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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⑮
제2장 세존의 생애 – 깨달음에의 길, 열반에의 길
제7절 전도의 나날 : 세존의 가르침과 전도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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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존의 설법과 가르침
1) 전도 활동
세존의 재세 중에도 많은 수도자들이 제자가 되고, 또 세존을 따라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재가신자와 후원자가 증가하여 불교는 착실히 그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를 위해서는 세존의 끊임없는 전도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존의 교화는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 대해서 행해졌다. 국왕과 부호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세존은 꼭 같이 설법했던 것이다. 세존에게 있어서는 매일매일 문자 그대로 전도의 나날이었다. 탁발을 할 때, 문득 떠오른 말이 계기가 되어 가르침을 설하기도 했다.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세존이 먼저 말을 걸어 망설임을 풀어 주기도 했다. 소문을 듣고 세존을 찾아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악의를 품고 접근해 왔다가 오히려 세존에게 교화된 사람도 있었다. 세존에게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된 사람들로부터 식사의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설법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이상과 같은 것들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전도의 기록이다.
세존의 교화는 35세 경의 초전법륜으로부터 80세의 입멸 때까지 45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가르친 법의 내용은 동일한 것일 테지만 그 설법의 방법은 초기와 만년이 각각 달랐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세존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의 추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수행자 교단의 집단적 개종은 초기의 전도 활동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후에는 이 같은 형태를 거의 볼 수 없다. 우리는 사화외도(事火外道)의 카샤파 삼형제와 그 제자들, 그리고 산자야의 수제자인 샤리푸트라 및 마우드갈랴야나(목갈라나)와 그 제자들의 개종 때 격렬한 논쟁과 혹독한 대결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들이 우루빌바에서의 불을 토하는 독룡의 항복 등, 신통력을 겨루는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 쉬리바스티 거리에서 망고나무를 하룻만에 성장시키고 천 명의 부처를 출현시킨 것 등, 이른바 ‘쉬라바스티의 기적’을 연출했다는 전설은 이 지역에 세력을 펴고 있던 자이나교나 아지비카파와의 항쟁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세존을 비방하기 위하여 음탕한 여인을 시켜 마음에도 없는 세존의 설법을 듣게 하여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해 놓고는 몰래 그녀를 죽여 시체를 기원정사의 나무 밑에 묻고나서, “비구가 살생을 범했다.”고 떠들고 다닌 다른 종파의 수행자나, 둥근 나무 사발을 배에 넣어 임신한 것처럼 가장하여 세존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달려든 친차 여인의 이야기 등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친차 여인의 경우에는 제석천이 흰 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잡아맨 끈을 물어 끊었기 때문에 간계가 탄로 났으며, 그 순간 그녀는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다른 종파들에 의한 이 같은 방해 작업은 곧 세존의 전도활동이 그만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타종파와의 항쟁 설화가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다. 그 전도 활동의 주류는 도를 구하는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2) 가르침의 특성 – 대기(對機) 설법과 비유
세존은 교화에 있어서 인간의 심리를 통찰하고,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서 설법을 했다. 이것을 ‘대기설법’이라고 하며, 의사가 병세에 따라 투약 치료를 행하는 것에 비유하여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도 한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비구키 키사고타미의 출가에 관한 이야기(죽은 사람이 없는 집의 겨자씨를 구해 오게 한 것)는 대기설법의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세존은 매우 난해한 교리를 설명할 때 능숙하게 비유를 사용하여 듣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 있다.
앙가국의 수도 참파(짬빠)에 사는 장자의 아들인 쉬로나 코티빈샤(Ⓟ 소나)는 라자그리하에서 세존에게 귀의한 후, 한림에 살면서 선정에 열중하고, 엄격한 정진의 결과, 발에서 피가 날 정도였으나 그래도 정각을 얻을 수 없었다. 득도를 단념하고 환속을 결심한 쉬로나에게 세존은 거문고의 비유로써 설법하였다.
“거문고는 그 줄이 너무 세게 매어져 있거나 너무 느슨하게 매어져 있으면, 좋은 소리를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무 지나친 정진이나 나태한 수행은 모두 정각과 거리가 먼 것이다.”
