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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그동안 발표한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조금 보탰습니다.
노동자국가와 노동자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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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노동자국가의 본질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 역할을 하는 실질적 민주국가라는 것이다. 그 대립 개념은 국가권력을 직접⋅간접으로 소수 자본가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형식적 민주국가 즉 자본독재국가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국가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소련과 동독을 비롯한 여러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이 노동자-농민의 국가, 약칭해서 노동자국가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오늘날 노동자국가를 화두로 내놓는 것은 노동자정치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인 듯하다. 노동자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면 대중적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나름의 전략적 계산 때문일 수 있다. 노동자정치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략적 사유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셈법에 따르면 노동자⋅노동운동⋅노동은 물론 그 대척점에 있는 자본⋅자본가⋅자본주의라는 말도 신중하게 가려서 써야 할 것이다. 사실 지난 30여년 동안 노동 개념을 기피하는 문화가 범사회적으로 고착되어 왔다. 그 결과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사장님’ 칭호를 얻게 되었고, 노동자들 자신도 먹고살만할수록 스스로를 노동자로 의식하기 어려워졌으며, 노동자 자리를 ‘시민’ 혹은 ‘다중’이 잠식해왔다. 이러한 반-노동중심 환경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즉 전략적 재고가 필요하다. 전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정치운동에서 물러서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노동⋅노동자계급⋅노동자국가와 그 대척점에 있는 자본⋅자본가계급⋅자본독재국가라는 핵심 개념, 그리고 양자의 근본적인 적대적 모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1. 2. 노동자국가 개념은 국가를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 보는 맑스주의 국가관을 답습하는 것이다. 이 답습을 향해, 노동자만의 국가가 아니니 노동자국가라는 구호를 써서는 안된다는 선동부터, 계급환원주의라는 포스트맑스주의적 비난, 국가의 공공성을 내세워 계급지배 수단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반쯤 가려버리는 유사 헤겔주의 논리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기된다. 그러나 맑스⋅엥겔스⋅레닌의 국가론은 아직 노동자들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구성하지 않는 단계에서도 자본주의의 본질적 발전 경향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 노동과 자본의 근본 모순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명시해준 이론적 무기다. 이 무기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 내지 양극화가 극심해질수록 그만큼 더 유효하다. 양극화는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격화되어 왔다.
그런데도 노동자국가 개념을 기피하는 좀 더 일반적인 이유는 현실사회주의가 패배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망한 모델’이라는 낙인은 사회주의운동의 성장을 막는 부적으로 그동안 잘 쓰였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인류의 당면 문제들을 해결할 최종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국주의적 자본독재하에서 핵재앙을 포함한 환경재앙의 밀물은 인류 모두의 턱밑까지 차올라왔고, 제국주의전쟁은 일상화되었으며, 생산력 발전에 따른 노동력절약⋅자동화⋅무인화⋅대량해고는 필연적 자연법칙으로서 노동자민중을 절대빈곤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안체제 건설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박해진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체제 건설에 동의하는 사람들⋅정파들⋅조직들 사이에서도 추구할 만한 모델에 대한 합의가 어렵다는 사정 때문에, 아직까지 노동자국가를 전략적 공동목표로서 내세우고 힘을 모으려는 노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가 건설해야 할 노동자국가는 과거의 것이든 현존하는 것이든 어느 단일 모델을 그대로 이식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독재 극복을 목표로 현재의 실천조건들에 근거하여, 기존 모델들을 분석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세부내용들을 창조적으로 구체화해가야 할 열린 모델이다. 따라서 다양한 기존 모델들은 분석과 평가를 통해 새로운 모델 구성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상이한 입장들이 상호 비판과 검증 과정을 거치며 공동작업의 공간을 확보해갈 수 있다. 물론 이때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본 전제는 있다. 그것은 노동자국가가 자본독재의 효율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개량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대안체제 건설을 위해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는 문제를 우회하지 말고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1. 3.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체제가 눈앞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범인류적 재앙들은 개별 지배자들의 일시적 타락이나 악의 혹은 오류 따위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결과물이다. 자본권력 스스로 자본을 무한히 증식하고 생산의 성과를 독식하려는 본능을 떨쳐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자본이 증식과 독식의 원리를 버리고 인류의 공존과 공영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본독재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고 또 해결할 수도 없는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국을 극복할 주체는 노동자민중이 될 수밖에 없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로 인한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이로 인해 노동자민중이 직접 몸속에 쌓아온 고통⋅비하⋅소외의 경험이 변혁의 기본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국가는 이 에너지 없이 상상할 수 없다. 노동자국가는 인류가 파국을 막고 공존과 공영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는 점에서 계급적 의의를 넘어서는 정당성과 헤게모니적 확장성을 지닌다.
