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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를 여행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 시작은 한 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새벽 4시, 인도는 이 새벽처럼 늘 일상에 찌든 나를 흔들어 깨운다.
뭄바이는 마하수트라(maharashtra)주의 주도로 인도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본사가 마천루를 이루고 월스트리트를 방불케 하는 대규모 주식 시장까지 있어서 다른 도시와는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뭄바이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인도 GNP의 38%를 차지하며 공항과 항만의 수.출입 물량이 전체 인도 교역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뭄바이는 인도의 상업도시지만 한 편 이 세련된 건물뒤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빈민굴과 홍등가도 그늘처럼 자리잡고 있다. 도시 구성원들 간에는 종교적 갈등까지 자리 잡아 매년 크고 작은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타지마할 호텔
인도의 대표 민족 자본가‘잠세뜨지 나세르완지 따따(Jamsetgi Naserwanji Tata) 가 지은 호텔로 1898년부터 1903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호텔은 사라세닉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구관과 1973년에 세워진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구관이 더 아름답다. 당시에는 입구와 창을 시가지방향으로 내는 게 관행이었는데 타지마할 호텔은 아라비아 쪽을 바라보고 있어 당시 파격적인 건축양식으로 자자했다. 객실 숙박료는 600불, 핑크빛 바탕에 흰 띠를 두른 자태는 아라비아 해의 청 녹색 물빛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타지마할 호텔이 세워지게 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곳의 설립자 ’따따‘는 그의 영국인 친구와 함께 뭄바이 최고의 호텔 ’아폴로‘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그가 인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텔 직원에게 출입을 저지 당했고 이에 분개한 ’따따‘는 호텔 아폴로를 꺽을만한 ’타지마할‘을 지어 인도인만 받았다고 한다. 수많은 관광객은 ’따따‘의 자존심을 세워주듯 호텔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염이 없다.
엘리펀트 섬으로 가기 위해 ’아폴로 번더‘라는 곳에서 배를 탔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잿빛이다. 배 안에서는 악세서리를 파는 보이들의 흥정이 한창이다. 바다 중간엔 해군 기지가 있었다.첨단 레이저 시스템을 갖춰 ’파키스탄‘에서 비행기가 뜨면 레이더망에 잡힐 정도로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엘리펀트 동굴 사원
아라비아 해 쪽으로 9km떨어져 있는 섬의 산 정상에 동굴이 있었다. 게이트에서 40분 정도 배를 타고 내려서 동굴 입구까지 미니 코끼리 열차를 탔다. 부두에서 지척인데도 불구하고 더위 때문에 무척이나 멀어 보였다.
사원 입구에는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산 정상까지 사람을 나르는 가마꾼들로 북적대고, 흥정을 하느라 시끌벅적이다. 점심은 입구에 유일하게 하나있는 식당에서 먹었는데 란빵에 감자소스를 넣고 요구르트와 곁들여 먹는데 맛이 담백해서 입맛에 맞았다. 남인도 전통음식엔 소스가 악간 매운 ’맛사라도샤‘ 하지만 느린 인도인은 1인분을 내 놓고 다 먹은 후 1인분이 나와, 일행 33명의 손님들의 재촉에 아마 주방에선 혼쭐이 났으리라.
세계 문화유산인 삼면의 얼굴 시바 신을 모신 사원은 20분 정도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사원은 450-750년 까지 3백년에 걸쳐 야트막한 산 하나를 깍아 조성 되었다. 내부에는 섬세한 부조와 조각들로 가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브리흐마와 비쉬누, 삼면의 시바인 ’뚜리무르티(Turmurti)상과 아내인 ‘빠르바티(Parvati) 상이었다. 아잔타나 카일라스 사원의 처음 초석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몇몇 부조는 포르투갈 점령군에 의해 사격 표적으로 사용되어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바다위에 띄엄띄엄 있는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코끼리들이 모여 들어 살게 되면서 이름이 유래 되었단다. 지금은 코끼리가 없는데 그 수가 엄청나서 손을 쓰게 되었다 전한다.
산 정상에서 유유히 흐르는 아라비아해를 보면 그 소란스러움을 잠재 운 듯 딴 세상 같기만 하다. 조용히 기도하듯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북인도 음식인 ’무깔르쁘‘라는 란과 닭고기를 곁들여 나오는 음식을 먹었는데 인도에선 ’탄두리‘란 말이 음식 이름 앞에 붙으면 닭고기를 진흙으로 구웠다는 뜻이다. 맛이 담백해서 우리 입맛에 딱 맞는다.
