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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저 눈!"
"안 본다."
배비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눈은 여인에게로만 가는 것이었다.
배비장은 이윽고 꾀를 내어 방자를 불렀다.
"저 경치가 참으로 좋구나. 서쪽을 살펴보아라. 저 불같은 일모의 경치가 아름답지 않으냐. 그리고 동쪽을 보아라. 약수 삼천리에 봄빛이 아득한데 한 쌍의 파랑새가 날아든다. 남쪽을 또 보아라. 망망대해의 천리 파도에 대붕이 날다가 지쳐서 앉아 있다."
방자는 짐짓 속는 체하고 배비장이 가리키는 대로 살펴본다. 배비장은 그 동안 여인을 보기에 바쁜 것이었다.
배비장이 그 여인을 한참 바라볼 때 방자가 하는 말이었다.
"저 눈은 일을 낼 눈이로군."
배비장은 깜짝 놀라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나 안 본다. 염려 마라."
이 때 방자는 갑자기 기침을 한 번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깜짝 놀라는 체하고 몸을 웅크리며 후다닥 물 밖으로 뛰어나와서 속곳을 안고 백포장 푸른 숲속으로 얼른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보름밤 밝은 달 같았다.
배비장은 그것을 보고 멍하니 정신을 잃고 앉았다가 스스로 탄식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 놈, 네 기침 한 번이 낭패로다. 고얀 놈 같으니라구!"
그러고 앉았다가 또 이윽고 배비장은 다시금 입을 여는 것이었다.
"얘, 방자야!"
"예!"
"네 저 백포장 밖에 가서 문안을 한 번 드리고 그 여인께 전갈을 해라."
방자는 말없이 배비장을 바라보았다.
"문안을 드리되, '이 산에 온 나그네가 꽃 보고 놀다가 여행의 피로로 몸이 노곤하고 기갈이 몹시 심하니 혹시나 음식이 있거든 기한을 면하게 해주시면 천만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여쭈어라."
방자 놈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전갈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지초면에 어떻게 남의 여자에게 음식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매 맞아 죽기에 꼭 맞겠습니다."
이에 배비장이 말하였다.
"방자야! 만일 매를 맞게 된다면 매는 내가 맞을 것이니 너는 달아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방자가 대답하였다.
"나으리의 정경을 보니 죽을 때 죽더라도 그렇게 할 도리밖에 더 없겠습니다."
그러고는 슬슬 그곳으로 걸어가서 헛절을 한 번 꾸벅하고 나서 잠시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쉬! 애랑아. 배비장이 벌써 너에게 반했으니 무슨 음식이 있거든 좀 차려 주려무나."
애랑은 방긋이 웃고서 온 정성을 다하여 산중귀물로 음식상을 정갈하게 차렸다. 그리고 맑은 술까지 자라병에 가득 채워 내어주었다.
"너의 나으리가 무례하지만 기갈이 몹시 심하다기에 이 음식을 보내니 그도 먹고 너도 먹고 빨리빨리 가거라."
방자가 애랑의 말을 전하고 음식을 올리니 배비장은 얼씨구나 하고 음식을 받아 앞에 놓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내 진작 이럴 줄 알았거니와, 저 감에 이빨 자국이 나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방자놈이 대답하였다.
"그 여인이 감꼭지를 이로 물어 뗐습니다."
배비장은 껄껄 웃었다.
"이 음식 너 다 먹어라. 나는 감이나 한 개 먹고 말겠다."
방자 놈은 짓궂게 감을 집어 들었다.
"이빨 자국이 난 것이라 그 여인의 침이 묻어 더럽습니다. 소인이 먹겠습니다."
"이놈!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이리 내놓아라."
배비장은 감을 빼앗아 껍질째 달게 먹은 다음, 그 여인에게 방자를 시켜 전갈을 보냈다.
"'이같이 좋은 음식을 보내 주셔서 잘 먹었습니다.'하고, 또 '무례한 말씀이나 하늘엔 양이 있고 땅엔 음이 있는데 이 음과 양이 서로 만나 합함은 인생의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 바 방탕한 화류객이 홀연히 산에 올라왔다가 꽃을 찾는 벌나비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하니 이 마음을 헤아려 주소서.' 하고 여쭈어라."