이밖에도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그 상처의 원인을 따지기 전에 먼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는 이야기나 ‘맹인들의 코끼리를 만진다.’ 등의 많은 비유가 있다.
그 가르침이 아무리 높은 것이라 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이해가 따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존의 설법은 어떤 때는 그 핵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또 어떤 때는 완곡하게 표현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3) 재가신자에 대한 설법
세존은 새로운 신자들에게 출가의 생활을 권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출가의 공덕을 설명하여, 고향인 카필라바스투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샤카족 사람들을 출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재가신자가 되어 가정에 머무르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세존은 재가신자에 대해서 우선 보시의 공덕과 계를 지킬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내생에 관해서 가르쳤다. 사제나 팔정도, 십이인연 등의 교리는 그 후에 설해진 것이다. 출가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교리일지라도 재가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구체적인 생활윤리에 관한 설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싱갈라에 대한 교훈(「싱갈로바다 숫탄타’, 한역으로는 六方禮經, 善生子經 등)은 그러한 갖가지 일상생활의 윤리가 정리된 경전의 하나인 것이다.
라자그리하에 사는 한 가정의 주인인 싱갈라는 부친의 유언을 지켜,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깨끗이 한 다음, 교외로 나가서 동서남북과 상하의 6방(六方)을 예배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마침 탁발을 위해서 그곳을 지나가던 세존은 이 광경을 보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천지사방에 예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설명한 다음, 각각의 방향을 부모, 스승, 처자, 친구, 시종, 사문, 바라문으로 구분하여 여기에 각각의 뜻을 부여하고 나서 이와 함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사람으로서 준수해야 할 도덕과 처세훈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설해진 도덕률의 기본은 인간생활의 더러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살생, 절도, 사음(邪淫), 거짓의 4악(四惡)에서 벗어나 욕망, 분노, 어리석음의 마음을 억누르고 매일매일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또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자는 조상 전래의 재산을 유지하며 좋은 친구와 교제하고, 또 가족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가운(家運)의 융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경전은 팔리어로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네 차례에 걸쳐 한문으로도 번역되었으며, 이때 내용과 문장도 많이 보충되었다. 또 이 경전이 대승 경전 속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설법하는 바가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윤리의 규범으로서 중요한 위치한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를테면, “해가 떠오른 뒤에도 아직 잠자리에 누워있고, 남의 처자에게 지나치게 접근하며, 싸움을 다반사로 하고, 무익한 일에 열중하거나 도박과 술, 여자에 정신을 빼앗기고, 아무 때나 거리를 배회하며 나쁜 친구와 사귀고, 특히 성욕이 강한 자는 인간 세상에서 파멸로 가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2천 수백 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훈계와 규범인 것이다. 또 친구 관계에 대하여 “술을 마실 때만 친구가 되는 자가 있고, 또 자기가 진짜 친구 중의 친구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친구가 진실한 친구이다.”와 같은 구절은 바람직한 인간관계에 필요한 올바른 자세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집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출가하여 수도를 하는 것이 그 본뜻이지만, 집에 있으면서 세존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는 재가신자로서 가정을 지키고 재산을 유지하며 윤리적으로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재가신자가 지켜야 할 이 같은 덕행이 후대의 경전에는 신자의 십덕(十德)으로 정리되어 있다. 