베트남의 경우처럼 노동자국가 대신 사회주의를 표방할 수도 있다.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은 사회주의 개념에 내장된 노동자계급해방운동⋅인간해방운동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통해 착취를 근절하고 평등사회로 나아간다는 사회주의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앞에 붙는 온갖 단서들이 운동의 방향을 흐려놓기도 한다. 예컨대 맑스 시대에도 봉건적 사회주의, 기독교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진정한 사회주의 등등이 사회주의 개념을 혼탁하게 만들었고, 20세기에는 국가사회주의(나치)까지 등장했다. 오늘날에도 시장사회주의나 민주사회주의가 어떻게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얼마나 노동자민중을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고 있는지 논란이 분분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는 목표를 좀 더 명확히 드러내는 ‘노동자국가’만큼의 전략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노동자국가는 역사적 위치상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동일하다. 자본독재세력의 저항을 제압하고 계급 없는 사회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 그 주요 과제다. 노동자국가는 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을 사회의 주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근본민주주의를 구현하며, 궁극적으로 계급과 함께 계급지배 수단으로서의 국가가 필요 없어지는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점에서 독재보다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대중적 공감대를 넓히는 데에 더 효과적일 것이다. 또 노동자국가는 이미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되었다는 전제 하에 인민을 앞세울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를 상대로 인류사적 해방전쟁을 벌여야 하는 현단계에 적합한 전략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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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자본독재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에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주요 무기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국가는 민주주의를 말뜻 그대로 받아들여,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19세기말에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들을 향해 이미 사회의 다수를 이루어 당대의 미비한 선거제도만으로도 스스로 무엇이든 할 능력이 있는데도, 지주와 부르주아지와 소매상과 이들을 쫓아다니는 법률가와 기자들에게 발언권과 정치권력을 맡겨놓음으로써, 거대 자유당의 꼬리 노릇을 하며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동자민중이 한국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는 사실과, 노동자민중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존재감조차 없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현단계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이라고 인식할 필요 있다. 이 모순의 해결책은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의 양대분파 가운데 차악을 골라 들러리서다 눈꼽만한 개량의 혜택과 무제한적 실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국가권력의 주인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이를 목표 삼아 독자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그 선결조건이다.
물론 민주주의 개념도 사회주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온갖 이데올로기들과 뒤섞여 있어 어지러운 상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국가가 없고, 군사독재의 최종판인 유신독재의 별칭이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말뜻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절차나 형식의 문제 등으로 권력 문제의 본질을 흐릴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인인 국가가 바로 민주주의국가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본보기는 파리코뮌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반혁명 세력의 무력에 의해 단명에 그쳤지만, 파리코뮌은 노동자국가가 지향할 민주주의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 핵심은 사회의 종복인 국가기구들이 사회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없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한 데에 있다. 보통선거에 의한 모든 공직자의 선출과 소환, 입법부와 행정부의 통합, 공직자의 특권 배제, 권력의 주요 원천인 정보 공개, 무장한 민중으로 상비군 대체 등등이 그것이다. 구체적 조치들은 정치적 경험의 축적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보완될 수 있지만, 지배자의 교체가 아니라 지배관계의 해체를 실현코자 한 파리코뮌의 근본민주주의 정신은 노동자국가의 정치적 기본원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레닌은 민주공화제를 자본주의 최선의 정치적 외피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구현될 경우 부르주아지에게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준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레닌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할 수 있고, 승리 후에도 사회주의를 견고하게 하여 국가 사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도 파리코뮌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가 국가의 행정 기능을 단순화함으로써, 누구나 일시적 관료가 될 수 있어 아무도 관료가 될 수 없게 하는 조건이 마련되며, 이러한 조치를 통해 국가 사멸의 길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레닌도 근본민주주의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이 근본민주주의의 유산을 오늘의 조건에 맞도록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2. 2. 그러나 맑스⋅엥겔스⋅레닌이 근본민주주의와 함께 무정부주의까지 옹호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자본독재국가만 아니라 모든 국가 자체를 악마화하는 운동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노동자국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자본독재세력을 제압하여, 착취와 불평등의 원천인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경제적 평등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경제적 평등 없이는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국가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는 과정은 자본독재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지난한 전쟁과정이다. 자본독재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바꾸는 혁명과정도 당연히 전쟁이다.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자본독재세력을 즉시 일소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민중의 의식적 변화와 조직적 성장, 투쟁 경험과 성과 등을 집약하는 것이 노동자국가다. 또한 노동자국가는 그 다음 단계의 전쟁에서 자본독재를 제압하여 착취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전략무기다.