1월 19일 카일라스 사원으로 가기 전 2004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빅토리아역(c,s,t)에 7tl 50분에 도착했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모방하여 인도 풍으로 바꾼 건물이지만 밤엔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이 붉은 건물 색과 어울려 환상적으로 보인다.
’카일라스 사원‘은 산’덩어리 하나로 이루어진 곳으로 산 아래는 복사꽃이 수줍게 우리를 맞는다. 서기600-1000년까지 400여년에 걸쳐 조성된 이곳은 무굴 제국의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가 아그라로부터 도주하여 도읍을 정한 곳으로 오랑가바드 서북쪽 30km지점에 위치해 있다. 불교 석굴 사원 12개, 힌두교 석굴사원 5개동, 총 34개의 석굴로 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모든 사원의 문 앞에 작은 마당이 붙어 있다. 제 16굴의 명칭은 ’카일라스‘로 우주의 중심인 신성한 산이란 뜻이다. 커다란 하나의 바위산을 위로부터 정으로 쪼아 내려오면서 코끼리, 사자, 시금조, 꽃, 기둥, 연화대, 아수라, 가루다상을 만들어 놓았고, 현란한 조각 기술과 파낸 정성은 신의 경지다. 암산을 쪼아 낸 바위 조각의 양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5개나 세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1월 20일 오랑가바드(아잔타)로 가기 위해 밤 침대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밤샘을 하는 승객들이 바닥에 담요를 깔고 가족끼리 엉켜 누워 있었다. 철로 위엔 버려진 오물과 배변으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역사 안에 쓰레기통은 한 번도 씻지 않았나? 얼마나 가야 될까? 끝이 보이지 않더니, 새벽 4시 30분에 ’부사왈‘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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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650년까지 850년에 걸쳐 조성된 ’아잔타 불교 석굴‘은 말발굽형의 ’와고래‘강변 수직 절벽에 29개의 석굴로 되어 있다. 거대한 제1석굴 사원 내에는 그 당시 사용한 광물질의 안료를 사용한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한데 특히 연꽃을 들고 있는 1번 비하라 석굴의 보살상은 은은한 미소가 마치 살아있는 미녀의 얼굴 같아서 불교 미술사에 무한한 가치가 있다.
제 27석굴 한 편에 있는 부처님의 열반상은 세계 곳곳에 열반상과는 사뭇 다르다. 거대하기
만 하고 조악스런 것들과는 달리 엄숙하여 관람자를 숙연하게 만든다. 거대한 석굴 속에 있는 원형의 탑들 또한 중국가 한국의 탑이 어떻게 변화하며 전파되었는가를 가르쳐 준다. 이 동굴사원은 후세에 동북쪽으로 그 기법을 전파하여 중국의 석굴 문화와 한국 경주의 석굴암 모델이 되고 있다.
1번- 풍만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흑인 공주와 출가전의 붓다 모습.(붓다의 얼굴은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 보임)
2번- 붓다의 전생과 이생 이야기 그림.
4번-28개의 기둥, 부조로 새겨진 조각, 화가 나서 날띄는 코끼리와 이룰 피하는 두 남녀의 모습은 걸작,
6번- 유일한 2층 구조, 음악 기둥이라고도 함. 붓다의 상만 2개.
9번- 짜이띠야 석굴. 초기작.
10번- 처음의 세상.
16번- 수려한 벽화, 빈사의 공주는 백미, 붓다의 이복동생의 남편 난다가 출가를 결심하자 아내 순다리가 슬퍼함.
17번- 조각가들의 보물 상자라 불림, 뱀의 왕가나와 아내 나긴스.
27번- 인도에서 가장 큰 열반상. 붓다를 유혹한 악마 마라의 모습.
다울라 타바드 고성
아그라에서 1000km를 도망친 ’아우랑제브‘(무굴제국)가 묵었던 성으로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입구를 오르는 길 왼쪽엔 거대한 정사각형 우물이 있었다. 수영장 크기로 우물은 깊이가 1m를 넘는다. 입구에서 안채까진 운동장만한 정사각형 안뜰이 있었고, 성 뒤편에는 거대한 암산이 성을 안고 있어 뒤편에선 성이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새이다. 그의 부인은 미니 타지마할에 묻혔다. 입구에 문을 들어서면 둥근 연못 속에 그녀의 넋인 양 작은 연꽃들이 피어 있고, 맑은 물속엔 형형색색의 인파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투영되어 그 옛날의 화려함을 되새겨 준다.
