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의 모든 게시물은 복사ㆍ절취(캡쳐 포함)ㆍ이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게시물의 내용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ㆍ보완ㆍ변경ㆍ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씨족 이야기 O: 반남박씨 문과 급제자
부록2: 과거와 관련된 뒷이야기 2-I
I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조선 시대 초기에는 과거가 비교적 엄정하게 시행되었으나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오면서 과거 분위기는 혼탁해지게 되었고 부정과 비리가 개입하였다. 반남박씨 인물 중에도 과거 부정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경우가 있었다. 이른바 ‘기묘과옥(己卯科獄)’에 연루된 것이다.
1699년(숙종 25 기묘년) 단종(端宗) 추존을 위한 왕위 복위를 경축하기 위해 증광문과(增廣文科)를 설행, 한세량(韓世良) 등 34인이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상소로 이 과거 시험에 부정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해 11월 5일 임금이 과거장(科擧場)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이 “국가의 기강(紀綱)이 해이해지고 사습(士習: 선비의 풍습)이 투박(偸薄: 인정이 박하고 불성실함)해져 매양 과장(科塲)이 있을 적마다 문득 사람들의 말이 있었는데, 이번 과거(科擧)에서는 전파된 말들이 더욱 낭자합니다. 과거는 곧 선비들이 발신(拔身)하는 초정(初程)인데, 떠도는 말들이 이러하니 명백하게 핵실(覈實: 일의 실상을 조사함)하지 않을 수 없으나, 대간(臺諫)의 지론이 분명하지 않아서 실로 지적하여 빙핵(憑覈: 핵실의 근거로 삼음)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한다. 과장(科場: 과거시험장)에서의 부정이 어제ㆍ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으며 이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견이었다.
이어서 좌의정(左議政) 서문중(徐文重)은 “대관(臺官)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외간에 전파된 말들이 또한 매우 분분합니다.”라고 덧붙인다. 또한 신하 중에는 당(唐)나라 때의 전례에 의거하여 다시 시험을 보여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고, 봉미관(封彌官) 이하를 수금(囚禁: 죄인을 잡아 가둠)하고 아울러 조사해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임금이 명하여 이탄(李坦)을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유시하기를, “그대는 들은 대로 진달하도록 하라.”하니, 이탄이 과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문제들을 아뢰는 말 속에 “박필위(朴弼渭) 또한 연소한 사람으로 글을 짓지 못하는데, 어떤 이가, ‘표(表)와 책(策)을 지어 바쳤는데 부(賦)로 합격되었다.’ 합니다만, 이는 왕래하는 가운데 떠도는 말이어서 진실로 신빙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숙종실록』). 바로 반남박씨 박필위가 그해 증광시에 부정 합격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였다.
드디어 의금부에서 수사에 착수하여 수권관(收券官) 김전(金戩)ㆍ김시욱(金時郁), 등록관(謄錄官) 오석하(吳碩夏), 봉미관(封彌官) 홍수우 (洪水禹)의 공초(供招: 죄인의 범죄 사실 진술서)를 받았다. 다음은 홍수우의 공초 내용이다.
******************************************************************
“일찍이 박태회(朴泰晦)와 면분(面分)이 있었는데, 하루는 박태회가 와서 말하기를, ‘나의 아들 박필위(朴弼渭)가 바야흐로 회시(會試)에 나아가는데, 그대가 시소(試所)에 들어가면 돌보아줄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뒤 또 말하기를, ‘오석하(吳碩夏)와 그대를 이미 차비관(差備官)에 차임하도록 도모하여 놓았으니, 모쪼록 서로 상의하여 돌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오석하는 본디 심익창(沈益昌)ㆍ박태회(朴泰晦)를 위하여 시소(試所)에 들어갈 것을 모의한 사람으로서, 오석하가 속히 민시준(閔時俊)의 말을 따를 것을 힘써 권하므로, 간모(奸謀)에 빠지면서 굳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시준과 정순억이 피봉(皮封) 4장(張)을 빼내었는데, 민시준은 그 가운데 3장(張)을 가지고 나아가서 박필위(朴弼渭)ㆍ이성휘(李聖輝)ㆍ이수철(李秀哲)에게 나누어 주었고, 1장은 정순억이 오석하의 말에 의하여 심익창(沈益昌)에게 내주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정순억이 와서 말하기를, ‘심성천(沈成川)의 말이, 「이 피봉(皮封)은 좋지 않다. 결코 우리들 사대부(士大夫)의 피봉이 아니니 도로 들여보내라.」 했다.’ 하였는데, 출방(出榜)한 뒤에 들으니, 정순억이 그것을 이도징(李道徵)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숙종실록』 12월 30일 기사)
******************************************************************
한마디로, 과거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응시자 측의 부탁을 받고 제출한 답안지를 바꿔치기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답안지 바꿔치기로 이성휘(李聖輝)ㆍ박필위(朴弼渭)ㆍ이수철(李秀哲) 등 여러 명이 부정 급제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명문대가의 자제들이라는 것이다. 이성휘는 이조참판을 지낸 이선(李選)의 아들이며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李厚源)의 손자였고, 박필위는 좌의정을 지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손자였으며, 이수철은 예조참의,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동직(李東稷)의 아들로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1652~1747)의 사위였다.
그 어떤 시험보다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할 문과가 이 지경에 이르자 항간에는 뇌물로 급제하는 풍조를 빗댄 ‘어사화냐, 금은화냐?(御史花耶 金銀花耶)’라는 동요가 떠돌기도 했으며, ‘백지(白紙)로 낸 시험지에 홍패지(紅牌紙) 나오니, 머리에 어사화 꽂고 길에서 쳐다보는 이에게 으스대네. 도적의 소굴에서 밤중에 휘파람 소리 들리니, 이 무리들 또한 청렴하다 말할까?’라는 시(詩)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숙종실록』).
물론 과거부정에 연루된 사람들은 벌을 받았다. 의금부에서 여러 죄수들을 유배지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송성(宋晟)을 제주(濟州)로, 이성휘(李聖輝)를 나주(羅州) 지도(智島)로, 정순억(鄭順億)을 흑산도(黑山島)로, 이수철(李秀哲)을 강진(康津) 고금도(古今島)로, 이도징(李道徵)을 흥양(興陽) 녹도(鹿島)로, 박태회(朴泰晦)를 진도(珍島)로, 박필위(朴弼渭)를 금갑도(金甲島)로, 김인지(金麟至)를 순천(順天) 방답(防踏)으로, 오석하(吳碩夏)를 대정(大靜)으로, 홍수우(洪受禹)를 거제(巨濟)로, 민시준(閔時俊)을 정의(旌義)로 정배(定配)하였는데, 모두 종을 삼도록 하였다(『숙종실록』). 그러나 백성들의 정서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식자(識者)들이 한탄하기를, ‘과적(科賊)들이 살아서 옥문(獄門)에서 나가니, 나라에 형벌(刑罰)이 없다.’라고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과적(科賊)’은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세보에는 박필위의 과거 급제 관련 사실이 아예 기록되지 않았다.
<이 카페의 모든 게시물은 복사ㆍ절취(캡쳐 포함)ㆍ이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게시물의 내용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ㆍ보완ㆍ변경ㆍ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