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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Jan. 1978(월)
다시 새해의 첫날이다. 그러나 어제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78년! 내가 태어난지 만 38년째가 된다. 대망의 80년대를 2년 남겨두고 바짝 다가온 해이기도 하다. 금년 한해. 그리고 내년이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전환점을 찾아야 하고 그 점을 중심으로 해서 막상 하나의 명실상부한 전환을 이룩해야 하는 해이기도 하다. 새로운 마음가짐 그리고 각오로서 임하여야만 한다. 우선 3월초 귀국이 우선의 문제이고 그 다음은 일단 가서 형편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먼저 망미동 집을 짓고 옮김으로서 현재의 집을 처분하고 마련되는 얼마간의 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터야한다. 무엇인가 방도를 마련하고 싶다. 정 여건이 안 맞으면 다시 1년을 승선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계기만은 만들어야 한다.
연일 부연 사막의 황사 속에 해가 뜨고 날이 밝는다. 먼 이국의 바다 위에서 맞는 새해의 마음가짐과는 달리 아무런 변화도 없는 가운데 오히려 아침식사시간이 늦다는 이유로 늦잠마져 즐겼다. 올 한해도 전 선원과 전 가정의 건안을 비는 뜻에서 건배를 하고 손수 한잔씩 따뤄 권하기도 했다. 추워서 손발이 시린 정월이 아니다. 텁텁지근한 여름의 정월. 구수한 국물의 떡국 대신 소고기국에 생선찜 그리고 유일한 한 가지 고사리나물이 이채를 띄운 Menu다. 그나마 작년 중국선원이 타던 리젠트 보턴호로부터 산 것이다.
식사 후 모처럼 윷놀이를 벌이다. 맥주, 양주, 담배를 상품으로 걸고 내가 $50을 냈다. 전 선원을 5개 팀으로 나누었다. 열전과 흥분과 묘기가 백출. 그리고 기발한 재치까지 등장하여 흔쾌한 하루가 됐다. 의외로 즐거운 날이다. 모두가 만족한 날이다. 너무 웃어서 아구통이 얼얼하니 아프기도 했고 목이 쉰 사람도 있다. 평평하지 않고 경사진 갑판위인데다 파도에 따라 좌우로 로링하는데 따라 윷가락이 굴렀다 말았다 했다. 멍석대신 깐 캔버스, 간장종지 대신 쓴 일본 오차잔 등이 각가지 기술들을 낳았다. 계속 6번을 낙으로 하고 만 No.1 영감님을 보고 ‘가서 자소’ 하면서 거칠게 항의하는 부하 기원들이 있었다. 기적에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한 순간이나마 망향의 시름을 잊고 유쾌한 시간이 되었음을 너무도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을 부리는 한 방법으로 쓴 것뿐이다.
학교 시절에 배운 인간의 심리학이 여기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함을 절감했다. 해걸음에 딴 상품술을 풀어헤치고 빙 둘러앉아 안 모금씩 마시며 주고받는 얘기들 속에는 먼 옛날로부터 가까운 가정이 이야기까지 왔다 갔다 한다. 즐거운 가운데 2갑 곽동만군의 모친이 지난 9월 17일 본인 출국 후 별세하셨다는 말에는 모두가 남의 일 같지 않게 애통해 했다. 가족을 떠나 있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파생되는 온갖 희노애락의 감정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불행이다. 전 가족의 생계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이지만 그로 인해 다하지 못하는 자식, 남편, 아버지의 구실도 크다란 양심의 가책을 넘어 죄의식에 가까운 것을 갖게 한다. 모처럼 노래자랑이라도 할까 했으나 낮의 윷놀이만큼 즐겁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두다.
오늘 1등한 갑판사관팀과 3등한 갑판부 부원팀이 딴 상금 40$에다 조금씩 보태어 2갑 관군의 조위금으로 가져왔다. ($110) 비록 멀고 외진 곳 그나마 땅이 아닌 바다 위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인정이 스미고 있음을 보인다. 일단 귀국시 가져가기로 하고 대아에 연락 회사에서 가불형식으로 곽군의 가정에 보내도록 조처하다.
오늘쯤 얘들 데리고 경산에 가 있을 것이다. 열흘 후면 어머님 기일인데 그때까지 얘들을 둘것인지 모르겠으나 추운데 할마시의 귀찮아하는 표정이 선한 것만 같다. 얘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할머니의 얘기주머니를 우리 얘들은 아마 모르고 지나갈 것만 같다.
2nd. Jan (월) 1978
예정대로 오후 4시 Pilot Juliet 승선 17:20시 새로 만든 Tinkan Island No.8에 접안하다. 대기 6일만이다. 이 Tinkan 부두는 독일업자의 시공으로 2년만에 완공했다는 새로운 현대식 항만이다. 규모도 괜찮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부두를 얼마든지 다 만들 수 있는 이곳 Lagos부근의 지리적 자연적 조건이 아무래도 부럽다. 아시아의 현관이란 부산의 그 좁은 곳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Pilot J(아마 그놈도 튀기 같다만)의 자만에 가득찬 말투에 질투가 난다. 내일부터 양하작업 시작하기로 하다.