노동자민중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착취체제의 제거와 더불어 실현될 풍요로운 삶 자체다. 이는 경제적 평등만 아니라 합당한 생산력 발전을 통해 가능해질 것이다. 자본독재하에서 대량해고의 주요 원인이 될 기술혁신들은 필요노동시간의 축소를 통해 노동자민중의 자유시간을 확대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다. 이윤증식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사용가치, 파괴된 환경의 복원과 보존 등에 적합한지 여부가 생산력 발전의 기준이 된다. 무엇보다 각 분야별 단계별 생산과 분배 과정상의 의사결정 참여는 관련 당사자들 모두의 의무이자 권리가 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과잉생산, 이에 따른 위기, 경제영토 확장을 위한 갈등과 전쟁 등을 막는 것도 사회적 의사결정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국유화 과정 및 그 운영의 세부 방법들을 현단계에서 미리 확정할 수 없으며, 다양한 성공⋅실패 사례들을 참조하고 생산력의 발전 수준을 바탕으로 치밀한 연구와 계획을 통해 결정해 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전체의 실질적 평등과 풍요를 구현해가기 위한 현실적 방법을 마련하는 것, 그리하여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질적으로 도약할 물적 발판을 구축하는 것이 노동자국가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임은 변함없다.
이에 대해 흔히 인간의 이기적 본성, 경쟁력 내지 생산력 발전 약화, 역사적 실패 사례들 등을 근거로 계획경제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성을 들먹이곤 한다. 그러나 실패 사례는 참조사안이지 노동자국가가 답습할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의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성공으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자본독재가 경쟁력의 이름으로 노동자민중을 서열구조에 묶어두고 각자도생으로 내몰아온 것과 달리, 공존⋅공유⋅공영에 적합한 생산⋅소비 문화를 통해 낭비와 파괴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사회 구성원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과제다. 이 경우 자본독재 속에서 체화한 이기적 본성은 노동자국가 건설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에 근거해, 또 평등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보상체계를 통해 이타주의와 대립하지 않는 형태로 구현될 수 있으며, 이러한 문화에 적합한 새로운 생산력 발전도 필요한 만큼 가능해질 것이다.
2. 3. 오늘날 대다수의 노동자민중은 노동자국가를 꿈속에서도 꿈꾸기 어렵다. 흔히 자본독재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뻗어가고 있으며 이윤추구가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적 원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환상이 형이상학적 제일원리로 굳어진 것은, 국가권력과 결탁한 자본권력이 직접적 생산자들을 상대로 몇백년간 벌인 피비린내 나는 잔혹사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것은 역사적 산물이므로 역사 속에서 사멸할 수 있다. 이러한 환상과 그 부속 논리들을 깨지 않고는 노동자국가 건설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혹 유리한 역학관계로 인해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더라도 쉽게 반혁명의 쓰나미를 겪어야 할 것이다. 자본의 작동 원리와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심화하고 널리 공유하는 것은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필수적이다.
