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 가운데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의 불상의 손 모양을
가리켜 전법륜인(轉法輪印)이라고 하는데, 석가여래가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 사성제, 팔정도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법의 기본 가르침들을 설법할 때 취했다는 자세에서 유래한다.
이 초전법륜의 자리에서 석가여래는 유명한 고집멸도와 팔정도를 가르쳤고, 다섯 수행자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석가여래는 이를 보고 "이로써 세상에는 아라한이
6명이 되었다." 하고 말했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석가여래는 예전에 수행에 도움을 주던 수행자(도인 아라라칼람마라와 도인
우드라카푸트라) 두 사람을 떠올렸지만, 신통력으로 살피니 애석하게도 두 사람이 7일 전, 그리고
전날 밤(사흘 전이라고도 한다)에 죽었음을 알았다. 그는 직후 자신과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를
떠올렸다. 불법에서는 이들은 처음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에 아버지 숫도다나가 아들을 호위하라고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싯다르타의 인간됨을 보고 따랐던 그의 수행 시절 동료였다고도 한다.
앞서 언급한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고 시봉을 받는 것을 보고 오해하여 그들은 사르나트로 가서
따로 수행을 하였다.
보리수를 떠난 석가여래는 가야에서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로히타바스투, 울루빌파칼파, 아나라,
사라티프라 등을 거치며 약 800km 홀로 맨발로 걸어서 강가 강(갠지스 강)에 이르렀는데, 사공은
석가여래의 허름한 자태를 보고 뱃삯이 없으면 못 건네준다고 대답했고 이에 석가여래는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떠서 강을 건넜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사공으로부터 전해들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은 '앞으로는 출가한 수행자들은 따로 뱃삯 받지 말고 무상으로 건너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바라나시국의 녹야원에 석가여래가 막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석가여래를 떠나버린 다섯 수행자가
수행 중이었다. 그네들은 석가여래가 온 것을 보고 '수행이 힘들다고 타락한 놈 따위, 발 씻을 물이나
차려주고 내버려두자.'고 무시하기로 서로 약속했는데, 석가여래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자신들도
모르게 석가여래를 향해 엎드렸고, '자리에 앉든 밥을 먹든 제가 알아서 하게 놔두자.'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들이 먼저 자리를 펴서 석가여래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발을 씻어주려 하거나
석가여래의 발우를 받아 제자의 예를 갖추며 석가여래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때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신색과 피부가 대단히 좋고 청정하오며 면목이 원만 하옵고 또 광명이 족하오며
모든 근이 청정하나이다. 장로 고타마시여, 이제는 좋고 묘한 감로를 만났거나 청정한 감로의 성도를
얻었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나를 여래라고 부를 것이요, 고오타마라고 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미 감로의
도를 발견했고, 나는 이제 감로의 법을 증득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곧바로 부처로서 일체지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서 마음에 자재로움을 얻었느니라."
이때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다섯 수행자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예전에 6년간의 극심한 고행을 하면서도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하지 못했거늘,
모든 성인이 수행했던 그 같은 길을 증진하지도 못했거늘, 하물며 장로께서는 지금 육신의 욕망을
좇아 나태를 내어 선정을 잃고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는데 어찌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십니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자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욕망에 끌리지 아니하며 선정을 잃지도 않고 또한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지도 않다. 그대들은 스스로 알리라. 내 지난날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거짓을 말한 것이
있는가? 또한 일찍이 상호가 이처럼 청정하고 원만히 빛나던 때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내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탈 락을 얻으리라.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이제 조용히 법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
사성제 팔정도 중도와 연기법 설하다,
깨달음을 증득한 붓다가 이 세상에 내보인 최초의 카드는 중도(中道)였다. 중도는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적절성’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적절성을 바를 정(正) 자로 나타낸다.
정견(正見)으로 시작하여 정정(正定)으로 끝나는 팔정도(八正道)란 바로 중도를 세분화한
원칙이라고 하겠다.
성도(成道) 후 함께 고행을 한 5인의 비구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도 중도였다.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일변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다운 진리가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무소득(無所得)의 상태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생(生)·멸(滅)·단(斷:끊어짐)·상(常:항상함)·
일(一:같음)·이(異:다름)·거(去)·내(來)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한다. 여기에서 팔부(八不)는 생멸(生滅) 등의 팔사를 부정하는 불생(不生)·불멸(不滅)·
부단(不斷)·불상(不常)·불일(不一)·불이(不異)·불거(不去)·불래(不來)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모든 사집(邪執)이 파멸되어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의 도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해동 원효(元曉)대사는 불법의 계율을 중도에 계합시켜 그 참뜻을 밝혔다.
그는≪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비유비무(非有非無)는 극단을 여읜 중도의
계를 나타낸 말이다. 계의 바탕(體:체)은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지만, 인연의 본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계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비유(非有)이며, 계가 비록 비유라고 하지만 인연을 따라 생겨나
토끼 뿔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비무(非無)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계를 비유비무의
중도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 원효대사는 “만일 계의 업을 말하면 막는다는 데 계의 뜻이 있는 것이며, 그 막아야 할 대상은
곧 죄(罪)이다. 계는 결국 인연을 따라 생기지만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하여 깊이 들여다보면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얻어질 수 있는 실재(實在)의 객관은 없다.”고 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계를 중도에 계합시키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마음자리를 두고 논하자면 뿌리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므로 죄가 될 요소가 따라붙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릇됨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은 절대적이고 객관화된 본질적 표준인 죄성(罪性)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죄성은 마음의 근본 바탕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 속에 계가 중도에 계합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그의 여러 저술을 통하여 화쟁 사상을 펼치고 무애 자재한 이론으로 모든 경전을 올바로
풀이할 수 있었던 것도 철두철미하게 중도를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破)할 것도 없고 파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세울 것도 없고 세우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른바
이치가 없는 것이 지극한 이치요(無理之至理:무리지지리) 그렇지 않는 것이 크게 그렇다(不然之大然:
불연지대연).”라고 천명한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의 서문을 비롯한 수많은 글에서,
원효대사는 원융무애한 절대의 원리에 입각하여 성(性)·상(相)·공(空)·유(有)·일(一)·이(異) 등의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회통시킴으로써 중도의 사상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고려의 의천(義天) 또한 “진리는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말이나 형상을 여읜 것도 아니다. 말이나
형상을 여의면 뒤집힌 미혹(迷惑)이요, 말과 형상을 집착하면 참으로 미(迷)한 것이다.”, “교학자
(敎學者)는 안을 버리고 밖에서 구하며, 습선인(習禪人)은 인연법(因緣法)을 모르고 안으로만 밝혀
편향 집착한다.”고 하여 중도로써 수행할 것과 중도의 중요성을 누누이 밝혀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