낮에 한국선원이 탄 배로 ‘Scarlet Mare'와 교신했다. 제일선박에서 나온 후 Lagos는 처음이라고 했다. Capt.는 전에 대아의 Pear River를 탔었다는 윤태일이란 사람이다. 고향까마귀 찾는 식으로 ’한국 사람 있으면 나오시오‘를 연발. 서로 통화가 된 셈이다. 오늘 입항이 아니었으면 우리 배와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Boat로 내왕이 있었을 것이다. 3월초 만기자 19명에(만기자 15명, 1년 연장자 4명) 대한 개인 면담을 시작하다. 아직 본선의 귀추는 미정이다. 어떻게 변하던 그것은 다시 그때 가서 대처하되 우선 현상태로 모든 여건이 계속된다는 가정 하에 더 연장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얘길하도록 했다. 지난 3월 우리들이 출국시 너무 시간적 여유가 없어 회사나 우리들 자신들이 허둥대던 꼴이 선해, 미리 알려주고 대처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교대를 원하는 본선을 위해서도 유리한 입장이다. 菅原군의 교대도 이 달 10일경에 시켜야 한다. 꼭 가고 싶고 벌써 지루한 모양이다. 선주와의 연락이 1월4일까지는 여의치 않으리라. 아직 차항이 미정이니까. 계획을 잡기가 어렵다. 시간이 해결사다. 모처럼 넓직한 부두에서 배구, 야구. 베드민튼 등으로 오후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Apapa나 Lagos가 멀고 또 차비가 많이 드는 탓으로 모두들 주머니가 허전한가 꼼짝들을 않는다. 다행한 일이다. 우선 부두가의 그 지독스런 똥냄새가 없어서 한결 시원스럽다. 대신 건너편 숲 속에서 날아오는가 모기가 많다. Las에서 올 때 다시 알약(키니네)을 먹긴했으나 그게 염려스럽다. 각실 취침 전에 약을 뿌리도 자도록 유의를 하다.
4th. Jan(수)
어제 오늘 순조롭게 양하기 진행중이다. 무엇보다 선원들의 작업이 없어 모두들 서운한 모양이다. 앞으로 계속 이런 사정이라면 -. 다시 급료에서 10%씩 가불한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Mr. Ashok 아직 차항이 미정이란다. 3월만기 예정자의 일차 면담을 대강 마쳤다. 의외로 잔류가가 많은데 놀랐다. 19명중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은 겨우 6명이다. 6개월을 연장하고자 하는 자가 4명, 1년 희망자는 8명이다. 기관부의 C/E에 대한 아랫사람의 고충을 솔직히 얘기해오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 그 때문에 회사에까지 보고한다는 것은 물론 한 사람대 여러 사람의 일이지만 직책에 관한 문제가 있는 만큼 회사의 오판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아무튼 현재의 상태에서 그만큼 연장희망자가 많다는 것은 의외다. 비록 항로가 안전하고 가끔 잡비가 생긴다는 그 여건이 있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시 귀국했을 때 수개월을 놀아야 한다는 그 상황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가 보다. 게 중에는 경력을, 결혼시기마져 고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땅 딛고 살아가기가 그만큼 힘겹고 어렵다는 좋은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배가 낡아 거주설비 등이 불편하고 잡일이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일에 복잡성이 적고 정박이 많은 것이 무엇보다 좋은 본선이다. 일단 대아와 德丸에 알려두자. 菅原군도 몹시 궁금한 모양이다만 내일쯤 Telex해보자. 내 자신도 일단 3월에 귀국키로 작정하고 보니 마음이 오히려 편하기도 하고 완전히 그쪽으로 마음이 굳어져 간다. 반면에 3월이 어찌 그렇게도 아득한지 모르겠다. 막상 2개월이 1년 같은 느낌이다. 1년을 더하면 그만큼 유리한 입장이라는 것을 아직도 인정을 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역시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하고 약한 것인가보다. 새삼 아내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Las 출항 때부터 일단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애를 썼으나 아내의 편지를 읽고 난 뒤에 확고하게 굳히고 다른 잡년을 털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남은 2개월이 그냥 아무렇게나 보내버리는 나날이 되지 않도록 다잡자. Agent Assaf의 Mr. Asmuel군에게 Motor 수리의뢰 했으나 종일 무소식이다. VHF로 직접 연락. 내일아침 Texi라도 보래라고 전해두다. Sea Protest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 대사관에도 가야한다. 이번 항차의 황천보담도 이상한 소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5th. Jan 1978(목)
대리점에 의뢰한 차를 Trans-con에서 제공한다고 Mr. Ashok가 말한다. Motor 싣고 Assaf거쳐 공장에 들렀다가 Lansal, 우체국을 거쳐오다. Mr. Assaf. 어제 차보내란 소리가 못마땅한가 보다. 그런 System은 Nigeria에는 없다나 -. Lansal의 Mr.Eulromi, 여우 같은 영감이 반가워 못 이기는 체 하더니 설합에서 뭘 꺼내드니 살짝 보인다. 영국에서 띄운 내 사진 Film이다. 당신거라 특별히 보관했단다. 결국 뭐 줄것인가로 이어진다. 2N에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다. 편지봉투채로 가져가라는 것을 아직 좀 더 있다 올테니 잘 보관해두라고 했더니 ‘Never Mind’의 연발이다. London에서 찍은 Slid Film들이 모두 희미하다. 날씨보담도 해거름에 찍었고 Slids로는 처음 찍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인가 보다. 가장 선명하게 갖고 싶었던 열차 바깥풍경들, 목장들이 모두 어둡게 돼버렸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궂고 어스럼 했으니 좀 더 노출을 세게 할 것을 -.
박물관의 Egypt Mummy가 비교적 잘 나온 것은 수확이다. 2N 줬다는 얘기에 모두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똑같다고 웃기를 한다. ‘제놈들이 하루 종일 벌어야 3-4N인데 그게 어디야!’ 덤뿍 쥐어 줄 놈이 따로 있지-.
