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심령을 치료하시는 주님 / 삼하 12:1-6, 눅 7:36-50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 눅 7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시몬이라는 이 바리새인이 왜 예수님을 초청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가 에수님을 초청하면서 귀한 손님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를 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예수님을 존경한 것 같지는 않다. 하물며 그가 예수님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듣고자 청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면서 그의 신분을 확인하려 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시몬에게는 어떤 사모하는 마음이나 갈망하는 마음이 없이 예수님을 그의 집에 모셨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만찬의 자리에 뜻하지 아니한 불청객이 뛰어들어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불청객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었다.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의 집에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여인이 이 만찬 자리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며 머리털을 풀어 그 발을 닦고 향유를 부었다. 이런 일은 정상적인 여자라면 고저히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광경을 바라본 집주인인 시몬은 말할 것도 없도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남자들만 둘러앉은 만찬 자리에 이 여인의 행동은 해괴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셨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심정을 이해하신 것이다. 이 여인의 눈물의 의미를 아신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던 이 여인의 고뇌와 아픔을 예수님은 느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동시에 이 여인의 그 모든 행동에서 이 여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과 사랑을 학인해 주셨고, 죄 사유함과 평안을 이 여인에게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죄인인 여자에게 관심을 기율여 보자. 이 여인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소문이 났다. 이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문이 날 수 있는 죄는 주로 간음죄라고 볼 수 있다면, 이 여인은 창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여자였을 것이다. 이 여인이 이와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부모를 잘못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도 가끔 이런 일이 있긴한데 부모가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사생아로 태어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생아로 태어났다면 커가면서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자기 앞에 거세게 닥쳐오는 이 운명이 물결을 거슬러 살아보려고 발버둥쳐 보았지만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그 운명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창녀로 전락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회의 시궁창에서 온갖 더러움을 다 겪으면서, 이 여인은 자기의 비극적인 운명을 저주하면서 몇 번인가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을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이끈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여인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저주하며, 이 세상을 찬바람이 부는 겨울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은 한때 결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쫓겨났는지도 모른다. 이 여인은 한때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여인이 맛보아야 하는 것은 배신과 모멸의 쓰라린 맛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여인의 심령은 상처받을대로 상처받으면서 혹한의 얼어붙은 땅처럼 공꽁 얼어붙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누구도 그 얼어붙은 심령을 녹여줄 수 없었으며, 그의 가슴에 봄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한 여자의 일생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이런 운명을 지어주셨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로 시도가 되었다.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인과응보 사상이 가장 기초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그것은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지를 못한다. 요 9장에서는 다른 대답이 주어졌다. 나면서 맹인이 된 사람을 두고, 그것이 부모이 죄 때문인지 자기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둘 다 아니고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고난은 신비에 속한 것이다. 그 원인을 분명히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원이이 어디서 왔든지 중요한 것은 비극적인 고난의 현실이다. 오늘 이 사회 속에 고난이 있고, 이 여인이 걸어온 것과 같은 비극적인 인생이 있으며, 얼어붙은 심령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따져 누구를 원망하고 저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 속히 치료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받은 심령을 스스로 핥으면서 죽어갈 것이 아니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심령의 치료자로 오셨다. 마 9: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여인은 아마도 이 집으로 예수님을 찾아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멀리서 몇 번 보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비웃음과 조롱섞인 눈으로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나사렛 예수에게 끌렸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따뜻한 햇빛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그 햇빛을 그의 영혼 속에 받아들인 것이다.
오래된 영화인데 ‘사랑의 요술사’란 영화가 있다.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다가 풀려나 이스라엘로 귀환된 마술사 한스 뮐러는 심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 다닌다. 그는 경찰만 보면 모두 나치로 생각하고 도망을 한다. 모두가 그를 도우려고 하지만 믿지를 않는 것이다. 한번은 그가 머물고 있는 마을에 경찰이 찾아오자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총을 들고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을 한다. 그때 그를 가까이서 돌보아주던 아가씨가 그를 설득한다. ‘당신은 살인자가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를 가두고 있습니다.’ 그러자 한스는 문을 열고 나오면서 외친다. ‘나는 병들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그 여인이 달려와 그를 감싸 안아준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가두고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그가 쓴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인간을 끌어올려서 광대한 전망을 주는데도 인간은 물러 앉아서 실망한다. 신은 인간을 약속의 상대로 삼는데도 인간은 그 기대를 믿으려고 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죄다.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단념하는 선이, 그의 과오가 아니라 그의 무위가 그를 고소한다. 그는 소망을 갖지 아니했다고 고소한다. 왜냐하면 자기 포기의 죄는 항상 소망 상실과 약한 믿음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전하는 복음은, 꽁꽁 얼어붙게 하던 겨울은 지나고 모든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봄이 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방안에 문을 꼭꼭 걸어닫고 있을 것이 아니라, 봄의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동산에 올라가 얼어붙은 내 마음 속에 그 햇빛을 받아들이면 그 심령이 되살아나며,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새싹이 돋아나듯이 내 속에서도 희망의 새싹이 움트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버려놓았다고 원망하는 생각을 버리라.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치료하시려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운명을 고난으로 몰아 넣으신 분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잘못된 강박 관념과 잘못된 자기 판단을 버리고, 이제 여러분을 치료하려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라. 여러분의 삶은 분명 예수님을 만난 이 죄인이었던 여인이 경험한 뜨거운 눈물과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 눈물을 쏟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을 때, 그는 바로 자기가 사로잡혔던 강박관념을 쏟아버리며, 아무에게도 줄 수 없었던 사랑을 예수님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이 여인이 진정으로 자기를 비운 순간이다. 이 여인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사랑의 마음을 되찾은 순간이다.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던 이 여인이 이제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순간이다. 예수님은 그런 이 여인을 보시고 그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이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심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시작하게 하셨다. 이 여인이 이제까지 간직하였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 비웠을 때, 예수님은 그 심령 속에 사랑과 믿음과 평안을 채워 주신 것이다. 이 여인의 상처받앗던 심령은 이제 치료가 된 것이다.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이 이제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녹아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움트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의 상처받은 심령을 치료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려고 헤매고 계신 것이다. 바림받은 자를 구원하여 사랑받는 자녀되게 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아버지 집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다만 탕자의 마음이 닫혀 있었을 뿐이다. 그가 돼지 우리 속에서 비로소 그 마음 문을 열었다. 그전까지는 그의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게 되어서 비로소 마음 속에 있던 모든 자존심을 비우고 아버지의 집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영접되었고, 다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자.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을 비우자. 우리 심령을 좀먹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자. 우리의 상처받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빛나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올려 그의 친구로, 그의 자녀로, 그의 상속자로 삼으시려고 하신다. 그가 치료하시지 못할 심령은 없다. 누구든지 자기를 비우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그를 새롭게 지어 주신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상처받은 심령, 찢긴 심령, 상한 심령들이 치료받고 평안함 속에서 주님 만을 찬양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