자본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과학적 인식의 확산은 자본독재세력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노동자민중의 몸속에 새겨넣는 총체적 자본이데올로기의 극복과정이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과학적 인식의 생산과 공유를 위한 체계적 조직적 노력은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의 핵심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이데올로기가 총체적으로 유포되고 주입되는 데에 맞서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개인 차원의 연구와 소규모 공부모임들부터, 노동조합⋅노동자정치운동조직⋅노동자당을 통한 공식적 비공식적 교육⋅연구를 맹렬히 펼치도록 서로를 고무하고 자극할 필요 있다. 활용 매체의 형태도 가릴 필요 없다. 나아가 공식적 교육연구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재들을 발굴⋅양성하고 대안정책⋅사상을 개발⋅전파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자본권력과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노동현장⋅투쟁현장이야말로 최고의 연구소이자 학교다. 눈앞에서 매일 벌어지는 정치코미디도 훌륭한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전쟁의 주요 성과들은 노동자국가 건설 이후에도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해방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자각하고 기억하며 자부심을 갖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전진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자본이데올로기는 인식 영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감각과 욕구를 장악한다. 자본에 잠식된 감각과 욕구를 바꾸는 일은 인식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노동자민중 다수가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욕구를 갖지 않고, 밀려오는 재앙을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한다면 노동자국가 건설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지배적인 감각과 욕구, 서열구조 속의 상승과 더 나은 상품을 향한 욕구는 각자의 크고작은 성공들로 채워진 일상적 질서가 흔들리지 않고는 바뀌기 어렵다. 일상 질서를 흔드는 데에는 과학적 인식 이상으로 예술작품들이 효과적이다. 자본독재의 추악함에 대한 혐오감과 해방투쟁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전율, 피지배 노동자민중의 한없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분노를 일깨우는 예술작품들은 자본독재에 맞선 투쟁의 욕구를 북돋을 뿐 아니라, 노동자국가에서도 노동자민중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의미를 찾고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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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오늘날의 객관적 조건은 어디서 당장 파국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 영국과 EU, 심지어 중국까지 끊임없이 위기 경보음으로 소란하다. 달러패권 중심의 국제 독점금융자본의 수탈체제는 반복해서 삐걱대고 있다. 군사력과 함께 이 패권을 지탱해온 생산력이 불균등발전법칙 앞에서 초조하게 떨고 있다. 통화⋅금융정책이나 관세전쟁 혹은 리쇼어링 수준의 대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제국주의 말기 증상이 미국을 뒤덮고 있는 듯하다. 저임금을 향한 자본의 본능을 고임금에 묶여 있는 정치논리로 얼마나 틀어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계화로의 회귀는 미국 내부의 양극화를 더욱 키울 수밖에 없고, 달러 살포로 문제를 덮기에는 신용파괴의 위험이 너무 크다. 그나마 잘 나간다는 미국 자본이 풀 수 없는 딜레마로 휘청거릴 때, 이미 진행 중인 전쟁들의 불길이 어디로 날아갈지, 한반도는 아닐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미국 경기가 기침하면 한국 경제가 통째로 몸살을 앓는 것이 섭리 아닌가.
그러나 객관적 상황이 아무리 위기와 혁명의 시대를 외치고 있어도, 주체적 조건이 너무 열악하면 혁명은 불붙을 수 없다. 주체적 조건의 핵심은 자본권력과의 투쟁 경험 및 과학적 인식을 통해 대안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단결하는 노동자민중의 조직적 성장이다. 지난 수십년 간 한국자본의 빠른 성장과정에서, 특히 외국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 착취를 통한 초과이윤에도 힘입어, 자본권력은 국가권력의 주인으로 자리잡았고, 동시에 노동자계급 상층부를 매수할 수 있었다. 노동운동은 자본독재세력의 분할통치 전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 내부의 서열구조가 고착되면서 계급적 단결보다 각자도생의 문화가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조건을 타개하고 과학적 인식과 변혁의지를 공유하려는 운동은 주체적 조건의 질적 변화를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잉여가치 착취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노동자민중은 분열과 각자도생의 지옥 바깥에서 함께 만나 힘을 모을 잠재력을 갖고 있다. 물론 다양한 업종별 이해관계와 노동조건의 차이로 인해, 노동자민중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계급동맹, 즉 통일전선에 준하는 전략이 필요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러시아혁명기나 중국혁명기와 달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노동자계급과 자본독재의 적대적 모순과 함께,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의 파국적 운명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계급적 단결을 강화⋅확대하는 것, 막대한 계급적 단결의 잠재력을 현실화하고 그 자력장 속으로 다수의 노동자민중을 끌어들이는 것, 이로써 주체적 조건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운동의 당면과제다.
