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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장정일의 독서 일기 7
저- 장정일
출-랜덤하우스
독정-2019. 8.29.목
· 메마른 눈물이 괴었다간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 어린 시절 나를 안심시켜 주던 담요같은 역할
· ·수세기 동안 역사 편찬은 주로 법률가. 성직자. 사업가와 재산가들의 부업이었다.
· 사진이 진실을 조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주 고전적 방법은 가위, 면도칼, 풀 등의 물품으로 필요 부분을 잘라 다른 사진을 오려 붙이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드 장군 사진은 일본군에 의해 필리핀을 쫓겨났던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환활 때의 사진이다. 이 사진 역시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는 역사적 장면을 놓친 <라이프>의 기자를 위해 맥아더가 군함을 동원해 상륙 당시를 다시 연출한 사진이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독일 저웁가 ‘의무적인 사과’를 맡고 나서는 바람에 개개의 독일 국민들은 나치 시대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국가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침략 전쟁에 참여했던 개개의 국민들이 양심의 가책을 초소하게 된 일본의 경우와 무척 다르다.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에는 기존 서구 판타지물에 긷든 독자에게는 좀 맥 빠지는 대목이 있다. 강고하고 타협할 수 없는 선악 이분법 위에 작동하는 서양의 신화나 판타지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귀신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는 상생과 용서가 기저를 이룬다. 그래서 아신, 전우치, 미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죽이지 말라”다. 그들은 귀신이나 영물을 죽이는 대신 백 년이나 천 년 정도 호리병 속에 가두어 놓는 벌에 그친다.
· 유용주의 『마린을 찾아서』(한겨레신문사, 2001)를 읽다. -퍼옴
이 책이 ‘노동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나는 유용주의 독자였다. 자전소설이기도 한 이 책의 작가는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 부모·가족과 헤어져 온갖 노동 현장을 전전한다. 작가는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을 증오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감싸 안는다. 한 소년의 성장을 노동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런 책은, 요즘 들어 점점 낯설고 귀한 것이 되어 간다. 진흙이 신발 밑창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이 삶의 체험에서 길어 올린 진득한 문장은 가히 일품이다.
책 제목에 나오는 ‘마린’은 매일 가게 앞을 지나가던 여대생에게 작가가 몰래 붙여 준 별칭이다. 유용주는 자신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여대생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비탄에 빠진다.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노동자의 자긍심이 한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유용주는 여대생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야학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게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그에겐 인생의 전환점과 성장의 순간이 함께 왔다. 첫 번째 국어 수업 시간에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못 배우고 가난한 이웃과 노동자들의 삶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시인이 될 것을 결심한다(“건강하고 튼튼한 시인”, p.162). “내 운명은 정동교회 배움의 집 첫 국어 수업 시간에 결정이 났다”(p.161)라고 말했던 열여덟 살 때, 그는 성장의 광맥을 움켜쥔 것이다. 요즘은 유용주 작가처럼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생활 전선에 투입되는 청소년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학교는 교과를 중심으로 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능하지만, 삶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는 삶을 신비화하고 은폐하면서, 신분 상승 혹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우선 교과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다그친다. 학교가 삶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삶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삶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간다.
그런데 유용주의 이 책은, 어울려 사는 것이 삶이며 또 노동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학생들의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 준다. 어울려 살며 노동하는 삶! 이게 ‘삶의 정면’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같은 작가의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솔, 2002)도 읽었으나, 나는 그 책으로부터는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나의 개인주의는 유용주 주변 시인들의 끈적한 연대를 낯설어한다. 다름으로써 증명되는 모더니스트의 삶과 문학이, ‘함께, 똑같이’라는 민중주의자들의 삶과 문학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 장정일.
·We do not realize what we have on earth until we leave it(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우주로부터의 귀환>-퍼옴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1983)은 1960~70년대 미국의 우주진출 과정과 우주비행사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우선 당시 미국과 소련간의 우주경쟁이 치열한 상황을 소개하고 이어 우주 계획의 과정과 진행을 생생하게 짚어본다. 특히 아폴로 13호의 아슬아슬한 귀환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후 엘리트 군인 출신의 우주비행사들 이야기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이들이 우주여행을 하기 전까지의 삶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여기에 우주체험으로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과 그들 자신 인생에 미친 영향, 종교관 등을 여러 자료와 생생한 전언을 통해 들려준다.