6th. Jan(금)
바람기 없는 무더위가 계속된다. 비라도 가끔 한번씩 왔으면 좋으련만. 간간히 불어주는 오후의 남풍(해풍)이 유일한 기대가 된다. 예상외로 순조롭게 양하가 진행된다. 우선 개미떼 같은 고기 도둑들이 없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새로운 부두에 아직은 질서가 엄격한 가보다. 거기다 영국에서 실은 작고 튼튼한 Carton Box다 취급하기에 한결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속도라면 12-13일경이면 끝낼 수 있을 것도 같다. Mr. Ashok 다음 항차가 Lome가 될 공산이 크다고 한다. Lome라면 2월 중순까지 다시 한 항차를 더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그 다음을 봐야 하는가? 주부식도 염려된다. 3월초까진데 -. 용선계약서(C/P)가 어떻게 연장을 하는지, 재계약을 하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멀찍이 한 번 더 돌아옴으로서 완전히 끝내고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선용금 문제, 주부식 문제, 만약 Lome에서 본선의 작업을 행했을 경우의 작업비 문제 등이 부수적으로 골치를 썩히겠다. 가뜩이나 지루하게 생각되는 터에 짜증을 부채질하게 될 것도 같다. 오후에 菅原군을 데리고 일본대사관에 갔다. 주로 외국공관들이 밀집된 Victory Island의 신개발지구 속에 일장기가 솟아있다. 국력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절감케한다. 사무실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백인여인이 상냥하게 대해준다.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 건설하고 있는 이놈의 Nigeria도 분명히 장래가 탁 트인 곳이다. 곳곳에 다져지고 있는 도로, 고가도로, 항만들이 그것을 약속하리라. 비록 지금은 밥을 팔아 똥을 사먹는 형편이지만 모래땅 위에 긁어보아 Cement와 물만 부으면 뭣이 이루어지는 자연적 조건이 더욱 그렇다. 년중 무휴로 일할 수 있는 기후. 열대지방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일반적 관념을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모든 세계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일하지 않으며 않되겠금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맺어지고 있다.
이곳에 접안중인 Greece선 Goro호 선원들이 Blue Filim 3개를 갖고 놀러 왔다. Me-Saloon Class들이란다. 아마 본선 C/O, C/E 등이 본선에 Project가 있다고 자랑을 한 모양이다. 어디가도 그 버릇 개주지 못하는 가보다. 막상 북구에서 좋다고 해서 사기는 했으나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단다. 試寫를 해보다. 내가 영국에서 산 것과는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난다. 역시 그 방면(?)에서는 영국이 미개발국인가 보다. 타협 끝에 $50에 구입키로 합의하다. 나중에 적당히 처분하기로 하고-.
7th. Jan(토)
Greece선 Goro호를 방선. 선・기장을 만나다. 그 배의 기관장은 한국에도 몇 번 인가 다녀갔단다. 인천항을 기억하지 못하나 맥아드장군 동상은 기억에 남는단다. 독일회사에 용선. 나이지리아에 건설중인 독일용역회사의 자재를 서독에서 운반중이라면서 역시 이곳 Nigeria에서는 독일놈들이 돈을 다 벌어간다고 마치 배우 어네스터 버그나인를 닮은 선장이 시샘을 한다. 선령이 20년을 넘었다는 데도 우리 배 보다 정정하다. 내부 자재도 고급품이다. 역시 선박에 대한 기본개념의 차이를 서양과 일본에서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먼저 주거설비 즉 인간생활을 먼저 고려하고 다른 공간을 생각하는데 비해 일본선박들은 맨 먼저 화물과 효율적인 선박운항의 공간을 확보하고 난 다음 남는 부분에서 인간 생활장을 배정한다. 그러니 좁고 불편하다. 뱃사람에 대한 인식자체도 그랬다. 비록 해적이었을 망정 여왕으로부터 명예로운 훈장을 수여하는 영국과 죄수들을 골라 배를 태워 보내는 중국이나 일본의 풍속들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기도 하다. 1년을 계속 승선한다는 소리에 입을 벌리고 아연해 하던 Kelway의 Mr. Clack David의 모습도 생각난다. 현재 우리의 실정으로선 뱃사람에 대한 대우를 다만 급료를 좀 더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게 아니다. 좀 더 짧은 승선기간, 유급휴가의 충분한 실시, 그리고 선원가족들의 자유로운 해외여행의 특전 등이 아울러 이루어 짐으로서 선원자신이 육상과 같은 인식으로 일 할 수 있게 한다.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해양국으로서의 면모가 갖추어 질 것이다. 아직은 우리의 현실적 여건이 부득이 하다고는 하지만 선원가족들이 일본까지만 왕래할 수 있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꼭 이루어지고야 말겠지만 -.
