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장
希言自然.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른바, (사람은) 저절로 그러해야 한다.
希, 無也. 無爲, 之, 言順天道, 之, 自然也.
“희希”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 이것은 “이른바” (사람은)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를 말미암아야 한다(는 말)이며, (사람은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를 말미암아야 한다는 말) 이것은 (사람은) “저절로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생겨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也.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은 아침나절을 마치지 못하고,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는 하루를 마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인가? (바람과 비) 이것을 (저절로 그러하게 세찬 바와 저절로 그러하게 사나운 바가 되도록) 일삼는 바. 하늘과 땅이다. (이렇듯) 하늘과 땅은 (저절로 그러한 바를 받들어) 높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과 땅도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과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처럼) 오래 보여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물며 이른바 사람이야!
飄風, 疾風也. 驟雨, 暴雨也. 風, 言不終朝, 而雨, 言不終日者, 風比雨, 尤疾速也.
“표풍飄風”은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이다. “취우驟雨”는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이다.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이 이른바 “아침나절을 마치지 못하고”,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가 “하루를 마치지 못하는” 까닭은 “바람”과 “비”가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를 어긋나고 벗어난 채, 일부러 일삼아) “세차지고” 빨라졌기 때문이다.
雖天地之化, 若或, 剛燥暴急, 失其自然之道. 則亦不能長久. 而况於人乎!
이른바, “하늘과 땅”이 (바뀌게 하고) 달라지게 한 바이지만, 이른바 어떤 것이 (일부러 일삼아) 단단해지고 딱딱해지며 “사나워지고” 빨라지게 되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 性·命)를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도)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를 잃어버리게 되면) 오래 가게 되거나 “오래 보여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물며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를 잃어버린) 사람이야!”
故從事於道者, 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왜냐하면, 도道를 말미암고 일삼는 사람은 (오래 보여지는) 도道와 (더불어) 같이 하게 되고, 덕스러움德을 말미암고 일삼는 사람은 (도道 다음으로 오래 보여지는)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게 되지만, (도道와 덕스러움德을 말미암고 일삼는 바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오래 보여지는 도道와 도道 다음으로 오래 보여지는 덕스러움德을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과 (더불어) 같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道者, 太極乘, 于至靜之中. 以樞紐, 於陰陽. 一氣, 周流, 無有窮已.
“도道”는 태극太極이 올라타는 바(乘; 無極)일 따름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끝점에 다다라 조용한 가운데(中; 無爲)인. 이른바, 문지도리와 문고리일 따름이다. 이른바,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거나,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지거나, 자신의 처음 모양과 모습으로 되돌아올 때, 밀고 나아가거나 잡고 들어오는) 음陰·양陽의. 하나의 기氣일 따름이다.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에게) 두루 흘러들지만, (두루 흘러듦이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天地之所以長久, 以其與道爲一. 故人, 能從事於道, 則可以如天地之體, 常於長久也.
“하늘과 땅”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보여지게 되는” 까닭, 이른바 (“하늘과 땅”) 그것은 “도道”와 (더불어) 같이 한 채, 하나되는 바를 일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도道를 말미암고 일삼을” 수 있게 되면, “하늘과 땅”의 (도道와 더불어 같이 한 채, 하나되는 바를 일삼는) 모양과 모습을 (더불어) 같이 하게 되고, 늘 그러하게 오래 가게 되며, “오래 보여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德者, 其發舒也, 象陽氣之噓. 其斂藏也, 象陰氣之吸. 一時, 各有一時之始終. 雖不能如道之長久. 而抑亦爲次, 於所謂道者矣.
“덕스러움德”은 그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을) 피우고 펴는 바이다. 양기陽氣와 날숨의 모양과 모습으로써. (“덕스러움德”은) 그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을) 지우고 접는 바이다. 음기陰氣와 들숨의 모양과 모습으로써. (“덕스러움德”은 따라서 그 일삼음의) 각각이 각각 한 번의 시작점과 끝점을 가진다. (“덕스러움德”은) 따라서 “도道”의 오래 감과 “오래 보여짐”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다. (“덕스러움德”) 이른바 (그 수준이 그 아래로) 눌려지는 바이자, 이른바 (그 정도가 그) 다음으로 일삼아지는 바인 것이다. 이른바, “도道”의 (오래 감과 “오래 보임”) 그것보다.
故人, 能從事於德, 則可以如天地之用, 亦能長久也.
“따라서” “사람”이 “덕스러움德을 말미암고 일삼을” 수 있게 되면, “하늘과 땅”의 일삼는 모양이나 모습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보여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至於風雨, 本自疾速. 而飄風, 驟雨, 所以剛燥暴急. 又是, 風雨之失者, 其速, 尤速.
(다시 앞 문장에) 이르면, 이른바, “바람”과 “비”는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세차고 빠르다. 그러나 (“바람”과 “비”가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이 되고, “사나운 비”가 되는 까닭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벗어나고 어긋난 채, 일부러 일삼아) 단단해지고 딱딱해지며 “사나워지고”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바람”과 “비”가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이 되고, “사나운 비”가 되는 까닭) 그것은 “바람”과 “비”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잃어버린 채”, 그 (“바람”이 일부러 일삼아) 빨라지고, 이른바 (“비”가 일부러 일삼아) 빨라지기 때문이다.
人, 若從事於失, 則可以如風雨之失, 其不能長久也. 審矣.
