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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8)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6) / 마 24:29-31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은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 가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워 떨다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낮에 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는 누군가가 창칼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냐?”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그러자 식인종들은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말라. 한두 번도 아니고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 밤만 되면 창칼로 지키는 자가 있어 도저히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이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 주신 하나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지금까지 성자 예수님에 대해 5회에 걸쳐 공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개략).두 번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탄생). 세 번째,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십자가). 네 번째, 예수님은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부활). 다섯 번째,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심). 오늘은 여섯 번째로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재림). 예수님의 생애 순서를 따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크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를 따르고 있고, 성자에 대해서도 생애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순서를 따른 고백이다 보니, 체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두서없는 말을 하면, 듣고 있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신앙 고백이든 신앙 간증이든, 체계적인 게 좋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달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말로 전해야,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사 중에 방언보다 예언을 높이 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닌, 전달력 면에서 그랬습니다. 이 말씀이 그걸 대변해줍니다. 고전 14: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비체계적인 사람은 체계적인 것이 힘들겠지만, 체계적으로 말하고, 체계적으로 글 쓰는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재림”은 흔한 설교 주제가 아닙니다. 한 책을 정하여 이어가는 강해설교를 하지 않는 한, 재림과 맞닥뜨릴 때가 드뭅니다. 모처럼 사도신경 강해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상고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점점 가까운데,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위기입니다. 코로나도 위기지만, 더 큰 위기는 재림신앙의 실종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신약성경에 318회 나오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의 매 25절마다 한 번 꼴로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구약성경까지 합하면 1,518회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은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재림신앙’은 우리 신앙의 빼놓을 수 없는 근간입니다. 재림 신앙은 다른 말로 종말 신앙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신앙은 종말론적입니다. 천지 창조가 시작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종말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대 희랍사상에서 시작된 순환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히브리사상에서 유래한 직선사관입니다. 순환사관에 의하면, 역사란 동일한 패턴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이 역사관에서는 자연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역사관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가 토인비입니다. 직선사관은 역사를 다르게 이해하는데, 역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이해합니다. 역사는 시작된 이래 종말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봅니다. 이 역사관을 말하는 근거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역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천지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맞게 됩니다.
1. 거기로부터
“거기로부터”에서 거기가 어딥니까?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좁게는 하나님 우편을 가리킵니다. 넓게 보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무얼 하십니까? 1) 왕으로서 세상과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땅이 마귀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과 민족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2)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육체적인 연약함과 죄성 때문에, 여전히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도로 도우십니다. 3)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교회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성화의 단계로 이끄시는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옛적에 사도들을 통해 성경을 주셨고, 오늘날 교회에 설교자들을 세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실 수 없어서,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 4: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보내실 때도, 때가 차매 보내셨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재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야 가능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당대로 이해했습니다. 곧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계산보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벧후 3:4절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그럴듯한 문제제기로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벧후 3: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마디로 아직 하나님의 때가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늦춰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후, 조금이라도 죄를 덜 지어서 데려가셔야 하기에, 우리를 이 땅에 두십니다. 다른 이유 찾기 어렵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를 통해, 한 영혼이라고 더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실 때 구원자로 오셨다는 게, 사복음서 기자들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마 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 19: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요 12: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문제는 그 다음 한 문장입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목적이 180도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2.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럼 예수님의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고, 어떤 사람이 심판에서 제외됩니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곧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재림 시에 살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죽은 자들까지 모두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의 대상이지, 심판에서 제외된 사람이나, 심판을 면제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계 20: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당연히 믿는 사람은 제외되겠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안에는, 예수 믿는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심판자 앞에 펼쳐진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생명책인데,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책에 기록된 행위는 신(信), 불신(不信)입니다. 사실 행위로 구원여부가 갈린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성인, 또는 의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 역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육체가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사람이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행위로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할 사람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롬 3:10- 12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자랑할 만한 행위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엡 2: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으로 볼 때,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행위는, 예수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가 확실합니다. 신, 불신으로 생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생사,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은 생명책으로 판결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심판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만 남아있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심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오해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후 5: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지 않습니까? 우리가 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판단을 받게 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고후 5:9절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그 기준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썼는가’입니다. 주를 부끄럽게 하는 자로 살았으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서, ‘야, 지옥에 안 간 것만도 다행이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낄까요? 같은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했던 분들은 영광스런 구원을 받는데, 자기는 가까스로 구원을 받고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돼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때, 사람들에게서는 부러움을 샀지만, 그것에 취해 주를 기쁘시게 하는 데 소홀했다간, 그 날에 부끄러움을 겪게 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은, 돈 씀씀이도 다릅니다. 오래 전 어느 군인이 미국에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보니 동료들이 주중에는 훈련을 받고, 주일이면 모두들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주일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따라가 봤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헌금대가 주욱 돌아갑니다. 이 군인은 얼마를 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난감합니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마침 5달러짜리가 하나 잡힙니다. 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여집니다. 내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안내자니 체면이 깎일 거 같습니다. 헌금대는 바쁘게 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헌금대가 주머니 형태로 되어 있지만, 미국은 세숫대야처럼 생긴 은그릇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헌금대가 이 군인 앞에 도착했습니다. 좀 아깝긴 하지만, 하는 수없이 5달러짜리를 내고, 다음 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자기 친구가 얼마를 내는지에 가 있습니다. 그 역시 5달러를 냅니다. ‘아, 5달러가 기준인가보구나. 내가 제대로 했구만!’하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웬걸, 그 친구가 4달러를 거슬러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은 ‘아뿔사’하고 머리를 쳤다는 웃지 못 할 얘기입니다.
