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4일차 코스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 Santuario della Beata Vergine Maria del Santo Rosario di Pompei )
폼페이는 비극적인 사건들과 암울한 시간들을 겪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비극은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의 승리로 바뀌었으며 불행했던 시간들은 셀수없이 많은 순례자들이 기적과 은총을 경험하면서 환희에 찬 시간들로 바뀌었습니다.
폼페이를 방문한 첫 번째 비극은 A.D. 79년, 베수비오 산이 맹렬히 폭발했을 때였습니다. 화산은 로마의 도시를 파괴했고 도시는 수백년 동안 화산재 아래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폐허에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개발된 다른 도시도 비극을 맞았습니다. 1659년에는 말라리아 전염병이 널리 퍼지면서 황폐해졌고 인구 대부분이 사망했습니다.
https://youtu.be/wkY-bSqmfmE?si=EVqF7v1DV5ZIgr9D
전염병이 퍼지기 전에 세워졌던 고대의 교회는 1740년에 무너졌고 그 자리에 소성당이 세워졌습니다. 한때 번창했던 교구에는 한줌의 신자들만 남았고 늙고 지친 사제 한 명이 이들을 위해 미사를 드릴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신자들은 여러 미신에 빠져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상강도떼까지 나타나 그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약탈했습니다. 폼페이는 결국 "대담하고 악명높은 강도들의 위험 천만한 휴양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절대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택하셔서 당신께 신심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해 경이로운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불행한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성모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바르톨로 롱고(Bartolo Longo, 1841-1926)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가장 예상 밖의 선택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나폴리에서 변호사 공부를 하던 바르톨로는 대학교 재학 시절에 사탄주의(Satanism)를 소개받았습니다. 사탄 교회의 사제로 "서품" 받은 후, 그는 오랫동안 설교, 예식 집행,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사제에 대한 공개적인 조롱,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헐뜯는 발언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나쁜 친구들에 의해 사탄에게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였던 빈센트 페페(Vincent Pepe)는 그를 다시 천주께 데려갔습니다. 빈센트는 마침내 바르톨로가 도미니코회 수사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의 돌봄을 받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알베르토 수사는 바르톨로가 사탄주의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사 생활로 돌아온 바르톨로는 빈자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배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그룹의 일원 중에는 고대의 폐허인 폼페이 근처에 부동산을 소유한 부유한 미망인인 디 후스코 백작부인(Countess di Fusco)이 있었습니다. 백작부인으로부터 임대료 수금을 위탁받은 바르톨로는 도시의 황폐함과 주민들의 영적 빈곤을 목격했습니다.
1872년 10월의 어느날, 폼페이 근처의 들판에 잠시 멈추어 선 그는 사탄의 사제로 봉헌되어 살았던 지난날을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영원하기 때문에 사탄의 사제직도 어쩌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사탄에게 봉헌된 사람이고 여전히 그의 노예이자 재산이므로 그는 지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상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깊은 절망감과 함께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 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알베르토 수사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것을 들었다:
"나의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틀림없이 나의 영혼에 한줄기 빛을 던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외쳤다: "당신의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당신의 말씀이 맞다면 저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묵주기도를 전파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속에 대한 응답처럼 폼페이의 성당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삼종경을 드리라는 초대였다. 그 종소리는 나의 확고한 결심에 대한 서명과도 같았다."
바르톨로는 지체 없이 교구 미션을 조직하고 거룩한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사제들을 초대했습니다. 미션을 완료하기 위해 그는 성모님의 성화를 전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리의 어느 상점에서 적당한 그림을 발견했는데 안타깝게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 그림은 적합치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성화는 캔버스 또는 목판 위에 오일로 작업한 것이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골랐던 그림은 종이 재질의 유화식 석판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톨로가 알베르토 라덴테 수사에게 성화 일로 실망했다고 털어놓자 알베르토 수사는 마더 콘세타(Mother Concetta)라는 수녀님의 수녀원에 있는 성화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수녀님이 성화를 흔쾌히 내어놓으려 했으므로 알베르토 수사는 바르톨로에게 성화를 청해보라고 부추겼습니다. 그 성화는 원래 알베르토 수사가 어느 중고상에서 발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작 8칼린(1달러에 상당)에 성화를 구입했고 그것을 마더 콘세타 수녀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를 본 바르톨로는 성화의 한심한 상태와 역사적, 예술적 결함 때문에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성화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벌레가 갉아 먹은데다가 성모님의 얼굴은 거칠고 거의 촌부처럼 보였다... 성모님의 머리 바로 위의 캔버스 조각은 사라졌고... 성모님의 망토는 갈라져있었다. 다른 인물들의 꺼림칙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미니코 성인은 거리의 바보처럼 보였다. 성모님의 왼편에는 성녀 로사가 있었는데 이분을 내가 나중에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로 바꾸었다... 이 선물을 거절할지 받을지 망설였다. 나는 그날 저녁 무조건 성화를 약속했고, 결국 받았다."
바르톨로는 마더 콘세타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성화를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를 이렇게 격려했던 것입니다: "가져가세요. 성모님께서 이 성화를 통해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요." 이 말은 예언으로 드러났습니다.
