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한계와 믿음
2025. 6. 22(주일낮예배) 전도서 3:11
연세대 교수를 지낸 정현종 시인이 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 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 라고 하였다. 꽃봉오리는 아직 꽃이 피기 전의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 기쁠 때와 슬플 때와 힘들 때가 모두 꽃을 피우기 전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어떤 어려움이 다가 온다고 하여도 지금까지 견디고 버틴 것처럼 견디고 버텨야 꽃을 피울 수 있는데, 포기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현종 시인은 나는 가끔 후회한다는 싯구로 시를 시작한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정현종 시인이 가지는 그러한 후회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창세기 45장을 보면 형님들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으로 팔려온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가 기근으로 고통할 때 요셉의 형님들이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온다. 그래서 한번 곡식을 구하여 돌아간 형님들은 또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왔을 때 요셉은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창 45:3) 하고 묻는다. 그런데 요셉의 형님들은 다 놀라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형님들에게 요셉이 한 말이 창세기 45장 4-5절이다. 요셉이 형님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읽기 바란다.
(창 45:4-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형님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 사실로서 형님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먼저 보내었다고는 하나님의 역사를 중심으로 형님을 대한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형님들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에 요셉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또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하다가 누명을 써서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시위대 뜰에 갇힌 요셉은 왕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서 주었는데,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술맡은 관원장은 복직하고, 떡맡은 관원장은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복직한 술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된 후에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고 기록한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4절) 하고 부탁했는데, 술맡은 관원장은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 뜰에 갇힌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런데 요셉의 삶을 이렇게 고통케 한 장본인은 형님들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형님들 때문에 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셉의 삶에는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사실을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내가 봤다는 말이 제일 큰 힘이 되는데, 요셉은 그 사실을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다. 그랬던 요셉의 삶에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가? 옛날에 방송되었던 웃찾사에서 부산특별시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 코너는 서울 남편과 부산남편이 말하는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아내가 아파트 부녀회장에 녹색 어머니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번에 동창회 회장까지 맡게되었다. 이때 서울남편들은 와 자기 대단하다 집안일도 잘하고, 리더쉽도 좋고 자기 최고! 하고 말한다. 그러면 부산 남편들은 뭐라고 말하겠는가?
와 돈안되는 짓거리 하는 것은 니가 일등이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아내와 모처럼 소고기를 먹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가 배탈이 났는지 배가 아프다고 말한다. 그때 서울남편은 와 나는 괜찮은데, 소고기가 상했나? 자기야 빨리 병원가자 하고 말한다. 그런데 부산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니는 딱 수준이 돼지고기다.
만약 여러분 남편이 경상도 남편스타일이면 속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떤 분은 왜 서울스타일 남편도 많은데, 나는 경상도 남편을 만났을까? 하는 생각과 또 하나님은 이런 경상도 남편을 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게 놔두시는가? 하는 원망도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남편을 그대로 두고 계시겠는가? 전도서 3장 1-3절을 보기 바란다.
(전 3:1-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기한(제만, 히)은 정해진 시간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모든 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므로 그 흘러가는 순간에 반드시 깨닫고 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형통할 때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또 고통스러울 때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해서 절망만 하고 사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누리고 있는가? 그런데 전도서 3장 11절에 기가막힌 말씀이 나온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시종을 측량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먼저 주신 은혜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고난의 끝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였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더 온전케 하여 주실 것인가? 그리고 이 고난의 끝은 알 수 없지만, 그때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져 있을까? 하는 기대함으로 고난을 대하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 제일 마지막 결론으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전 12;1)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지혜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교회가 속한 장로교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이다. 1642년 영국교회 지도자들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5년 6개월 동안 무려 1,163차례 회의와를 통하여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이 만들어 졌다.
이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 신앙고백 6장은 인간의 타락, 죄, 형벌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다.
1.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 6장 1항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락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다고? 하는 질문을 한다. 아니 교회 역사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질문 중에 하나가 왜 하나님은 사탄의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 사탄을 만들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가? 욥기의 시작은 세상을 두루다니고 온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질문이다. 그때 사탄은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고 묻는다. 그러한 사탄에게 하나님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라고 하나님이 욥의 자녀와 재산에 대한 것을 사탄의 손에 다 맡기셨다. 그래서 욥은 10명의 자녀와 그 많은 재산을 다 잃는 고통을 겪는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를 다 맡겼다. 그 결과 욥은 10명의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는 고난을 경험해야 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그러한 욥을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 맡기셨다. 그래서 욥은 온 몸에 욕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그의 고통을 긁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면서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그러한 욥은 친구들이 와서 욥의 고난의 이유가 죄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욥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교만하다고 할만큼 드러낸다. 그리고 욥은 용서하는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한다.
욥이 왜 그렇게 하였겠는가? 욥은 고난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나는 끝이다는 그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을 버릴 수 없었고, 또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욥기의 인생의 결론이 무엇인가? 자신이 왜 그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욥은 그 고난의 시간이 다 지나간 후에 그는 주를 귀로 듣는 자에서 눈으로 보는 자로 변화되게 되었다. 고난을 통하여 욥은 재산적으로만 부요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까닭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나는 그 이유와 결과를 다 알 수 없는 유한한 인간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여 주실 것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고난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한이 있는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유익케 하시는 하나님을 더 간절히 믿고 붙잡음으로 그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를 경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 고난의 끝에서 나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