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 ⑬:
죽음보다 더욱 깊은 그리움
ㅡ“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ㅡ
②
朴埰同 (2015.03.21.18:55)
다음은 {목사의 딸} 70쪽에서 옮깁니다.
나는 밤마다 아버지가 주무시기 전에 발을 주물러드렸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어머니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셨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당신 일에만 몰두하셨다.
제가 아버지를 여읜 뒤 한 해가 지나도록 집에 있을 때면 ‘죽음보다 더욱 깊은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 하나는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줄거리를 파악한 ‘영미소설’이나 ‘영미희곡’ 같은 경우 {영한사전}에서 단어 하나하나 모두 찾아 공책에 적어가며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목사의 딸}에는 <고아들>이라는 소제목으로 ‘어머니를 여읜 뒤 1954년에 미국으로 유학 간 요한 오빠, 故 김애련 사모님 교통사고 현장에 있었던 박혜란 님 둘째 오빠’와 ‘故 박윤선 목사님’의 해후, ‘1972년, 거의 20 년만의 만남’을 적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적은 기록대로라면 ‘자녀들을 위한 기도’만 하실 뿐 자녀들에게 참으로 ‘무정’하셨고 ‘무정’하신 박윤선 목사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정’하신 모습에서 ‘박윤선 목사님 인간미人間美, 김애련 사모님을 향한 그리움’을 유추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목사의 딸} 97쪽~101쪽에서 옮깁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이 이민 와서 오빠 곁에 머물자 오빠는 매우 행복해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고마웠다. 오빠 덕분에 미국 생활에 잘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빠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는지 유학을 떠난 후 한 번도 한국에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와는 등을 돌리고 살았다. 물론 한국에 나올 여비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우리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어색한 두 부자의 만남이 이뤄졌다.
“왔냐.”
“네”
20 년 세월의 공백기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서먹할 뿐이었다. 어색한 시간이 끝날 즈음 요한 오빠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때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만 높았던 터라, 나는 자식이 부모에게 그렇게 질문해도 되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버지는 아들의 느닷없는 질문에 놀라시는 듯했으나 분을 내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답변하시지도 않았다. 오빠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재혼하시려고 저를 미국에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나는 놀랐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해명을 하시지 않았으며, 오빠는 아버지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돌아갔다. 아마도 단단히 별렀던 같다. 그리고 그날 밤, 새벽 두시쯤 됐을까, 아버지가 나를 깨우셨다.
“애야, 나 돌아가야겠다.”
“네에? 지금 이 새벽에요?”
“그래. 돌아가야겠다.”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새벽에 나를 깨우고는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셨다. 아직 일을 마치시지도 않았는데, 모든 일을 접고 짐을 꾸리셨다.
아버지는 귀국 뒤 요한 오빠에게 세 차례 편지하셨으나, 요한 오빠는 답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내게 몇 차례 편지를 보내 궁금해하셨다.
혜란에게
그동안도 주님의 은혜로 평안할 줄 안다. 위해 기도할 뿐이다.
···(중략)···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요한 오빠 오해를 좀 풀도록 하라는 것이다. 내가 요한이를 미국에 입양 관계로 보낸 것이 내가 그를 사랑치 않아서 그리했다는 오해는 풀어야 한다. 그 입양 결정은 너희 어머니가 살았을 때 된 것이다. 너희 어머니와 내가 요한이를 잘되게 하려고 기뻐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다만 여권과 비자가 너희 어머니 별세 후에 좀 더 있다가 나왔으므로 어머니 없는 처지에서 외국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요한이가 어머니의 비참한 광경을 서울서 봤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내가 화란에 가 있던 때였다. 내가 화란에 가 있던 때에 고려신학교에서 생활비를 넉넉히 대지 않아 곤란을 봤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내 친구들도 학교 담당자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화란서 돌아오니 그런 원망스러운 말을 내게 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여기 말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내가 화란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 너희 어머니가 늘 비관의 편지(생활비가 부족하다고)를 종종 했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가 요한이와 같이 서울 가서 사진 박은 것을 내게 보낸 바 있었다. 그 사진은 극히 비참하게 보였다. 아마 그때 몸이 괴로웠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들이 요한이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요한이를 사랑치 않은 까닭이 아니다. 너희 어머니는 내가 화란에 있을 때 종종 편지했으며 나를 격려해 줬다.
내가 잘못한 것은 주로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일본에 있을 때 너희 어머니와 약간 다툰 일이 있고, 또 나로서는 지나치게 분노한 일이 있는 것, 심지어 조금 때린 일도 있음은 뼈아픈 일이고, 회개한다. 그러나 요한이가 가정의 불행한 방면을 전부 내 탓이라고 하면서 나를 몹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주님 일에 지나친 충성을 했는지는 모르나, 너희를 위해서는 시간을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내가 요한이를 데리고 있은 때가 많지 못함은 후회한다. 그런데 모든 일에 하나님 판단이 있을 것이다.
···(하략)···
-1971년 12월 27일에 받은 편지-
편지를 보면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직시하지 않고 회피했다. 자식의 도리를 언급하면서 부모의 도리가 무엇인지도 함께 언급해야 했으며, 본의 아니게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면 먼저 사과부터 해야 했다. 그러니 요한 오빠가 아버지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가는 일이다.
ㅡ박혜란 님은 {목사의 딸} 96쪽에서 요한 오빠와 아버지의 만남을 1972년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시는데, {목사의 딸} 98쪽~101쪽에 적힌 편지, 박윤선 목사님께서 박혜란 님에게 보내신 편지는 1971년 편지입니다. 이를 두고 “{목사의 딸} 96쪽 저자와 {목사의 딸} 98쪽~101쪽 저자는 다르다.”며 ‘{목사의 딸} 박혜란 님 저작’을 부정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ㅡ
{구약성경}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동해보상법’에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규정을 뛰어넘는 법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엡 6:2~3)으로서 제5계명에 관한 법입니다. 즉,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린 자는 똑같이 때려라.’가 아닌,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한 자는 똑같이 저주해라.’가 아닌, “죽여라.”는 법입니다. ‘{목사의 딸}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편의 사고’로 {목사의 딸}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채 {목사의 딸}에 편승해, 박윤선 목사님 생애 한 단편만을 가지고 ‘故 박윤선 목사님 인격 전체와 신앙과 신학 전체’를 부정하며 난도질했던 철부지 목사님들은 이제부터라도 입에 재갈을 물리셔야 합니다.
자식들 앞에서는 침통한 얼굴뿐, 그 어떤 큰 내색도 하지 않으셨던 박윤선 목사님···.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친한 친구나 후배 앞에서는 우셨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추측이 빗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12일에 기독서점에서 {목사의 딸과} 함께 산 ‘안만수 대담 {박윤선과 140 인의 만남: 제1권} 조주석 편 {수원: 영음사, 2013)’ 33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신 목사님>이라는 소제목으로 ‘장경재 목사님 아내 되시는 강정채 사모님과 안만수 목사님 대담’ 끝부분입니다. 어제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읽은 글입니다.
강정채: 그때 시계가 참 귀했습니다, 내가 장 목사님(남편)께 시계를 사드렸는데, 그 다음날 보니까 시계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까, 박윤선 목사님께서 시계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차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박 목사님께 드리고 왔다고 장 목사님이 말씀하셔요. 그리고 처음 사모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렇게 슬퍼하시는 거예요. 고생 많이 시키고 맨날 혼자 살다가 가셨다고 말입니다.
안만수: 그러면서 막 우셨어요?
강정채: 예. 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