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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철학초고
K. 맑스,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제4장 소외된 노동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 생산의 힘과 범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만큼 더 가난해진다. 노동자는 상품을 만들면 만들수록 자신은 그만큼 더 값싼 상품이 된다. 사물 세계의 가치 증대에 정비례해서 인간 세계의 가치 저하가 심해진다.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노동은 자기 자신과 노동자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산하고, 더욱이 노동이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비례해서 생산한다.(경철65)
이 사실이 나타내는 것은,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즉 노동 생산물은 하나의 소원한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힘이 되어 노동에 대립한다는 사^실이다. 노동 생산물은 대상이라고 하는 형태로 고정화⋅사물화된 노동이며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실현은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이런 실현이 경제적 상황에서는 노동자의 현실성의 박탈로 나타나고, 노동의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나타나고, 획득은 소외, 즉 외화로서 나타난다.(경철65-66)
이 모든 것의 귀결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생산물에 대해서, 소원한 대상을 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하는 규정 안에 숨어 있다. 왜냐하면, 이 전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가 힘들여 일을 하면 할수록, 그가 자기의 건너편에 만들어내는 소원한 대상 세계가 그만큼 강대해지고, 그 자신의 내적 세계는 더욱 가난해져서 그에게 귀속하는 것이 더욱 빈약해진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경철66)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에 주입한다. 그러나 대상에 주입된 생명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고 대상의 것이다. 따라서 이 활동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많은 대상을 상실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은 그가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서 소외된다고 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즉 하나의 외적인 현실 실재가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된 소원한 형태로 존재하여, 그에 대해서 독립적인 힘이 되어, 그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한다는 뜻을 갖는 것이다.(경철66)
대상으로부터의 노동자의 이런 소외는, 경제학의 법칙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노동자는 보다 더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가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지고, 그가 보다 더 많이 가치를 만들어내면 낼수록 그 자신은 그만큼 무가치하고 시시한 것이 되고, 그 생산물이 문명적이 되면 돌수록 그는 더욱더 야만이 되고, 노동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노동자는 무력하게 되고, 노동이 지적이 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지성이 결여된 것이 되어 자연의 노예가 된다.(경철67)
분명히 노동은 부자를 위해서는 놀랄만한 작품을 생산하지만, 노동자 자신에게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움막을 생산할 뿐이다. 그^것은 미를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 대신 기계를 사용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는 야만스런 노동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다른 일부를 기계로 만든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정신박약과 크레틴병을 생산한다.(경철67-68)
그것은 우선 첫째로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인 것이며,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그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며,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자유로운 육체적⋅정치적 에너지를 발휘하기는커녕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 이외의 장소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고, 노동을 하고 있는 때에는 자기 바깥에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에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노동할 때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그의 노동은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노동 이외의 곳에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노동의 소원함은 육체적인 강제나 그 밖의 강제가 없어지자마자 노동을 페스트처럼 싫어하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외적인 노동, 즉 인간이 그곳에서 자신을 외화시키는 것 같은 노동은 자기희생의 노동이고, 고행과 같은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게 노동의 외재성은, 노동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는 점, 그것이 그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점, 그가 노동에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속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경철68-69)
