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사화(四福四禍)
2022. 6. 26(주일낮예배) 누가복음 6:20-26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스타인이라는 유명한 피아니트가 있다. 얼마나 피아노를 잘 쳤던지 사람들은 모짜르트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찬사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1차대전에 참전한 비트겐스타인은 부상을 당해서 오른손을 절단하였다. 그 이후 자신은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절망감에 10년동안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비트겐스타인은 동료 작곡가들을 찾아가서 왼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협주곡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비트겐스타인은 모리스 라벨로부터 왼손을 위한 피아노 D장조 협주곡을 받아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 후에 많은 동료들로부터 곡을 받아서 비트겐스타인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후 왼손만을 위한 협주곡이 1천여곡이 만들어졌고, 이제는 양손을 다 가진 사람도 왼손만으로 연주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왼손 협주곡으로 삶의 희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 3년전 KBS뉴스에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씨가 소개되었다.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던 이훈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2012년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왼쪽 뇌가 60% 손상되어서 후유증으로 오른손과 오른발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이훈씨는 절망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교수님이 왼손이라도 해보지 않을래?라는 말 한마디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왼손 연주곡이 1천곡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용기를 내어서 힘겨운 재활과 연습 끝이 성모병원에서 환우들을 모아두고 독주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미국의 교수님이 와서 그 연주를 보고 미국에서 7번 연주회를 하면 박사학위를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래서 이훈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7번 연주회를 하고,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 그 피아니스트 이훈씨의 연주를 잠깐만 감상해 보기 바란다.
동영상 시청 /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50초
이훈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희망이 99%, 절망이 1%. 그렇게 되었어요. 언젠가 양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훈씨가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재활운동을 하고, 또 열심히 피아노 연습하는 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삶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과 평행을 이루는 평지설교이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산에서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께 많은 제자들이 나아왔다. 그때 예수님은 12명을 택하여 사도로 부르셨는데, 그 12명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시 받는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갈릴리 사람을 대표적으로 무시하는 유대사람이었다. 그래서 무시하는 가룟유다와 무시받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와 같이 갈릴리 출신의 제자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룟유다와 갈릴리 출신의 관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관계가 셀롯인 시몬과 세리 마태이다. 셀롯인 시몬은 로마에서부터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건 삶을 살았다. 그런데 세리 마태는 동족의 피를 빨아서 로마의 배를 채우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시몬의 눈에 반역자이고, 배신자인 마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관계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를 향하여 용납하고 인정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관계와 똑같은 모습이 곧이어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나아왔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준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지기 위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 그 현장은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연암 박지원이 어느 해 과거시험을 보러갔다. 그런데 시험에서 떨어진 박지원은 마침 이웃에 합격한 선비에게 축하편지를 썼다. 그 내용이 참 재미있다.
무릇 요행을 말할 때 ‘만에 하나’라고들 합니다. 과거 응시자가 수만 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데, 합격자가 겨우 스무 명에 지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고 말해도 되겠지요. 시험장 문에 들어가느라 서로들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무수했지요. 형제들끼리 부르며 찾아다니다 혹시라도 만나면 손을 잡고서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난 듯 여기므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지금 그대는 ‘열에 아홉’까지 갔던 저승 문턱에서 벗어났고 게다가 ‘만에 하나’에 해당하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이 하듯 저는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 ‘열에 아홉’은 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드립니다.
조선시대 신분을 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과거는 수만명 중에 20여명 뽑았기 때문에 만에 하나 였다. 사람들은 모두 만에 하나가 자신이 되기를 소원하며 고사장으로 몰려가는데, 문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넘어져서 밟히고, 심지어 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열의 아홉은 그 문에서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의 기대를 걸고 고사장으로 들어가지만, 그 입구에서 밟고 밟히는 그런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사장 입구에서 밟고 밟히는 그 소란한 현상을 우리는 3글자로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난장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는 순간 그 자리는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예수님을 만져서 자신의 병이 낫고, 또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다투고, 싸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용납이 없고, 배려가 없었다. 모두 내가 만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 모두 용납과 배려는 없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난장판이 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설교가 마쳤을 때 성경은 그들을 백성(눅7:1)이라 호칭하고 있다.
예수님이 무슨 설교를 하였기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는가?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설교의 시작은 4복4화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고,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였다.
이상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산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가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부요해지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핍박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는 부요한 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고 있는가?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하고, 주리고, 울음과 핍박을 받는 사람은 자기 욕구를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부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자는 무엇을 중심으로 살았겠는가? 허태균 고려대학 심리학과 교수님이 일본에서 3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그때 선배가 편안하게 일본을 다닐 수 있도록 자전거를 빌려주었다. 그래서 그 자전거를 숙소 거치대에 세우려 하는데, 관리인이 자전거를 타려면 등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왜 등록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더니 자전거를 도난당했을 때 찾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편리하니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이 등록하지 않고, 관리인을 피하여 다녔다.
왜 교수님은 등록을 하지 않았겠는가? 교수님 생각에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어짜피 선배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져 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등록을 하면 3개월 후에 선배가 다시 등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성을 따지면 등록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는가? 운전하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도로 갓길에 노란실선이 그어져 있는 곳은 주정차금지구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정차 금지구역에 카메라가 있는지를 살피고, 그리고 다른 차가 지나갈 공간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 2가지 조건이 맞으면 노란실선이 있어도 차량을 주차한다. 왜냐하면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유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화가 있으리로다고 책망하는 사람들은 주를 위하여 충성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를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 나라의 유익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삶의 모든 시간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화 있을진저 라는 예수님의 탄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4복과 4화중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데 4복의 삶과 4화의 삶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그 부분을 함께 읽기 바란다.
(눅 6:23-25)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3절은 4복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날에 기뻐 뛰놀리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고통과 괴로움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날에는 기쁨이 충만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 라고 예수님이 탄식하는 사람들은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복이 있도다 라는 칭찬을 듣는 사람은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지만, 화있을진저 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기쁨이 전부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소망이 있는가? 예수님은 사복사화를 통하여 자기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또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을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은 모두 4복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각기 용납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중심과 소망이 동일하므로 한 백성이 되는 복된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