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 하나님과 나
2024. 6. 23(주일낮예배) 누가복음 15:11-32
장남이나 장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침몰하는 배에 동생과 단 둘이 있었다. 그때 구조대원이 와서 단 한 명만 구조를 시켜 준다면 누가 나가겠는가?
이 질문에 장남이나 장녀는 주저하지 않고 동생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막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막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장남은 주저하지 않고 동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생은 망설인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형님은 동생에 대한 이러한 애틋함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위하여는 염소 새끼 한마리 잡지 않았는데, 동생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고 화를 내고 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아버지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삶을 살았는가?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팀 켈러 목사님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공통점을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 몇가지만 말씀드리겠다.
먼저 첫째와 둘째의 공통점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달라고 말했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받기 위하여 아버지의 명을 어김없이 따르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째는 악하고, 첫째는 착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둘다 관심이 아버지가 아니라, 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첫째는 둘째와 똑같이 아버지 앞에 무례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둘째는 아버지께 분깃을 달라고 한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과거나 오늘날이나 굉장히 무례한 짓이다. 그런데 둘째는 그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는데, 살림은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아버지가 나누어 준 것은 자자손손 함께 사는 그 땅을 둘째는 받아 간 것이다. 그리고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한 것이다.
그러면 첫째는 다른가? 아버지가 첫째를 잔치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나왔을 때 아버지에게 한 행동과 말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기 바란다.
(눅 15:29) 그러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노릇하고 무슨 말씀이든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버지 라고 부르지 않는다. 표현을 조금 거칠게 하면 아버지를 향하여 이것 보세요 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종노릇하였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로서 함께 일을 하였는데,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종이 되어서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부부가 한평생을 살고 난 후에 아내가 나는 한평생 당신과 사는 것이 고통이었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큰 아들의 이 말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를 모두 잔치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께로 온다. 그때 아버지는 그 둘째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잔치를 베푼다. 그랬던 아버지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는 큰 아들을 잔치에 초대하기 위하여 집 밖으로 나가신 것이다. 그런데 첫째는 아버지의 말씀에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잔치에 참예하고 있는데, 첫째는 바깥에서 불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첫째는 집 밖에서 불평만 하고 있는가? 2019년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에 있는 고다이지 사찰은 안드로이드 로봇 관음상인 마인더를 2억 5천만원에 설치하였다. 고이다지 사찰은 현대인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큰 돈을 주고 로봇 관음상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25분동안 법요(불교의식)를 인도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설법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 설법에 귀를 기우리고, 또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사진 1, 2>.
여러분은 지금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2023년 6월 9일 AI 기술의 선두주자인 오픈AI의 샘 알트만(Sam Altman) 대표와 그렉 브로크만(Greg Brock-man) 사장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나온 가장 독특한 질문 중에 하나가 AI가 종교단체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브로크만 사장은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브로크만 사장의 말에 의하면 벌써 목사를 대신하는 AI로봇이 나왔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성경구절을 제시하면서 조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다. 2020년 4월에 기독교인인 김민준 대표(24살)가 어웨이크 코퍼레이션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위하여 주님AI를 개발하였다. 그래서 주님AI에게 휴거가 일어난다는 게 진실입니까?하고 물으면 시와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마태복음 24장 36절의 말씀이 나오고 기다림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아니 그 주님AI에게 기독교인으로서 비트코인을 해도 되는가? 와이프가 아침밥을 챙겨주지 않는 것이 고민이다 는 등의 고민을 말하면 곧바로 답을 준다고 한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가지는 많은 질문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주님AI를 찾아가겠는가? 아마 여러분이 찾아가는가? 가지 않는가?의 핵심은 주님AI가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답을 하면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몇번 갔는데 내 비위를 건드리는 말만하고 있으면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첫째 아들의 모습이 아닌가?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것 보세요 라고 부르고, 또 자기는 동생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하였지만, 나는 종과 같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옳은 모습인가? 팀 켈러 목사님은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 왜냐하면 탕자라는 단어는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살림을 제멋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탕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탕자라는 말은 씀씀이가 헤플 때 사용하기 때문에 탕자에서 쓰는 것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팀 켈러 목사님은 정말 씀씀이가 헤픈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 준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정말 씀씀이가 헤픈 분이 누구인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한마디 묻지를 않는다. 아버지는 그 둘째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긴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계산하지 않고 베풀고 있는 것이다.
잘 기억하기 바란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가면 벽화가 있는데, 거기에 저울이 자주 보인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 저울에 달아 의가 남아야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허비하는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고 은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잔치에 들어올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오늘은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지난 주 설교와 연관을 맺고 싶다. 지난 주 우리는 시편 62편의 말씀으로 복된 외로움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의 외로움이 복된 외로움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외롭고 힘든 상태에서 내가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하였는지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고 나를 받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외로움이 복된 외로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는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어느 목사님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사모님이 임신을 한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너무 좋아서 퇴근하면 사모님의 배를 만지면서 축복기도하고, 또 아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사모님 배가 이상하여 병원에 갔는데, 계류유산이다는 진단을 받았다. 목사님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의사선생님에게 한 번만 더 검사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다시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서 일주일 후 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묵으로 집에 도착한 후 사모님을 내려주면서 여보 편히 쉬어!는 말만하고 교회로 갔다. 그렇게 차를 몰고 교회로 들어가는데 주차장에 담임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를 주차하였을 때 목사님은 다가와서 까치발을 하면서 안아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냥 참고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 교역자실로 들어갔는데,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교역자들이 다 일어나서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 괜찮으십니까? 하나님이 선물을 또 주실겁니다. 힘내세요 다들 그렇게 말하면서 목사님을 꼭 껴안아 주었다. 그때 목사님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서 엉엉 하며 울었다. 그리고 마음이 좀 진정이 된 목사님은 그날 저녁에 퇴근하여 집으로 가서 사모님에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합시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는 아프고 힘든 사람이 있으면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저 사람이 회복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는 탕부 하나님이 둘째 아들을 안은 것처럼 아프고 힘든 사람이 있으면 아무 말없이 그냥 안아야 한다. 그리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는 섬김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때 교회는 탕부 하나님이 베푸신 그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잔치의 기쁨이 있는가? 첫째 아들이 아직도 기쁨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계산하고 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계산하고 따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옳은 자리에는 있을 수 있지만, 잔치의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계산하고 따지는 자리를 버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잔치의 자리로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잔치의 기쁨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 탕부 아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