대표적으로 전도사가 된 제임스 어윈을 비롯해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치료까지 받은 버즈 앨드윈, 정치가가 된 존 글렌 등이 등장한다. 거의 전기에 가까운 이들 비행사들의 인생 이력을 살펴보면서 귀환한 우주인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대기권 밖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거나 혹은 달이라는 낯선 곳에 발을 내딛은 체험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은 하나같이 우주에 대한 외경으로 인격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질서를 갖춘 신적인 느낌(汎神?)의 우주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등바등하며 서로 적대시하는 지구인의 삶에 대한 성찰이 뒤따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군인과 과학자라는 우주인들의 한계는 있었고 저자는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시각과 철학을 가진 우주인들이 대기권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비친다.
결국 35년 전 저자의 바람은 2023년에 이뤄질 전망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일본의 억만장자 마에자와 유사쿠라는 기업가가 민간 우주탐사기업 '스페이스 X'를 통해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달’ 관광에 나선다고 한다. 그는 8명의 아티스트를 모아 일주일간 우주여행을 떠난다고 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마음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한편 미국 우주인 외에 당시 소련 쪽 우주인들도 후속편의 인터뷰를 해봤더라면 어떨지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직접 우주에 나가보진 못했어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느낌을 추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출처] 우주로부터의 귀환|작성자 시로짱
·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서울대행정대학원통일정책연구팀 저
동독처럼 오랫동안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미숙 상태에 빠드린 국가도 없었고 노동자를 사회적 온실 속에 살게 한 곳도 없었다. 는 마츠와 앵글러는 “한마디로 극단적인 이기심과 노동을 기피하는 사고가 뼛속 깊이 박혀 있으면서 국가에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인간이 사회주의적 인간”이라 한다. 퇴출의 칼날을 맞는 피고용자들은 언제나 노력과 책임이 부족하며 도전 정신이 없는 미성숙한 사회 인자로 치부된다. 그것이 기세 좋게 사회주의적 인간으 두들겨 팬 저자들의 흰 손에 묻은 핏자국이다.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남과 북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사라지면 된다-고은
·<나를 돌려다오>이용휴, 이가환 부자의 산문선집
처음 태어난 그 옛날에는 천리를 순수하게 다르던 내가, 지각이 생기면서부터느 ㄴ해치는 것이 분분히 일어났다. 지식과 전문이 나를 해치고 재주와 능력이 나를 해쳧ㅆ으나, 타성에 젖고 세상사에 닳고 닳아 나를 얽어맨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을 받들어 어른이니 귀인이니 모시며, 그들을 끌어대고 이용하여 어리석은 자를 놀라게도 했다. 수많은 성인은 지나가는 그림자니 나는 내게로 돌아가리라
·해방전 까지는 윤동주와 치구엿고 해방 후부터는 장준하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 둘의 죽음으로부터 늘 콤플렛스르 느꼈던 것이 노년에 발현됐다는 해석도 있지만 문힉환 스스로가 입애달고 다녔던 그 콤플렉스는 실은 문익환이 자랑하는 콜플렉스였으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는 가면이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방패삼아 청, 장년기 동안 은둔 속의 참여를 했다. 다만 사람들이 소란하지 않을 때는 알아먹지 못했던 1989년 방북은 열매 안에 꽃 감추고 있던 무화과의 결실이었다.
·보양 저 <추악한 중국인>
중국인은 한국인과 같이 여러 종류의 장을 담가 먹는데 보양은 뭐든지 오래되고 케케묵은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 믿는 중국인의 의식을 ‘장독 문화’라 부르며 그 원인을 유교 사상에서 찾는다. 정치와 조상 숭배를 결합한 유교가 중국을 지배하면서부터, 중국 문화는 보수적, 폐쇄적이 되어 구더기가 들끓는 장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 앞사람이 쳐 놓은 그물을 뚫고 지뢰밭을 과감하게 뛰어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느린 걸음으로 우리 자신을 묶어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서를 읽을 때 마음의 눈을 열어 놓아야먄 속지 않는다. 책을 다 믿느니 차라리 책이 없는 것이 낫다.