우리는 인간의 실천적 활동인 노동을 소외시키는 행위를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왔다. 그 첫째 측면은, 노동자가 노동 생산물에 대해서 소원하여 지배하는 것 같은 대상으로서 관련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동시에, 노동자가 감성적 외계, 즉 자연의 대상에 대해서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것과 같은 소원한 세계로서 관계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째 측면은, 노동이 생산 행위에 대해서 노동 내부에서 갖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속하지 않는 소원한 활동으로서 관련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활동은 고통으로서의 활동이고, 힘은 무력하고, 생식은 거세로서 나타난다.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즉 그의 인격적 생명은 그 자신에게 반항적이고, 그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그에게는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 나타난다. 제1의 측면이 사물의 소외인 것처럼, 제2의 측면은 자기소외이다.(경철69-70)
인간은 하나의 유적인 존재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자기 자신의 그것이든 다른 사물의 그것이든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이것은 같은 사항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지만−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눈앞에 살아 있는 유로서 관여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경철70)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을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첫째로 유적 생활과 개인생활을 서로 소원한 것으로 만들고, 둘째로 추상화된 개인생활을,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태의 유적 생활의 목적으로 만든다.(경철70-71)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유적인 성격이다. 그런데 생활 자체는 생활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경철71)
동물은 그 생명활동과 그대로 하나를 이룬다. 동물은 그 생명활동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동물이란 생명활동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를, 스스로의 의욕이나 의식의 대상으로 한다. 인간은 의식적인 생명활동을 영위한다. 인간의 생명활동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일체화되어 있는 식의 도식적인 존재양식이 아니다. 의식적인 생명활동이야말로 동물적인 생명활동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이 의식적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인간은 유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바로 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존재이며 결국 자기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역전시켜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인 생명활동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수단인 것처럼 만들고 만다.(경철71)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한다. 이에 반해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에 지배되어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육체적 욕구에서 자유롭게 스스로 생산하고, 더욱이 이 자유 속에서 비로소 참된 생산을 한다. 동물은 다만 자기 자신을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전체 자연을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물은 그대로 동물의 물질적 신체의 일부가 될 뿐이지만, 인간은 자기의 생산물에 자유롭게 맞선다. 동물은 그것이 속하는 종이 정하는 바와 욕구에 따라 형상화하지만, 인간은 그 어떤 종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도 생산할 수 있고, 어디서나 대상에 그 고유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미의 법칙에 따라서도 형상화한다.(경철71-72)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에 속하지 않고, 소원한 힘으로서 그에게 대립한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자의 활동이 그 자신에게 고통이라면, 그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이고, 사는 기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신들도 자연도 아니고,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런 소원한 힘일 수 있는 것이다.(경철74)
인간은, 자기 자신의 활동을 자^신의 현실성의 박탈과 자신의 징벌로 돌리고,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기 것이 아닌 생산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생산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생산활동이나 생산물에 대한 지배를 할 수 있게끔 만들고 만다. 인간은 나 자신의 활동을 자기로부터 소외하는 것처럼 소원한 타인에게 그 사람 것이 아닌 활동을 내주고 만다.(경철74-75)
따라서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에 의해서 노동자는, 노동에 소원하고 노동의 권외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가, 노동에 대한 자본가−노동의 지배자를 그 밖에 어떻게 부르든−의 관계를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재산은 외화된 노동의, 즉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산물이며, 성과이며, 필연적인 귀결이다.(경철75)
