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6-19 주일설교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무엘상 16:1~7
저는 적록색 색약입니다. 그래서 빨간색을 잘 못 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정상인들이 빨간색을 들이밀면서 무슨 색이냐고 물어요. 빨간색이라고 하면 “잘 보네” 이럽니다. 저는 색맹은 아니고 색약인데 적색과 녹색을 섞어 놓으면 잘 못 봅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감나무에 올라가서 빨간 홍시를 못 보니까 감나무 밑에 있는 누나가 답답해 죽으려고 해요.
또 장미 넝쿨에 장미가 몇 송이만 피어 있으면 그게 잘 안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진처럼 앞에 있는 장미원의 장미를 따라 장미꽃이 활짝 핀, 이런 장미는 잘 보입니다.
세상에는 색약도 있지만, 적록색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도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색을 보지 못하는 전색맹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시각장애자들을 생각하면 색약이나 색맹도 감사하며 살아야겠죠.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사람이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남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봅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 후에 상대방의 옷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보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을 만날 때 무엇을 보십니까? 오늘은 보는 것의 차이를 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이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또 사람과 사람이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이 성경적인지 답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때문에 매우 슬퍼하고 있었습니다(삼상 15:11, 35).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이 언제까지 슬퍼하고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 았 느 니 라’고 하셨습니다(16:1). 당시 왕은 사울인데 이새의 집에서 하나님이 한 왕을 보셨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나서 나도 하나님처럼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영안이 열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했습니다. 먼저 맏아들 엘리압이 입장하는데 사무엘은 엘리압의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았다는 왕이 바로 이 아들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16:6).
여러분, 이거 어디서 한 번 본 장면 같지 않습니까? 전에도 사무엘이 키가 크고 잘생긴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죠. 그런데 실패했어요. 키가 크고 잘생긴 그 청년 사울은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전히 사람의 키와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실패를 경험하고도 사무엘의 시각은 교정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시각을 교정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무엘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시각도 교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람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면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들과 기준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16:7)
이새의 아들들이 둘째, 셋째, 그리고 일곱째 아들까지 모두 입장했는데 하나님이 모두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아들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막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데려왔더니 아직 좀 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자, 그 사건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어느 날, 보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대항해서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고대의 전쟁은 요즘 전쟁과 다릅니다. 요즘 전쟁은 작전을 잘 짜고 몰래 군사를 움직여 기습합니다. 하지만 3000년 전의 사람들은 마주 진을 치고 당당하게 싸웁니다. 싸우기 전에는 우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나와서 자기들이 왜 싸우러 왔는지 설명하고 상대의 항복을 요구합니다. 혹은 장수 하나가 대표로 싸워서 승패를 결정하자고 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전쟁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의 대표로 나온 장수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괴물이 나왔는데 골리앗은 키가 여섯 규빗+한 뼘이었습니다. 대략 3m 정도 됩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입은 갑옷은 무게가 5000세겔입니다. 대략 60kg 정도 됩니다. 골리앗의 창은 창 날만 600세겔인데 대략 7kg 정도 됩니다. 이런 괴물이 나와서 누구든 자기와 1:1로 겨루자고 했습니다(삼상 17:4~10).
그런데 여기서 바로 보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벌써 40일째 골리앗이 진영 앞에서 소리를 치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대표자가 출전하지 않습니다. 가서 이기면 구국의 영웅이 되고 왕의 사위가 되고 엄청난 상금을 받을 텐데 아무도 안 나서는 이유는 바로 골리앗을 ‘보 았 기’ 때문입니다(17:24-25). 골리앗의 큰 키를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갔다가는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의 큰 키와 용모를 보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키만이 아닙니다. 상대의 돈과 권력이 많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입니다. 한번 사람이 크게 보이면 하나님이 작아 보입니다. 골리앗 앞에 오금이 저려서 벌벌 떱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의 설교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가는 망할 것 같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골리앗의 키와 그가 입은 갑옷과 그가 들고 있는 창의 크기와 무게를 보고 있을 때 그런 것을 보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전쟁터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다윗입니다. 다윗의 형 일곱 중에 셋이 군인으로 나가 있었는데 다윗은 형들에게 식량과 옷을 갖다 주러 갔습니다. 다윗도 골리앗의 키를 보고 입은 갑옷을 보았지만 다윗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대신 다윗에게는 골리앗의 큰 키보다 하나님이 죽은 것이 보였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으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40일입니다. 40일은 성경에 100번 이상 나오는 표현인데 기간을 꽉 채운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름이 죽은 것을 보고 의분에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사명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할 사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물매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서자 골리앗은 다윗을 보았습니다. 키와 갑옷과 무기를 보여주는 사람 골리앗은 자신의 기준으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17:42). 하지만 결과는 여러분 모두 아는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싸운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골리앗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방금까지 골리앗의 키와 갑옷과 무기를 보던 사람들이 이제 그 골리앗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17:51). 하지만 다윗은 그 전에 이미 골리앗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사람이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이기지 못할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과 비교해서 아주 조그만 존재인 것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다윗보다 큰 것이 문제도 되지만 물매로 맞추기 쉬운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있는 문제 상황이 심각하더라도, 여러분에게 문제가 되는 사람이 아무리 높은 권력이 있더라도 하나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 상황을 나와 비교하면 문제가 크지만 하나님과 비교하면 문제가 아무것도 아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시각을 교정해 주시는 날입니다. 이제 세상을 볼 때, 사람을 볼 때, 문제를 볼 때, 하나님께서 교정해 주신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골리앗의 키를 보보지 말고 하나님의 키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쉽냐고요?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한 볼 수 있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종종 눈을 감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잠을 잘 때만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 자다가 종종 꿈을 꾸죠. 사람들이 꿈을 꾸면 그 꿈에 무슨 뜻이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만일 해몽을 잘한다고 알려진 사람이 길몽이라고 하면 매우 기뻐합니다. 현실이 어려워도 그 꿈 때문에 희망을 품고 살고, 희망을 품고 산 것 때문에 꿈대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잘 때 외에도 눈을 감는 사람들입니다. 언제입니까? 머리 감을 때 말고, 또 언제 눈을 감습니까?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구원받아야 하는 영혼들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눈을 감아야 합니다. 좀 더 길게 눈을 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쉽지 않은 세상을 눈을 감고 어떻게 이깁니까?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눈을 감습니까? 하지만, 자, 따라 해 보세요.
내가 일할 때는 내가 일한다.
내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제 옆 사람에게 말하세요: “까불지 말고 눈 감으세요.”
보는 것은 믿음이고 또한 사명입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사명을 수행하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죽음이 두려워 사명을 거부한다면 하나님도 죽고 이스라엘도 죽고 온 나라와 온 가족이 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 다윗은 골리앗의 키를 보는 대신에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온 가문과 자신이 다 함께 사는 길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어떤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돈이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고 자기의 사명이 보입니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죽어가는 태아가 보입니다. 그래서 태아 살리기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미혼모에게 버림받아 죽어가는 아기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를 만들어 아기 살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깨어진 가정이 보이고 누구에게는 상처 입은 청소년이 보입니다.
저에게는 가정을 허물고 교회를 허물고 국가를 허물려는 젠더 이데올로기 문제와 저 원수들이 입법을 추진하는 차별금지법 문제가 보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세상에는 색맹도 있고 문맹도 있고 컴맹도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맹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처럼 이렇게 소리칠 때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 10:51)
“사명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https://youtu.be/mrSlI7tCojM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