·너 소야? 나 최영의야‘ 소는 그렇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은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너 책이야? 나 독자야‘하고 잡히는 대로 읽는 일은 난독이요 패티시(살찐-지나침)다. 좋은 독서는 강한 동기 부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왕의 정부들이 보석을 탐하는 까닭을 마거릿 크로스랜드은 <권력과 욕망>에서 정신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쓸 때, <왕의 정부>를 쓴 엘리노어 허먼은 “궁정을 급히 떠나야 할 때면 왕에게 몸값으로 받은 보석들을 작은 천 주머니에 넣거나 속옷 등에 넣어 꿰매어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선호돠었다.” 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옐리네크의 대표적 작품이다. 남편의 대체물로 딸을 다루면서 철저한 억압과 통제를 행사하는 어머니, 이로 인해 왜곡된 성적 정체성과 욕망을 갖게 된 딸, 서로에게 남성의 대리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의 공생 관계, 폭력적인 사도마조히즘, 정복욕에 다름 아닌 ‘정상적’ 남성성 등을 보여주면서 모녀 관계, 성 정체성, 지배와 복종의 메커니즘, 남녀 관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 옐리네크 저.
현대사회에서의 사랑과 소통의 문제, 욕망과 몸의 문제를 탈신화하고자 한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소설로, 강압적인 어머니에 의해 스파르타식 음악 훈련을 받는 소녀의 모습은 비극 『클라라 S.』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옐리네크는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 소설은 2001년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암흑의 핵심>-퍼옴
문명사회가 보장하는 안이한 삶을 박차고 나와 궁극적 자기인식을 성취할 수 있었던, 의식이 깨어있는 한 인간의 자기 탐구담을 그린 폴란드 출신 작가의 장편. 헨리 제임스와 더불어 20세기 영국 소설을 개척한 콘래드의 대표작! 영화 <지옥의 묵시록> 의 원작소설. 이 책은 서구 제국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한 점에서 주목받는다. 이 소설의 화자 말로는 유럽인들이 <암흑의 대륙>이라고 부른 아프리카로의 항해를 통해, 탐험을 동경해 온 자신의 꿈이 궁극적으로는 위장된 제국주의적 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 김성곤(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이 책은 무엇보다도 문명 사회가 보장하는 안이한 삶을 박차고 나와 궁극적 자기 인식을 성취할 수 있었던,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인간의 자기 탐구담이다. 이 책의 감동은 작가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서도 나오지만, 그것보다도 우리가 서술자 말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의 정신적 탐구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할 수 있는 그 강력한 주술적 힘에서 나온다. ―이상옥(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템즈 강 하류 한 기선 위 네 명의 선원들의 묘사와 어두운 배경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베테랑 선원인 말로는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본인의 젊은 시절, 콩고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머지 선원들에게 들려줍니다. 흔한 말로는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하지만 우리의 착한 주인공은 열심히 들어주죠.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의 전부이죠.
아프리카 콩고 상류에 있는 일 잘하는 아주 대~단하신 커츠라는 인물을 데리고 와야하는 임무
지금 우리에게도 콩고의 메콩강 상류를 다녀오라고 한다면... 당연히 꺼려할 사람이 많겠지만 이 글이 쓰여진 당시에는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고 콩고인들을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답이없던 시기였죠.
<교과서에서 봐온 제국주의의 모습>
제국주의란,
1870년부터 20세기 초까지 걸쳐 나타난 독점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총칭하는 말이며 영토를 확장하여 식민지화 시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죠.