사유재산도 또한, 비록 그것이 외화된 노동의 근거나 원인인 것처럼 보여도 오히려 그 한 귀결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디 이 관계는 뒤에서는 상호작용으로 변화한다.(경철75)
사유재산의 마지막 발전의 정점에 이르러 처음으로, 사유재산의 이 비밀이 다시 분명해진다. 그 비밀이란, 사유재산은 한편으로는 외화된 노동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외화하는 수단이며, 이 외화의 실현이라는 것이 다시 등장한다.(경철75)
그렇다면 노임의 강제적인 인상은(그 외의 모든 어려움을 도외시하고, 이 인상이 하나의 변칙적 사태인 이상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도 힘에 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도외시해도), 노예의 급여 개선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를 위해서나 노동을 위해서나 그 인간적인 사명과 존경을 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경철76)
노임은 소외된 노동의 직접적인 한 귀결이며, 소외된 노동은 사유재산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한 쪽이 몰락하면 다른 쪽도 틀림없이 몰락할 것이다.(경철76)
(2) 또한 사유재산에 대한 소외된 노동의 관계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사유재산 등으로부터, 즉 예속상태에서 사회의 해방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노동자의 해방만으로 보이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의 해방에는 보편적 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생산활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 인간의 예속상태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모든 예속관계가 그 관계의 단순한 변종이자 귀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경철76-77)
제2초고 사유재산의 존재양식
일반적으로 자본은, 노동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생활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다. 경제학이, 실업 중인 노동자나 이런 고용 관계의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관여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도둑⋅사기꾼⋅거지, 실업 중인, 굶고 있는 범죄 예비군의 일꾼들은 경제학에는 존재하지 않고, 의사⋅재판관⋅장의사⋅거지 단속 관리 등의 눈에만 보이는 사람들이며, 경제학의 영역 외를 날뛰는 망령들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가 갖는 일련의 욕구란, 노동자라는 종족이 사멸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 있는 동안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욕구밖에 되지 않는다. 노임은 다른 모든 생산 용구의 유지와 보전, 이자와 함께 재생산되기 위해 필요한 자본 일반의 소비, 즉 바퀴를 계속 회전시키기 위해 쓰이는 기름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노임은, 자본과 자본가들의 필요경비의 일부이고, 이 필요가 요구하는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경철80)
스미스나 세이에 비하여 리카도나 밀 등의 위대한 진보는, 그들이 인간의 생존−인간의 상품 생산성의 대소−을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으로, 아니 유해한 것으로 보고 설명한 데에 있다. 그들에 의하면, 어떤 자본이 어느 정도의 노동자를 부양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이자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 즉 해마다의 절약의 총액이라고 하는 것이 생산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최근의 영국 경제학의 일관된 진보도 또한, 그것이 노동을 경제학의 유일한 원리로까지 높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노임과 자본 이자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끝까지 명석하게 분석하여, 자본가는 보통 노임의 인하로만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었다. 소비자를 속여서 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그런^ 서로의 속임수가 정상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경철80-81)
제3초고
제2장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그러나 재산이 없다는 것과 재산이 있다고 하는 대립은, 그것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 아직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대립이며, 그 활동적인 관계와 내적 관계에서 파악되지 않는 대립이며, 모순으로서 파악되지 않은 대립이다.(경철92)
공산주의는 그 최초의 형태에서는 사유재산의 보편화와 그 완성에 지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이중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물적 소유의 지배가 너무 크게 공산주의에 맞서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으로 만인에 점유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능 등을 무시하려고 하고,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소유를 생활과 생존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긴다. 노동자라는 규정은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에게 확장된다. 사유재산의 존재양식은 공동체가 사물 세계를 모두가 공유하는 자세에 머물러 있다. 사유재산을 보편적인 사유재산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이 운동은 마침내는 결론(이것은 물론 배타적인 사유재산의 한 형태지만)을 여성의 공유로 대치하여 이에 따라 여성을 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는 동물적인 형태로 나타나기까지 한다.(경철93)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이다. 