방자는 배비장의 분부대로 그 여인에게로 가서 전갈을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배비장에게 말하였다.
"그 여인이 답례는 듣지도 않고, 큰 탈 날 것이니 빨리빨리 돌아가라고 합디다."
배비장은 쓸쓸하게 긴 탄식을 하면서 일어섰다.
"할 수 없다. 이젠 내려가자."
침소로 돌아온 배비장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해 상사로 신음하는 것이었다.
"한라산 맑은 정기를 제가 모두 타고 나서 그리도 곱게 생겼는가? 잊을 수가 없으니 한이로다. 애고 애고 이 일을 어찌할꼬?"
그러나 배비장은 이윽고 굳은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에라! 죽더라고 말이나 한번 건네 보고 죽으리라."
그리고 일어섰다.
"얘야, 방자야!"
"예, 부르셨습니까?"
"어서 이리로 좀 오너라. 나는 죽을병이 들었구나!"
"무슨 병이 드셨기에 그처럼 신음하십니까? 패독산이나 두어 첩 드셔 보십시오."
"아니다. 패독산이나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러면 망령병이 드셨나 보구려. 망령병에는 무슨 약보다 당약이 제일이랍니다."
"무슨 약이란 말이냐?"
"홍두깨를 삶은 것을 당약이라고 합니다. 젊은 양반 망령엔 당약이 제일입니다."
"아니다. 내 병엔 따로 약이 있다. 하지만 그걸 얻기가 어렵구나."
"그 무슨 약이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늘에 있는 별도 따려면 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방자야! 그 말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살고 죽고는 방자 네 손에 달렸다. 네 날 좀 살려다오."
"아따 나으리도, 죽긴 누가 죽습니까? 말씀이나 하시구려."
"오냐, 오냐. 방자야 어제 한라산 수포동 푸른 숲 속에서 목욕하던 여인을 보지 않았느냐? 그 여인으로 하여 병을 얻었다. 이거 죽을 지경이로구나. 네가 그 여자를 좀 볼 수 있게 해 주려무나."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 여자는 규중에 있으니 만나볼 길이 없습니다."
배비장은 더 할 말을 잊어 버렸다. 그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얘야 방자야! 그 여자가 음식 차려 보낸 것을 보면 그도 내게 전혀 마음이 없진 않았던가 보더라. 한번 말이나 해 보라."
"어디다 말을 한단 말씀입니까?"
"그 여인에게다."
"나으리! 그건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 여인의 성깔이 악하고, 절개가 굳으니 그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배비장은 방자를 잡고서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얘야! 될지 안 될지 편지를 써 줄 테니 전해 보아라. 일만 잘되면 구전으로 삼백 냥을 주마! 방자야 어떠냐?"
방자 놈은 구전을 많이 준다는 소리에 군침을 흘렸다. 그러나 관문 속에서 구렁이가 된 놈이므로 돈냥이나 얻어 볼 생각으로 은근히 잡아떼는 것이었다.
"소인은 그 편지 가지고 가지 못하겠습니다."
"방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천리 밖 이곳에 와서 통정하고 지내는 하인이 너밖에 더 있느냐? 네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이냐! 그러니 방자야, 잘 생각을 하고 내 이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다오! 얘, 방자야!"
"나으리! 소인이 나리와의 정의를 생각하면 물불을 사양치 않고 뛰어들겠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소인은 세 살 때 아비가 죽어 늙은 어미 손에서 자라 열 살 때부터 방자 노릇을 해 왔는데 한 달에 관가에서 주는 것이라곤 돈 두 냥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심부름을 하노라면 신발값이나 되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은 어떠냐 하면, 각방 나으리님네가 잡수시다 버리는 밥이나 얻어서 어미와 그날그날 연명해 가는 형편입니다."
방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소인의 사정이 이러니 일이 뜻 같지 않아 소인이 병신 되어 나리도 모실 수 없고 늙은 어미는 먹일 수 없게 되면 소인의 신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렇게 위태로운 곳엔 갈 수 없습니다. 나리께서 살펴 주십시오."
"그런 일이라면 아무 염려 말아라. 만일 매를 맞을 경우라면 네 상처가 낫도록 해 줄 것이며, 네 어미는 내가 먹여 살리겠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어서 이거나 갖다 주어라."