「밀린다 판하」에 의하면 나가세나 비구는 밀린다왕의 질문에 대하여 신자는 ① 불교 교단과 고락을 함께 한다. ② 세존의 가르침을 지침으로 한다. ③ 가능한 한 기꺼이 보시를 행한다. ④ 세존의 가르침이 침체된 것을 볼 때는 이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⑤ 올바른 견해를 가진다. ⑥ 흥미 본위의 생활을 지양하고, 또 생계를 위하여 다른 스승을 선택하지 않는다. ⑦ 육체에 의한 행위와 말에 의한 행위를 삼간다. ⑧ 화합을 즐긴다. ⑨ 질투를 하지 않고 거짓으로 세존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 ⑩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10개 항목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2. 45년간 전도의 발자취
1) 세존의 전도 범위
세존이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로 설하면서 돌아다닌 지역은 어디였을까? 초전법륜을 행한 뒤 세존이 마가다국의 종교 도시 가야로 향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세존의 직접적인 전도 범위는 갠지스 강의 중류 유역에 한정된다. 즉 갠지스 강 남쪽의 마가다국, 북쪽 유역의 브리지 연합 릿차비족의 영토, 그리고 약간 북서쪽에 위치한 코살라국과 말라족, 콜랴족의 지방, 약간 남서쪽 야무가 강과의 합류점에 가까운 바트사국 등이다. 이밖에 마가다국 동쪽에 인접해 있는 앙가국과 코살라국 서쪽에 인접해 있는 판차라국, 쿠루국에도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가다국에는 수도인 라자그리하가 있었고, 코살라국에는 쉬라바스티(사밧티)가 있었다. 이들은 당시 2대 강국으로서 도시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어, 융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릿차비족의 수도 바이샬리(Ⓟ 베살리, 광암성, 廣巖城)는 상업도시로 번영했으며 바트사국의 도읍인 야무나 강변의 캬유샴비(꼬쌈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라나시나 카필라바스투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또 도시뿐만 아니라 설법의 장소로서 경전에 기록된 거리와 마을은 더 많은 수에 이르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세존 교화의 발자취가 멀리 서인도와 스리랑카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ㅇ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후대의 창작일 것이다.
2) 라자그리하
현재 비하르 주 대략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라자그리하의 유적은 구성(舊城)과 신성(新城)으로 나윈다. 구성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은 북쪽으로 바이바라 언덕, 비프라 언덕, 라트나 언덕, 찻타 언덕과 이어져 있는데, 바이바라 언덕과 비프라 언덕의 사이로는 북문이 뚫려 있다. 남쪽은 소나 언덕과 우다야 언덕으로 막혀 있어서, 두 언덕의 협곡에는 남문이 있다.
현재 자이나교의 사원이 점점이 서 있는 이들 언덕의 능선에는 돌을 쌓아올린 외벽이 길게 뻗어 있어서 분지 중앙을 둘러싼 내벽과 더불어 적의 침공을 막고 있었다. 적어도 경전상으로는 이 거리에서 실제로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구성과 신성이 모두 왕궁 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구성의 남문 밖은 반강가 강의 자마한 줄기와 접하고 있다. 동서로 뻗은 바이바라 언덕과 소나 언덕 사이의 계곡을 분지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보드가야로 통하는 구도로를 따라 세존이 체류한 적이 있는 장림(杖林, 랏티원)의 연고지가 있다. 우다야 언덕과 찻타 언덕의 사이를 동쪽으로 나아가면 제석굴(帝釋窟) 설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 기리야크 스투파의 유적이 있다. 북문 근방 바이바라 언덕의 북쪽 중턱에서는 온천수가 솟아 나오기 때문에, 대낮에는 목욕을 하거나 세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북문을 나서면 왼쪽으로는 죽림원의 옛터가 있고, 그 앞에는 돌을 쌓아올린 산성의 외벽이 대략 사각형으로 구축되어 있다. 성안 남문 근방에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수레를 몰고 다니던 바위길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깊이 파여 들어간 수레의 바퀴 자국이 역력히 보인다. 여기서는 ‘셸 인스크맆션(shell inscription)’이라 불리는 기묘한 문자같은 것도 볼 수 있다.
세존은 라자그리하에서 영취산과 죽림정사에 흔히 머물렀으며, 때로는 성안으로 탁발을 하러 다니기도 햇다.
