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며 / 시원'
오랜만에 약국에 갔더니 손님들이 다들 한마디씩 한다. 누군가 불쑥 “오매 할매가 나왔네.”라고 외쳤다. 남자 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늙었나?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등이 구부러진 그래서 키가 작아져버린 보잘 것 없는 노인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분이 나를 동갑내기로 보았고 심지어 더 주름이 없다고 뽐내며 말할 때도 밉진 않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은 감정이 묘했다. 남자에게 듣는 말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진실이어서 일까.
그동안 마음과 몸이 지쳐있었는데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좀 쉬자 보다는 더 열심히 하자라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다. 부쩍 작년 여름부터 일이 힘들었다. 업무가 기계화 되다보니 예전 방식에 집착하고 컴퓨터를 못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웠다. 모든 면에서 삐꺽댔다. 손을 떼라는 신호다. 다행히 딸이 약국을 맡아서 하겠다고 했다. 다만 완전히 손 떼지 못하고 오후에 일하는 조건이었다, 7월 25일에 탈출했다. 반쪽이지만 그게 어디인가? 사실 나는 살아갈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 그래서 주변에서 누가 어떻게 아프다더라, 또 죽었다더라고 하면 무섭고 두려웠다. 또 내 몸이 점점 노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겁났다. 그런 것을 느끼니 시간이 무척 아까웠다. 여태까지 일한 시간도 의미가 있고 즐거웠지만 내 시간도 중요했다.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트리거였다. 그날따라 손님들이 의자에 쭉 앉아있었다. 늦게 출근한 나는 가운을 걸치고 매대로 나오려다 그만 상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늘 볼 때는 심술궂은 얼굴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 오랜 만에 나를 보더니 환호를 하는 것이었다. 40년 이상을 한자리에서 변함없이 지키다가 안보이니 궁금했던 참이었나보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앞을 보고 인사하다가 꽈당 넘어졌다. 왼쪽 슬개골에 금이 가서 반 기브스를 했다. 다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밀 검사를 하니 무릎 연골이 닳아서 인공관절 수술까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엉망이었다. 몸도 마음도. 일을 놓으면 아프다더니 살 만하면 죽는다더니 하는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일에서 아주 물러나라고 정을 떼라고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실은 뭔가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균형을 잘 잡았더라면 덜 다칠 텐데. 늙었나 보다. 그냥 툭하고 넘어졌는데도 골절이다니.
이제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제일 먼저 청계 목포대학교에 있는 헬스장에 등록했다. 근력 운동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트레이너에게 개인 레슨을 받기로 했다. 또 하나는 예전에 건성으로 해왔던 글쓰기를 하는 일이었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는 길에 평생교육원에 들렀다. 안내 책자에 ‘일상의 글쓰기’를 보는 데 어찌 그리 반가운지 그곳에 늘 있어주어서 고마웠다. 내가 신청해도 될까하고 여러 번 고민도 해보았지만 다시 도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교수님도 여전했고 다음 카페에 정회원도 되어 있었고 핸드폰에 줌도 살아 있었다, 숨죽이며 첫 번째 강의를 들었다. 꼬박 3시간이 어쩜 그리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열정을 요구하는 글쓰기를 열정으로 꽉 채운 수업이었다. 내 마음이 절실해서 그런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연상 될 정도였다. 이 느낌 그대로 가져가서 집중하고 또 다시 시작해서 행복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할매가 돼 보자고 다짐해 본다.
첫댓글 그 자리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반가웠을지 예상이 됩니다.
오래 전에, 우리 보다 먼저 이 방의 회원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선생님도 분명 잘하실 것 같습니다.
"오매, 할매가 나왔네." 진짜로 그리 말한 분이 있다면 배려가 너무 없는 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