성화는 갖고 다니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에 바르톨로는 성화를 시트로 감싸서 나폴리와 폼페이를 왕복하는 어느 마차꾼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주인공을 몰랐던 마차꾼은 폼페이에 도착하자 성화를 인근 밭에 옮길 거름더미 위에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불길한 방법으로 묵주기도의 모후는 폼페이에 도착하셨습니다.
성화가 폼페이에 도착한 날짜는 1875년 11월 13일입니다. 신자들은 해마다 특별한 기도와 의식으로 성화의 도착 기념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도착 후 2개월이 되던 1876년 1월, 성화의 1차 복원작업이 바르톨로 롱고가 조직한 거룩한 매괴회의 교회법적 설립에 맞추어 완성되었습니다. 2차 복원작업은 1879년 나폴리의 예술가 말다렐리(Maldarelli)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처음에 그는 이 작업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3차 복원작업은 1965년 바티칸에서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화를 안치할 성소를 위해 바르톨로는 장엄한 성당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건설 자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동전과 부유한 사람들의 상당한 기증으로 조달되었습니다.
성당을 건설하는 동안 세 가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극심한 간질 발작의 희생자였던 12세 소녀 클로린다 루카렐리(Clorinda Lucarelli)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녀의 친척들은 혼비백산하여 클로린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성당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클로린다는 성화가 공개된 날 치유되었습니다. 두 명의 의사는 이 치유가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선서했습니다.
고통 속에 죽어가던 젊은 여성 콘세타 바스테릴라(Concetta Vasterilla)도 클로린다와 비슷한 약속을 하고 치유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초석이 놓이던 1876년 5월 8일, 종부성사를 받고 괴저 상태로 죽어가던 안토니오 바로네 신부(Fr. Anthony Varone)도 마찬가지로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다음날 아침 미사를 집전했고 거룩한 묵주기도의 축일에 강론대에서 자신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았음을 인정했습니다.
초석이 놓이고 한 달 후, 지오바니나 무타 부인(Madame Giovannina Muta)이 치유된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폼페이의 성모님께 어떤 약속을 하라고 설득되었을 때 그녀는 폐결핵 말기 환자였습니다. 6월 8일, 침대에 누워 있던 무타 부인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폼페이의 성모님 성화를 환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화를 바라보던 그녀에게 성모님께서 다음의 글이 적힌 리본을 떨구어주신 것입니다: "지오반니나 무타, 폼페이의 동정녀께서 당신의 청을 들어주신다." 환시가 사라진 후 무타 부인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여기에 모두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일어났습니다.
성소가 건설되는 동안 바르톨로는 고아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쏟았고 성소에서 사용할 9일 기도문과 기도 안내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1885년 4월 1일 미망인이던 마리아나 디 후스코 백작부인과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그들의 돌봄에 의지하던 많은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시간과 재산을 쏟았고, 성직자와 수도자 지망생도 후원했는데 바르톨로는 약 45명의 신학생의 교육비를 감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당은 1891년 5월, 교황 레오 13세의 교황 특사인 라 발레타 추기경(Cardinal La Valletta)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1934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의 명시적 명령에 따라 거대한 새 바실리카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실리카는 1939년에 완공되었고 교황 비오 12세의 존함으로 말리온스 추기경(Cardinal Magliones)이 문을 열었습니다. 교황 성 비오 10세는 폼페이의 성모께 대한 신심과 성소를 지지하신다고 이미 표명하셨습니다.
묵주기도의 성모의 기적적인 초상화는 예술적으로 풍부한 이 대성당의 제대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황금색 프레임 속에 모셔진 이 아름다운 성화는 보좌에 앉아 계신 복되신 성모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모의 무릎에는 성 도미니코에게 묵주를 건네고 계시는 예수 아기가 계시고 성모는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에게 묵주를 건네고 계십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천주께서 이 성화를 통해 베푸신 은총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버려졌던 단돈 1달러짜리 그림은, 이제 성모님께 대한 감사에 넘친 사람들이 기증한 금강석과 보석이 가득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매일 최소 10,000여 명의 순례자가 이 성소를 방문한다고 추정되지만 1년에 두 번, 즉 5월 8일과 10월의 첫째 일요일에는 최소 100,000명의 순례자가 바르톨로 롱고가 지은 장엄 기도에 함께 합니다.
한때 사탄주의에 몸담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개종자였고 존경받는 변호사이자 고아들의 수호자였던 바르톨로 롱고는 향년 85세를 일기로 1926년 10월 5일에 사망했습니다. 바르톨로 롱고와 그의 아내의 무덤은 성소의 지하묘지에 있습니다.
"나의 묵주기도를 전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복되신 성모 마리아의 약속은 1980년 10월 26일에 거행된 시복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르톨로 롱고의 영혼의 구원을 확인했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폼페이의 대성당 대제대 위에는 오래 전 고물상에서 1달러에 샀던 그 기적의 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기적과 은총은 폼페이의 성모님의 전구로 일어났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복되신 성모의 무릎에는 성 도미니코에게 묵주를 건네고 계시는 예수 아기가 계시고 성모는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에게 묵주를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성화는 성모님께 대한 감사로 기증한 다이아몬드와 여러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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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