이 자연적인 유관계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가 그대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이기도 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가 그대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 즉 인간의 자연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관계에서는, 인간에게 인간적 본질이 어느 정도까지 자연으로 되어 있는가, 또는 자연이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인간적 본질이 되어 있는지가, 감정적인 형태로, 즉 하나의 직관 가능한 사실에까지 환원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 입각해서, 어느 정도까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유적인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생성되어 있고, 그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가 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다.(경철94)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에는,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욕구가 인간적인 욕구가 되었는가,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 다른 인간이 인간으로서 욕구되어지는 것이 되었는가, 인간이 그 가장 개별적인 존재에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도 분명해진다.(경철94)
인간의 자기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폐지로서, 따라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공산주의. 그러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발전이 가져온 완전한 부에 입각해서 의식적으로 생기는 것 같은, 사회적인 인간, 즉 인간적인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전한 자기 귀환인 것 같은 공산주의. 이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 내지는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한다. 이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또 인간과 인간의 항쟁의 참된 해결이고, 현실 존재와 본질의, 대상화와 자기 확인의, 자유와 필연의, 개별과 유의 다툼의 참다운 해결이다. 그것은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더욱이 자신이 이 해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경철95)
종교⋅가족⋅국가⋅법률⋅도덕⋅과학⋅예술 등은 생산활동의 특수한 존재양식에 지나지 않고, 생산활동의 일반적 법칙에 따른다. 그렇다면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은 인간적 생활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므로,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이며, 따라서 인간이 종교⋅가족⋅국가 등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존재로 귀환하는 일이다.(경철96)
종교적 소외 그 자체는 의식이라고 하는 인간의 내면의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경제적 소외는 현실적 생활의 소외이고, 따라서 소외의 지양은 의식과 현실의 양면을 포함하고 있다.(경철96)
공산주의는 무신론과 동시에 시작되지만(오언), 이 무신론은 우선은 도저히 공산주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본디 그것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아직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무신론의 인간애는 우선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애에 지나지 않지만, 공산주의의 인간애는 실재적이며, 당장이라도 활동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경철96)
하지만, 노동의 소재도 주체로서의 인간도,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출발점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들이 운동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바로 이 점에 사유재산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 운동 전체가 갖는 일반적 성격이다. 사회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활동과 향유는 그 내용으로 보나 그 존재 방식으로 보나 ‘사회적인’ 활동이며, 사회적인 향유이다.(경철97)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인간일 때 비로소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처음으로 자연은 인간에게, 인간과의 유대로서, 다른 인간을 위해 있는 그의 존재로서, 또 그를 위해 있는 다른 인간의 존재로서 있게 되어, 여기서 비로소 인간적 현실의 생활 기반으로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의 인간적 존재양식의 바탕으로서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에게 있어 그의 자연적 존재양식이 그의 인간적 존재양식이 되고, 자연이 그에게 있어 인간이 된다. 따라서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완성된 본질적 통일이며, 자연의 참다운 부활이며, 인간이 관철된 자연주의이며 자연이 관철된 인간주의이다.(경철97)
그러나 과학적 활동과 같은, 좀처럼 타인과 직접적 공동으로 수행할 수 없는 활동을 행할 경우에도, 나는 인간으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나의 활동의 소재가−그리고 사상가가 활동에 써먹는 언어까지도−사회적 산물로서 나에게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도 사회적 활동이다. 따라서 내가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나는 사회를 위해 만드는 것이고, 더욱이 내가 하나의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만드는 것이다.(경철97)
