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정복’ 위해 철저한 ‘자유’ 허용
-홍콩과 낙랑의 자유경제
“1997년 이후에 어떻게 되는거죠?”
“어!”
밝게 웃던 홍콩 여인 ‘밍’이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었다.
1991년 8월의 어느 날 네덜란드 서북쪽 도시인 암스테르담 교외의 풍차마을을 둘러보다가 홍콩에서 온 밍 일행을 만났다. 필자는 그녀와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손에는 맥주와 고린내 나는 치즈가 들려 있었다. 저녁 9시가 되어도 해는 하늘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음이 만발하던 자리를 홍콩을 반환해야 하는 해를 의미하는 ‘1997’이란 숫자 때문에 급속도로 썰렁해졌다. 이 일로 동행한 동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천안문 사태와 홍콩인들
그녀에게 공포감을 안겨준 1997년의 근원에는 1989년 4월 북경 천안문에서 발생한 학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중국 정치 지도자 호요방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했다. 학생 대표가 요구 사항을 담은 문서를 천안문에 나타난 리펑 부총리에게 무릎을 굻고 전달하려 하였으나 무시됐다. 곧이어 학생들의 단식과 죽음이 이어지고……. 중국 정부는 결국 총·칼·탱크로 시위를 무력 진압했다. 200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세계인들에게 그것은 톱뉴스였지만, 8년 후에 중국 정부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될 홍콩인들은 여기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홍콩인들의 공포는 그들이 만든 영화에 리얼하게 스며들었다. <영웅본색>이라는 영화에서 검은 선글라스, 검은 코트, 검은 바지에 검은 총을 갖고 있던 주윤발의 모습은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 회의주의를 상징한다. 목적 없는 사람들, 난사되는 총알에 파리처럼 죽어가는 모습들.
홍콩은 서양인들의 약탈적 근대 자본주의가 만든 도시였다. 1842년 8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청이 참패하자 난징南京조약에 의해 홍콩 섬이 영국에 할양됐다.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치열한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두려움을 느낀 자본가와 전문 인력 175만여 명이 홍콩으로 이주를 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홍콩은 번영을 이루게 된다.
홍콩은 155년간 영국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영국적 문화를 꽃피웠고, 종주국보다 잘사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도시로 도약하였다. 홍콩인의 의식도 어느새 서양적 요소,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주민 스스로도 자신을 단순한 중국인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홍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1984년 영국은 1997년까지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5년 후 천안문 사태가 터지자 불안감을 느낀 많은 홍콩인들, 특히 지식인과 부유층들이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의 영연방 국가와 미국 등지로 대거 이민을 갔다. ‘엑소더스’를 연상케 했다. 주윤발·이연걸 등의 스타는 물론이고 오우삼·서극 같은 감독들이 홍콩을 떠났다. 별이 없는 홍콩은 초라하게 시들어가는 듯했다.
낙랑인들의 대대적인 탈출
313년 한반도의 서북부 낙랑군(평양)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압록강의 입구인 서안평을 차지해 낙랑군과 중국 본토 사이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낙랑군을 공격했다. 10월에는 사람 2000명을 잡아갔다. 중국 문물을 향유하며 중국 복식을 입고 시서 詩書를 암송했던 낙랑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홍콩인들은 그들이 이주해갈 영연방의 나라가 건재해 있었고,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했다. 하지만 낙랑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중국의 본토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마침 요동과 요서에 근거지를 둔 모용 선비(전연)는 사람을 보내 낙랑인들을 회유했다.
“약탈에 눈이 먼 고구려인들이 당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낙랑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이 이어졌다. 유민 1000여 호가 배편으로 전연의 영토인 요서로 떠났다. 400년의 역사를 가진 낙랑이 사라지는 듯했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그 수도에 낙랑군을 세웠다.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군은 본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관리들이 인구 조사를 했다. 군내 호구 현황을 파악해 통계 수치를 나무판(목간)에 적어 넣는 작업이었다. 인구는 28만 명, 호수는 4만5000여 세대였다. 47년이 흐른 뒤(기원후 2년) 낙랑군 인구는 40여만 명으로 늘었다(『한서지리지』). 세계 최고의 인구 밀집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315년 2월에 미천왕은 현도군을 함락시켰다. 많은 사람이 죽고 포로로 잡혀 고구려로 끌려왔다. 이로써 한반도에 400년 동안 존재했던 중국의 군현들은 완전히 소멸됐다. 하지만 이를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독립투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고구려의 낙랑 점령은 유통망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과 동아시아 세계 각국과 바다로 연결된 항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먹고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고구려의 군주 미천왕은 어린 시절 먹고살기 위해 소금 장사를 했다. 배에 곡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 소금과 교환했다. 그리고 소금을 배에 싣고 압록강으로 들어와 중상류의 지류 구석구석까지 유통시켰다(『삼국사기』), 그는 시장에 정통했으며, 상업이 주는 이익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1세기 앞서 비전을 제시해준 나라가 있었다. 후한 말 군웅할거 시대에 공권력이 무너지자 공손도公孫度라는 자가 요동에서 세력을 얻어 한반도 북부 황해안의 중국인 식민지 낙랑군을 장악하고, 204년경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그 남쪽에 새로이 대방군을 세웠다. 그 결과 한반도에서 중국의 식민지는 황해도까지 확산되었다.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의 시대가 되자 강남의 손씨 오나라와도 융성한 무역을 이루었다. 이것은 공손씨의 세력이 남쪽으로 뻗어 한반도 남단의 마한을 누른 결과이다. 강남에서 중국의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항로는 위험했지만, 직접 동중국해를 횡단해 한반도의 서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오히려 안전했다.