영취산(ⓢ 그리드라 쿠타, Ⓟ 깃짜꾸따 : 시사굴산, 耆闍崛山)은 성에서 바라보면 약간 동쪽 끝으로 보이는 찻타 언덕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 언덕의 능선에는 검은색에 흰색이 섞여 있는 암반이 솟아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독수리의 깃처럼 보인다고 하여 독수리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은 자기 아들인 아자타사트루에 의하여 유폐되어 실의의 나날을 보냈던 빔비사라왕의 감옥과 명의(名醫) 지바카가 소유했었다는 망고나무 밭의 대략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산꼭대기는 경전에서 전하는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기에는 어렵지만 그래도 정사의 터가 남아 있으며, 부근에는 명상과 수도에 알맞은 작은 동굴이 지금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한편 죽림정사는 구성의 북문 밖에 인접해 있는데, 아주 평탄한 땅에 세워져 있다. 죽림정사(칼란다카 니바파)는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가 기증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일설에는 라자그리하의 부호인 칼단다카 장자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대나무가 무성한 숲으로서 바로 북쪽에는 아름다운 칼란다카 연못이 있었다. 죽립정사에서 행해진 세존의 설법도 매우 많다. 20세기 초엽에 고고학국에 의해서 이 지역 일대의 발굴 조사가 행해졌지만 당시에는 이미 대부분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어서, 스투파 터가 확인된 것 이외에는 두세 개의 불상과 연기에 대한 노래가 적힌 11세기의 남성상이 발견된 데 그쳤다. 죽림정사에서는 바이바르 언덕의 북쪽 경사면으로 제1회 불전결집이 거행되었던 칠엽굴이 바라다 보인다.
라자그리하는 당시에 세력을 뻗고 있었던 자이나교 등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구성의 서쪽, 바이바라 언덕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손반다르굴은 거기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3~4세기의 자이나교 출가자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자이나상이 조각된 것이 남아 있다. 구성의 대략 중앙부에 위치한 마니야르 마트도 옛 불교의 스투파 위에 세워진 것이지만, 사실상 자이나 사원과 힌두 사원의 옛터인 것이다.
법현과 현장도 이곳을 다녀갔는데, 특히 현장의 기록 중 칼라다카 연못가에 건립되어 있었다는 아쇼카왕 석주와 두세 가지의 유적을 제외한 나머지는 지금도 그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3) 쉬라바스티(사밧티)
쉬라바스티는 푸라세나짓트왕(Ⓟ 빠세나디왕 / 파사익왕) 치하에서 번영했던 코살라국의 수도로서, 그 명칭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전설적인 왕 쉬라바스타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불교가 흥기하기 이전에 이 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아치라바티 강(지금의 라프티 강)의 남쪽 강 언덕에 위치하여 남북 인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또는 상업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고 있었다. 「숫타니파타」에는 세존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십여 명의 수도자가 남인도로부터 이곳까지 찾아와 세존을 따라서 라자그리하로 갔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쉬라바스티의 유적은 현재 웃탈 푸라데슈 주의 사헤트∙마헤트 가운데서 마헤트의 땅으로, 성을 둘러싼 누벽 터는 볼 수 있지만 내부의 유적에 있어서는 분명치 못한 점이 많다. 팍키 쿠티, 캇치 쿠티라고 불리는 두 개의 작은 언덕 가운데서, 전자는 현장이 기록한대로 앙굴리말라가 회개했던 곳이라느니 또는 푸라세나짓트왕이 건립한 대법당의 터라느니 하는 견해가 있지만 확증은 없다. 후자는 쿠샨시대의 건축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유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성의 교외에 위치한 유명한 기원정사가 얼마나 융성했는가는 뒤에 기술할 것이다.
3. 전도여행으로부터 정주(定住)로..
1) 상가와 계율
세존에게 귀의하고 출가한 비구들(후에는 비구니도 포함됨)은 불교 교단(상가)의 일원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상가는 ‘화합중(和合衆)’이라고 해석되는 말인데, 흔히 큰 바다에 비유된다. 제각기 다른 맛을 지닌 많은 하천의 물도 한 번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모두 같은 맛이 되듯이 출신과 계급이 다른 사람들도 일단 출가한 다음에는 모두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상가의 구성원인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무엇보다도 계율의 준수가 요구되고 있다. ‘계(실라)’는 불교의 수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적인 덕행이며, ‘율’은 상가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타율적인 행위규범을 뜻한다. 계와 율은 모두 세존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었다. 세존이 결정한 규칙은 각지에 있는 불교 교단의 구성원에게도 전해졌다. 세존의 입멸 후에 열린 제1결집에 의해서 율 – 즉,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규칙들 –로서 정비된 규칙은 ‘바라리목차(婆羅提木叉)’라고 불리게 되었다.(계율이 부처님에 의해 의도적으로 정해졌다기보다는 당시 교단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부처님께 물어서 그 결과를 모은 것이다.) 이러한 규칙들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죄로 정해진 것은 ‘바라이법(婆羅夷法)’이라 불렸으며, 이것을 어긴 자는 상가에서 추방되어 두 번 다시 상가에 들어올 수 없다.
