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黃長燁, 1923년 2월 17일 ~ 2010년 10월 10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다.
제5~6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에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황원택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성장하였으며
평남강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평양고등상업학교에 신규 입학하였으나 193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전입 및 편입학하여 1941년 평양고보를 졸업하였다.
아버지 황원택은 본부인을 여의고 재혼한 부인에게서 황장엽과 아우 황봉엽 두 형제를 보았다.
일찍 사망한 그의 아버지 황원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1942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주오 대학(법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1944년 2월, 일제의 패전 징후 상황으로 인하여 강제소환되어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주오 대학을 중퇴한 후 약 1년 6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탄광에서 징용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그 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인 1947년 만24세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고 1951년에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 취득한 후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철학 석사·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에 귀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65년 10년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였으며 김정일을 후원하여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1972년 ~ 1982년),
1980년 조선로동당 총비서장,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원장,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장,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장 등 여러 요직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고 이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지인이 황장엽에게 30년 동안 개혁 개방을 같이 하자며 "너희 그러다가 진짜 망한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김정일을 중국에 보내 달라!"고 했고,
이에 황장엽은 김정일에게 중국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라고 제안했다가 "그 나쁜 XX들! 무엇 때문에 중국에 가겠소?"라며 욕하던 김정일에 의해 결국 당 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에,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였다.
그의 수기에는 망명 이유를 조국(북조선)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자신의 담당하던 당 국제사업의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망명 후에는,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였으나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집권 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0년간 정부에 의해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해제되었다.[5] 이후 사망할 때까지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황장엽이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황장엽을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2010년 4월 4일에 보도했다.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조선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고만, 지난달 30일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또한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밝혔다.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2010년 10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양녀인 김숙향 등이 주관하였으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소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