홍콩이 세계 4대 금융센터, 5대 외환 시장, 아시아 2대 주식 시장이었고 세계 460개 항구를 연결하는 자유무역항이었다면, 낙랑군은 발해·황해·남해 연안을 따라 삼한과 일본열도와 남중국 그리고 북중국을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로 묶어주는 장거리 무역의 중개자였다.
우려와는 달리 고구려는 낙랑인들을 우대했다. 중국 문명을 체화한 그들은 소중한 존재였다. 낙랑군이 멸망한(313년) 후 8000호 이상의 사람들이 남았다. 그들은 고구려의 해외 상업과 외교, 나아가 정교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에 종사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안악 3호분 벽화에 주인공 ‘동수’는 전연의 관리 출신이었으며, 358년에 그것을 그린 사람들도 낙랑계 장인이었다.
중국, 홍콩 경제활동의 자유보장
낙랑인들은 고구려의 명령을 받고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전란의 장이었고 교역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지독한 불경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중원에 군수 수요가 지대하다는 것을 간파한 낙랑인들은 수출 상품을 개발했다. 품목은 소모품인 화살이었다. 칼과 창은 수리만 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은 회수가 불가능했다. 중국 내부에서도 화살을 생산하고 있지만 소모를 따라가지 못했다. 낙랑 상인들은 만주의 산림지대에 지천으로 널린 싸리나무를 수집하게 했고, 화살촉은 그곳에서 많이 나는 청석이란 날카로운 돌을 대체품으로 선택했다. 금속보다 싸고 생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330년부터 후조後趙에 화살이 수출되었다.(『삼국사기』). 후조가 전연과 전쟁을 시작하자 수출량은 더욱 증가했고, 선금까지 지불할 정도가 되었다. 338년 겨울, 압록강으로 30만 곡斛의 곡물을 실은 배 300척이 들어왔다(『자치통감』). 그 곡물은 후조의 왕 석호石虎가 고구려에 보낸 화살에 대한 대금이었다. 그 배가 돌아갈 때 고구려의 화살이 선적되었다.
반환 후 홍콩도 그다지 암울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후광으로 홍콩은 예전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 홍콩은 대외무역 창구인 동시에 자금 조달처로서 중국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낙랑과 홍콩은 호전적인 고구려와 경직된 중국 아래로 들어갔는데도 자신의 역할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경제활동의 자유 보장’이었다.
고구려의 왕들은 낙랑에 철저한 자치를 허용했다. 고구려 국왕과는 별개로 남중국의 동진이나 북중국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으며, 그들은 외교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지 고구려가 바라던 것은 낙랑인들이 대외 상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에서 일부를 떼어 납부하는 것이었다. 무역이 원활할수록 고구려에 이익이 되었다.
세계의 자본이 홍콩을 선호하게 만드는 원인도 중국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다는 것에 있다. 인민 해방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200~3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센트럴 선착장에서는 아직도 반중국적인 파룬궁 지지자들이 시위를 할 정도다. 2008년 미국 헤리티지 재단은 홍콩을 경제 자유지수 세계 1위의 지역으로 올렸다. 홍콩은 정부 규제 최소화, 낮은 조세 부담률, 사유재산권 보장 등을 유지해 세계 금융 및 비즈니스 센터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세계 40개국의 400여 은행과 321개의 증권사가 진출해 있다. 외국으로 이주를 했던 많은 홍콩인들도 돌아왔다.
낙랑에 대한 고구려의 철저한 자치의 보장은 이후 중국에서 적지 않은 유력 인사들을 낙랑으로 불러들였다. 중국 어양군 출신 장무이라는 사람이 낙랑으로 와서 고구려로부터 황해도 지역을 다스리는 대방태수의 자리를 받았다(『장무이명문전』). 동리라는 전연 사람도 역시 그러했다. 그도 한韓태수라는 자리를 얻었다.(『동리명문전』). 그들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집안 가솔들을 많이 데려왔다. 동리와 친척인 동수라는 사람은 낙랑 전체를 책임지는 자치장관(낙랑상)이었다.(‘안악 3호분묵서’). 그는 전연에 납치된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송환해오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바 있다.(355년).
고대의 원거리 항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재화의 안전한 교환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그 시장으로 올 리가 없다. 정치적 중립, 공급 보증, 이방인의 재산 및 생명 보호는 교역이 시작되기 전에 보장되어야 했다(리베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적이다.(280~287)
[출처] 전쟁기획자들
서영교 지음, 2014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