IBULU FISH라는 대리점에서 신토쿠마루를 부르고 있으나 응답이 없다. 신토쿠마루는 분명히 Sapale 입항으로 듣고 있는데? Lagos쪽에서 부르다니? 12시 私船교선시간에 연락하여 신토쿠마루를 VHF로 불러 물어보니 Agent Name이 다르다. 아무튼 한 번 문의해 봐 달란 부탁이라 IBULU FISH를 불러 물어보니 입항허가번호가 나왔으니 즉시 Sapale로 입항하도록 전언해달란다. 신토쿠마루 선장,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면 즉시 가겠다고 한다. 식수도 식료품도 다돼 고생이 많다고 舵手인 한국인 선원이 말한다. 입항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는 Capt.의 심정과 표정이 눈이 선하다. 어딜가면 되느냐고 묻는다. Escravos River에 가서 Pilot를 불러라고 일러 줬는데 거기 도착하고 나서도 다시 찾는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단다. Escravos Pilot Station에 다시 연결시켜 줬다. 짧은 영어지만 내 덕을 보는 사람이 있고 덕분에 고맙다고 깎듯이 인사를 받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나 내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지만 그저 같은 회사 선박을 타고 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점에서 서로 마음으로나마 돕고 위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말 때문이다. 일본어를 잘 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일본어를 시작한 지난 10년간의 들인 노력의 보람에 흐믓함을 가진다.
입항한지 1주일이다. 하루하루는 무서우리 만큼 빨리 지나간다. 어물어물하면 하루는 가버린다. 어느 때 보다도 안정된 기분으로 들어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생각만큼 능률은 없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검둥이들이 귀찮을 정도로 많다. 아예 없다고 하고 모든 일은 당직 사관에게 일임했는데 어떻게 알고 오는지? 저녁때 매일 가볍게 배구를 하는게 좋다. 비몽사몽간이던 잠이 그런대로 숙면이 된다 모래쯤은 다시 시내 나가 편지라도 찾아 보아야겠다.
9th. Jan(월) 1978
東幸丸 입항 1시간 전 먼저 나부터 부른다. 12시경 투묘 예정이라며 Agent. Tran-con에 연락을 부탁하잔다. Entrance No.가 아직 없으니 여부가 궁금타고- .오후 Mr. Ashok 왈, Toko는 아직 No.가 없으니 즉시 Lome로 가서 기다리도록 연락해달란다. 이 녀석들이 나를 아주 중계소처럼 양쪽에서 부려먹을 모양이다. Toko 선장, ‘はい はい(하이: 예)’를 연발하며 즉시 Lome로 간다며 ETA가 02:00경이라 알려왔다. 외항에 묘박하는 것도 허가번호가 없으면 안 된다니 고약한 海事行政이다. Lome나 Cotunu앞에는 Lagos 입항을 위해서 대기소처럼 기다리는 배들이 많다. 식수도 충분히 공급치 못하고 주부식도 마찬가지. 덕분에 Lome 등은 어부지리를 얻는다. 물도, 주부식도 팔고 대리점비, 입항세, 도선료도 벌고 -.
앞으로 Lagos 외항에도 그전처럼 1년씩 대가한 배들이 차츰 없어지겠지만 아직도 항만행정체계가 제대로 잡힐려면 많은 기간이 결릴 것이다. 각 대리점과 각선박과의 연락이 입항 중에까지 VHF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육상 통신시설이 불비하기 때문이다. 선내에 설치한 전화 한 대로 국내는 물론 국외 어디까지도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선진국에 비교하면 아득한 일이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잘 산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돈에는 ‘더러운 돈, 깨끗한 돈’의 구별이 없다는 유태인식의 사고방식이 너무도 현실적이다. 잘 살면 그 만큼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로 또 다른 하나의 부와 풍요함을 창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술집 작부가 받아 쥔 돈에 ○팔아 번 돈이라고 쓰여 있지 않다’는 藤田씨의 얘기를 한 번 더 음미해 볼만하지 않은가? 의식주가 풍부하지 못한데서 눈에 보이지 않은 도덕이나 인격이 이루어질 건덕지가 없으리라. 없는 사람들 위에 그렇게도 당당하게 군림하는 가진 자들의 횡포는 필연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생활 자체가 하나의 부를 추구하는 집단체의 움직임이다. 가진 자와 아는 자가 곧 힘을 만들어 낸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가진 것과 아는 것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장 안정된 상태가 되고 정상적인 Balance를 유지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가진 것과 아는 것 정도에 맞는 힘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듯이 모든 것은 스스로가 만들고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것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제법 그을기도 했는데 그 놈의 모기 주둥이를 막을 만큼 두껍게는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모기주둥이가 점점 뽀죡해 가는 것인가? 밤이면 기온이 급강하한다. 새벽이면 싸늘한 한기마져 있다. 일교차가 심하다. Mr. Ashok 느닷없이 Togo Maru 연락이 안 되냐고 허겁지겁이다. 왜? 어제 자기의 실수로 Lome까지 보냈다고-. 가까운 Cotunu부근이라도 좋은데 -. 한 번 불러보마. 헌데 너는 왜 그리 나한테 협조하지 않느냐? 뭐든지 하겠단다.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 보편적인 심리상태는 같은가 보다. 급하면 삭삭하고 부탁해 오면 으쓱해지고 -.
오후에 마침 500KC가 연결. VHF로 불러보니 된다. 역시 ‘하이 하이 아리가도고자이마스’를 연발하는 戶田선장의 목소리. 내일 아침 04시경 Lagos 도착 예정이며 그때 다시 부르겠으니 부탁하잔다. 그땐 잠잘 시간이나 날이나 밝거던 교신합시다. 부식 구입차 R/O. C.S 내보내면서 Lansal들러 편지 있으면 찾아오게 하다. 하군이 만든 냉면(라면으로 만듬)이 모처럼 시원한 기분을 내준다. 맛이야 그저 그렇지만 시큼한 식초맛에 얼음덩이가 한층 시원스럽고 입안이 화끈한 진짜 냉면생각을 나게 한다. 그걸 생각해 내는 성의도 좋고, 비록 나이 서른 된 노총각으로 Saloon Boy를 하고 있으나 성실한 청년이다. 이번 기회에 C/K로 승급시켜 주야겠는데 잘 될는지.
