였는데, 아버지처럼 성격이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계승에 반대하던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통치를 하다 아구스도 황제의 재판을 받고 고울 지방으로 추방됩니다.
그 후 이 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를 위해 5대 총독으로 빌라도가 파견되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가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파견했던 13명의 총독 중 한명이었습니다.
‘본디오’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지방호족이었던 그의 집안을 가리키며,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으로 무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로마제국에서 기사가문 출신으로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죠.
빌라도는 A. D. 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당시 상황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있었을까요?
대개 총독들은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황제를 기념해 세운 ‘가이사랴’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지만,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유대를 통치하며 정치, 종교, 경제 전반에 걸쳐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바로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서’라는 말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에 관한 정보를 성경을 통해 접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유대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기인하는데, 그가 총독 휘하의 군대 사령부를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군대를 옮기려면 황제의 동상과 군기를 가져와야 하는데 ‘거룩한 도성’에 이런 것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유대인들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한 이유로 유대인의 반란의 위험성을 로마의 황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 잠깐 언급되어 있지만,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의 점령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기록에 의하면 로마 경비병은 관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을 곤봉으로 쳐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유대인의 불만은 계속 로마에 전달되었고, 예수님의 수난 시기에 빌라도의 입지는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주었지만, 결국 빌라도는 AD. 36년 로마로 소환 조치되고 맙니다.
이제 궁금증이 조금 풀립니다.
그렇게 잔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왜 예수님께 그런 관대한 모습을 보이려 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는지.
그가 처한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나려는 곳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이기적인 이유에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 24절.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죠.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처형을 요구하자, 때려서 놓으리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관례를 따라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고자 시도하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그 아내의 말대로 예수의 판결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을 외면한 것이죠. 마지막 순간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 말씀.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어떤 핑계가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빌라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빌라도와 관련된 몇몇 전설들과 창작된 이야기만이 전해올 따름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고뇌하는 모습!
문제는 우리 인생의 고뇌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비겁한 선택은 비겁한 결말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빌라도의 허영심
고민하는 빌라도의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요?
빌라도는 왜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 중 24절을 보세요.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떠오른 생각은 ‘허영심’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허영심은 세속적인 사람에게서도 종교성이 강한 사람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허영심’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실을 감추거나 희생시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 보니까, 빌라도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결정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만이 그것을 회피하고 싶을 뿐이죠.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15-18절에 보니,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두 가지 점에서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하나는 관례에 따라 총독이 죄수 중에 하나를 놓아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욕을 먹고 싶지 않다는 것,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사람들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단이 파고드는 틈이 바로 인간의 ‘허영심’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야망이라는 ‘허영심’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놀랍게도 육신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일수록 ‘허영심’에 더 취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의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 이 부분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을 만날수록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무기로 공격한다.
그것은 허영이다.
종교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대개 허영의 문제로 넘어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도덕적 성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허영의 유혹은 날마다 경건의 열심과 순전함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겉은 밝고 화려하지만 속은 어두운 삶으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적는다.
‘거룩함에 대한 교만처럼 위험스럽고 교묘하며 간사스러운 교만은 없다.’”
물론 빌라도가 종교적으로 그런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순절을 지나며 꼭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권력을 위해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 목을 매듯이,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 종교적 허영심으로 인해 진실을 외면하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탄이 종교적 허영심에 물든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종교적 허영심에 대하여 많은 분량을 할애하셨다는 것,
특히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한 것을 무겁게 다루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의 내용이죠.
먼저, 구제에 대하여 예수님이 묻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복지 제도 중에 하나가 회당에 일정량의 돈을 내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제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그 돈을 낸 사람을 공개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관례를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구제의 의도가 무엇이냐를 물으시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구제의 동기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인지가 ‘허영심’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또한, 당시 경건의 훈련이었던 기도에 대하여도 말씀하십니다.
독실한 유대인들은 관습에 따라 하루에 세 번씩, 개방된 공공장소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회당에서 소리를 내서 기도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었죠. 여기서도 예수님은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건하고 열심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종교적 경건은 허영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또한 경건 훈련을 위해 바리새인들이 하던 방식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금식할 때 이들은 베옷이나 상복을 입었습니다. 종종 얼굴에 먼지나 재를 뒤집어쓰기도 하는데, 고행과 슬픔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법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누군가 눈치 챌 수 있도록 영적 허영심으로 금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금식을 할 때’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만일 금식을 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셨다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금식의 형식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금식할 때’라는 말은 예수님의 의도가 금식을 하면 좋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기도와 구제와 금식 중에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동기를 물으시며, 우리의 허영심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허영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동기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은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이 동기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할진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동기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목회자의 자기반성이 이 부분에 참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하는 목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보다, 그 말씀을 전한 자신에 대한 평가에 더 민감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설교자’를 잊고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에 목말라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틈을 사탄은 참 교묘하고 치밀하게 파고들죠.
어떤 목사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특별 집회를 할 때면 원하는 강사가 누군지 교인들에게 묻는답니다.
그리고 그 많은 한국의 목회자 중에 늘 ‘김병삼 목사’가 1순위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것을 감추지 못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교인들은 제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설교하는 나를 생각하는가?
언젠가 어떤 방송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방송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시청률 1위입니다! 역시 입이 벌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목회를 한다는 것이 ‘허영심’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며 오스왈드 챔버스가 끊임없이 싸웠던 것이 ‘자신’이었다는 것.
‘주님은 나의 최고’라고 진정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의 싸움 말입니다.
진정한 영성과 경건은 주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데,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R. T. 프란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 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존 캘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묵상한 후에, 다시 내려와서 자기 자신을 묵상해야 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저는 이런 정의를 내려 봅니다.
“허영심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