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운송에 관한 것은 전회(前回))에서 얘기했지만 일찍부터 이 분야에 탁월한 노하우를 축척해 온 나라가 북구(北歐)의 스웨덴과 덴마크이다. 이들 나라는 고위도(高緯度)란 지정학적 사정 탓인지 아니면 바이킹의 후예들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해운업도 발달하여 지금도 세계 어느 항구에서나 그들의 마크를 단 대형 컨테이너선을 볼 수가 있다.
당시는 이들이 자사(自社) 선박을 줄이고 많은 중진국들의 선박을 용선(傭船)하여 세계 과물류(果物類), 특히 바나나 운송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었다. 특히 스웨덴의 Salen사(社)가 유명했으며, 마침 내가 승선했던 선박이 일본회사 소유였으나 Salen사(社)에 용선(傭船)되었다. 선령(船齡)이 약간 오래되어 의심스러웠던지 Salen사로부터 Supercargo(화물관리감독인)로 Engineer인 Mr. Hagen을 본선에 파견, 기술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도와준다는 뜻에서 9월 13일부터 약 한 달간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중남미 Colombia의 Turbo항에서 바나나를, 적재부터 북아프리카의 여러 항에서 양하(揚何)를 마칠 때까지의 한 항차였다.
그는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적었다. 선박기관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서 이론과 기술을 특별히 연수(硏修) 받은 사람이었다. 본선이 적재항에 도착하기 위해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때 미리 승선하여 처음부터 점검과 과정을 감독하고 확인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본선의 입장에서는 업무의 간섭(?)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전문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노하우는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자신으로서는 좋은 기회이긴 했다. 실은 바나나를 운송할 때마다 많은 문제점이 있었고 선주(船主)와 적잖은 교신이 왕래했었지만 그들도 전문지식은 부족했다.
미리 본선 기관장과 고급 사관과 준사관(準士官)들을 모아 의논 겸 지시를 했다. 선진기술을 전수(傳受)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자고 했지만 모두가 시쿤둥하며 귀찮다는 표정들이다.
“그냥 큰 사고없이 얼렁뚱땅 시간만 가면 되는데 뭘 선진기술이니 뭐니 하며 골치 아프게 할 필요 있냐.”하는 눈치들이다. 직위가 높을수록 그렇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일상생활에 있어서 확실하게 모르거나 불편한 점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발전은 없다. 세계 모든 문명 발달은 ‘불편함을 찾고 해결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라 하지 않았는가. 그저 지금 가진 경험과 재주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발전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뿐이다.
Turbo 항에 도착해 보니 자주 작은 갯가의 마을이다. 항구랄 것도 없다. 순전히 바나나 적재를 위해 농장 끝에 만든 듯했다. 부두에 접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늑한 바다 위에 닻을 내리고 계선색(繫船索)으로 고정한 채 갑판 위의 Hatch(선창)을 열지도 않고 선박의 옆구리에 뚫어 둔 side port(옆문)에다 컨베어벨트를 설치하고는 바지(거룻배)에 싣고 온 바나나 상자를 내 뜀박질보다 빠른 속도로 실어나른다. 선창을 바꿀 때마다 설비 변경에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그 외엔 일사천리(一瀉千里)이다. 하루 밤 사이에 모두 마친단다.
입회한 담당 항해사에게 나가 있으란다. 자기들이 모두 알아서 안전하게 한다고… . 수십 년간 해본 솜씨였다.
농장에서 막 채취(採取) 것이라 과육(果肉) 온도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정신없이 돌아갔다. 관계 책임 사관들과 직장(職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건 말건 차분히 자신의 할 일을 하나하나 확인 · 점검하는 Mr. Hagen이었다.
“내가 직접 현장의 선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오. 캡틴인 당신에게 얘기할테니 당신이 오더하시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부득이 최고 책임자이기에 마치 내가 그의 꼬봉(?)처럼 따라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 적당히 걍 해도 될낀데…” 곁에서 지켜본 갑판장의 두털거림이다.
본선 기관실의 냉동기 온도부터가 엉망이다. 각 선창에 들어가는 냉기(冷氣)의 온도부터가 각양각색이다. Mr. Hagen의 눈이 둥그래진다. 여분의 온도계는 커녕 달린 것 자체도 고장인 것이 있다. Mr. Hagen 보기가 민망스럽다. 그와 본선 기관장, 나 셋이 나란히 앉았다. ‘어찌 이렇게 됐소?’고 따진다.
본선의 공xx 기관장, 그는 체계적으로 기관을 공부한 적이 거의 없이 처음부터 손으로 만져 익힌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대화가 이뤄질 수가 없었다.
먼저 이론을 세우고 그에 따라 기계를 설계하고 만들며 기술을 익혀온 서양 사람들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봐서는 아예 대화의 상대가 될 일이 아니었다. 무조건 뜯고 보자는 기관장과 먼저 원인을 찾아보자고 하는 하겐(Hagen) 씨 사이의 내 입장이 말이 아니었다. 마치 문틈에 손가락 끼듯이 ….
기관장은 “늘 그래왔는데…” 하고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것이 그에게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계나 성능 이전에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1차 목적항은 이태리의 Livorno항으로 결정, 운항일수와 온도유지 일정 등이 명확하게 지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적당히’라는 개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반드시 현장을 확인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다.
어제 밤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새벽에 Air Fan(창내 가스배출을 위해 바깥 공기를 순환기키는 모터장치)를 계속 High(고속)가 아닌 Low Speed(저속)로 돌아갔다.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상(異常)이 감지되면 먼저 현장을 확인하라. 억측이나 설마… 하는 생각은 버려라. 원인을 찾고 해결하고 난 다음에도 재발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하라.”