11th Jan(수) 1978
새색시 눈썹 같은 가냘픈 초승달이 잠시 뵈더니 이내 없어졌다. 오늘이 어머님 제삿날이다. 모두들 모였을 텐데 나만이 빠졌을 게다. 이제는 만성이 된 듯도 싶다만 막상 마음만은 그렇지가 않다. 해를 거듭할수록 思慕의 정, 그리고 悔恨이 더해감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생존해 계셨으면 예순여덟해를 맞는다. 나를 서른에 낳으셨으니까. 우리의 기억에 너무도 진하게 남은 외할머니를 닮아 허리도 많이 굽으셨을 게고 이빨도 성한 것이 없이 다 빠져 합죽해졌을 테지만 毛髮은 아직도 새카맣게 남았을 거다. 당신대의 8남매, 우리대의 8남매를 거의 맡아 키웠고 치송했기에 골몰도 많으셨고 읍내에서도 유명한 조모님 밑에서 당한 설음도 겹겹이 쌓였음도 기억한다. 조금만 과식을 하거나 맛있게 잡수신 후에는 속이 거북하다고 하신 것을 벌써부터 알았으면서도 할머니 체면이 무서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약도 쓰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을 남기셨다고 하지만 당시의 무지했던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암이란 진단이 확정된 후에 아버지의 실망하시던 모습. 그리고 수술 후 다소 회복의 증세가 있었을 때의 기뻐하시던 모습. 이미 절망이라고 단언은 않지만 연일 진통제만 투여하시던 慈生병원의 鄭박사의 의도를 진작 알고도 남았었다. 경황중에 치른 누나의 결혼. 거의 뼈와 거기 붙은 가죽밖에 없을 만큼 야윈 체 겨우 상체만 일으켜 큰 사위의 절을 받고 그래도 미소로서 답하시던 모습이 주위의 눈시울을 자아내게 했다. 결국은 물 한모금도 삼키지 못하고 쇠진함으로 세상을 하직하실 임종의 순간에는 한마디 말씀조차 하실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음이 당연하였으리라. 싸늘하게 식어가는 앙상한 뼈뿐인 얼굴에 볼을 데고 누나와 무척도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부터 차츰 흔들리기 시작한 집안, 동생들의 풀죽은 모습은 차라리 내가 입대함으로 보질 않았으니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으리라. 숱한 방황과 정신적인 공허함. 누나, 형수와 함께 새 엄마를 부산 좌천동에서 보셔놓고 3일만에 입대할 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6개월 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휴가차 밤차로 도착한 그 이튿날 아침에 ‘어무이’라는 소리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다시 내 손으로 짐을 꾸려 열차에 실어 보낸 후 처음으로 술을 마셨고 20일간의 휴가를 기억조차 없게 보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생명이 다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남은 여러 사람에게는 실로 엄청남 큰 변화를 강요하고 초래했다. 충수의 어린나이에 시작된 객지생활, 남수의 학업중단, 치수 정희의 탈선 등도 모두 그 영향 때문이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운명이고 복이라들 하지만 애처롭고 아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 숱한 골몰을 겨우 끝내고 막 좋은 시절이 열리는 참이었는데 -. 惡이란 것을 너무도 싫어했고 나를 해롭게 모함한 사람도 저주하지 못했으며 어질고 착한 부덕을 지닌 어머니였다. 할머니의 눈총이 두려워 자식들에게도 사사로운 잔정 한번 주지 못했고 받아보지 못하셨다. 형제간에 입이 무겁고 자질구레한 정이 없음은 선천적인 성격탓이라기보다는 성장기의 그러한 환경탓도 많으리라. 숱한 설음을 나보다도 두 형님이나 누나는 더 잘 알 것이다. 비록 지금 말이 없으나 당신에 대한 연민의 정은 나보다 몇 배 더 깊고 클지도 모른다. 심지어 서울 형님은 삼촌이 늦게 태어남으로 외가로 쫒겨가 있기도 했었다니까.
어느 듯 가신지 18년이 된다. 그 당시의 내 나이 만큼한 자식들을 내 자신이 직접 키우고 있으면서도 한해 한 번씩도 묘소를 찾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그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살기가 나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가리라. 그러나 마음뿐인 것을 -. 전쟁직후 누구나가 보리죽으로 연명해가던 6학년 때 추운 겨울 희멀근 국물뿐인 죽으로 온 식구가 떼우면서도 가끔식 과외공부한다고 흰쌀밥을 도시락에 싸 보내 주신일, 중학교 공납금 미납으로 등교 중지를 당하든 이튿날 손수 어려운 옥실댁을 찾아가 구해다 주던 일들이 유난히 뚜렷하게 남아 있음은 이미 고인이 되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 생전에 마음 편히 해드리지 못한 주제에 아무리 혼이라지만 찾기에 너무도 먼 거리의 낯선 지구 한 모퉁이이다. 맥주 한 잔 부어놓고 당신을 생각하고 눈물을 찔끔거려 보고 상념에 잠겨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다들 모였을텐데 이유야 어쨌든 빠졌다고 권위를 덤뿍 실은 영감님의 넋두리가 있었을 게고. 혼자서만 왔다갔다 한다고 짜증낼, 그래서 공연히 그것이 자기의 죄인양 미안해할 아내가 오늘 저녁만은 반드시 나를 생각할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염려를 안 끼치는 것이 가장 효도하는 길이라 했거늘 그리 본다면 내가 가장 불효막심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여하튼 누구보다도 마누라가 건강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고 또 막상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함은 분명한 일이다. 어머니 제삿날 마누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불효한지고 모르겠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내 자신도 얘들을 가진 부모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英靈이 계시다면 정말 편히 눈감으실 수 없으셨겠지만 ‘어머님 이제는 모두 장성했고 그 나름대로 제 갈길들을 가고 있습니다. 편히 쉬시고 곳 저희들을 지켜주십시오’
Toko Maru와 Agent Trans-con, 그리고 Tincan Port 등과 Relay 시켜줬고 大遠丸와 교신이 있었다. Assaf에서 菅原군과 교대할 三浦(미우라)군이 내일 06:00 Lagos공항에 도착한다는 전보 알려오다.