배비장은 얼굴에 미소를 띄고 궤문을 덜컥 열더니 돈 일백 냥은 내주는 것이었다.
"이게 약소하지만 우선 네 어미에게 갖다 주어 양식이나 팔아먹도록 해라."
방자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체 응락을 하였다.
"나으리께서 정 그러시다면 편지를 써 주십시오."
"일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네 수단에 달렸으니 부디 눈치 있게 잘 해라."
방자는 애랑에게 그 편지를 전하였다.
편지 내용은 한 마디로 줄인다면 다음과 같다.
'낭자를 한 번 본 후 상사의 괴로움으로 깊은 병이 들었는 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낭자의 손에 매었으니 모쪼록 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애랑이 편지를 다 읽고 나자 방자는 애랑에게 말하였다.
"답장을 하되 허투로 하지 말고 애가 타게 해라."
방자가 애랑의 답장을 받아 주니, 배비장은 애랑의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 대학지도나 읽는 듯이 읽어 내려가다가,
'미친 소리 말고 마음을 바로잡고 물러가라.' 한 대목에 이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고 이 일을 어찌할꼬? 섬 속에 원통한 귀신 되었구나."
곁에서 방자가 채근하였다.
"여보 나으리, 실심 마시고 그 아래를 더 읽어 보십시오. 연자가 있소그려."
배비장은 다시 보아 가다가,
"옳지, 연자의 뜻을 알았다."
하고 무릎을 치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연이나(그렇긴 하나) 장부의 중한 몸으로 나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하시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나는 규중 여자의 몸으로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만나기 어려우니 달이 진 깊은 밤에 벽헌당을 찾아와서 몰래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한 베개를 베고 자려니와 만약 실수한다면 그 몸이 위태합니다. 만약 오시려거든 집안이 번거롭고 닭과 개가 많으니 북창 쪽으로 살살 가볍게 걸어 오십시오.'
배비장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렇게도 못 견디게 정신이 몽롱하고 온 몸이 쑤시던 병도 감쪽같이 나았다.
기다리던 밤이 되자 배비장은 정장을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방자가 이를 보고 참견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나으리 소견 없소. 밤중에 유부녀 통간하시면서 비단옷을 입고 가다가는 될 일도 안 될 것입니다. 그 의관을 모두 벗으시오."
"벗다니? 초라하지 않겠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드시면 가지 마십시오."
"얘야! 요란스럽게 굴지 마라. 내 벗으마."
배비장은 방자의 말을 따라 의관을 훨훨 벗어 버리고 덜덜 떠는 것이었다.
"얘야, 알몸으로 어찌하란 말이냐?"
"그게 좋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면 한라산 매사냥꾼으로 알겠습니다. 제주 복색으로 차림을 차리시오."
"제주 복색은 어떤 것이냐?"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리십시오."
"얘야! 그건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들거들랑 가지 마십시오."
"아니다 방자야. 네가 하라면 개가죽이 아니라 돼지가죽이라도 뒤집어 쓰마."
배비장은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렸다.
"얘야, 범이 보면 개로 알겠다. 총 한 자루만 꺼내어 들고 가자! 그러는게 안전하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겁이 나고 무섭거든 차라리 가지 마오."
"얘야! 네 정성이 그런 줄 몰랐구나. 네가 못 갈 것 같으면 내가 업고라도 가마! 어서 가자 방자야!"
높은 담 구멍 찾아가서 방자가 먼저 기어 들어갔다.
"쉬! 나리,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두 발을 한데 모아 묘리있게 들이미시오."
배비장이 두 발을 모아 들이밀자, 방자놈이 안에서 배비장의 두 발목을 모아 쥐고 힘껏 당기니 부른 배가 걸려서 들어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하였다. 배비장은 두 눈을 흡뜨고 바드득 이를 갈았다.
"얘야, 조금만 놓아다오."
방자가 갑자기 다리를 탁 놓자 배비장은 곤두박질하고는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매사가 순리로 되지 않으니 낭패로구나. 산모의 해산법을 말하더라고 아이를 머리부터 낳아야 순산이라 한다. 그러니 상투를 먼저 들이밀마. 너는 이 상투를 잘 잡고 안으로 끌여 들여라."