그 하나가 불살생(不殺生)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모든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고 하는 생명존중(아힘사)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둘째의 불투토(不偸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후대에는 물질적인 도둑질뿐만 아니라 훔치고자 하는 마음 등과 같은 심리적 동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다음에 불사음(不邪淫)은 출가 후에는 성적 교섭을 끊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불망어(不妄語)는 단순히 거짓말을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얻지 못한 종교적 체험(이를테면 정각의 경지 등)을 얻었다고 하는 거짓말을 금하는 것이다.
율에는 이 밖에도 참회를 함으로써 용서되는 가벼운 허물과 일상의 의∙식∙주에 관한 예절, 또는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조목 등이 포함되어 있다.
2) 유행 생활
세존이 극단적인 고행을 버린 것은 앞서도 말한 바가 있지만, 출가 수도자가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식사는 탁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밤에는 나무 아래에 앉아서 쉬는 것 등 네 가지 원칙(사의지, 四依止)은 출가 비구의 기본적인 생활양식으로서, 후대에 이르면 이것이 12~13가지의 ‘두타행(頭陀行)’으로 정리된다. 세존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하카샤파는 이 두타행이 뛰어났기 때문에 ‘두타 제일’로 불렸다.
13두타행은 경전에 따라 약간씩 그 내용이 다르지만 주로 삼림 속에 살고, 분소의(糞掃衣 : 버려진 헝겊 조각을 주워 모아서 만든 옷)를 입고, 항상 삼의(三衣 : 상의, 중의, 하의)만을 입으며, 언제나 앉아서 눕지 않고, 나무 아래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살며, 음식물은 걸식에 의해서만 충당하고, 더욱이 한 번 식사가 끝난 후 다시 먹고 마시지 않는 등의 엄격한 생활규범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테라 가타」에는 두타행을 일상적으로 실천한 많은 비구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도적이었다가 출가한 앙굴리말라도 엄격한 두타행자였다고 한다. 세존은 삼림 속에서 혼자 살면서 다른 비구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던 그릿사니 비구(?)에 대하여, 그저 삼림 속에 사는 것만이 수양이 아니라 비구가 된 자는 그 행위의 모든 면에 있어서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훈계하고 있다.
초기의 경전은 출가 비구들이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삼림 속 깊숙이 나무 아래나 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에 잠기고,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또는 짚으로 주위를 둘러친 간단한 오두막에서 비바람과 이슬을 피하고, 평지에서는 지붕이나 나무 그늘 같은 덮개가 없는 옥외의 맨땅에서 자며, 때로는 산 중턱에 있는 자연 동굴을 이용하여 수행하고 그 곳에 머물렀음을 전하고 있다. ‘숲에 사는 사람’, ‘나무 아래서 사는 사람’, ‘묘지에서 사는 사람’, ‘맨땅에서 사는 사람’ 등의 표현은 이 같은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존 시대에 무성하던 원시림의 옛 모습을 지금의 인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바위산의 동굴이나 바위 그늘,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갖가지 신령스런 나무들은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에 당시를 회상해 볼 수 있다.
세존 자신도 극히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전도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불제자 500명과 함께 있었다.”거나 “1,250명과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아마도 후대에 첨가한 것일 것이다.
3) 원림(園林)과 정사(精舍)
그러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행하는 유행(遊行) 전도의 형태는 얼마 후 교단이 확대되고 재가신자들이 토지와 건물을 기증함으로써 정주(定住) 포교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특히 비가 오는 계절(雨期)의 3개월 동안은 교통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나쁜 질병이 유행하고 독사와 해충에 해를 입을 우려가 있으므로 비구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공부하고 수도에 전념하는 기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를 ‘우안거(雨安居)’라고 부른다. 이것은 다른 종파의 출가 수도자에게는 관습화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세존은 애당초 이 관습을 따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비판을 고려하여 ‘우기의 정주’를 허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존이 우안거를 지낸 곳은 라자그리하를 비롯해서 매우 넓은 범위에 이르고 있다.