12. Jan(목)
아침부터 미우라군 오기를 고대했으나 무소식, 정오경 VHF로 연락. 밤10시 55분착으로 변경됐다는 것과 스가하라군의 출국기편을 알려준다. 즉시 菅原군을데리고 대리점엘 갔다. Telex 사본을 받고 13일 11:00시 Lagos출발 예정인 菅原군의 일정을 14일로 변경토록 수배 의뢰하다.
Trans-Con에서는 내일 출항해야 한다고 느닷없이 연락이 온다. 그저 자동차 몰 듯이 아무 때고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현상태로 출항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음으로 ‘그러자’고 했다만 큰일 날뻔했다. 중요한 통신사 교대가 있는데 너무 늦게 통지가 되었다. 하루만 늦었거나 빨라졌다면 그 귀찮은 교대업무를 어쩔뻔 했냐. 청수도 남았고 가까운 Lome라니까 염려는 없다만. 다만 화물이 창내에 많이 남겨둔 것이 문제다. Lome에서는 거의 본선 선원들 손으로 잔제작업을 해야 할텐데-.
Trans-Con과 협의 오늘밤만 본선에서 작업하기로 하고 철야키로 하다. 여기서 200톤을 간단히 하면 $400을 번다. 전반적인 작업관계를 협의차 Trans-Con에 가다. 역시 대규모적으로 냉동공장을 증축하고 있다. 이번부터는 직접 VHF를 설치했고 제3의 창고와 자체정비공장, 자가발전시설 등을 건설중이다. 가운데는 2-3층의 본관 사무실을 지을 것이라고 Mr. Ashok가 귀띔한다. Mr. Kishinani는 출항전 No.4 Hatch를 제외하고 모두 양하했으면 하는데 가능성을 묻는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고 출항시간을 내일 오후 늦게로 미룬다면 -. 저네들은 아침 10시 예정했더란다. 내일 아침이나 오후나 Lome 입항은 14일 아침이라야 된다는 점을 강조, 오후 1시경을 잡고 최선을 다 해보기로 하다. 전항차 Over-Loading 한 200상자에 대한 대가를 듬뿍 준다. 서로 기분에 맞게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 상호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능률적인가? 오유월 감기는 개도 않는다고 하던데 콧물을 훌쩍거리며 온 Mr. Ashok가 Contac 몇알 달라더니 결국 통체로 가져가 벼렸다.
밤 8시 Agent Mr. Samuel과 Lagos공항에 나가다. 11시 도착인데 3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이놈의 딱한 사정. 지난 3월 거지떼처럼 몰려들던 검둥이 틈에서 땀방울을 굴리며 내렸던 그 공항이다. 그런데 그 동안에 건물도 새로 짖고 간간히 간판도 붙었지만 역시 국제공항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부산역 청사보다 못하다. 도착 5분전에 알아보니 아무소식이 없단다. 그럼 어찌되냐? 모르겠단다.
겨우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날씨 때문에 WT917편은 내일 아침 8시에 도착을 바뀌었단다. Announcement도 없고 Arrival Board에도 아예 비치지 않는다. 대합실에서 맥주 두병씩만 까도 돌아오다. 내일 아침 8시 도착, 출입국관리사무소 거쳐 승선, 인수 인계하기까지 출항시간이 맞아떨어질 것인가? 귀선도중 낮에 대리점에서 만난 키 큰 농부 같은 직원(이름은 모르겠다)의 집 앞에서 맥주 대접받다.
모두가 고유의 복장으로 그네들만의 언어로만 즐거운 저녁시간들을 즐긴다. 바위덩어리 같이 뚱뚱한 상점주인 아줌마도 손님처럼 버티고 앉아 같이 맥주 두어병을 까 재낀다. 꼬마를 시켜 사온 꼬지요리 비슷한 고기가 맛이 희한하다. 양고긴듯하다. 그렇게 넓은 시장바닥에 많이도 나와 있던 갈색털과 점잖은 수염을 가졌던 그 양들인 모양이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菅原군의 걱정이 태산이다. 인수인계도 그렇고 이 무질서한 곳에서 혼자 귀국하기도 염려스럽다고 찡그린다. 고속도로상의 군데군데 엎어지고 서로 쥐어박아 찌그러진 교통사고 현장을 보고 얼굴에 핏기를 잃더니 -.
