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려갈 길♡
성경: 사도행전 20장 24절.
찬송: 432, 433, 438, 493, 494
설교: 이 경준 목사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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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받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려고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빌립보서 3장 10절의 말씀과 함께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2장 1절로부터 3절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달음질은 우리가 아는 마라톤을 말합니다. 마라톤의 유래는 기원전 490년경 아테네군 1만 명과 페르시아군 10만 명이 아테네 동북방으로부터 40.2km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서 벌였던 대전투에서 비롯됩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을 물리쳤고,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아테네까지 달려갔었는데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에 도착해서 시민들에게 “기뻐하라, 우리가 이겼다.”라는 말만을 전하고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 페이디피데스가 달린 거리가 42.195km인데 이를 기리기 위해 마라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42.195km의 거리는 인간이 달릴 수 있는 한계의 거리라고 합니다. 이 거리를 포기하지 않고 달리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끝까지 변치 않고 앞만 보고 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라톤에서는 출발점과 결승점이 정해져 있어서 뛰어야 할 거리를 알고 있지만, 신앙의 달리기는 출발점과 결승점이 제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평가도 얼마나 열심히 끝까지 달렸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에 따라 상급도 정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간혹 마라톤 경기를 보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신앙생활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중도 포기자는 그냥 뛰지 않고 트랙(track)을 벗어나면 그만이지만, 신앙의 경주자는 중도 포기를 하여도 인생의 경기장에서 이탈할 수가 없습니다. 삶이 끝이 나는 날까지 방황하다가 결과에 따라 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마라톤은 뛰어가야 할 거리를 알기 때문에 도착할 때를 나름대로 예측할 수 있지만, 신앙의 달리기에서는 결승점이 어디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뛰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결승점이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인생의 끝을 알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 끝까지 완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혀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달리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포기하고 마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날은 분명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라톤은 결승점에 누가 먼저 도착했느냐에 따라서 성적이 가려지지만, 신앙의 경주에서는 누가 얼마나 열심히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달렸느냐에 따라서 상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끝나는 시점까지 정말 최선을 다하여 꾸준히 달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꾸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유혹도 물리치고 게으름도 뿌리치며 결승점에 도착해야 주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의 연조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달려오셨는지 기억은 나십니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신실하게 달려왔었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했는지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왜?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달려온 그 과정을 보시고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잘했다고는 하실까요? 만일, 내가 게을러서 신실하지도 못하였고 세상 유혹에도 기웃거렸었다면 남아있는 나의 인생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달음질할 수 있는 마지막의 구간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은 바나바를 이렇게 평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의 달음질을 치는 사람에게는 이런 칭찬이 따르는데 여러분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교우들에게서 어떤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나, 아내나, 남편에게, 또 자녀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요? 그들이 여러분을 믿을만하고 신실하다고 평가한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름지기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도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 같은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한 종이라는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국가의 요직이나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나 직장에서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다 정직하고 바른길로만 갔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었을 것이고,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더 하여졌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거짓말을 일삼고, 사람들에게 비방받을 일을 했었다면 지금까지 달려온 그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일컬어 타락한 신자 곧 낙오된 신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나라를 위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을 귀하고 높은 자리까지 오르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을 위하여 착하고 진실하게 맡은바 직을 감당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신앙의 달음질은 언제 어느 자리에 있거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결승점까지 달려가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3장 10~12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달음질을 하되 칭찬받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야 결승점을 통과한 후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충성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사소한 일에도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고자 하는 상급은 우리의 생명을 다 드려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 상급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대가로 받게 되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고백도 조만간 맞이하게 될 그 날에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고 고백합니다.
장거리 달리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천국의 삼층천을 경험하였던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나 명예나 물질이나 지혜와 지식,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영혼이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만이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의 구주로 모시고 날마다 말씀따라 살아가므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형통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주의 복음을 전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부름을 받는 날 잘했다 칭찬들으며 면류관 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올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