무엇보다도 피해야 할 일은, ‘사회’를 또다시 추상물로서 개인에 고정적으로 대립시키는 일이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표출은−비록 그것이 타인과 함께 동시에 수행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삶의 표출이라고 하는 직접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사회적 삶의 한 표출이자 확증이다.(경철98)
사유재산은, 인간 자신에게 대상적인 것이 되어 있는 것과 동시에, 인간에게 소원하고 비인간적인 대상이 되어 있다고 하는 감성적 표현밖에 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표출이 곧 그 삶의 외화이며, 인간의 현실화가 그 현실성의 박탈이며, 하나의 소원한 현실성이라는 것의 감성적 표현밖에 되지 않으므로, 사유재산의 적극적인 지양이란 곧, 인간적인 본질과 생활을, 대상적 인간을, 인간적인 제작물을,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감성적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경철99)
사유재산은 우리를 어리석고 일면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처음으로 우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서 존재하거나, 또는 우리에 의해 직접 점유될 때, 즉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시고, 몸에 지니고, 그 안에 거주하는 등, 요컨대 사용할 때뿐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직접 그리고 현실적으로 점유된 것까지도, 우리는 이를 단순한 생활수단으로밖에 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점유물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생활이 곧 사유재산의 생활이며, 결국은 노동과 자본화인 것이다.(경철99)
이렇게 해서, 모든 육체적⋅정신적인 감각 대신에 그런 모든 감각의 소외, 즉 소유의 감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는, 자신의 내면적인 부를^ 내보내기 위해 이와 같은 절대적 빈곤으로까지 내려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경철99-100)
따라서 사유재산의 지양은, 모든 인간적 감각과 속성의 완전한 해방이다. 다만, 이런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이들의 감각이나 성질이 주체적으로나 객체적으로 인간적이 되어 있어야 한다. 눈은 인간적인 눈이 되고, 그 대상은 사회적인 대상, 즉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태어나는 인간적인 대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각 감각은 그것들이 실제로 작용할 때에는 직접 이론가가 될 것이다. 감각은 사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사태에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사태 자체도, 그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대상적 인간적으로 관여하고, 또 그 역도 성립할 것이다. 나는, 사태가 인간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응할 때에만, 사태에 대해 실천적으로 인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유용성이 인간적 유용성이 되면, 욕구나 향유도 그 이기적 성질을 잃고, 자연은 단순한 유용성을 잃을 것이다.(경철100)
확실히 인간적인 눈이 향유하는 방법은 거칠고 비인간적인 눈의 향유방법과 다르며, 인간적인 귀가 향유하는 방법은 조야한 귀의 향유 방법과 다르다.(경철100)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대상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 것은, 대상이 그에게 인간적 대상 내지 대상적 인간이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대상이 인간에게 사회적 대상이 되고, 인간 자신이 자기에게 사회적 존재가 될 때, 그리고 이 대상에서 사회가 인간을 위한 존재가 될 때이다.(경철100)
대상은 눈에는 귀에 대한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되고, 눈의 대상은 귀의 대상과는 다른 것이 된다. 각 본질력의 특유성이란 바로 그 본질력의 특유한 존재를 말하며, 따라서 또, 그것이 대상화되는 특유한 방법, 대상적이고 현실적인 산 존재의 특유한 존재양식이기도 하다.(경철100)
예를 들어 인간의 음악적 감각은 음악에 의해 비로소 불러일으켜지는 것인데, 제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인 귀에는 그 어떤 뜻도 가지지 않고 그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대상은 나의 본질력의 하나를 실증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의 대상이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본질겨이 주체적인 능력으로서 자각되어 있을 때뿐이고, 어떤 대상이 나에게 갖는 뜻(대상이 그에 대응하는 감각에 대해서 갖는 뜻)은 나의 감각이 이르는 범위가지만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인간의 여러 감각은 비사회적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인간적 본질이 대상적 형태로 풍부하게 전개되면 비로소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풍부한 감성이, 음악적인 귀가, 형태의 미를 파악하는 눈이, 요컨대 인간적 향유의 능력을 가진 여러 감각, 즉 인간적 본질 능력으로서 확인된 여러 감각이 완성되거나 생겨나거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오감뿐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의지나 사랑 등의) 실천적 감각, 한 마디로 인간적인 감각, 여러 감각의 인간성은, 그에 알맞은 대상의 존재, 즉 인간화된 자연에 의해 비로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경철101)