13th. Jan(금)
10여일 동안 잘 보냈다 싶더니 오늘은 격전의 날이었다. 아침 7시 눈뜨자 마자 공항으로 가다. 아예 대리점 직원을 오지도 않고 차 운전수만 보냈다. 전 선원은 밤새 철야작업으로 전부 잠에 골아 떨어졌다. 8시에 온다던 비행기가 소식이 없다. 부연 황사현상로 인해 10시 15분에 도착한다드니, 그 시간이 10분이나 지나서 다시 물으니 Kano란 곳에서 채재, 뜨지 못하고 날 좋기를 기다린단다. 언제 뜰런지도 모르겠다니 오유월 소불알 떨어지기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Trans-con측에서는 어쨌던 14일 아침까지는 Lome 입항시켜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Off-hire를 시사했다. 菅原군과 상의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일단 그를 공항에 두고 나는 귀선하여 만약 1시경 출항이 되면 대신 문 국장을 공항으로 보내 三浦군 도착즉시 바로 대리점에서 수속, VHF로 연락하면 그간에 외항에서 Anchoring한 체 기다리기로 -.
이 작전은 오늘 오후 해지기 전까지 도착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부득이 그대로 출항. 교대를 Lome에서 해야한다. 이미 출국자의 Ticket는 수배되었으니 Lome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할 수 없다. 그래도 Lome가 Lagos보다는 조용하고 질서가 나은 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배를 자동차처럼 생각하는 Trans-Con의 운항방식 때문이다. 거기다 그렇게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이놈의 나라 사정이 그렇고-. Oil이 부족하다고 졸다가 일어난 운전수 5N준다니 없다던 기름이 어디서 생겼는지 염려말고 가잔다. 귀선해보니 다행이 출항이 오후 5시로 연기. 계속 양하중이다. 본선선원의 협조 요청도 있다. 잘 됐다. 이제 몇 시간 동안에 도착만하면 된다. 다시 공항행. 도중에서 군인과 경찰을 겸한 순경에게 걸려 그놈 운전수 8N나 빼겼다. 밑진 장사다. 슬며시 넘겨다 보며 10N요구하는 걸 영어는 ‘OK'밖에 모른다고 잡아뗐더니 운전사만 닥달하여 8N에 놓여났다.
양볼에 세줄씩 칼자국을 낸 운전사가 기가차는가 너털웃음을 웃었지만 차츰 벌레 씹은 얼굴이 된다. 공항에 이르니 菅原군 빈맥주병만 앞에 놓고 허탈한체 앉아있다가 구세주나 만난 듯 벌떡 일어난다. 큰일 났단다. 왜? 선장이 가고 이내 비행기는 도착했는데 사람이 없단다. 뭐야? 그럼 어디갔단 말인가? 공중에서 사라졌나? 돌아가자. 골이 난 운전수 큰길을 피하고 샛길을 마구잡이로 달리는 데 영 차가 춤을 춘다. 창자가 울렁거린다. 고속도로상에선 120Km나 밟아 재낀다. 불안하다, 개값이 될까 겁도 나고, 천천히 가재도 막무가내다. 일단 Agent로 바로 가려다 부두 앞에서 길이 막혀 배로 귀선 점심이나 먹자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三浦군이 왔다. 어어? 허허! 귀신한테 홀렸나? 비행기에서 내려서 바로 Agent 찾아가서 수속마치고 오는 길이란다. 실상 비행기에 탔는데 긴장했었던지 菅原군이 못 본 모양이다. 그래도 이 녀석은 혼자서 찾아 다니는 걸 보면 菅原보다는 똑똑한 모양이다.
좌우지간 일은 잘 됐다. Mr. Samuel이 이번에는 菅原군의 출국 수속을 내일이 아닌 오늘밤에 하러 가자고 졸라댄다. 정신없다. 三浦군편에 보낸 공문, 선용금, 항해지시서, 접수 즉시 회신작성, 선내고지 등등. 바쁘니까 또 그런대로 손도 대가리도 돌아가는 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겨우 봉투를 봉하고 돌아서는데 출항 Document한다고 한패가 밀려온다. 시장바닥이다. 아직도 양하중이데 Statement Fact가 어떻게 나오냐? Sign하는 것도 어느 때 보다 많다. 분명히 하기 위해 Assaf이 까다롭게 하는 모양이다. 도장찍어라, Sign해라 이건 네 꺼다 아니다 내 꺼다, 안 된다 된다. 그저 제각기 책임 안 질려고 발뺌할 뿐이다. 채 마치기도 전에 Pilot왔단다. 빨라 좋다. 菅原군 그렇게 경황없는 속에서 혼자 내려가게 할 수는 없고 Pilot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차 태워 보냈다. 6개월간 고생이 많았다. 젊은 놈 치고는 여러 가지로 고생도 겪고 생각하는 것이 몸집 답잖게 스케일도 컸었는데 사회의 첫 경험을 재수 없게 외국인 속에서 혼자서 겪음으로서 많은 심적 변화를 일으키는 듯도 했다. 음식도 맞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그의 전도를 빈다.
17:20분 출항. 개미다리 같이 바짝 마른 Pilot India는 흑인이다. Pilot 치고는 삭삭하고 친절하다. 외항을 벗어나니 어둠이 깔린다. 하루가 어찌 됐는지? 뭐 잘못을 남기거나 잊은 것은 없는지? Toko의 戶田선장 영감님 ‘우린 Lome로 가요’ 했더니 다음에 또 오거던 잘 부탁하잔다. 그저 인사가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합니다)’다. 어제는 보트를 샀는데 휘발유가 없다고 문의해 오더니 -. 한잠 자고 나면 Lome입항이니 내일 아침부터 또 바쁘겠군. 그렇게 보낸 오늘, 그리고 닥아 올 내일은 내일일 뿐이다. 자자.