코친에서 쇼핑을 만끽
Sahil Hotel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11시 50분에 뭄바이 공항에서 ’코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2시간비행 후 오후 6시 코친에 도착했다. 코친은 로마시대부터 향신료 무역의 중개지로 수 백 년 간 외세와의 동거로 인해 혼합된 문화가 형성된 곳이다. 특히 드넓은 아라비아 해와 그 위에 드리워진 중국식 그물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중국식 어망은 무거운 돌을 단 도르래 식으로 어망을 바다에 넣어 고기를 잡는다. 광동성에서 많이 사용 되었으며 원나라 13세기’쿠빌라이 칸‘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한 배에 45명의 어부가 수작업으로 고기잡이를 하는데 지금은 어획량이 줄어 관광자원으로만 이용된다고 한다.
이곳은 인도이면서도 힌두교가 아닌 ’카톨릭‘이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대체로 유럽식으로 세련되었고, 상품의 질이 좋고 물건 이 정찰제로 대체로 싸서 쇼핑의 맛을 더해줬다. 전통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관광객들에겐 천국, 이름도 웨스턴 식으로 부른단다. 특산품은 홍차,후추,비누,카레, 향신료등이 수출된다고 한다. 코친에는 유대인 거리가 있다. 11세기 향신료 무역을 하던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1568년에 건설된 ’유대인 회랑‘이 남아 있다. 중국 광동성에서 가져온 푸른색과 흰색의 돌로 장식되었다.
아시아 최초로 카톨릭이 들어온 곳으로 성프란시스코 성당은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12년간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로코코 양식인 산타쿠루즈 대성당내부는 작고 아담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이끈다.
마탄체라 궁전은 포르투갈이 코친의 지배자 비리게발라 바르마에게 선물한 궁전이다. 밖에서 본 모습은 사다리꼴로 내부에는’라마야나‘벽화가 유명하다. 17세기제작. 간결한 선과 풍부한 색감이 눈길을 끈다. 쇠처럼 단단한 3가지 나무로 조각한 것이다.
알라뿌자의 하우스 보트
’깨랄라‘주에서만 볼 수 있는 Back Water 크루즈는 하우스보트(House Boat)라는 특이한 호텔 선박으로 예쁘고 소박한 객실을 갖췄다. 원래는 쌀 수송선으로 전통식 나무배에 야자 잎으로 지붕을 얹은 것이다. 알라뿌자는 뱅갈 만과 대서양의 물이 어우러지는 곳으로 알라뿌자의 꼴람 사이의 수로를 헤치며 항해한다.
남극의 베네치아라부를 정도로 고요히 흐르는 강과 주변의 열대 정취를 맛볼 수 있다. 보트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면서 한가함을 만끽한다. 어디선가 둔탁하게 들리는 빨래소리와 교회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만이 정적을 깨울 뿐이다.
작은 보트는 사람이 노를 젓는데 1인당 25루피(400원), 넷이서 한 배를 타고 수로 위에서 아래로 한 바퀴 도는데 우리가 탄 보트는 8인용으로 객실이 4개이다. 하샘+김생, 황언니+시연, 박언니+수연,나, 요리사, 선장, 서빙맨 3명이 승무원이다. 저녁엔 버터에 구운 가재 요리와 포도주로 남극의 밤에 축배를 들었다. 요리사 솜씨가 무척 좋아서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아침은 눈부시게 찬란했다.
파파야 나무 잎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노란 햇살이 녹색의 물 위에서 찰랑거린다. 야자수 그늘 밑을 산책했다. 가느다란 육지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민물과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이 평화롭다. 아침 준비를 하는 현지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아기자기 사는 그들의 사는 집 안뜰도 기웃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하늘엔 어젯밤 반짝이던 들이 남아있다. 분명 이 곳은 신이 사는 곳이다.
코발람 비치, 최악의 만찬
이튿날 우리를 태운 버스는 끝없이 펼쳐지는 코코넛 나무를 배경으로 아라비아 해를 끼고 달려, 오후 4시 ’코발람‘에 도착하여 Paja Mahal Hotel 에 여장을 풀었다. 인도에서 유명한 쿠발람 해변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흰백사장을 비추는 등대 불빛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섬이 없어 조류가 매우 빨라 해마다 수 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한단다. 그래서 이곳 어부의 부인들은 시집올 때 입었던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고기잡이 나가는 남편을 전송하고, 또 배가 들어오면 새 옷을 입고 맞이하는 전통이 있다. 아침, 대서양의 어부들이 고기 잡는 광경을 보았다. 7-8명이 한 조가 되어 백사장에 그물 끝 새끼줄을 두고, 다른 한 쪽 끝을 머리에 감아 이고 바다 가운데 있는 배까지 해엄 쳐 간다. 배위의 사람에게 건네주면 배에선 넓은 원을 그리며 그물을 드리운다. 나머지 2-3명은 원 바깥쪽에서 물장구를 쳐서 고기를 몰았다. 수고에 비해 고기의 양은 많지 않지만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는 그들의 목소리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지구 끝 어디에서도 먹고 사는 게 다 비슷한 듯 싶다. 만선을 빌며 호텔로 돌아왔다.