3. 2. 이러한 일은 노동자민중 누구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해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적극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과학적 인식의 생산과 전파에 작심하고 적극 나서는 사람들 없이는 주체적 조건 형성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없다. 유서깊은 용어로 전위가 필요한 것이다. 전위의 자격증을 누가 따로 발급할 수는 없지만, 운동의 성장을 위해 상호검증과 헌신이라는 규율에 자발적으로 따름으로써 조직과 대중의 신뢰를 쌓는 것이 전위가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위의 과제는 레닌이 말한 ‘인민의 호민관’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위로 만들어 가면서 전위의 대중화, 혹은 대중의 전위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전위의 대중화는 자본독재에 맞설 대안조직인 전위당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구상에서 미리부터 당독재와 관료주의의 냄새를 맡고, 고개를 돌려 탈중심의 원리를 찾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노동자국가의 정치원리가 근본민주주의임을 상기할 필요 있다. 전위는 노동자민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가 아니라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전쟁에서 자발적으로 앞장서 몸을 던지는 전사다. 의식성과 자발성의 통일을 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전위 자신도 파리코뮌의 기본정신을 일상 속에서 체화하여,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으며 지젝이 말하는 ‘사라지는 매개자’ 역할을 맡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탈중심주의와 반대 방향에서 전위의 대중화가 개량주의⋅수정주의로 귀결될 위험에 대해 우려할 수도 있다. 19세기말 사회주의자법을 통한 탄압을 뚫고 급성장한 독일 사민당의 우경화에서 그러한 위험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때 엥겔스가 자부심을 느끼며 목격한 당세의 확장에서만 우경화의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노동자계급 상층부에 대한 매수 효과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양적 확장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주체적 조건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적 확장이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운동의 변질을 막을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우 헤게모니 개념이 유용하다. 즉 설득력 있는 판단력과 헌신성을 통해 다수의 자발적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적극적 변혁주체들의 헤게모니 확장 자체가 이미 해방전쟁의 양상을 규정하는 주요 변수이기도 하다. 아무튼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서는 전위당의 성장이 필수적이다. 노동자민중의 에너지를 최대한 모아낼 뿐 아니라, 해방전쟁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가며 그 에너지의 효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전위당의 역할이다.
3. 3.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단결을 위해서는 전위조직들의 단결도 의미 있다. 지향 모델이나 역사에 대한 인식 차이, 운동 경험 상의 갈등 등으로 전위조직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고집한다면 계급적 단결을 호소해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이에 반해 노동자국가 건설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상호비판과 검증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더 나은 해결책을 함께 만들고 실천하는 경험을 축적해간다면, 노동자민중도 자본독재의 양대 분파를 대체할 대안세력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고 동참의 전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단결이 전위당의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또한 운동의 성장 산물이자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의회주의에 매몰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당들의 성과가 미미했다는 사실이 전위당 중심의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에 대한 불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의 체제변혁의지 포기, 이를 뒷받침해온 경제성장이라는 물적 토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물적 토대가 제국주의적 국제자본 차원에서 급변하고 있으며, 체제변혁이 절박한 당면과제로 떠올랐다는 점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간과할 수도 없지만, 그것에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이때 의회 참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떤 목적의식으로 참여하여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의회만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다양한 부문운동조직 혹은 제도권 내부의 어느 위치에서든 자본독재 종식을 위해 전위가 효과적으로 기여할 만한 일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때의 해방전사가 자본에 매수되어 운동을 포기하고 그러한 역할을 망각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모든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는 식의 교조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돌아보면 좋을 것이다. 그는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회에 참여하여 개량주의적 노동당이 반동세력을 물리치고, 노동당 정권의 귀결을 노동자 대중들이 실제로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자계급 다수의 견해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혁명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변화는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지 선전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독재의 주요 분파인 민주당을 상대로도 이러한 전략적 판단을 활용할 수 있어 보인다. 이때 민주당 정책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차기 민주당 정권의 귀결을 예견하고 그 한계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대중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경험에 앞서 ‘노동자계급 다수의 견해에 변화’를 앞당겨 일으킬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적 정치세력의 성장 필요성과 가능성을 노동자민중 사이에서 널리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전망 속에 노동자국가 건설의 지속적인 준비에 속도를 올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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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국제주의 문제는 변혁모델과 직결되어 변혁운동 내부에서도, 특히 세부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의견 일치와 단결의 발판을 넓히기보다 논쟁과 분열의 지뢰밭이 되기 쉽다. 이 자리에서는 그래도 혹시 공감대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를 원론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복합적인 현상들에 대한 논의에서는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사유, 즉 변증법적 사유를 가동하여, 현상의 다면성⋅역동을 강조하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주체적 판단을 고무하고자 한다.