오감의 도야는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산물이다.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사로잡힌 감각은 편협한 감각만 가진다. 굶주린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형태로 음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음식으로서의 추상적인 존재가 있을 뿐이^다. 음식이 조리되지 않은 날것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런 영양활동이 동물의 영양 활동과 어떤 점에서 구별이 되는가는 말할 수 없다. 마음고생이 많고 궁핍한 인간은 제아무리 훌륭한 연극을 보아도 그것에 감동할 만한 감수성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광물을 다루는 상인이 알 수 있는 것은 광물의 상업상의 가치뿐이지 광물의 아름다움이나 독특한 본성을 보지 않는다. 그는 광물학적인 감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론적 견지에서 보나 실천적 견지에서 보나 인간의 감각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나, 인간적 존재와 자연적 존재의 부 전체에 감응할 수 있는 인간적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나 인간적 본질의 대상화가 필요한 것이다.(경철101-102)
‘생성되어 가고 있는 사회가 그런 인간적 감각의 형성을 위한 모든 재료를, 사유재산과 그 빈부의−또는 물질적 정신적 빈부의−운동을 통해서 발견한다고 하면, 이미 생성을 끝마친 사회는, 이와 같이 풍부한 모든 본질을 갖춘 인간을, 즉 풍부한 모든 감각을 갖춘 사려 깊은 인간을 그 사회의 지속적인 현실로서 생산한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런 사회적 상태에서 비로소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유심론과 유물론, 활동과 수용은 대립하는 것이 되지 않고 그와 함께 그런 대립항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잃는다. ‘이론적인 대립항의 해소조차도 오직 실천적인 방법으로만, 즉 인간의 실천적인 에너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그 해소는 결코 단순한 인식의 과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의 과제다. 그리고 철학이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도 그것을 이론적이 과제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경철102)
산업의 역사와 산업이 생성을 끝마친 대상적 존재가, 인간적 본질력의 펼쳐진 책이며, 감성적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적 심리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심리학은 이제까지, 인간의 본질과의 연관에서가 아니라, 항상 다만 외연적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소외의 내부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그가 인간의 본질적 힘의 현실로서, 인간의 유적 행위로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나 정치⋅예술⋅문학과 같은 추상적 보편적 본질에서의 역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경철102-103)
그러나 자연과학은,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비인간화를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산업을 매개로 하여 더욱더 실천적으로 인간생활에도 파고들어, 그것을 개조하고, 인간의 해방을 준비하게 되었다. 산업이란, 자연의, 따라서 자연과학의, 인간에 대한 현실적인 역사적 관계이다. 따라서 산업이 인간적인 본질적 힘의 누구나 알 수 있는 개시라고 이해된다면, 자연의 인간적 본질이나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과학은 그 추상적 물질적 경향을, 또는 오히려 관념적 경향을 잃고, 그것이 현재 이미−비록 소외된 형태이기는 하지만−참다운 인간적 생활의 바탕이 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적 과학의 기초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의^ 그 이외의 기초나 과학의 그 이외의 기초와 같은 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인간의 역사−즉 인간사회의 생성작용−속에서 생성되는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현실적인 자연이며, 따라서 비록 소외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산업을 통해 생성되는 자연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적 자연인 것이다.(경철103-104)
감성(포이어바흐 참조)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은, 그것이 감성적 의식과 감성적 욕구라고 하는 이중적 형태의 감성에서 출발하는 경우에만−즉 자연으로부터 출발할 때에만−현실적인 과학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이 감성적 의식의 대상이 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욕구가 되기 위한 준비의 역사이며, 그것에 이르는 발전의 역사이다. 역사 그 자체가 자연사의, 즉 자연의 인간에의 생성의 현실적인 일부인 것이다. 이윽고 자연과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이 되고, 인간에 대한 과학은 자연과학을 자체에 포함하게 될 것이다. 즉 오직 하나의 과학이 있게 될 것이다.(경철104)
‘그렇게 되면 이미 명백한 것처럼, 경제적 부와 빈곤 대신 풍부한 인간과 풍부한 인간적 욕구가 나타나게 된다. 풍부한 인간이란, 인간적인 생생한 표출의 총체를 필요로 하는 인간, 즉 자기 자신의 실현을 내적인 필연성으로 삼고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간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전제하^에서는−인간의 풍부함뿐만 아니라 가난까지도 인간적인 의의를 ,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의를 손에 넣게 된다. 가난은, 인간에게 최대의 풍부가 되는 다른 인간을 욕구로서 느끼게 하는 수동적인 유대이다. 열정이란, 내 안에서 대상적 존재가 지배하고, 나의 본질적 활동이 감성적 형태로 분출하는 일인데, 그것이 여기서는 동시에 나의 본질적인 활동이 되기도 한다.’(경철104-105)
그러나 사회주의적 인간에게,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적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인간을 위한 자연 생성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므로, 사회주의적 인간은 나 자신에 의한 나 자신의 탄생에 대한, 나의 생성 과정에 대한, 분명한 부정할 수 없는 증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이, 즉 인간이 인간에게 자연의 존재로서 있고, 자연이 인간에게 인간의 존재로서 있다는 것이, 실제적이고 감성적인 형태로 눈에 보이는 것이 되어 있으므로, 무^엇인가 소원한 본질에 대한, 자연과 인간을 초월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자연과 인간이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물음−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경철106-107)