이 시기의 콩고는 정말 미지의 세계인 것이었죠. 말로는 기꺼히 이 일을 행하게 됩니다. 커츠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여서 꼭 만나봐야겠다는!!! 그런 사명감을 갖고 출발하기 보다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첫번째 관문인 주재소에서 말로는 회계주임에게 상류 깊숙히 들어가야 커츠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덧붙여 커츠에 대한 주변의 평판도 듣게되죠. 영국인들이 그 깊은 오지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하던 와중에 콩고에서 돈이 되는 상아를 약탈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그곳에 드나든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2.보름 정도를 걸어서 중부 주재소에 도착하자 또다른 정보제공자 지배인과 일급회사원을 만나게 되고 커츠씨 이야기를 듣습니다. 배가 고장났다는 안좋은 소식도 듣지만 여기서 말로는 커츠가 내륙 주재소 소장으로 콩고 원주민들에게 문명을 전파하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러던 와중 중부 주재소 지배인의 숙부가 이끄는 엘도라도 탐험대가 중부 주재소에 도착하게 되고 그들은 <엘도라도>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갖가지 보물들을 약탈해가려는 욕망 뿐 콩고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커츠가 상아를 운반하다가 갑자기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게되면서 점점 '커츠를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3. 커츠가 있는 주재소로 가는데 2개월이나 걸렸는데 도착한 후 그들은 원주민에게 공격을 받게 되고 조타수의 흑인이 화살을 맞아 죽게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커츠가 있다는 내륙주재소에 도착하지만 그들을 처음 반기는 건 어릿광대같은 러시아인입니다. 이 러시아인의 말로는 커츠씨가 원주민들을 떠나지 않았으면 해서 말로의 일행을 공격한 나... 단순히 커츠씨가 대단해서 그가 콩고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의 신처럼 추종하는 관계라는 걸 알게됩니다.
4. 겨우 커츠를 그 무리에서 빼오게 되지만 도망오는 과정에서 그는 다치고 이미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는 죽을 때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후 말로는 본국으로 돌아와 커츠의 약혼녀를 찾아가 그의 죽음과 편지 그리고 사진을 전달해주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가 된다.
* 이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
첫 번째는 바로 제목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암흑"이라는 단어이다.
작가는 어둠이라는 묘사를 통해 글을 읽는 내내 음침한 분위기와 메콩강 상류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려고 많이 노력한다. 물론 제목에서 말한 암흑의 핵심은 콩고의 무지한 원주민들과 그들의 문화인줄로만 알던 말로가 깊숙히 직접 들여다보니 유럽 제국주의에 세뇌 당하여 희생되는 백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빛과 어둠 / 백과 흑 - 결국 이 암흑이라는 것은 명암과 채도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있는 것 아닐까. 암흑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의미를 작품에서 언급 될 때마다 한 번 생각해보면 잘 읽히지 않는 책... 잠시 쉬어가며 읽을 수 있는 독서의 기술이 되지 않을 까 싶다.
두 번째 단어는 바로 "고발"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을 한 작품으로 녹여냈지만 이 역시 불완전한 고발이라 생각된다.
커츠의 야만성은 제국주의의 세뇌에 의한 것이라는 부여와 죽을 당시 말한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는 대사와 함께 이 어느 정도의 면죄부가 주어졌다라고 생각된다. 제국주의에 희생되어 온 몸을 불사른 백인은 조금은 억지스럽게도 모든 명성과 그가 한 행위들이 조용히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작 아프리카 콩고 주민들과 식민지 내부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언급도 볼 수 없는 작품이다. 물론 작품이 쓰여진 당시 역시 어떠한 해답을 낼 수 없었기에 작가가 이렇게 썼다고도 생각을 해볼 수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결말이다.
마지막 단어는 "세뇌"다.
커츠가 콩고 상류에서 신격화 되어 상아를 착취하는데 큰 능력을 보였다. 이것이 정말 커츠의 개인적인 능력인 것인가? 아니면 커츠를 그저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사상에 열심히 따르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글을 읽는 내내 커츠라는 인물이 궁금해질 때마다 들었던 생각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커츠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사상을 잘 이해하고 그 사상에 맞춰 연극을 잘 했던 것은 맞지만 그에게서는 잔인함과 대담함 말고 그 어떠한 특별함은 없었다. 결국 제국주의 사상에 세뇌당한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 백인들은 그간 이루어 놓은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들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등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
-113p-[출처] #암흑의 핵심 / 제국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다|작성자 Yuns
구효서의 <라디오 라디오>
·두부 한 모 크기만 한 나지오를 사려면 쌀가마를 달구지에 싣고 가야 할 만큼 귀중품이었던 시절 라디오를 귀동냥하려면 라디오를 가진 사람한테 밉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라디오 가진 사람은 마을의 권력자 같았다. 월남전에 갔던 이웃 형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마을에 텔레비전을 메고 오면서부터 병태의 라디오 시대는 막을 내린다.
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급격 성장한 미국 무선 기술은 1925년을 경계로 대중 미디어 산업으로 정착, 난립했던 아마추어 라디오 무선국은 점차 대기업이 대신하고 콘텐츠도 스포츠 중계 뉴스 등으로 넓혔다.