노동자국제주의에 입각한 세계 노동자계급의 연대는 노동자국가 건설에서 필수적이지만, 선결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노동자국제주의의 성장 없이는 노동자국가 건설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국가 건설은 제국주의적 국제독점자본세력과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일국 차원에서 한발 앞질러 시작하더라도 국제주의적 연대, 다른 노동자국가들 혹은 반제국주의적 노동자세력들과의 연대 없이 지켜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자국가 건설은 “낡은 사회의 힘과 전통에 맞선 집요한 투쟁으로서, 유혈 투쟁과 무혈 투쟁, 폭력 투쟁과 평화 투쟁, 군사 투쟁과 경제 투쟁, 교육 투쟁과 행정 투쟁”이다. 이 투쟁은 일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전쟁이며, 여기서 패하면 과거의 온갖 야만이 다시 창궐하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는다면, 국내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도 인도주의 이데올로기 언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연대 노력이 여차하면 일자리 경쟁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으로 받아들여지고, 맹목적 민족주의나 외국인 혐오 정서의 타겟이 될 수도 있다.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에 맞서는 해방전쟁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노동자국가 건설에 적극 나설 때,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과의 동지적 연대의 체험을 축적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당면과제의 일부다. 그 구체적 경로들을 다각도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자본의 상당한 부분이 유리한 조건, 특히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통해 초과이윤을 뽑고자 해외로 진출했고, 현지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제국주의적인 자세를 굳혀 왔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미제국주의세력에 맞선 투쟁에 머물 수 없고, 한국 자본의 제국주의적 발전경향을 향해서도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현지 노동자들과의 연대 공간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4. 2. 노동자국제주의는 제국주의와 대립하는 노동해방⋅인간해방의 이념이지만,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약소국 민족주의도 제국주의와 대립한다. 약소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세력이 부추기고 악용하는 지배민족의 배타적 애국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국제주의와 약소국 민족주의는 외형상 대립하는 듯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점에서 결합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은 국제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주의 일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판했다. 또 그는 약소민족들의 민족자결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즉 약소민족들의 자율적 선택을 통하지 않고 강제로 강대국에 병합하는 것은 국제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대러시아주의로 인해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어온 주변 약소민족들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국제주의 정신에 부합된다고 진심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무엇보다 약소국들의 민족해방이 제국주의국가들에 타격을 줌으로써 세계 사회주의혁명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다. 이에 따라 레닌은 제국주의국가 내부의 프롤레타리아혁명과 종속국들의 민족해방혁명을 동시에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에서의 노동자국가 건설은 레닌이 제국주의국가냐 종속국가냐에 따라 나누어 설정한 계급해방혁명과 민족해방혁명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다. 그만큼 지난한 과제지만, 세계혁명의 새로운 출발점 혹은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할수록 국제주의적 연대와 계급적 단결이 필수적이며, 나아가 이중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사회적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국가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전면에 내세울 경우 여타의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 문제는 한없이 뒤로 미뤄두어야 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노동자국가 건설에 필요한 철학은 고정불변의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허물고, 만물을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유물변증법이다. 이 불문율을 깨고 한 가지 불변의 원리를 내세우자면,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자는 것이다. 이 원리가 없다면, 도대체 왜 착취와 억압과 차별에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할지 말하기 어렵다. 평등의 원리는 계급차별과 민족차별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불평등과도 대립한다. 다만 효율적인 불평등 문제 해결의 전략에 근거해, 즉 실질적인 해결을 위해, 구체적 조건 속에서 문제의 선후와 경중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오늘의 제국주의적 자본독재가 몰고오는 거대재앙 앞에서, 이를 극복해야 할 절박한 조건에 비추어, 어떤 불평등 문제든 해방전쟁의 특정 국면에 새로이 불을 붙일 수 있음을 의식할 필요 있다. 이때의 불씨를 소홀히 하지 않고 살려내는 것이야말로 ‘인민의 호민관’이 떠맡은 과제이기도 하다. 노동자국제주의를 끌고가는 근본 동력 역시 전략적 가치를 능가하는 평등 원리다.
4. 3. 현실정치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국제주의가 제대로 실현된 적이 있는지 회의를 품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국제주의 정신에 가장 충실해야 할 소련과 중국은 한때 핵전쟁 직전 단계에까지 분쟁을 키웠었다.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도 전쟁의 역사가 가로지르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조선이 가까워지면서 중국이 조선에 음으로 양으로 압박을 가하는 듯하다. 국제주의보다는 국가이기주의가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서도 훨씬 강력하게 작동한다고 냉소적으로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논리를 좀 더 밀고가면 예컨대 소련이 약소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것도 결국 소련의 영향권을 넓히려는 국가이기주의의 산물 아니냐는 결론까지 나온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서 복합적 원인들로 인해 불거지는 분쟁을 근거로 노동자국제주의의 현실성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편견의 산물이다. 노동자국제주의는 국가이기주의와 얽히면서 실현될 수도 있다. 국제주의의 순수한 발현물을 추출해내려는 것은 국제주의의 현실적 불가능성을 입증하려는 욕구에 기인하기 쉽다. 노동자국제주의는 그 실현 수준에 대한 평가대상이기 이전에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에 맞서기 위한 이념적 지표로 운동의 성격을 규정한다.