우안거의 관습은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도 공통적인 것으로, 자이나교의 개조 마하비라도 라자그리하와 미티라, 바이샬리 등에서 우안거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도시나 마을은 세존과 그 제자인 비구들이 우안거를 지낸 고장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두 파 교도가 동일한 곳에서 우안거를 지낸 일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습이 점차 정착함에 따라, 부유한 재가신자나 유력한 왕들은 비구의 안거를 위한 장소나 건물을 자진해서 불교 교단에 기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아라마(원림, 園林)’나 ‘비하라(위하라, 정사, 精舍)’ 등으로 불렸다. 아라마는 원래 ‘휴식처’나 ‘과일이 있는 동산’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불교 이외의 수도자들이 체류하는 원림도 있었다. 인도의 여름 더위를 안다면, 나무 그늘의 시원함만이 유일한 구원의 장소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아라마는 실로 즐거운 휴식의 동산이었던 것이다. ‘상가 사람들이 모이는 아라마(상가라마)’는 후에 중국에서 ‘승가람(僧伽藍)’으로 음역되어 사원 건축의 총칭으로 쓰였다.
비하라(위하라)도 원래는 명상과 수도를 위한 장소나 오두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교단이 발전하고 많은 비구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대규모의 건축물이 건조되자, 소위 ‘승원(僧院)’의 조직을 뜻하게 되었다.
일찍이 세존을 위해서 기증된 아라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기원정사이다.
4) 기원정사
한역 경전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기록되어 있는 이 아라마는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급고독’이라 불리던 쉬라바스티의 장자 수닷타(아나타빈띠까) 푸라세나짓트왕의 태자인 제타(祇多) 소유의 원림(제타바나)을 구입해서 기증한 것이다. 원림을 구입하겠다는 수닷타 장자에게 태자는 그 땅의 넓이와 같은 양의 황금을 요구했다. 그러자 믿음이 두터운 수닷타는 자기가 갖고 있는 황금을 땅에 깔고 그 땅을 팔라고 요구했다. 제타 태자도 그 마음에 감동하여 금으로 채우지 못했던 나머지 원림을 기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원정사 보시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알려져서 불교 미술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즉 기원전 2세기경의 바르후트를 비롯한 보드가야, 산치, 아마라바티 등에서 출토된 석주와 석비의 부조에 묘사되어 있다. 보드가야 난간의 그림은 땅에 가득 깔린 황금과 수목, 황금을 까는 두 남자의 모습을 표현한데 지나지 않지만, 바르후트의 부조는 이와 아울러 완성된 정사와 물항아리를 들고 서 있는 수닷타 장자, 세존에게 귀의하는 제타 태자 등, 설화 전부를 표현하고 있다.
기원정사의 유적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카닝감에 의해서 발굴되고 확인되었다. 지금의 웃탈 푸라데슈 주의 사헤트와 마헤트 중 사헤트가 그것인데, 사헤트는 누벽으로 둘러싸인 마헤트(쉬라바스티의 거리로 추정된다.)의 서남쪽 성밖 약 1km 되는 지점에 있다. 사헤트는 남북 약 350m, 동서 약 230m에 이르는 유적이다.
이들 유적은 이 지역의 승원이 세존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쿠샨시대(2세기경)와 굽타시대(4~5세기경)를 거쳐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많은 영고성쇠가 반복되었는 바, 5세기의 「법현전」은 “흐르는 물은 예전의 그 물이 아니로되 맑고 깨끗하며, 수풀과 나무도 아직 무성하여 온갖 화려한 색을 제각기 자랑하니, 그 초목의 울창함을 보라. 여기가 이른바 기원정사다. 기원정사를 둘러싼 모습으로 98개(일설에는 18개)의 승가람이 세워져 있는데, 그 모두에 승려가 살고 있었으며, 다만 한 곳만이 비어 있더라.”고 그 융성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7세기의 현장은 “가람은 수백이 있지만, 허물어진 것이 많다. 승려들은 많지 않은데, 이들은 정량부(正量部)의 학설을 배우고 있다.(불멸후 300년 쯤에 상좌부의 독자부에서 갈라져 나온 학파. 시비를 판정함에 있어 그릇됨이 없다는 뜻에서 ‘정량’이라고 함) 외도의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하여 이미 그 황폐함이 극심해져 감을 전하고 있다.
