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래빗홀'을 보고
지난 2월 24일과 25일에 동명동에 위치한 민들레 소극장에서는 전대극문화연구회(이하 전대 극회) 제121회 정기 공연이 있었다. 학생들이 선택한 작품은 데이비드 린제이 어베어라는 미국 작가의 ‘래빗홀’이었다. ‘래빗홀’은 2007년에 퓰리처상(드라마 부문)을 받았다.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은 이 작품을 보고 바로 영화 제작을 결심하고, 주연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연극이 아닌 영화로 먼저 접한 사람도 많다.
‘래빗홀’은 사랑하는 사람을 부지불식간의 사고로 잃은 이들의 시간에 관한 얘기이다. 베카와 하위는 8개월 전에 4살짜리 아들 대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대니는 다람쥐를 쫓아서 도로로 달려간 개 타즈를 쫓아갔다가 열 일곱살 나디아(원작에서는 제이슨이라는 남학생인데 전대 극회는 이 인물을 여자로 바꾸었다.)가 모는 차에 숨졌다. 대니의 엄마인 베카가 동생 이지와 통화하느라 잠시 시야에서 대니를 놓친 순간에 사건은 벌어졌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그 상실감에 따른 깊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방식에 있어서 베카와 하위는 서로 다른 방향을 추구한다. 베카는 아들의 흔적과 추억을 하나씩 지워가며 아들을 잊으려고 한다. 아들의 그림을 상자에 넣어 지하실에 두고 아들의 옷가지를 정리하여 구세군에 기부한다. 또 타즈를 엄마에게 보내 버린다.
하위는 그런 베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아들과의 지난 시간을 곱씹으며 슬퍼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베카 역시 그리하길 바란다. 하위는 아내와 다시 잠자리를 가지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혼자 대니의 영상을 보면서 아들을 추억한다. 하지만 번번이 베카와 부딪힌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애도의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베카는 오히려 상처만 받고,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으면서 남편이나 엄마, 여동생과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인다. 그 시간은 잔인하다.
시인 T. S. 엘리엇은 그의 대표작 ‘황무지’를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겨우내 답답하고 차가운 땅속에 있던 씨앗들에게 이제 다시 봄을 맞아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새 생명을,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4월은 잔인한 시간이다. 베카와 하위가 보내는 시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 두 사람에게 아들이 죽은 후, 애도의 막바지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 시간은 너무나 잔인하다. 더구나 두 사람의 애도 방식이 그렇게도 다르니 말이다.
이 연극에는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중요한 캐릭터가 있다. 죽은 대니와 동갑내기인 앨리스의 엄마 데비다. 베카와 절친인 데비는 아이를 잃은 베카에게 어떤 위로를 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두려움 때문에 베카를 찾아오지 못한다.
데비의 역할은 중요하다. 냉정한 척, 무심한 척하지만, 사실은 아들 대니를 잊지 못하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베카가 안정되면서 일상으로 서서히 복귀한다는 것을 알리는 지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에서 베카는 데비를 받아들이고, 데비도 베카를 받아들인다. 베카는 남편 하위도 받아들이고, 엄마 냇을 받아들이며, 이지도 받아들이고 사고를 낸 소녀 나디아도 받아들인다. 하위 역시 아내 베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디아도 받아들인다. 이렇게 ‘래빗홀’은 아픈 서로가 슬픈 서로를 받아들이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공연에서 아쉬운 점은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자녀를 잃은 아픔을 표현하는 데 아무래도 서툴렀다는 것과 그 서투름이 어색한 번역 투가 여실한 대사와 함께 미묘한 부조화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대학생들이 상실의 아픔을 견디고 극복하는 이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주는 내용의 작품을 선택해서 최대한 연기한 점은 칭찬할 만한 요소다. 2022년의 이태원 사건과 2014년의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이 연극을 사고로 아이를 잃은 모든 부모에게 작은 위로를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감히 선택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첫댓글 글이 차분하고 좋네요. 특히 ' 받아들인다 '를 9번 쓰신 것이 유의미해 보입니다.
‘래빗홀’의 전반적인 이해에 도움을 주는 작품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