비교적 순수하게 노동자국제주의가 구현된 사례들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스페인 내전처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보불전쟁 기간의 독일 노동자들은 투옥과 추방 등의 처벌을 무릅쓰고 유럽노동자들의 국제주의적 단결을 외쳤다. 노르웨이가 국민투표를 통해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를 결정했을 때, 스웨덴의 반동세력들이 무력으로 노르웨이를 짓밟고자 했지만 스웨덴 노동자들의 반대로 좌절했다. 이 역시 국가주의를 무색케한 노동자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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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오늘날 미국 단일 패권주의에 도전하는 중국 중심의 다극화와 일대일로의 본질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 문제는 중국 사회의 성격 문제와도 맞물려 간단히 판정하기 어렵다. 입장 차이는 중국이 시장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적으로 급성장했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더라도 극에서 극으로 벌어진다. 극심한 양극화, 과잉생산, 독점 금융자본의 비대화 등은 명백히 자본주의적 성장의 결과물이다. 이와 관련해 양극화는 극복되어가고 있으며, 과잉생산 설비, 독점금융자본, 첨단생산력은 국가의 계획과 관리 하에 공동부유와 사회주의 발전의 밑거름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옹호할 수 있다. 이때 일대일로는 당연히 호혜와 평등의 정신에 입각한 노동자국제주의의 현대적 실현과정이다. 다극화는 미제국주의에 맞서 평화롭고 호혜적인 국제관계를 정착시키는 중대한 전환이다.
이와 반대로 중국 사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면, 일대일로 역시 저개발국들을 상대로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권을 확보해가는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다극화는 생산력 불균등발전에 따른 경제영토 재편과정이며, 구 지배세력인 미⋅일⋅EU와 이미 벌이고 있는 경제전쟁에 머물지 않고 언제라도 제국주의전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과정이기도 하다. 비폭력과 호혜는 직접적 내정간섭이나 폭력적 정권교체 혹은 전쟁과 방식은 달라도 본질은 동일하다. 즉 장기적인 초과이윤 수탈의 밑밥이다.
노동자국가가 국가권력을 통해 자본독재세력을 제압한다는 구상에 비춰보면 중국의 미래는 예의주시해야 할 문제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국가권력이 자본주의적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내전 수준의 갈등을 감수하면서라도 제압해갈 수 있을지, 아니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권력까지 이미 기득권세력의 일부로 포섭되어 그러한 역동을 만드는 데에 실패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중국이 이미 일정한 수준에 이른 생산력을 바탕으로 공동부유와 평등사회를 향해 혁명적으로 전진해 간다면, 노동자국가의 주요 연대세력으로서도 의미 있을 것이다. 내부 변화에 실패하고, 중국 사회의 성격을 자본주의라고 확정짓는 입장이 경계하는 제국주의적 본질을 확연히 드러내거나, 미국과의 경제전쟁 혹은 있을 수 있는 파괴적 살상전에서 패배한다면, 노동자국가 건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 실체가 양 극단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귀착되지 않고 진동해갈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중국은 이런저런 유보조건을 달더라도 노동자국가의 연대세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노동자국가 건설은 중국의 사회주의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5. 2. 노동자국가는 현재의 운동상황과 지배관계를 앞지르는 개념이다. 이 점에서 관념론적 외양을 띤다. 그러나 기존 국가가 현실적 토대인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국 위기와 노동자민중의 압도적 비중에 부합하지 못하는 데에 반해, 노동자국가는 현실적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세워진 상부구조다. 이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이 상부구조는 토대에 대한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인 반영물에 머물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체제라는 토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토대의 변화를 유발한다. 노동자국가가 위로부터의 관념론적 구상이냐 유물론적 이론이냐가 아니라, 지금 필요한 문제의식이냐가 핵심사안이다.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적극적으로 널리 공유하자.
202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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