방자놈은 배비장의 상투를 노벙거지째 와락 잡아당겼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펑 하고 들어가자,
"불을 켠 방으로 들어가서 욕심대로 얼른 놀다가 날이 새기 전에 나오십시오."
하고 방자는 몸을 숨기고는 배비장의 거동을 엿보는 것이었다.
가만가만 자취없이 들어가서 문 앞에 서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뚫고 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본 배비장은 정신이 아찔하였다. 등불 밑에 앉은 여인의 태도, 천상의 선녀를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문구멍으로 풍겨왔다. 배비장은 담뱃내를 맡고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놀랐는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소리쳤다.
"도둑이야!"
배비장은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말하였다.
"문안드리오."
"범을 그리려다 강아지를 그린 그림이로군. 아마도 뉘 집 미친개가 길을 잘못 들어왔나 보다."
여인은 배비장의 꼴을 보다가 이렇게 말하고는 나무조각으로 배비장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배비장이 말하였다.
"나 개 아니오."
"그러면 뭐냐?"
"배가요."
계집은 배비장의 꼴을 보고 웃고 내려와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이 밤에 웬일이오?"
들어가 정담을 나눈 뒤에 불을 막 끄고 나니, 방자 놈이 고함을 친다.
"불 켜놓고 문 열어라."
여인이 깜짝 놀라는 체하고 몸을 떨며 당황해할 때 방자 놈의 지어낸 언성이 다시 떨어졌다.
"요기롭고 고얀 년, 내 몸 하나 옴짝하면 문 앞의 신 네 짝이 떠날 날이 없으니 어느 놈과 미쳐서 또 두런거리고 있느냐? 이 연놈을 한 주먹에 뼈를 부수어 박살 내리라."
배비장은 혼비백산하여 허둥거렸으나 외문 집이 되어 도망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몸으로 이불을 쓰고 여자에게 물었다.
"그게 본 남편이오? 성품이 어떻소?"
"성품이 매우 표독합니다. 미련하기로는 도척이요, 기운은 항우요, 술을 좋아하고 화가 나면 백주에도 칼을 뽑아 피보기를 예사로 합니다."
계집의 말을 들은 배비장은 애걸복걸하면서 여인에게 매달렸다.
"낭자, 나를 제발 살려 주게."
계집은 언제 장만해 두었던지 커다란 자루를 꺼내 가지고 와서는 아구리를 벌리면서 말하였다.
"이리 들어가시오."
배비장은 이상하게 여기고 겁에 질려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거기엔 왜 들어가라는 거야?"
"들어가면 살 도리가 있으니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배비장을 자루에 담은 후에 자루끈을 모아 상투에 감아 매고 등잔 뒤 방구석에 세워 놓고 불을 켰다
이때 방자 놈이 문을 왈칵 열고 성큼 들어서며 사면을 둘러보았다.
"저 방구석에 세워 놓은 것은 무엇이냐?"
"그건 알아서 뭣 하시겠어요?"
계집의 대답이 간드러지다.
"이 년아, 내가 묻는 데 대답을 할 것이지 무슨 반문이냐? 이 년 주리방망이 맛을 보고 싶으냐! 맛을 보고 싶다면 보여 주마."
계집의 음성이 더욱 간사해진다.
"거문고에 새 줄을 달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방자 놈은 수그러지는 체하고 수그러진 음성으로,
"음! 거문고라면 좀 타 보자."
하고는 대꼬챙이로 배부른 등을 탁탁 쳤다. 그러니 배비장은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꿈틀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배비장은 아픔을 꾹 참고 대꼬챙이로 때릴 때마다 자루 속에서,
"둥덩 둥덩"
하고 소리를 냈다.
"음! 그놈의 거문고 소리가 매우 웅장하구나. 대현을 쳤으니 이제 소현을 쳐 봐야겠군."
이번은 코를 탁 쳤다.
"둥덩 둥덩"
"음! 그놈의 거문고가 이상하다. 아래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고 위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니 말이다. 이 어떻게 된 놈의 거문고냐?"
계집의 대답이었다.
"이건 특수한 거문고라서 그렇답니다."
"그러냐? 술 한 잔 날 권하고 줄을 골라라. 오늘 밤 놀아 보자. 내 소피 보고 들어오마."
