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3 주일설교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합니다
마태복음 11:20~24
이사야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픈 노래가 나옵니다.
나는 나의 포도원을 위해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거기에 극상품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네.
그곳에 원두막도 세우고 포도즙 짜는 틀도 팠다네.
이제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더니 들포도가 맺혔다네.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울타리와 담을 제거해버리고 짓밟히며 먹히며
잡초와 가시풀이 무성하게 해서 야생동물이 놀게 해야겠구나.
이 포도원은 다름아닌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라네.
그들이 좋은 백성이 되기를 바랐더니 포악한 자들이 되었구나.
이 노래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데려와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외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도록 복을 주신 결과는 뜻밖에도 두 가지 불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고 친절을 베풀며 도와주면 고마워하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정말 이상합니다. 사랑을 조금 베풀어 줄 때는 고마워하고 말을 잘 듣다가 사랑을 많이 베풀어 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마움을 잊어버립니다. 오랜 기간 사랑을 베풀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지겨워합니다.
자녀들 가운데서도 종종 부모님 은혜를 그렇게 대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목숨 걸고 낳아서 밤잠 못 자고 기르며 먹이고 입힌 부모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연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를 읽다 보면 하나님이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을 계속 번복(飜覆)하십니다. 너희가 아무리 기도해도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겠다고 하시고는 이어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되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회복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참된 백성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진짜 마음일까요? 둘 다입니다. 이 두 가지 선언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말로 말귀를 알아먹는다고 하죠. 예수님도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마 11:15)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고라신 사람들과 벳새다 사람들과 가버나움 사람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20절에서 책망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오네이딕소(ὀνειδίζω)인데 책망하다, 꾸짖다, 비난하다, 욕하다 등의 뜻입니다. 여기서 비난하고 책망한 것은 화를 못 참아서 폭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이키게, 회개하게 하시려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21절은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데 이는 저주의 표현이 아니라 슬픔의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우아이(οὐαί)는 “오오 슬프다”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책망한다는 말, 오네이딕소(ὀνειδίζω)와 슬퍼한다는 말, 우아이(οὐαί)를 연결하면 예수님이 슬퍼하며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면 예수님이 슬퍼하십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예수님은 슬퍼하며 화를 내고 계실 것입니다. 인간인 제 눈으로 볼 때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데, 목사들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대신해서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망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1:4에서도 하나님은 “슬프다”라고 하셨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29:1에서도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하나님도 예수님도 당신의 백성을 보시면서 이렇게 슬퍼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2800년 전, 이사야 시대의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이용해서 좀 더 부자가 되고 좀 더 안락함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좀 더 신기한 기적을 구경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 병자와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열병도 단번에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회당장의 딸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중풍 병이나 열병은 고쳐주면서 나는 왜 감기도 안 고쳐주는지 아쉬워했습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나오는데 그 고을에서 권능을 많이 행하셨어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회개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베푸신 이적이 부족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복음을 충분히 듣고 믿지 않는 자의 책임이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지 못했거나 잘못된 설교를 들은 사람의 책임보다 제대로 된 말씀을 들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큽니다. 우리 주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많은 이적을 보이셨는데 그런 일을 두로나 시돈에서 보이셨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했을 것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베옷은 삼베옷이 아니라 거친 낙타털 옷입니다. 베옷은 히브리어로는 사크(שַׂק)이고(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갈 때 사용한 사용한 자루가 사크였다) 헬라어로는 사코스(σάκκος), 영어로는 색(sack)입니다. 이 말은 곡식 담는 자루에서 유래한 이 말은 우리 말로는 ‘마대 자루’ 정도 되겠죠. 그러니까 “베옷을 입고 회개한다”는 말은 “마대 자루 뒤집어쓰고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가장 슬플 때 하는 행동이 전적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모습인데 요나서 3장에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회개했습니다.
물론 어떤 모습으로 슬픔을 표현하느냐 하는 행동보다 예수님의 슬픈 마음에 공감하는 마음 상태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사라졌기에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조차 사라졌습니다. 성당에서 미사 중에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에 있어도 하고, 마음에 없더라도 시키니까 하고 관례상 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관례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하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더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은 적이 없으므로 책임이 적다는 뜻입니다. 두로와 시돈에게는 제공되지 않은 회개의 기회, 믿음의 기회를 고라신, 벧새다, 가버나움에는 충분히 제공하셨습니다.
심지어 23절에서는 이런 권능을 소돔에서 보이셨다면 소돔이 멸망하지 않고 오늘까지 있었으리라고 하십니다. 소돔 사람들이 멸망한 것은 예수님이 찾아가서 엄청난 이적을 보이며 믿을 기회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고라신, 뱃새다, 가버나움에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엄청난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요한보다 위대한 자라고 했습니다(11절). 그 말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들은 것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들은 신약 백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은 왜 이렇게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고 뻔뻔해졌을까요? 22절에 답이 나오는데 “심판 날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두려움이 없는 이유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안전하고 풍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넘었고 놀아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병을 고치는 의술이 있고 젊은 여성이 밤길을 나다녀도 안전합니다. 카페에 스마트폰을 놓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그대로 있고 도서관에 노트북을 놓고 나가서 식사하고 와도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다 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천당이기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믿음 없는 사람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재림을 늘 생각하며 신자 답게 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뭐라고 말할까?
그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회개시켜 새 사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작은 심판, 임시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망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십니다. 모든 어려움이나 짊병이 다 죄 때문에 받는 징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혹은 아플 때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회개한다면 그만큼 우리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 백성이 모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에는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부족한 평신도들이 설교했다면 오늘날은 정식으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이 넘쳐납니다. 또 신학박사가 넘쳐납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설교학 박사의 설교도 듣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에 살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모르고 가난함을 모릅니다. 배부르게 식사하고 카페에 가면 카페가 공원 수준입니다. 카페에는 빵 연구소가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그 빵을 안 먹을 수가 없죠. 1㎞만 되면 당연히 차를 타고 가지 걸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많이 요구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더 하시렵니까? 무엇을 더 드리시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볼 때 슬퍼하며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칭찬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 바로 믿으시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