세상 아까운 것이, 과속이나 주정차 단속카메라에 찍혀서 내는 범칙금이라는 것에 다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하는 것을, 범칙금 내는 것보다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입은 크게 준 것 같지 않은데, 헌금을 줄이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살림이 좀 나아졌어요?”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하나님께 드린 만큼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도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저축했느냐, 얼마나 상속했느냐’도, 나름 의미 있을 수 있지만, ‘어디에 얼마나 썼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운 일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멸시와 수치도 당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보낸 서신에 보면,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떳떳함이 묻어납니다. 딤후 4:7-8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평생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썼기에, 죽음을 앞두고 감옥에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은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마 24:30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또한 천사를 통해 약속하였습니다. 행 1:10-11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성경의 마지막 약속이기도 합니다. 계 22:20-21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그럼 예수님이 오신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의 재림 시기는 언제입니까? 그 시기가 정해지기는 한 건가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다른 질문에는, 시원시원하게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재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 24: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나도 잘 모른다”는 식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안 가르쳐 주고 싶어서 그랬는지, 예수님이 진짜로 모른다는 뜻인지, 하나님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알아서 좋을 게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이건 우리 죽음의 때를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언제 죽는가를 알아서, 자기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면, 모르긴 해도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부작용이 만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의 시기는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입니다.
대신 재림의 징조는 알려주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하여 미혹합니다. 갖가지 재난과 난리와 전쟁이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 중에도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전파됩니다.그럼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24장에서 재림 시기와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 후,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25장에서 비유 3개를 들어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로 준비성을 들고 있습니다.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를 예로 들면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으면, 주님이 언제 재림하셔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처녀가 신랑을 사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랑이 언제 와도 맞이할 수 있는, 기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 열처녀 비유의 결론입니다. 마 25: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두 번째 비유는달란트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로 충성을 들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통해서,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큰일을 맡았느냐 작은 일을 맡았느냐, 사명이 크냐 작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충성만 하면 되고, 사명이 크든 작든 충성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 주인에게 똑같은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1절과 23절이 같습니다. 마 25: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여, 잘하였도다 칭찬받고,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로 이웃사랑을 들고 있습니다. 재림이 가까워질 때 일어날 증상으로, 몇 가지 예를 드셨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마 24: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한 때는 뜨겁던 사랑이 식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딤후 3:1-2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웃보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마 25: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세 번째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이 제일 어렵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우리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서가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가 너무 자기 사는 데 바빠서가 아닐까요? 아니면 혹 우리가 더불어 사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거룩하게 살려고 해서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 맞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노벨상이 만들어진 계기를 보면 참 재밌습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유럽 최대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가롭게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라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를 본 것입니다. 그는 다른 신문도 찾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문 역시 자신의 죽음을 보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프랑스의 한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잘못 알고 보도한 오보였습니다. 그런데 노벨은 자신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들의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신문은 ‘죽음의 상인 죽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또 어떤 신문은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다이너마이트의 왕이 끝내 사망하다’라고 게재했습니다. 또 다른 신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빨리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발견해 떼돈을 번 노벨이 이제 죽었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 기사들을 본 노벨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자신의 유산의 94%인 3200만 스웨덴 크로나(440만 달러)를 기부하여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벨상의 시작입니다. 노벨이 엄청난 재산을 은행 기금으로 예치해서 과학의 발전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써 달라고 유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으면 ‘평판’이라는 것을 남깁니다. 중국의 속담에 ‘관 뚜껑을 닫은 다음에야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고 난 후 장례식장에 오는 조문객들의 말들을 들어보면 “고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진실된 평가를 듣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도 자신이 죽고 난 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떨까요? “나는 죽고 난 후 사람들과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더 열심히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종말을 알지 못하듯, 우리 주님의 재림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나의 종말이 언제 오든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오든지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두 손 들고 주님을 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한 사도신경 고백,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말씀의 핵심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고, 그 목적은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재림은 심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재림은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맛보는 잔칫날(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정신 차려야 합니다. 혹시나 타락하고 있을 때에 주님 오시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자에게 심판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날마다 깨어 있어, 주님 오시는 날 구원의 영광에 다 참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더욱 정신 차려 종말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세상 일에 정신 팔리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 오실 때 기쁨으로 맞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깨어 있어, 주님 오시는 날 구원의 영광에 다 참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듣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