방자는 문밖으로 나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엿들었다.
자루 속에서 배비장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 자가 거문고를 내 볼 것 같으니 다른 데로 나를 옮겨 주오."
"이곳으로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윗목에 놓인 피나무궤를 열고 말하였다.
궤 속으로 들어간 배비장은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서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가 믿고 데리고 있는 방자의 계교라는 것을 어찌 알 것인가.
계집이 궤문을 닫고 쇠를 덜커덕 채우니 이제는 함정에 든 범이요, 독 안에 든 쥐였다. 배비장은 숨이 가빠져 왔다.
이 때 나갔던 사내가 다시 들어오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눈이 저절로 감겨 잠깐 꿈을 구니 백발노인이 나를 불러, 네 집에 거문고와 피나무궤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액신이 붙어서 장난을 하므로 패가망신할 징조라 했다. 저 궤를 불태워 버려라. 어서 짚 한 단을 가지고 가서 불을 놓아라!"
배비장은 탄식하였다.
"이젠 화장인가.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이때 계집이 악을 썼다.
"조상 적부터 전해 내려온 기물로 업귀신이 들어 있는 업궤인데 그것을 불사르라니 안 될 말이오."
"이 년아, 나는 너하고 못 살겠다. 나는 업궤를 가지고 나가겠다."
사내가 궤를 덜컥 어깨에 걸머지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계집이 붙들고 늘어졌다.
"임자가 업궤를 가져가고 나는 망하란 말이오? 이 궤는 못 놓겠소."
"그렇다면 한 토막씩 나누어 갖자."
사내는 커다란 톱을 가지고 와서 궤짝 위에 올려놓고 말하였다.
"자 어서 톱을 마주 잡고 당기자."
배비장은 더 참지 못하고 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여보소. 미련도 하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 하지 않소? 그 계집에게 궤를 다 주구려. 토막을 내면 못 쓰게 되고 말지 않소?"
그러자 사내는 톱을 내던지며 말하였다.
"아뿔사! 이놈의 업귀신이 도생하여 인사가 되었으니 불침으로 찌르자."
불에 단 송곳이 배비장의 왼편 눈으로 내려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궤 속의 배비장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서 악이라도 한 번 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눈의 소중함을 모른단 말이오?"
"에그! 궤신이 저 상할 줄 미리 알고 애걸하니 정상이 가엾구나. 그 몸 상하지 않도록 궤를 져다가 물에다 던져 버려라."
사내는 질방을 걸어 궤짝을 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어디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게 뭐냐?"
"업궤요."
"그 궤를 내게 팔아라."
"그러시오."
사내는 궤짝을 져다가 사또가 있는 동헌 마당에 놓고 물에 던지는 듯이 말하며 궤 틈으로 물을 붓고 흔들었다.
"궤 속 귀신 너는 들어라! 이 파도에 띄울 테니 천리길을 떠나거라."
배비장은 생각하였다.
'어허 궤가 벌써 물에 떴나보구나. 이젠 죽었구나.'
그런데 얼마 후에 들으니 어기어차! 어기어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몰론 사령들이 지어서 하는 배 젖는 소리였다.
배비장은 소리를 질렀다.
"거기 가는 배는 어디로 가는 배란 말이오?"
"제주 배요."
"어렵지만 이 궤를 실어다가 죽을 사람 살려 주오."
"궤 속에서 나는 그 소리가 이상하다. 우리 배에 부정 탈라! 상앗대로 떠밀자."
"난 사람이니 부디 살려 주오.“
"어디 사는 사람이냐?"
"제주사오."
"제주라는 곳이 미색의 땅이라, 분명 유부녀 통간 갔다가 그 지경이 되었구나.“
"예, 옳소이다."
"우리 배엔 부정이 탈까 못 올리겠고 궤문이나 열어 줄테니 헤엄을 쳐서 가거라. 그런데 이 물은 짠물이니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테니 눈을 감고 가라."
사공이 쇠를 덜커덕 열어놓자, 배비장은 알몸으로 쑥 나와서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와락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렸다.
한참을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가다가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치니 배비장은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가 앉고 전후좌우에 관속들과 기생, 노비들이 늘어서서 웃음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사또가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 그 꼴이 웬일인고?"
배비장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