그러나 무신론도, 이런 본질의 결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무런 뜻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신의 부정이고, 이 부정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존재를 설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미 그와 같은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로서의 인간 및 자연의, 이론적 실천적 감성적 의식에서 출발한다.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미 종교의 폐기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긍정적 자기의식이며, 그 현실 생활도, 이미 사유재산을 지양한 공산주의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긍정적 현실이 된다. 분명히 공산주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긍정이며, 따라서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역사적 발전의 필연적인 인간의 해방과 회복의 현실적 계기이다. 공산주의는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미래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활동적인 원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산주의 그 자체는 인간적 발전의 목표−인간적 사회가 취하게 될 형태−는 아니다.(경철107)
제4장 부와 욕구
이것은 주체 쪽에서 보아도 그와 같이 나타난다. 그것은 우선, 어떤 경우에는, 생산물이나 욕구의 확대가 비인간적이고 기교적이고 부자연스럽고 망상적인 욕망을 궁리하는 노예, 항상 타산적인 노예가 된다−사유재산은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 욕구로 만드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경철134)
인간 노동의 가장 원시적인 방법(도구)이 다시 부활하여 로마 노예의 단조로운 일이 수많은 영국인 노동자의 생산 방식이 되기도 하고 사는 방법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인간적인 욕구를 하나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물적인 욕구까지도 없어져 버린다. 아일랜드인은 이미 먹는다는 욕구밖에 모르고 더욱이 감자를 먹는다. 감자 중에서도 가장 나쁜 종류인 룸펜 감자를 먹는다는 욕구밖에 모른다. 그러나 영국도 프랑스도 각 공업 도시 안에 이미 하나의 작은 아일랜드를 가지고 있다. 야만인과 동물은 적어도 사냥이나 운동 등의 욕구를, 그리고 집단생활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제 막 자라고 있는 인간, 아직 채 발육하지 못한 인간−즉 아이들−을 노동자로 기르기 위해 기계와 노동의 단순화가 쓰인다. 기계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약한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경철134-135)
‘욕구와 그 수단의 증가가 어느 정도 무욕과 무일푼을 만들어내는가는 경제학자( 및 자본가)가 다음과 같은 일로 증명해 준다(여기서 자본가를 덧붙인 것은 우리가 경제학자−그 학문적인 고백과 그 자세−를 화제로 삼을 경우, 일반적으로 항상 경험주의적인 기업가가 화제에 오르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로 경제학자는, 노동자의 욕구를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는 데에 최소한 필요로 하는 데까지 압축하고, 노동자의 활동을 가장 추상적인 기계적 운동으로까지 압축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이 이외에는 그 어떤 활동의 요구도, 향락의 욕구도 가지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경제학자는 이런 생활까지도 인간적인 생활이며 인간적인 존재양식이라고 공언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경제학자는 그 이상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생존)을 표준으로 해서, 더욱^이 그것을 일반적으로 표준으로서 산출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한다. 대다수의 인간에 해당하므로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를 감각도 욕구도 가지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그 활동을 모든 활동으로부터의 순수한 추상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그에게는 노동자의 그 어떤 사치도 배척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고, 가장 추상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모든 것−그것이 수동적인 향락이건 활동의 표출이건−이 사치스럽게 보이고 만다. 그렇다고 한다면 경제학이라고 하는 부에 대한 이 과학은 동시에, 억압과 궁핍과 절약의 과학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깨끗한 공기나 육체적 노동에의 욕구까지도 인간에게 절약하게 할 정도가 된다. 경이적인 산업에 대한 이 과학은 동시에 금욕의 과학이기도 하고, 그 참다운 이상은 금욕적이면서도 폭리를 탐내는 수전노와 금욕적이면서도 생산하는 노예이다. 그 도덕적인 이상은 자기 급료의 일부를 은행에 맡기는 노동자이다. 경제학은 자기의 이런 마음에 드는 생각을 위해 하나의 비굴한 예술까지도 찾아냈다. 경제학의 이 이상이 감상적인 연극으로 상연된 것이다.(경철135-136)
이렇게 해서 경제학은−그 세속저이고 향락적인 겉치레에도 불구하고−참으로 도덕적인 과학이며 가장 도덕적인 과학이다. 자제, 즉 생활과 모든 인간적 욕구의 억제야말로 그 주요 가르침이다. 당신이 먹거나, 마시거나, 책을 사거나, 극장이나 무도회나 술집에 가거나,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공론을 즐기거나, 노래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싸움질을 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만큼 당신은 절약을 하는 것이 되고 당신의 재화, 당신의 자본은 커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신이 자기 삶을 표현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만큼 당신은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외화된 삶은 커지고 당신은 자신의 소외된 본질보다 더 많은 것을 저축하게 된다.(경철136)