14th. Jan(토) 1978
GMT 06:00시 정각. Lome 외항에 닻을 내렸다. Lome가 벌써 세 번째다. 의외로 외항에서 대기 중인 대형선들이 많다. 이곳 Lome도 차츰 화물양이 많아지며 부득이 기다려야 하는 수뿐이다. 부두래야 겨우 대여섯척 밖에 船席이 없는데-. 언제들어도 Lagos와는 다른 부드럽고 낭창한 Port Control의 말 대답이 아침부터 기분을 달랜다. 11시경 Canpex의 대리인 Mr.Jose와 연결. 12시경이나 오후에 Pilot 승선, 입항할 예정이란다. 12:20분 내항의 정박중인 소련선에 계류하다. 이곳에서 전재할 모양. Mr.Jose가 방선. 작업계획을 세우다. 정박중 본선 Life Boat사용을 의뢰한다. 낮에 이야기가 있었기에 Pilot에게 부탁하여 좌현계류토록 했는데 그가 해주지 않았다. 그도 Pilot에게 여러분 얘기했단다. 사용료를 받기로 하고 선미만 이선하여 보트를 내렸다. 내일 아침 07시 30분부터 작업개시키로 하다. 검역, 청수 그리고 야채구입도 의뢰했다. 이곳 Togo의 Lome는 자유항이면서도 국가자체가 공산국이어서 한국선원이 기항은 하나 상육은 금지된 곳의 하나다. 북괴의 공관이 있고 그놈들의 군인들도 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으며 그네들의 방해로 상륙이 금지시킨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튼 입항전 전원을 모아 다시금 주의를 주었다. 특히 접안중인 선박이 소련선적이다. 그들의 내부는 언제나 베일 속이다. 철저한 당직 그리고 주거실 쪽은 하인을 막론하고 출입을 금지하는 걸 보면 무언가 조직적이고 훈련된 듯도 싶다. 공무이외의 사적인 접촉, 상호방선, 물품교환이나 매매행위는 일체 금지. 우리의 정치적 역사적 현실이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인 이상 충분한 주의를 하자. 자유분망한 민주주의 국가 사회인들이 장기간에 걸쳐서는 모르지만 짧은 기간에는 아무래도 훈련된 집단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작년 3월에는 그것도 모르고 부식구입차 큰 욕을 보았던 일이 생각나다. 비싸도 별 수 없고 Shipchandler는 너무 비싸고 횡포도 심하니 Mr. Jose 자신이 직접 조금씩이라도 구입해주도록 하겠단다. 고마운 일이다.
금항차부터는 Owner측의 보고서류 및 항해지시가 까다롭게 내려왔다. 물론 냉동선으로서의 당연한 日常業務이지만 실상 지금까지 본선으로서는 거의 실시하지 않았고 안 해도 되도록 여건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각 입항지의 항정보고가 이색적이다. Agent Fee 요율까지 알려줄 사람이 있을까마는 -. 항만의 사진까지 요구하는 걸 보면 무엇인가 계획하는 일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현지에 가 있는 사람만큼 정확한 정보는 없다. Claim. 해난관계 등에 대한 주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을 얻지 않아도 좋으니 해난사고는 없는 것이, 또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아 정 사장한테도 답신이 왔다. 지난 11월 중순경 LAS에서 안부겸 속현을 권하는 서신를 띄웠더니 아마 즉시 회답을 쓴 모양이다. 역시 학자답게 또박또박한 글씨로 마치 知己에게라도 쓴 것처럼 -. 아무래도 이런 사업을 자신있게 이끌어갈 Type은 아니다. ‘체험하지 못한 사람과는 언어상통이 되지 않아 杜門不出’ 한다는 얘길 보면 내 편지의 얘기가 꽤나 공감이 간 모양이다. 하기야 지난날 아버님의 심정을 돌이켜 봐도 짐작하고 지금의 형편을 보면 정사장의 처지도 알만하다. 학식도, 재산도,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는 해도 노모를 모시고 아직 무성취한 자식들을 거느린 初老의 처지에 마누라를 여읜다는 것은 곧 ‘喪妻가 亡妻’라는 말이 진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로 정사장 자신보다 시집갔다는 그의 딸과 장성한 쌍둥이 두 아들에게 부친의 免鰥(면환)을 손수 시켜드리도록 권하고 싶다. 물론 얼른 생각하면 가신 분에 대한 불효라고 볼 수도 있으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살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인대 -.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가 뿌린 가정 ,자식 등이 무참히도 불행을 겪는다면 더더욱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여자다. 자식으로서 새로운 한 가정의 기둥이 될 엄마를 모심으로서 더 이상 가정의 흩어러짐을 막고 자식들의 바람직한 뒤바라지가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진실한 孝가 될 것이다. 이론이야 그렇지만 실상 그게 행해지기는 어렵다. 막상 우리 집은 성공했다기 보다 그럭저럭 잘 넘긴 경우가 아닌가. 아무리 늙어도 어린애처럼 죈다는 부모의 정, 엄마의 정이 그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C/E 임동길 영감, 소련선의 직원인 여자 승무원이 탐이 나는가 늙은 여우가 곳감 쳐다보듯 하더니 또 주책을 부린다. 선원 몇 명이 와서 영화도 보고 여자들도 오고 어쩌고-. 도대체가 정신이 바른 사람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그래도 자기가 나무라고 말려야 할 처지다. 그저 여자가 탈이다. 술이라면 ‘ㅅ’자만 봐도 입가에 미소가 감돌던 작년의 이반식군 모양 여자만 보면 넋을 잃고 만다. 늙어도 더럽고 추하게 늙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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