인디아의 땅끝, 칸나꾸마리
아침 9시 고오츠 산맥을 따라 3시간을 달려 12시쯤, 땅 끝 마을인’칸나꾸마리‘에 도착했다. 넓고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땅 끝 마을은 마두라이에서 450km가 떨어져 있다. 뱅골만 해 , 아라비아 해, 인도양 해, 세 곳의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인도인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바신의 여러 부인들 중 하나인 꾸마리의 도시, 6세기 때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팔레비왕조‘의 수도이기도 하다. 두 줄기 강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신성함을 운운하는데 세 개의 다른 바다가 교차하니 성지로 평가 받을만하다.
인도인들은 물과 종교의 상관관계에 민감하다. 특히 인도 순례자들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매월 보름에는 삼면이 바다인 관계로 달이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달이 수평선 속에서 해로 바뀌어 솟아오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축제일에는 멀리 라자스탄이나 펀잡, 우타르, 프리데시, 아쌈, 마나푸르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며칠씩 걸려 찾아와 인파로 북적거린다.
이곳은 주로 인도인들만 여행하는 곳이지만 호텔도 깨끗하다. 작지만 아늑하고 정갈한 호텔에서 모처럼 제대로 된 더운물로 샤워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새벽 5시에 호텔 옥상에서 해돋이를 보기로 했다지만 난 늦은 6시 반에 해돋이를 봤다. 해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긴다. 바닷가에 모래사장은 없고, 예쁜 색칠을 한 배들만 빼곡히 들어차 있고, 핑크빛 붉은 지붕과 정돈되지 않은 삶의 흔적들마저 따스하게 다가온다. 마주치는 아이들의 눈웃음은 밝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와 인도 음악이 아침을 깨운다. 호텔 도어맨은 전통 의상을 입은 체격 좋은 미남이다. 로비의 둥근 수반에 매일 신선한 꽃을 띄워 향기를 발산하는데 그것이 도어맨의 작품이란다. 붉은 꽃, 노랑 꽃, 흰 꽃을 둥글게 채워 넣었다. 꽃이 시들면 새로 바꾸는데 그의 굵직한 손에 비해 부드러운 손놀림은 감탄스럽다.
이곳은 바다도 하늘도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광활한 땅에 2만5천명의 신이 존재하는 곳. 원색의 옷과 무늬, 까마귀, 점점이 떠있는 예쁜 배들. 더없이 아늑하고 편안한 곳, 타고 난대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환생한다는 믿음,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그 여유로움도 거기서 나오는걸까
.왕조들의 도시, 마두라이
남인도 타밀나무주의 내륙도시이며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는’마두라이‘에 도착했다. 2500년 역사를 지닌 마두라이는 남인도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사는 큰 도시이며 ‘판다야’ 왕조의 수도지로 번성하였는데 11-12세기 사이에 ‘촐라왕조’,그 다음은 ‘함피의 비자야나가르 왕조’, 이어서 ‘나약 왕조’는 마두라이에 오늘 날과 같은 ‘쉬리미낙시 템플’을 세웠다.
점심을 먹고 ‘쉬리 미낙시 사원의 화려함의 극치인 ’고뿌람‘을 관람했다. 드라비다 건축양식으로 우아한 곡선이 돋보이는 천개의 기둥에는 각각의 문양과 3만3천개의 조각상이 있었다.
인도의 신들은 선.악등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희로애락을 느끼므로 더 친근감을 갖는다. 시바의 부인은 ’빠르바띠, 칼라, 까막쉬, 미낙쉬 등 다양한 여신으로 숭배되지만, 본질적인 모습은 하나이다. 사람의 눈에 다른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깐치뿌람’은 한국 선불교의 시조로 추앙받는 ‘보리 달마 스님’의 고향으로 달마는 깐치뿌람의 왕자였다. 천개의 고뿌람은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 되었는데 사원 안을 차지하고 있는 잡상인 때문에 등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인도 정부가 상인들을 강제 철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탄조르에 있는 고뿌람이 등재되었다. 탄조루 Maru Tham 호텔레 도착하자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 왔다. 호텔에선 꽃 목걸이와 물수건, 시원한 쥬스로 친절하게 맞이한다. 그래서인지 인도는 울고 다니고 끝나면 다시 가고 싶은 나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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