사실상 원리원칙에 따라 하자고 하는 데는 말은 백번 맞지만 우리 사고방식으로는 귀찮기 짝이 없었다. 내 자신도 평소 생활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원칙을 무시하고 ‘적당히’, ‘얼렁뚱땅’, 혹은 ‘짐작’으로 해 왔던가를 대오각성(大悟覺醒)했다.
중국이 서구화할 때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 그 사람들의 “差不得”(차부뚜어 : 대충대충/적당히)의 습성이었다고 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얼렁뚱땅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하더래도 최선이 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얼렁뚱땅으로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대갈했었다.
내가 그에게 받은 인상은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얼렁뚱땅’의 개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냉동기 자체의 성능이 다소 떨어지는 문제에서도 부딪쳤다. Owner(선주)측에서는 일단 Service Men을 양하항에서 수배하겠다고 했으나, Mr. Hagen의 생각은 완전한 점검을 위해서는 냉동기 제조사의 기술자가 한 항차를 승선하여 장기간에 걸쳐 조사해야 한다고 맞섰다. 일시적인 방편이 아닌 뿌리를 찾아 뽑아야 한다는 사고의 현저한 차이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극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한 합리성이 생활에, 문명에, 문화에 베어있기에 결국은 기술국가, 복지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되고 있지 않은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바가 크다.
Mr. Hagen의 선형(船形)이나 기관(機關)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높이 살만했다. 자국(自國)은 선형(船型)에서 선폭과 선미를 같은 넓이로 한다든가, 추진기(Propeller)는 가변피치(CPP)방식으로 하되 모양을 갈매기 날개 모양으로 하면 진동도 적고 선속도 올릴 수 있다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했다. 이것은 새의 날개에서 얻은 Hint란다.
연료절감 방법으로 뜨거운 배기(排氣)가스(Gas)로 ‘C'oil(중유)를 가열시키서 ‘A oil(경질유)’와 절반정도 혼합하면 적은 마력의 기관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므로 유류대의 절약이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흥미를 끌게 했다.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기에 선진 기술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야말로 과학적이라 느꼈다.
‘지구(地球)는 둥글다’와 ‘지구는 돈다’는 말은 감각적으로는 거짓말이다. 지구가 자전(自轉)을 하면서 공전하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우리의 육감으로 느껴본 적은 없지 않은가. 그 때문에 한번이라도 넘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서도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감각이나 경험으로 확인된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과학은 감각 ·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감각과 경험을 벗어나는 일이다.
과학은 이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이다. 핵심은 체계이다. 그냥 있는 세계를 의도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질서와 규칙을 발견하여 설명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강한 힘을 가진다. 있는 것을 그냥 ‘존재 자체’로 보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이다.
세계를 설명하려면 먼저 ‘자세히 봐야’ 한다. 즉 관찰이다. 관찰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과학자 · 예술가 · 시인 · 철학자들이라고 했다.
Mr. Hagen이 승선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자기 방에 Shower(샤워) 시설을 손수 만들었다. 얼마 머물 것이 아닌데도 꼼꼼하고 성실하게 한다. 얼마간의 불편을 참지 못하고 제 능력을 발휘, 해결하려 한다. 하루를 지나도 평안하게 보내려는 그의 생각은 본받을 만했다.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그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하다. 그리고 실제 그들의 생활에 여유가 있음을 느꼈다. 손수 요트를 설계 · 제작하고 운전하여 가족들과 함께 강을 타며 바다를 누빈단다.
오직 성실과 거짓이나 숨김 없는 사실의 알림이 서로의 신뢰를 낳는다는 것이다. 잘못을 얼버무리려다 더 큰 사고와 책임을 둘러쓰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거야 내 자신도 전직원들에게 그렇게 늘 말은 해 왔지만 말로서 그치고 만 적이 대부분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이라면서 남을 비방하거나 왜 그러냐고 비양거리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긴 시간 같이 앉아 얘기가 가능했던 것 같다. 백번 맞는 말이다. 다만 실행이 어려울 따름이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루는 “Captain, 테라마이싱 있소?” 하고 물어왔다. “왜, 어디 다쳤소?” 알면서도 눙쳤다. 뻔하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리비아 등은 우리는 상륙이 금지된 곳인지라 먼 빛으로 바라볼 뿐이지만 그는 국적이 다름으로 가능하기에 아가씨 집에 갔다가 그 놈의 성병이 옮은 것이다.
“집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거기 갔오?” 했더니, “선장도 상륙했으면 갔을거요.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 아가씨들이 얼마나 예쁜데….” 하며 둘이서 낄낄낄낄 웃었다.
그거야 내가 더 잘 안다. 오랜 역사 속에 동서양 문화가 합쳐진 시대의 후예 여인은 정말 이쁘다. 특히 그들의 히잡을 벗을 때 우리와 비슷하게 새카만 머리와 살결에다 오똑한 코 등이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칙이나 과학은 빠지고 숫넘들은 다 똑같다는 것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짧은 기간에, 한 사람으로 전체를 가늠하는 것은 불합리하겠지만 그에게서 받은 강한 인상은 체계적인 생각이 일(업무)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과 마음에 완전히 녹아있고 일상화되어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러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데…”하는 안타까움마져 느낀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Mr. Hargen, 그와 함께 하면서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터득한 것도 많지만 내 사고방식(思考方式)의 변화는 그 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내 머리와 생활에 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