경제학자는 당신의 삶과 인간성으로부터 빼앗는 모든 것을 화폐와 부로 메워 준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도 당신의 화폐는 할 수 있다. 화폐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무도회나 극장에 갈 수도 있고 예술, 박식, 역사적 진품, 정치적 권력도 순에 넣는 방법을 알고 있고, 여행을 할 수도 있고,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획득할 수도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화폐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들 모든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가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를 낳는 것과 스스로를 사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밖의 모든 것은 화폐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주인을 소유하면 그 노예를 소유한 것과 같으며, 그의 노예를 새삼 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정열과 활동은 소유욕에 묻힐 수밖에 없다. 노동자에게는 사는 의욕을 갖는 데에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것만 허용되며, 소유하기 위해 살려고 의욕하는 일만 허용된다.(경철136-137)
또 당신은 먹는 것과 같은 당신의 직접적 감각을 절약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당신이 경제적이고자 한다면, 환상에 빠져 몰락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공공의 이익에 참여한다거나 동정한다거나 신뢰한다고 하는 모든 것^도 또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경철137-138)
당신은 당신에 속하는 모든 것을 팔리는 것으로, 즉 유용한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경제학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즉 타인의 쾌락에 자신의 육체를 맡기고 돈을 번다고 한다면, 나는 경제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일까(프랑스의 공장 노동자는 자기 아내나 딸의 매춘을 제10의 노동시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진실이다), 또는 자기 친구를 모로코인에게 판다고 하면(모병거래 등과 같은 직접적인 인신매매가 모든 문명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경제학적으로 행동하고 있을까 하고 물어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경제학자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나의 법칙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사촌인 도덕이나 종교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경철138)
사유재산의 사상을 지양하기 위해서라면 머리로만 생각한 공산주의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사유재산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현실적 공산주의 활동이 필요하다. 역사가 그것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이 운동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사상으로는 이미 알고 있으나, 이 운동은 현실적으로 매우 기복이 많은 긴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리 역사적 운동의 목표와 한계를 알고 있고, 이 운동을 능가하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현실적인 닙노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경철141)
공산주의적인 노동자들이 단결할 때, 우선 그들은 교육이나 선전 등을 목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것에 의해서 하나의 새로운 욕구를, 사회적 결합에의 욕구를 자기 것으로 한다. 수단이라고 여겨진 것이 목적이 된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실천운동의 가장 빛나는 성과를 볼 수가 있다. 흡연⋅음주⋅식사 등은 이미 결합수단이나 단결수단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결합이나 단결, 사회적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와 같은 것만으로 그들에게는 충분한 것이다. 인간끼리의 우애는 그들에게는 헛소리가 아니라 진실이며,^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들로부터는 인간성의 고귀한 빛이 나와 우리에게 길을 비쳐 주는 것이다.(경철141-142)
제6장 화폐
인간인 한에서의 인간과, 인간적인 관계인 한에서의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전제하면, 당신이, 예를 들어 사랑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며, 신뢰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신뢰뿐이다. 예술을 즐기고 싶으면 예술적인 교양을 쌓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으면 실제로 격려하고 원조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태도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성적인 삶의 특정한 표출, 더욱이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어울리는 표출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하면서 짝사랑으로 끝난다면, 즉 당신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상대방의 사랑을 낳지 못하고,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표출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하다.(경철158)
첫댓글 특히 제 6장이 금과옥조지요
글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