“사람”이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잃어버리는 바를 말미암고 일삼게 되면”, “바람”과 “비”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잃어버림”으로써, (“바람”과 “비”) 그것이 오래 가거나 “오래 보여질” 수 없게 되는 바와 (더불어) 같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同於道者, 道亦得之, 同於德者, 德亦得之, 同於失者, 失亦得之.
(왜냐하면) 도道와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은 도道 또한 그(러한 사람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얻고,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은 덕스러움德 또한 그(러한 사람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얻지만,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과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은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 또한 그(러한 사람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얻기 때문이다.
人, 能合天道, 則天道, 以之章明順序. 是天道, 亦有得矣.
“사람”이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와 (더불어) 같이 할 수 있게 되면,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는 (그러한) “사람”으로써 (자신을 나타내는) 무늬로 삼고, 빛깔로 삼으며, (세상을) 말미암는 바로 삼고, (세상을 일삼는) 실마리로 삼게 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 그리고 “도道” “또한” (그러한 “사람”을 그러한 바로서) 가지며, “얻는다”는 것이다.
人, 能合天德, 則天德, 以之調和均適. 是天德, 亦有得矣.
“사람”이 “하늘(과 땅)”, 그리고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게 되면, “하늘(과 땅)”, 그리고 “덕스러움德”은 (그러한 “사람”) “그”로써 (자신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로 삼고, 아우러지는 바로 삼으며, (세상을) 고르게 하는 바로 삼고, (세상과 더불어) 마주 보는 바로 삼게 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 “덕스러움德” “또한” (그러한 “사람” “그”를 그러한 바로서) 가지며, “얻는다”는 것이다.
不然而從事於剛燥暴急, 則人, 事失於下, 天氣, 應於上, 飄風, 驟雨, 必常應之. 是, 其, 失. 豈不亦有得乎?
이른바, (“사람”이 ‘아래’에서 일부러 일삼아) 단단해지고 딱딱해지며 “사나워지고” 빨라지게 되면, 이른바 “사람”이 ‘아래’에서 (“도道”, 그리고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리는 바”를 일삼게 되면, “하늘(과 땅)”의 기氣가 (모두) ‘위’에서 어우러지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과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가 반드시 늘 그러하게 (그러한 “사람”) 그와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그것은 (모두 그러한 “사람”) 그가 (“도道”, 그리고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러한 “사람” 그가)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세찬 바람”, 그리고 일부러 일삼아 “사나운 비”와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가지지 않게 되고, “얻지” 않게 되겠는가?
信不足, 有不信.
(왜냐하면, 사람이 도道와 덕스러움德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게 되면, (도道와 덕스러움德 또한 그러한 사람에 대해) 믿지 못하는 바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此兩句, 至是凡再言之. 其, 示人丁寧之意, 切矣.
이 2문장은 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자, 저절로 그러한 바인 “도道”와 “덕스러움德”에 대한 “믿음信”) 이것을 2번 일컫는 데 다다른다. (이렇게 한 까닭)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신의) 간절한 뜻이 절실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盖信者, 誠也. 中也. 土也.
이른바, “신信”은 (오상五常에 비유하면) 성실(誠;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음無爲과 저절로 그러함自然이 참되고 무르익은 바)이다. (오방五方에 비유하면) 중앙中이다. (오행五行에 비유하면) 흙土이다.
土, 冲二氣. 中, 制萬運. 誠, 統萬化. 信, 貫四德.
흙土은 (오행五行을 낳을 때, 음陰·양陽의) 2가지 기氣(가 한 번 가졌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모양과 모습)를 텅 비우는 바이다. 중앙中은 만물의 운동을 다스리는 바이다. 성실誠은 만물의 변화를 아우르는 바이다. “믿음信”은 (오상五常의 나머지) 4가지 덕스러움(四德; 仁·義·禮·智)을 (하나로) 꿰는 바이다.
故因上文失亦得之之言, 推本. 於人所稟得之冲氣.
따라서 앞 문장의 (두 번째 끝부분)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 또한 그(러한 사람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얻게 된다”는 일컬음을 말미암건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본체(本; 道·德)를 (높이) 받들어야 한다. 이른바, “사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품어 안은 바이자, “얻은 바”인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텅 빈 기(氣; 太極·無極·無爲·自然·道·德·性·命·誠·中·土)를.
而曰, 同於失者. 無, 他焉. 以其, 初生稟得冲氣. 不足. 未能全有信實之心.
따라서 (앞 문장의 첫 번째 끝부분은) 일컬었다.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과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그러한 기氣를 높이 받드는 바가) 없는 사람이자, (그러한 기氣를 높이 받드는 바가 있는 “사람”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 그는 처음에 태어나면서 (저절로 그러하게) 품어 안은 바이자, “얻은 바”인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텅 빈 기氣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 그는 그러한 기氣에 대한) “믿음信”이 무르익은 마음을 (오롯하게) 가지거나 오롯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故其, 於道德不自信, 及以致其失之, 如此也.
따라서 (그러한 “사람”) 그는 “도道”와 “덕스러움德”에 대해 저절로 그러하게 “믿지” 못하게 되고, 이른바 따라서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 그것을 “잃어버리는 바”에 이르게 되며, (“도道”나 “덕스러움德”과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잃어버림 또한” 그러한 “사람” “그”와 더불어 같이 하는 바를 “얻게 되는 바”) 그것과 (더불어)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右第二十二章.
여기까지가 제22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