발굴된 유적을 살펴보면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세존이 가끔 체류했던 간다 쿠티(향전, 香殿)가 있고, 그 남쪽 약 60m 되는 지점에 코삼바 쿠티의 초가집 터가 있으며, 주위에는 많은 정사와 사당의 유적, 우물 등이 보인다. 유적의 남쪽과 북쪽 구석에는 다음 시대의 증축을 거친 대정사의 건축이 몇 개 있는데, 중간 정원을 향해서 20여개의 승방이 배치되어 있다.
바르후트와 산치의 부조에 묘사되어 있는 간다 쿠티와 코삼비 쿠티는 둥근 지붕이 있는 작은 집으로서 지붕은 풀로 이어져 있다. 특히 아마라바티에서 출토된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오두막집은 높은 평상의 형식인데 10여단의 사다리가 걸쳐져 있다. 마루가 높고 지붕을 간단히 풀로 이은 오두막집은 오늘날에도 갠지스 강 연안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집이므로, 초기의 정사도 모름지기 그와 같은 형태를 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사의 건축에는 주로 목재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무 기둥의 존재를 시사해 주는 발굴 결과와 “기원정사는 원래 7층 건물로서 공양하는 사람들의 연등이 끊길 날이 없었다. 그러나 쥐가 나와서 연등을 물고 달아나는 바람에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재가 되고 말았다.”고 한 「법현전」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거의 틀림이 없다.
코삼바 쿠티의 남동쪽에 산재해 있는 스투파 중의 하나에서는 작은 뼈조각과 돌구슬, 진주구슬 등이 담긴 사리용기가 출토되었는데, 표면에 새겨진 쿠샨시대의 각문에는 이것이 ‘존자(尊者) 붓다데바(bhadanta buddhadeva)’의 것이라고 적혀 있다.
쉬라바스티에는 기원정사 외에도 앞에서 말한 므리가라 마트리(Ⓟ미가라마타)가 기증한 ‘동원녹자모강당(東園鹿子母講堂)’과 푸라세나짓트왕이 여승들을 위해서 건립한 라자카 아라마(왕원정사, 王園精舍)도 있었다.
세존은 성도 후 3년째 되는 해의 우기를 이곳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도 20여회의 우안거를 쉬라바스티와 그 근처에서 지냈다고 한다. 또 쉬라바스티와 기원정사에서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경전도 매우 많다. 따라서 이곳에서 설한 내용이나 교화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5) 라자그리하와 각지의 정사
마다가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성 북문 밖에 빔비사라왕이 기증한 죽림정사(베누바나)가 있었다. 또 구성(舊城)의 찻타 언덕 기슭에는 의사 지바카가 기증한 망고원(지바카 암바베나)이 있었다. 그리고 구성의 서쪽 10킬로미터 남짓한 지점에 위치한 장림(杖林) 근처에는 온천 곁에 세워진 ‘타포다 아라마(온천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세존은 자주 죽림정사에 머물면서 법을 설했다. ‘죽림원율서양이소(竹林園栗鼠養餌所, 베르바나 카란다카니바파 : 대나무 숲의 다람쥐 공원)의 이름은 많은 경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유적은 현재 몇몇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라자그리하의 옛 왕성 안팎에 산재해 있다.
아라마(원림)는 갠지스 강 중류 유역의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밧트사국의 수도인 카유샴비(꼬쌈비)에는 고시타 장자가 기증한 고시타 아라마가 있었다. 바이샬리의 대림(大林, 마하바나)에는 쿠타가라살라(중각강당)가 있었다.
세존의 고국인 카필라바스투의 냐그로다(니그로다) 아라마도 유명한 것이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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