<소설 줄거리>-퍼옴
나는 강병태. 나이는 열한살이고 초등학교 3학년이다. 내가 사는 곳은 휴전선에서 걸어서 한시간의 한내마을이다. 지금은 1967년, 라디오에서는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방한하고 동백림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곳에서 간첩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한다. 그림에 재주가 없는 나는 라디오를 그려 선생님에게 유일하게 칭찬을 받는다. 그 라디오는 우리 마을에서 세상과 연결해주는 가장 귀한 물건이자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드라마 '삼현육각'을 하는 영물이다. 전파 송신소에서 삐삐선을 타고 마을에 들어와 각 집에 있는 스피커로 연결되어 마을사람들을 찾아온다.
묘선은 동네 무당인 '영조'의 딸로 어머니가 죽은 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당집에서 스피커에 귀를 묻고 사는 열여덟의 처녀무당이다. 묘선의 유일한 친구는 동갑네기 옥님이다. 문제는 묘선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는 것이다. 묘선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옥님의 오빠 선우를 흠모한다. 그리고 어느날 선우가 그녀에게 이쁘고 앙징맞은 치솔을 선물함으로써 그도 묘선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묘선에게는 그보다 앞서 우연한 계기에 정을 통하게 된 명덕이 있다. 명덕은 어릴적 마을에 들어온 고아로 마을의 힘센 일꾼이다. 그 둘은 이미 서로의 살 맛을 알아버린 사이이기도 하다. 반면에 반편에 가까운 중식이는 묘선을 사모하지만 언감생신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버지가 사준 라디오로 라디오라면 사죽을 못쓰는 묘선을 꼬셔보고자한다.
묘선은 굿을 해서 먹고 삽니다. 큰 굿이며 작은 굿으로 먹고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지만 특별히 큰 돈을 벌 일도 없기에 그저 스피커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를 낙으로 사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스피커를 통해 듣는 라디오라는 것은 많은 약점이 있습니다. 전파송신소의 채널선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스피커를 연결하는 삐삐선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곧잘 시간을 안가리고 스피커는 꺼져 사람들의 애를 닳게 합의 몸을 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몸짓에서 스피커가 건드려지고, 명덕은 그 소리가 묘선이 자신을 부르는 소린줄 알고 묘선의 집으로 향합니다. 내심은 선우에 대한 묘선의 마음을 알기에 적당한 전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묘선의 집에 당도한 명덕은 그 광경을 보고 뒤집어지지요. 다음날 아침에 명덕은 옥님의 집으로 가서 횡포를 부리기 까지 합니다. 그리고 옥님이 어머니는 회의를 통해 풍기를 어지럽히는 묘선을 추방해야한다는 안을 통과시킵니다. 하지만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인 서낭제는 묘선이 치러야하지요.
그러던 어느날 라디오는 갑작스럽게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놈의 중계 때문이지요. 축구나 야구중계가 아니라 서울에 나타난 무장공비를 잡는 중계 때문에 '삼현육각'까지 빼먹는 바람에 사람들은 가슴이 탑니다. 속칭 1-21사태라는 것이지요. 이즈음에 내 친구 일석이네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옵니다. 월남간 일석이 형이 말년휴가에 사온 것이지요. 전기가 없는 탓에 검은 눈만 뜨고 있는 텔레비전이지만 아무튼 신기하기 그지 없어 일석이는 우리들 사이에서 강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드디어 서낭제가 열립니다. 서낭제는 마을의 가장 큰 행사지요. 대처에서 유명한 쟁이들을 불러다가 굿을 하는 큰 행삽니다. 그 서낭제의 주인공은 당연히 무당 묘선입니다. 묘선은 그날 옥님이 할아버지의 혼을 내림받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옥님 모는 서울에 있었지만, 땅에 업드려 꼼짝않는 묘선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옥님모를 부르지요. 사실 조상신 만큼 무서운 것은 없거든요. 옥님모가 당도하기 직전에 묘선을 깨어납니다. 그리고 삭삭비는 옥님모에게 아들의 의사를 거절하면 집안이 거덜난다는 계시를 합니다. 옥님모야 어쩔 수 없지요. 조상이 지핀 무당의 말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숭자는 묘선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마을에서 떨어진 묘선의 신당에 사람이 듭니다. 북으로 올라가려는 무장공빕니다. 바로 중계방송에 나온 주인공들입니다. 묘선은 그들에게 인질이 되고, 다시 스피커가 끄적이는 소리에 신당을 찾은 명덕의 신고로 경찰과 군인이 집을 애워쌉니다. 공비가 죽고 사건이 종결되자 묘선은 다락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묘선의 장례식을 조용하게 끝나고 마을은 다시 조용해 집니다. 어느날 나는 새를 쫒다가 산길에 들고 라디오소리를 만납니다. 그 소리를 찾아갔을 때 작은 무덤아래 바보 중식이가 라디오를 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비통한 명덕의 모습도 봅니다."
위의 내용처럼 구효서는 묘선의 사랑을 중층적으로 배열해 다양한 문제들을 끄집에 내는데 성공했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이 책을 선택하는 경우보다 책이 책을 소개하거나 새 질문과 숙제를 내는 경우가 많다.
·두부 한 모 크기만 한 나지오를 사려면 쌀가마를 달구지에 싣고 가야 할 만큼 귀중품이었던 시절 라디오를 귀동냥하려면 라디오를 가진 사람한테 밉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라디오 가진 사람은 마을의 권력자 같았다. 월남전에 갔던 이웃 형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마을에 텔레비전을 메고 오면서부터 병태의 라디오 시대는 막을 내린다.
·연극과 파티는 궁합이 잘 맞는다.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에 파티가 등장하고 원시인은 축제를 통해 자연이나 우주 질서와 하나가 됐다.
장승욱 <술통>
술버릇 변천사 가운데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깨기나 찌개 냄비 뒤집기는 한 때 나의 버릇이기도 했다. 고약한 그 버릇은 영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도 참을 수 있고 상대방도 참을 수 있는, 양해될 수 있는 버릇으로 전이된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철이 든다. 누구를 몇 십 년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는 문구를 심심찮게 본다. 왜 술통은 자꾸 뒤로 굴러가는가? 시간은 불가역하고 생은 현제 진행형인데. 사회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느 술자리가 대부분 생존경쟁의 연장이거나 비즈니스의 다른 표현이다.
·무슨 책이 좋아 묻지 말고 나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봐라,
·박정희는 이승만을 미워했지만 이승만이 닦아놓은 극우 반공 체제 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그 역시 반공을 국시로 하고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그길을 충실히 달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알또와 떠도는 사원>-
알또는 모르면 선생께 여쭤보려고 화상전화를 걸지만 부재중이다. 이는 가장 어려운 문제와 난관은 스스로 풀고 돌파해야 한다는 성장소설의 규약이 강제한 것이다고 하지만 이성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이성의 한계 표시이기도 하다. 저자는 알도와 고오빈다가 서로 이타적으로 도우는 결말로 서구와 비서구(인도)가 서로 지혜를 합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알도를 불길ㅇ 속에 뛰어들도록 한 것은 어떤 조건이아 이익이 아닌, 의무에서 나온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명열(정언 명령)으로 그것이 알도가 효하네스 선생에게 배운 흠잡을 떼 없는 최고 서구 윤리다. 그런데 칸트의 지침이기도 했던 그 행동은 알도가 병원에서 깨어나 늙은 요기 바바에게 들었던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설법을 실천한 거나 마찬가지다.
도구적 이성을 반성하는 서구의 비판적 이성과 모든 생명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비서구(인도)(의 시폐는 작품 말미에 실린 알도의 변화 속에 다시 합일한다.나비 채집이 취미였던 알도는 애써 잡은 나비를 놓아주며 “왜 아까분터 나비들을 일부러 놓아줘요?” 묻는 고오빈다에게 “나비는 잡았을 때보다 날아갈 때가 예브거든.”이라 대답한다. 이런 태도가 도구적 이서을 반성하기 위해 요청된 서구 비판 이성과 통한다.
세속의 법을 다르되 세속의 법과 하느님의 법이 정면으로 상충할 때에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게 신앙인의 양심이다. 양심적 병역 대체 희망자들이 바라는 것은 공역의 거부나 편한 대체 복무 혜택이 아니라 어떤 살인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양심을 고수하는 것을 입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